『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7)
예수께서 갈릴리 지방을 순회하시면서 전도하셨습니다. 여러 촌과 성을 순회하실 때에 자연히 많은 무리들을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이 많은 무리들을 접촉하시고 예수께서 이들을 보시고 여기에 기록한 대로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수고하고 유리 하는 것을 민망히 여기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추수할 것은 많으되 일꾼이 적으니 그런고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기도하여 일꾼을 더 많이 보내 주소서』라고 청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대중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는 이와 같은 무리들을 어떻게 보셨는가? 또는 예수는 이 무리들을 보시고 어떻게 느끼셨는가? 또는 예수는 이런 무리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 하는 몇 가지 점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예수께서는 어떻게 이 무리를 보셨는가? 여기 본문에 기록한 대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 하는 대중을 보셨습니다. 여기 고생한다는 말은 원어로 보면「지친다」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 뜻은 어린양들이 자기를 인도하는 목자가 없으므로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허둥지둥 방황하다가 가시덤불 사이로 가기도 하고 혹은 바위틈에 떨어지기도 하고 악한 이리를 만나서 죽지는 않았지만 그 독한 발톱에 찢기어서 피를 흘리는 양들의 모습을 여기에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유리 한다고 번역된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 하면 흩어진다는 뜻도 있습니다. 혹은 넘어진다는 뜻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렇게 찢기고 지친 양들이 사방으로 갈팡질팡 흩어지며 마지막에는 기진맥진하여 넘어지는 양의 모습을 여기에 묘사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당시에 대중의 모습을 보실 때에 마치 양 같은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 당시 대중들의 외적 상태만 의미한 것이 아닌 줄 압니다. 물론 외적 상태만 생각해도 로마 정치 아래 있고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교인들 아래 있는 그들은 가련한 바 많고 불쌍한 것이 많지만 예수 님은 단순히 이런 외적 모습만 보신 것이 아닙니다. 한층 더 깊이 들어가서 그들의 심령적(心靈的) 상태를 보셨습니다. 그들의 내적 심령적 상태야말로 찢기고 찢기어 기진맥진해서 이곳 저곳에 넘어지는 양의 모습을, 그 심령들 가운데서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성경의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께서 다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한국의 거리를, 한국의 성과 촌 혹은 서울의 거리, 부산, 대구의 거리, 이북의 평양, 신의주, 원산, 함흥의 거리를 걸으면서 이 거리에 방황하는 대중의 모습을 보시면 예수께서는 대한의 대중의 모습에서 어떠한 모습을 발견할 것인가를 스스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38선으로 찢기고 6·25 사변으로 쓰러진 한국의 대중들, 듣는 대로 10만 명의 고아, 30만의 찢긴 과부, 수없이 많은 눈, 팔, 다리가 없어진 상이군인과 동포들, 가족은 분산되고 형제, 처자는 이산되고 올바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는 이 무리들을 볼 때에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우리 가운데서 발견할 것입니까?
우리 민족의 외적 상태가 가련한 바 있지마는 한편 더 들어가서 우리 대중들의 심적 상태, 영혼의 상태를 우리가 가만히 주님의 눈을 가지고 볼 때에 그 모습은 어떠합니까? 오늘날 신문을 펴 보면 놀랄 만한 사회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 특별히 놀랄 만한 것은, 우리 한국 사회에 전에 그리 많지 않던 자살하는 수효가 점점 늘어갑니다.
일전 어떤 신문을 보니 단순히 서울 시내에서만 오월 중에 자살한 사람이 40여명이라고 합니다. 평균 하루에 한 사람 반이 자살하는 셈입니다. 전에 일본 사람들 가운데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들었지만 일본에 압박을 받으면서도 한국 사람 가운데는 자살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해방된 오늘에 이와 같은 현상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할 것입니까?
이것은 어떠한 계급이나 어떤 층에 국한 된 것이 아니고 그 가운데는 나이 젊은 사람도 있고 나이 많은 노인도 있고 여자도 있고 학생도 있고 각계 각층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생활고만이 원인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 대중의 심령 속에 깊이 잠든 그 영혼에 병이 들었는데, 그 병의 한 증후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 사회에서 전에 못 보던, 놀랄 만큼 격증하는 사실 가운데 하나는 강력범이 점점 많아 간다는 것입니다. 강력범 할 것이면 우리가 2차대전 전까지는 중국 만주에 가던지 중국사람 가운데 많은데 그들은 무식해서 우선 사람을 죽이고 도적질합니다. 이런 말 많이 들었지만 한국에서는 별로 많지 않던 사실인데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를 보면 어디서 그런 잔인성과 포악성이 우리 민족 중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도처에 이와 같은 사건을 보게 됩니다. 이것도 단순히 전보다 무기가 많이 퍼진 이유만은 아닌 줄 압니다. 요컨대 해방 이후 6·25를 거치고 아직까지 38선이 열릴 희망은 보이지 아니하는 이런 환경 가운데 사는 대한의 대중의 영혼 그 심령 속에 병이 들었습니다. 우리 대중의 심령 속을 가만히 엿볼 것이면 겉으로는 웃고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는 거의 누구든지 낙심과, 절망 속에 있으니 확실히 깊은 병이 든 것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자포자기하니 되는대로 살아라, 이것은 심령 속 깊은 병의 증후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왜 이와 같이 심령 속에 큰 절망과 낙심이 우리 대중 속을 지배합니까? 그것은 물론 지금 말 한대로 환경과 주위 사정이 그 원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가 역경 가운데 있다고 해서 그와 같이 다 낙망하고 절망에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이들이 이러한 환경에서도 영혼의 목자가 있어서 시편 23편에 기록한 대로 그들이 어떤 환경에 있든지 그 영혼을 푸른 풀밭에 눕게 해서 쉬게 하여 주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서 위로하여 주고 영혼을 소생시켜서 마음에 상처가 있을 때 싸매 주는 성신의 도움이 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내 목자가 나와 같이 하니 두려울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하는 담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아무리 이와 같은 역경에 처하였다 해도, 그와 같이 낙심하고 절망하고 자기의 생명을 자기가 끊는 비참한 자리에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대중이 이렇게 고생하고 유리하고 지치고 쓰러지는 이런 자리에 있는 것은 아직도 그 심령 속에 영혼의 목자를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예수께서 이와 같은 대중을 보시고 어떠한 느낌을 가지셨으며 어떠한 감정을 가지셨습니까? 감정이란 좋은 의미의 감정을 말합니다. 이렇게 지치고 쓰려지는 듯한 많은 대중을 볼 때 어떤 사람들은 도리어 이런 대중들을 멸시하는 태도를 가집니다. 시끄러워하고 업수이여기는 태도를 가집니다. 제가 일본인들이 중국을 점령한 후에 한 번 중국을 여행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천진역(天津驛)에서 본 광경이 지금도 선합니다. 그 때 일본 사람들이 천진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천진 역두(驛頭)에 서 있을 때 마침 기차가 와 닿는데 기차에서 중국 사람들이 푸른 옷을 입고 보따리를 등에 지고 아이들을 품에 안고 다투어서 개찰구로 나옵니다. 그 때 일본 헌병 사 오명이 거기 서서 전쟁 시대니까 보따리를 검사하고 어떤 위험한 인물이 없는가 비적(匪賊)이 없는가 살피기 위해 일일이 조사합니다. 그 헌병들이 중국 사람에 대해서 가지는 태도, 그저 보따리를 고이 풀라고 하면 좋을 텐데 발로 차면서 풀라고 하고 보따리를 못 풀면 어느새 뺨을 갈기고 보따리를 빨리 싸 가지고 가지 못해도 발로 차버리고 하는, 일본 헌병이 수 천명의 사람에 대하여 그렇게 멸시하는 태도를 가만히 옆에 서서 볼 때 아 일본 사람들이 지금은 권리를 가졌다고 사 억만 대중을 이렇게 학대하지만 이렇게 대중을 무시하는 일본 세력이 며칠이나 가겠는가 하고 생각했던 일이 있습니다. 과연 그 후에 몇 해 못 갔습니다. 서울의 거리를 걸어다니면서 멸시합니다.
여기에 부산에서 오신 교우들 있으면 용서하시고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6·25때 여러분 다 남으로 피난을 갔었는데 어떤 사람 대구, 어떤 사람 제주, 어떤 사람 부산에 갔다 돌아왔는데 갔다 온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제가 들어보니 제주에 갔다 온 사람은 보통 다 칭찬합니다.
제주도 사람들 어떻게 인심이 좋은지 피난민 배가 부두에 닿으니까 짐을 다 날라 주고 방 줄 있으면 하나 내 주고 돈 한푼 안 받고 그저 있으라고 그러면서 자기네는 배급 못 타도 피난민만은 다 배급 주더라고 칭찬합니다.
대구 갔던 사람들도 제주도 갔던 사람들처럼 칭찬은 하지 않지만 대구 사람들도 그만하면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것 들었습니다.
그런데 부산 갔다 온 사람의 말을 들으면 달랐습니다. 부산 사람들 피난민 모여드니 방세를 한달 있다가 올리고 두 달 있다가, 석 달 있다가 올리고 자꾸 방세만 올리고 동회에서 징용 내 보낼 때에는 피난민부터 먼저 잡아 내 보내었다고 합니다. 이런 말이 옳은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런 말만 들었지만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이렇게 많은 대중을 대할 때 조금 잘못하면 멸시하고 오히려 이런 태도로 대중을 대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보다는 좀 낫다고 하지만 보통으로 우리가 대중을 대할 때 어떠한 태도로 대하느냐 하면 일반적으로 무심하게 대합니다. 무심하다는 말의 뜻을 아시겠죠. 이런 모습의 말할 수 없이 지친 대중을 대하면서도 거의 감각이 없습니다. 그저 목석같이 오초 흥망이 비오지(吳楚興亡非吾知)란 말처럼, 오나라 초나라 흥망이 내게 상관 있나 하는 태도입니다. 이것 어떤 태도인고 하니 예수의 유명한 사마리아 비유 가운데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가다가 불한당을 만났는데 대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그대로 본체만체 지나가 버린 것 같은 태도입니다. 지나가는 태도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이와 같이 수난 중에 있는데 이런 태도 대하는 사람 제일 많을 것 같습니다. 어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외국 사람이 저에게 한국 사람처럼 무심한 사람은 없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신네들 보니까 길가에 어떤 아이가 넘어져 있어도 누구 하나 쳐들어 일으키고 가는 사람 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것 지나가는 태도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로잡혀 가고 많은 사람이 죽고 성전이 다 무너지고 이런 폐허에 앉아서 예레미야는 아픈 가슴을 안고 자꾸 눈물 흘리고 통곡합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을 보니까 아무 감각이 없이 무심하게 지나갑니다. 애가 1장 12절을 보면 예래미야가 스스로 탄식하기를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느냐 거리를 지나가는 자들아 너희에게는 상관이 없느냐?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민족이 이렇게 되고, 이 좁은 강산에서 한 달 동안에 사십여 명이 자살하는 것을 보아도 너희에게는 상관이 없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는 이 무리를 민망히 보셨습니다. 민망히 보셨다는 것은 단순히 섭섭한 감정으로만 본 것이 아닙니다. 글자의 내용이 고충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여기 영어 번역이 좋습니다. 영어 번역은「컴패션」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볼래 라틴말「컴」이란 말「같다」고 하는 말이고「패션」이란 말은「고생하다」고 하는 말, 즉 같이 고생한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지치고 쓰려지는 대중을 볼 때에 그 마음이 아팠습니다. 마음에 같이 고생하고 고통을 느꼈습니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대중을 볼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얼마나 주님의 마름을 가졌는가의 척도가 될 것입니다. 예수는 이 대중을 볼 때에 자기가 같이 이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같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믿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셋째로는 예수께서는 이런 대중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친히 일을 하셨습니다. 이런 대중을 보고 같이 아파하는 예수님은 가만히 앉아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사방으로 다니면서 가르치시고 병 고치시고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슬픈 자를 위로해 주시고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셨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모으듯이 영혼의 목자 되시는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모든 일을 다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에까지 못 박히셨습니다. 할 일 다하시다가 마지막에는 이 무리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희생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대중을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 영혼의 목자가 없어서 갈팡질팡 쓰러지는 한국에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대중을 위해서 내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지만 나는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 하실 뿐더러 친히 기도하시고 이들을 위해 일한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내 가족 위해 내 교회를 위해 기도하기 쉽지마는 사실 아직까지 내 동포를 구원해 달라고 얼마나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기도하실 뿐더러 전도자를 보내셨습니다.
10장을 보면 12제자를 택해서 은혜를 주시고 주님 혼자 다 다닐 수 없으니까 사방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그들을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대중을 위하여 내 대신 내 보낸 사람 있습니까? 몰론 우리 가운데 혼자서 전도자를 내 보낸 이도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감사한 것은 비오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국군 대령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제가 일선에 있으면서 우리 온 가정의 사정을 볼 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한국을 구원할 길은 다른 길이 없고 오직 복음을 전파할 것밖에 없는 줄 알고, 나는 군인의 몸으로서 친히 전도 많이 못하지만 내가 한 사람 전도인을 내 보내기 위해서 매달 얼마를 정해서 모내겠으니 내 대신 전도인을 보내주십시오 하고 첫 달 월급을 교회 사무실에 의탁하고 간 대령이 있습니다. 내가 친히 가지 못하면 내 대신할 사람을 얼마나 보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전도회에 다 가입하셨습니까? 전 도회라는 것은 내가 친히 할 수 없는 것을 내 대신 사람을 보내기 위하여 우리가 전도회에 가입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는 할 수 없어서 우리가 협력해서 하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을 구원할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양들을 거두어서 영혼의 참 목자가 되시는 주님 앞에 인도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 대중 심령 속 깊은 자리에 든 병을 구치는 길은 목자 장 되시는 주님께로 인도하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런 유명한 전설이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실 때 땀을 흘리시며 겨우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가십니다. 그 옆에 어떤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의 이름은 데보라카라고 전해 내려오는데, 그 여자가 가만히 보고 너무 불쌍히 여겨서 자기 머리에 썼던 수건을 벗어서 그 땀이나 좀 씻고 가시라고 생각하며 수건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감사히 받더니 얼굴의 땀을 씻었어요, 다 씻고는 고맙다고 하고 그 수건을 다시 데보라카에게 주었어요.
데보라카가 집에 돌아와서 그 수건을 펴서 보았더니 그 수건 속에 예수의 얼굴이 사진처럼 박혀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데보라카는 이 수건을 항상 보면서 그 때 내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땀을 흘릴 때 이 수건 드린 것 얼마나 감사한가, 그 수건을 볼 적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수건 때문에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도 우리 한국 거리에 지치고 쓰러지는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종로 거리를 걸러가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주님을 위하여 우리가 무슨 일을 얼마나 도울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수건 하나라도 십자가를 지시고 땀을 흘리며 수고하시면서 서울을 지나가시는 주님에게 바칠 정성이 있습니까? 우리가 수건 하나라도 드리면 그 수건에는 주님의 얼굴이 비칠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우리가 소유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조금이라고 도우면 이런 모든 것을 통해서 주님의 형장이 우리 마음속에 점점 이루어질 것입니다.
무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 하는 것을 보시고 민망히 여겨 말씀하시기를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 추수하는 주인에게 구하여 일꾼을 더 많이 보내주소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1955년 6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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