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인생고와 사명감 (요한복음9:1-12)

새벽지기1 2017. 2. 20. 07: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9:3)

이 말씀은 주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는 소경을 보고 제자들이 묻는 말에 대하여 대답한 말씀이올시다. 길가에 앉은 소경은 아마 제자들도 잘 아는 소경인 것 같습니다.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입니다. 또 보지는 못하지만 부모가 계시던지 친척이 있던지 해서 그를 도와주었다면 이렇게 구걸하지 않았을 터인데 아마 부모도 안 계시고 도와줄 만한 가까운 친척도 없었던 같습니다. 이렇게 앞 못보는가 몸이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는 그 경지를 볼 때 우리가 과연 이 세상 가운데는 이렇게 많은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이 광경을 보고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것이 이 사람의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여기 제자들이 물었지만 여기 제자들 생각에 일정한 견해가 있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어 큰 고난을 당하는 것이 누구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하고 물은 것을 보니까 아무튼 이 사람이 저렇게 고난 당하는 것은 죄의 결과로 생각하고 여기 대해서는 의심할 것 없이 으레 그렇게 생각하고 묻는 말입니다. 단순히 묻는 것은 자기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저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은 분명히 죄의 결과인데 누구의 죄입니까? 하고 그것을 물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제자들은 그 때 보통 유대 사람이 생각한 것과 같이 어떤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개개인이 개인적으로 다 죄의 결과라고 하는 이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사람의 죄를 과거에 의지해서 생각하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견해는 다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견해를 시정하기 위해서 구약 가운데도 욥기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여러분 욥기를 가만히 기억해 보세요. 욥이 고난을 당할 때 모든 친구가 와서 이것이 네 죄 값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욥의 죄 값이었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이런 책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제자들과 같이 으레 어떤 사람이 고난을 받는 것은 과거의 어떤 죄의 값이요 과거에 의해서 죄를 설명하려는 그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과거에 의지해서 어떤 사람의 고난을 단정하는 이론을 흔히 운명론 혹은 숙명론이라고 합니다. 과거에 의지해서 저 사람이 그 결과를 저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 가운데 믿지 않는 사람을 보면 이 비슷한, 이보다 더 강한 운명론적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견해인가 하면 어떤 사람이 고생을 당하든지 고난을 당하면 그것은 다 사주와 팔자요, 사주가 그러니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합니다. 사람의 난 때와 난 해와 난 달 등 과거의 사주에 의해서 벌써 결정된다고 하는 견해입니다.


인도교나 불교를 신봉하는 모든 사람이 보다 더 철저한 운명론을 가집니다. 불교와 유교가 주장하는 것은 사람이 세상에 나서 어떻게 사는 것은 다 어떤 결과인가 하면 칼마 라고 하는 법도에 의지해서 그 사람의 전생의 업보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철학에 의지하면 사람의 윤회 전생설(前生說) 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한번 나고 또 다른 세상에 또 나고 나는데 고생을 하는 그 사람은 전생에 어떤 죄를 지어서 그 결과로 말미암아 차 생에는 그런 고난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런 철학에 의지하면 사람이 고난을 당하게 되면, 그것은 사람이 어떻게 고칠 수 없고, 거기에는 자유도, 은혜도 없고, 거기에는 다른 방법이 없고, 단순히 그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와 같은 맹랑한 운명론적 철학을 믿게 되면, 고난을 받는 사람이 만일 그 철학을 믿는다면 그저 내 힘으로 할 수 없으니까 이미 전생에서 작정된 것이니 할 수 없다고 낙심하고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또 모든 사람이 이런 철학을 가진다면, 어떤 사람이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아도 그저 무관심하게 됩니다. 그 사람은 전생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을 어떻게 할 수 있나,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나,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것이니까 라고 말합니다. 자연히 그런 사람을 도와주고 좀 낫게 해 주려는 생각이 없어지고 냉정하고 무관심한 사회가 되고 맙니다. 그 대표적인 사회 현상을 오늘날까지 인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 생각에 네 가지 계급이 있고 그 네 가지 계급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불초 계급에 속해서 벌써 전생에 인연으로 그렇게 되었으니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무관심하고 냉정합니다.


여기 제자들의 견해는 그와 같은 극단적 견해는 아니지마는 어떤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을 벌써 죄 값이라고 보는 것은 일종 운명론적, 숙명론적 견해입니다.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면 내가 고난을 당한다 해도 낙심하고 이런 사람 보아도 무관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말씀을 듣자마자 이 견해를 부정했습니다. 자기의 죄도 아니고 자기 부모의 죄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과거에서 해석하여 하지 않고 미래에서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그와 같이 고난 가운데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이며, 우리는 그 일을 하는 것이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고를 볼 때에 과거에 어떤 이유에 의지한 숙명론적 입장에서 보지 말고 사명적 입장에서 미래의 입장에서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뜻과 하실 일이 있는데 우리가 이 일을 발견해서 우리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는 말씀입니다. 인생고에 대한 사명적 태도 사명적 견해입니다. 우리가 이 견해를 철저히 깨닫고 이 인생 길을 걸어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인 줄 압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누구나 고난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좀 편안하다고 하지만 언제 고난이 내게 이를지 모릅니다. 또 이 인생 행로에는 수난자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이 고난 당하는 것을 어떤 견지에서 보느냐 하는 여기에 내가 어떤 생활을 하며 어떤 일을 아느냐에 큰 관계가 있는 줄 압니다. 우리가 다 때때로 질병으로 고생을 합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갑자기 병에 걸립니다. 내 아는 친구 중에 나이 50이 넘어 자랑하기를 나는 50이 넘도록 아직 감기라는 것도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왔다고 그랬는데 그 이야기한 지 일년도 못되어서 갑자기 중병에 걸려서 누웠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병에 걸립니다. 우리가 원치 않지만 불치의 병에 걸립니다. 또 병은 아니지만 병보다 더욱 심한 6·25를 생각할 때 인생 고를 생각하게 됩니다.


6·二25 당해서 귀한 청년 가운데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년 가운데 눈, 다리, 팔을 잃어버린 청년, 허리를 못 쓰는 많은 상이군경과 불구자 청년들이 우리 사회에 많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육체의 고통, 질병과 불치의 병과 이 불구자들, 이런 사람들을 우기가 어떻게 보며 내가 만일 그런 자리에 있으면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제자들이나 한국 사람들처럼 인도철학을 가진 사람과 같이 숙명론적 견지에서 이것을 본다면 우리가 낙심하고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가운데 아무리 우리 머리로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계시는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 가운데도 하나님의 목적과 일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 질병을 통해서 여러 가지 일을 하십니다. 전에도 하셨고 지금도 하십니다.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가이며 종교가인 파스칼의 전기를 보면 그 사람의 머리는 비상히 좋았습니다. 물리학에 여러 법칙을 젊어서 자기 혼자서 다 발견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 후에 참 위대한 종교가가 되었습니다. 파스칼의 명상록은 지금도 종교가치고 읽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그와 같은 신령한 은혜를 받은 것은 병을 통해서였습니다. 한 번은 그가 말을 타고 높은 다리를 건너 가다가 말이 무엇에 놀라 뛰어 다리 밑에 떨어졌습니다. 온 몸이 상하고 죽을 뻔했습니다. 수개월 동안 병석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병석에서 치료하는 동안에 경건한 하나님을 믿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성경을 일고 명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히 깨닫게 되고 그 가운데서 신령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파스칼로 하여금 그 몸을 상하게 한 것은 그 병든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 프랜시스 이야기를 많이 들으셨을 줄 압니다. 프랜시스도 그렇게 큰 은혜를 받데 된 배후에는 건강해서 뛰어다니고 말을 타고 다니고 전쟁에도 나가고 할 때에 받은 것 아닙니다. 중한 병을 만나 오래 병석에 누워 있을 그 때에 점점 인생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 우리에게 질병을 주시는 것은 질병을 통하여 우리 자신에 대하여 하실 일이 있는 까닭에 질병을 주시는 줄 압니다. 우리 가운데도 질병을 통하여 많은 축복 받는 줄 압니다.
여러분, 만나보신 줄 알지만 토리 박사라고(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부흥 목사요) 지금 우리 한국에 나와서 상이군인을 위해 의 수족을 해주는 분이 있습니다. 북 장로교 선교사로 본래는 중국에 선교사로 나왔었습니다. 제二2 대전 때 피난민을 구원해 주느라고 분주히 다니시다가 자동차 사고로 그만 팔이 하나 부러졌는데 아주 상해서 잘랐습니다. 팔 하나 없이 외팔이 되었습니다. 그 후 미국에 가 있다가 한국에 6·25 사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전쟁이 일어나면 많은 청년이 손발을 잃게 되는 것을 생각하고 선교 부에 청해서 그가 한국 에 가서 의 수족을 해 줄 마음이 있으니 보내달라고 해서 그것을 선교 부에서 좋게 여겨 그를 매보내서 벌써 삼사 년 전부터 그 일을 여기 세브란스와 대전과 광주 등지를 중심으로 하여 많은 사람에게 의 수족을 해 주며 전도를 합니다. 우리 교회 청년 가운데도 특히 그를 도와주며 그와 함께 일하는 집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삼사 년 전에 아침 예배보고 자기 집에 가다가 갑자기 지뢰가 폭발해서 다리 하나를 잃고만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 많은 고통도 당하고 많은 애로를 당한 줄 압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고통 가운데 더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은혜 받고 특히 사업을 구하는 가운데 이런 사업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토리 박사와 킹스베리와 이분들과 같이 오늘날가지 의 수족 사업을 하고 특별히 많은 전도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대에는 불구자가 되고 불치의 병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만일 그런 가운데 있다면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이것을 생각해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책임입니다.


내가 얼마 전에 어떤 책을 보니까 미국에 알펜스라고 하는 곳에 어떤 여자가 반신불수가 되어 오랫동안 그저 침대 위에만 누워 있는데 이 여자가 반신불수로 살면서, 내가 누워서 할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던 끝에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습니다. 누워서 그림 그리기를 배워서 유명한 화가가 되었는데 특별히 알펜스주에 있는 모든 들꽃, 즉 야생화들을 전부 다 모아 오라고 해서 야생화를 전부 그려 500여 종류를 그렸습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이 다 보고 어떻게 잘 그렸는지 그것을 하버드 대학에서 사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주 당국은 이런 보배를 다른데 보낼 수 없다고, 그것을 우리 알펜스 주에서 사겠다고 하여 주의 보배로서 그 예술품을 잘 진열해서 보관한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불치의 병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내 자신이 이렇게 사명 적 견지에서 볼뿐더러 다른 사람이 이런 불치의 병을 앓고 불구자가 된 경우에도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명 적 견지에서 그 병과 불구자를 보아야 합니다.
이 사회에, 내가 사는 땅에, 이와 같은 병이 많고 이와 같은 불치의 불구자가 많으니 어떻게 하면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낼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합니다. 몇 달 전에 순천에 있는 어떤 청년, 그 사람은 나병자가 아닌데 그 근방에 있는 나병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기관을 설립해 가지고 그 나병 환자를 구호하기 위해서 사방으로 다니며 애쓰는 것을 보고 제 마음 가운데 많은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인간고를 보고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부산에 성화 원이라고 하는 불구자가 된, 믿는 청년들이 함께 모여서 일하는 모임이 잇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살길을 개척할뿐더러 불구 때문에 낙심하고 죄를 범하는 사람이 많으니 그런 사람 도와주기 위해서 많은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닙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자 함인데, 우리가 그 뜻을 알아서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또 그 다음에 질병은 육체적 고통이지만 그보다 더한 심리적 고통이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대에 갑자기 어려운 일을 당합니다. 갑자기 부모가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남편이, 어떤 때는 아들과 딸이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하물며 6·25를 지난 우리 한국의 동포로 말하면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줄 압니다. 많은 귀한 청년들이 나가서 돌아오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남편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납치된 후에 소식을 모르고 누구든지 6·25를 통해서 눈물을 흘리지 아니한 사람 없는 줄 압니다.


우리 인생 길을 살아갈 대에 누구든지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이 눈물에 대하여서도 하나님의 뜻이 있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하시는 일이 없다고 할 것이면 우리에게 눈물을 주지 아니하였으리라 믿습니다. 눈물을 통해서도 사명이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19세기에 있어서 미국의 여러 신학자 가운데 손꼽히는 유명한 신학자 포리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머리를 통해서 많은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저서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번은 자기가 심히 사랑하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처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다음 그는 이번 경험을 통해서 전에 머리를 통해서 깨닫지 못했던 신학을 깨닫고 많은 배움을 얻었다고 하는 말을 했습니다. 이 슬픔을 통해서 슬픔 당하는 사람에게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슬픔을 한번도 당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슬픔을 깨닫지 못합니다. 슬픔을 당해 본 사람이 참으로 다른 사람을 동정할 줄 압니다. 슬픔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유화해지고 온유해지고 다른 사람의 사정을 알게 됩니다. 슬픔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완숙해지고 인격이 자라납니다. 어떤 때 슬픔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슬픔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슬픔을 통해서 남을 위하여 사명을 주시는 적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미국에 어떤 돈 많은 부인이 딸 삼 형제가 있는데 이 딸 삼 형제를 데리고 여름에 구라파와 성지를 구경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가게 되었는데, 불행히 그 배가 가다가 파선을 당해서 많은 사람이 대서양에 빠져 생명을 희생당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배로 얼마를 구원하느라고 했지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마지막에 보니까 이 부인은 구원을 받았는데 딸들은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 여인이 처음에는 어떻게 할 줄 모르고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고통과 슬픔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자기 부모가 없어서 바로 자라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은데 내 딸을 잃었다고 그저 있을 수 있나 대신 다른 사람의 딸들과 아들을 기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성지에 가서,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던 예루살렘에 가서, 아메리칸 캐론이란 유명한 고아원과 탁아소를 세웠습니다. 자기 사재 전부를 다 드렸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을 위로해 주고 봉사한 것입니다.
슬픔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길을 갈 때에 이와 같이 슬픔을 당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며 우리가 무엇 하려고 고아원, 양로원, 모자원을 하느냐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슬픈 일을 볼 때에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고 하는 사명 적 견지에서 이런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이런 일에 대해서 냉정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가지느냐 하면 우리가 인생 고에 대해서 사명 적 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심리적 고통 이외에 오늘날 우리 한국의 동포들이 많이 당하는 고통이 있는데, 제가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고독입니다. 외로운 것입니다.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고독이란 것, 특별히 6·25와 38선으로 인해서 우리 사회에 고독한 사람이 많이 생겼습니다. 가족이 분산되고 홀로 이남에 내려오고 혹은 아들딸이 행방불명이 되고, 고독한 노인, 고독한 젊은 과부, 고독한 남자 청년들, 고독한 사람들 많습니다. 이 고독을 우리가 어떤 견지에서 봅니까? 숙명론적 견지에서 본다고 하면 낙심할 것밖에 없고 자포자기할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이 고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하실 일이 있는 줄 우리는 확실히 믿습니다. 과연 우리가 과거에 경험을 본다든지 과거의 역사를 보든지 과연 이 고독을 통하여 위대한 일을 이룬 사람들을 얼마든지 봅니다.


모세가 큰 사명을 받은 것이 애굽 궁전에서 호화롭게 많은 친구들과 같이 즐거이 놀 때 받지 못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 밀려가서 시내산에 쫓겨가서 외로이 양을 치면서 홀로 외로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엘리야도 다른 사람과 한가지로 있으며 보호도 있을 때에, 큰 하나님의 은혜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쫓겨나서 멀리 호렙산 기슭에 혼자 쭈그리고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가늘고 은밀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사야도 홀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아라비야에 가서 삼 년 동안 있은 것도 홀로 고독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가 있은 줄 압니다. 성 안토니 같은 사람도 자기 집을 떠나서 홀로 산 굴 속에 거의 일생을 있은 것은 고독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 받기 위해서입니다. 보통 때 하나님께서 주지 않던 은혜를 고독을 통해서 주십니다. 이 고독이야말로 참으로 봉사의 기회도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 결혼하지 않고 일생 독신으로 산 것은 오히려 독신으로써 하나님께 몸바치기 위한 목적이었던 줄 압니다. 독신으로 산 삶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강제로 하면 피해가 있다고 해서 우리 신교에서는 폐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에서는 아직도 이 전통을 지키고 있습니다. 여기 신교에도 역사가 오랜 나라에는 독신으로 지낸 사람이 많습니다. 제가 학교에 다닐 때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체 박사도 홀로 살고 있었습니다. 일생을 홀로 온전히 신학을 위해서 몸바치려고 결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살아 있지만 설교를 가르치는 궐로 박사라고 하는 이도 온전히 독신으로 신학을 가르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미국 피츠버그 제일교회의 유명한 목사 매카틴도 그 큰 교회를 돌아보며 일생을 독신으로 교회 일하다가 재작년에 은퇴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도 독신으로 이북에서 내려온 청년 가운데 독신인 기회를 이용해서 전에 하던 공부를 계속하여 신학을 졸업하는 사람, 혹은 대학을 졸업하는 사람, 혹은 신학을 졸업하고 군목으로서 군인을 전도하는 그런 사람, 독신인 기회를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고아원에서 학교에서 일보는 사람, 독신인 기회를 온전히 하나님의 일을 발견한 사람이 있습니다. 중고 시대를 보면 교회의 큰 사업이나 자선 사업을 보면 전부가 수도사들이 했습니다. 수도원을 중심으로 했습니다. 여러분 수도원이란 무엇인지 아십니까? 순전히 독신 남녀가 모인 곳입니다. 남자 수도원이란 순전히 독신을 서약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의 서약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일생을 독신 생활로 지낼 것, 둘째는 일생을 통해서 청빈(淸貧) 생활을 할 것, 셋째는 절대로 순종하는 생활을 할 것 등 세 가지를 서약합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모여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친히 고아원을 경영하고 전도와 봉사와 모든 일을 그들이 친히 가서 했습니다. 이것도 종교개혁 당시에 너무 폐단이 많다고 해서 신교에서는 없애자고 해서 없앴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교에서도 어떤 다른 형식으로 이런 수도사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이북에서 나온 독신자들 가운데 독신자 독신자들끼리 온전히 신앙을 중심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온전히 은혜 받을 것으로 다른 사람을 봉사하면 우리 한국 교회에 큰 축복이 되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수난자가 되든 내가 제삼자가 되든 사명 적 견지에서 고난을 당하고 그 중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고 행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야 나도 축복 받고, 우리 교회도, 우리 나라도 큰 축복이 있을 줄 압니다. (1955년 6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