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5)
자기의 육체를 잘 연단 시키기 위해서 모든 일에 절제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은 영적 경주장에서 달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 생활에서 절제는 필요 불가결의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이곳 저곳에 절제에 대한 교훈이 있습니다.
가령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 후서 1장 6절에서『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라 했는데 이와 같이 믿음에 일곱 가지 요소를 더하는 그 곳에 절제 하나를 더 넣었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갈라디아 5장 23절에서 성신의 열매를 열거하면서 역시 사랑, 화평(和平)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에 절제를 또한 가했습니다.
사도행전 24장 25五절을 읽으면 사도 바울이 벨릭스 감사 앞에서 기독교는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에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대해서 말하매 벨릭스가 두려운 마음이 나서 떨면서 그만하면 족하다고 말하고 이 다음에 다시 듣자고 한 기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교훈뿐 아니고 옛날 헬라 사람들의 도덕적 사상을 생각하여 보아도 그 때 사람들이 흔히 지금까지도 그렇게 열거하는 습관이 있지만 네 가지 덕을 열거할 때에 근신, 절제, 공의 그리고 용기를 말했습니다.
절제가 네 가지 덕 가운데 하나로서 믿어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계에서 절제란 금주 단연 을 연상합니다. 그렇지만 절제라는 말의 경위는 금주 단연 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생활에 있어 본능적인 모든 행동과 오락에 있어서 특별히 적당한 제어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절제라고 합니다. 가령 우리 감정 생활에 있어서도 제어가 필요합니다.
잠언 16장 32절에『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 가운데 성나지마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분노를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자기 마음 가운데 대단히 울분해서 분노가 폭발해 올라오지만 그것을 제어해서 적당하리만큼 쓰는 사람이고 감정을 절제 있게 쓰는 사람이올시다. 성날 때 감정에 절제를 할 주 모르면 많은 실수에 빠지기 쉽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같은 유명한 영웅도 일시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서 평생의 동지요, 가장 사랑하는 명장을 죽인 일이 있습니다. 감정의 절제, 알렉산더 대제가 천하는 정복했지만 자기 자신의 감정은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슬픔의 감정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슬픈 일을 당할 때, 우리가 이 슬픔도 억제할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부모를 먼저 이 세상에서 보내지마는 부모상을 당한 때에도 너무 슬퍼하면 오리려 그 당사자에게 손해를 가져옵니다. 그런 까닭으로 옛날부터 이효상효(以孝喪孝)라고 합니다. 효도로써 효도를 상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조상하고 슬퍼하지마는 효도로써 효도를 상하는 데까지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말에도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 3장 1절에 야고보 장로가 말씀하시기를『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했습니다. 그리고 혀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적은 것이지마는 큰 영향을 가지고 있는데 불과 같아서 온 동네를 사를 수 있는 화근의 발단이 된다고 경계했습니다.
우리가 말을 하지 말아야할 때 잘못하는 수가 있고 말해야 할 때에 안 하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말을 너무 많이 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말을 절제하고 적게 하도록 힘써야 우리 신앙 생활에 실수가 적을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 일상 생활 모든 방면에 이 절제가 필요한데 심지어 우리가 입는 옷이라든지 우리의 몸단장에도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 2장 9절에 사도 바울이 권면 하기를『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갑 진 옷으로 하지 말고』단정한 옷을 입고 갑 진 옷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옷과 단장에까지 이 절제의 덕을 잊지 말고 아담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지마는 사치한 데 흐르면 안 되겠습니다.
몇 달 전에 미국에서 한국에 시찰 온 분이 주일날 교회에 들어오는 문에서 저를 찾아와 만나게 되었는데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하는 때, 마침 어떤 부인이 옷을 잘 입고 그 옆으로 지나갔습니다. 그러니까 이야기하다가 이야기하던 것 다 잊고 그 여자의 옷만 자꾸 들여다 봅니다. 그 여자 옷이 굉장히 아름답다고 하며 그 다음에 하는 말이 저 천이 이 나라에서 나느냐고 묻습니다. 외국 사람이 한국 사람의 옷 입고 다니는 것까지 주목해 봅니다.
아마 한 일년 전 같습니다. 2차대전 전 필리핀이 미국치하에 있을 대에 고등 판무관으로 있던 세일러 박사가 한국에 와서 한 주일 이상 혹은 두 주일 여러 가지 각도로 실정을 조사하는데 그때 저를 만나 이야기하다가 하는 말이 내가 보니 일본 동경에 사는 사람과 한국 서울에 사는 사람을 비교해 보면 서울에 사는 사람이 낫더라고 하여 내가 깜짝 놀라서 하는 말이 그럴 수가 있겠느냐 일본은 지금 다 재건하고 잘 사는 사람인데 그럴 수가 있겠느냐고 했더니 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서 지금 대단히 곤란한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보통 생활 수준을 보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을 보면 아는고 하니 옷과 특히 신을 보면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동경에서도 일본 사람의 신을 자세히 모았고 서울에 와서도 한국 사람의 신을 자세히 보았다고 합니다. 보통으로 보면 한국 사람이 일본 사람보다 좋은 신 신고 다닙니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가 어떤 신을 신고 다니는지 그것까지 주목해 보는 줄 여러분 아셨습니까? 우리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신을 신고 어떻게 사는가를 온 세계가 다 주목해 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 전시입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 외국의 원조를 받아야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깨끗하고 아담하게 옷을 입으려니와 사치한 데 흘러가면 안 됩니다. 검소하고 아담할 수 있는 것과 사치하고 더럽게 살 수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단장하는 것도 마찬가진 줄 압니다. 화장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진 줄 압니다. 전에 선생님 말씀이 으레 여자들은 화장해야지 그러나 화장을 제일 잘하는 방법은 화장한 후에 남이 알 듯 말듯하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화장한 다음에 남의 눈에 띄게 되면 본래 화장한 근본 뜻에 어긋난다고 말씀하셨다 합니다.
여기 어떤 때 서울 거리를 지나게 되면 옷차림이든지 화장한 걸 보면 뉴욕 브로드웨이에 갔다놓아도 일등 당선될 만한 그런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우리 한국 실정에 도무지 맞지 않습니다. 이 화장도 절제가 있어서 도에 지나지 않아야 합니다. 도에 자나게 되면 지금 말한 것과 같이 근본 목적에 벗어나게 됩니다.
비슷할 말 같지만 미국 사람은 발달해서 사람 죽은 다음에도 시신에다 화장을 잘 합니다. 화장을 한 죽은 사람의 얼굴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자기 집에 두지 않고 곧 장의사한테 모셔갑니다. 가져다가는 약으로 씻고 남자는 머리를 깎고 여자는 파마를 다시 하고 얼굴을 곱게 씻고 방긋이 웃게 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고서는 화장을 잘하고 잘 모시고 그 다음에야 유족을 오게 하고 조객들이 와서 유족을 위로 할 때에는 그 세상 떠난 사람의 얼굴을 다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화장을 어떻게 하는지 살았을 때 보다 더 곱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화장은 도에 지나친 화장입니다.
도에 지나친 화장을 보면 죽은 사람의 얼굴이 생각납니다. 무섭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맙시다. 모든 생활에 있어서 도에 지나치지 않도록 내 처지와 내 환경과 내 생활과 내 지위와 모든 것을 살펴서 도에 지나치지 않도록 우리의 옷과 생활과 단장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절제 생활의 근본 정신이올시다.
음식에도 절제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음식은 우리가 다 먹고살아야겠지만 절제 없이 음식을 먹다가 벌받은 경험이 다 있는 줄 압니다. 그러기에 잠언 20장 56절을 읽으면『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할까 두려워하라』했습니다. 아무리 청밀(淸蜜)이 달지마는 과식하면 토합니다. 달다고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고 토하는 사람 많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고 절제 있게 먹어야지 도에 지나면 우리에게 해가 됩니다. 하물며 우리 육체에 아무 이익이 없고 손해 주는 물건을 우리 육체가 흡수할 필요는 없는 줄 압니다. 그 가운데 대표되는 것이 술과 담배입니다.
어떤 사람 말하기를 절제 있게 하라고 하니 술도 절제 있게 먹으면 되지 않느냐 취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말합니다. 절제 있게 하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도 절제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예 필요 없는 육신에 해를 주는 것은 아주 끊어 버리는 것이 절제입니다.
여러분 제가 설명할 것 없이 몇 천년 전에 잠언을 기록한 사람이 술 먹은 사람에 대해 기록한 것을 들어보세요.
잠언 23장 29절부터 읽습니다.『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잇느냐 까닭 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려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취하지 말라가 아니라 보지도 말라 하였습니다.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바랄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건들건들 한단 말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비틀비틀한단 말이요)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는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했습니다.
서양 속담에『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고 다음에는 술이 술을 먹도 다음에는 술이 사람을 먹는다』했습니다. 술이 사람도 먹고, 술이 집안도 먹고, 술이 나라도 먹습니다. 술로 망한 나라가 많습니다. 술 먹고 협잡하고 술 멀고 사바사바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술 마실 시험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이 시간부터 철저히 결심하십시오. 볼 필요도 없습니다. 철저히 금하는 것이 절제입니다. 또 담배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근년에 과학자들이 담배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이 많이 생기는데 바로 지난 6월에 미국 애트란타주에서 미국 의사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 때 미국 암종(癌腫) 연구회원 가운데 한 사람인 함몬 박사라고 하는 분이 자기가 담배와 암종 관계를 연구한 것을 발표했습니다. 이분이 1952년부터 지금까지 188,078명의 암 환자를 연구했는데 그 가운데 죽은 사람이 8,105五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여러 가지 암으로 죽은 사람이 있었으나 폐암으로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이분이 특별히 폐암으로 죽은 사람과 담배 피는 사람과의 관계를 자세히 연구했습니다. 거기 담배 안 피는 사람도 폐암 생겼지만 병든 사람 십만 명 가운데 담배로 죽은 사람은 816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에 담배 한 갑 이내 피는 사람은 폐암에 걸린 사람 십만 명 가운데 128명이 죽었습니다. 또 하루에 한 갑 이상 두 갑까지 피는 사람은 227명 죽었습니다. 하루에 두 갑 이상 피운 사람은 460여 명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의 연구 결과로 보건대 암과 담배의 관계에서 담배는 암에 직접 금물이라는 것을 여러 사람이 보고했습니다.
만하탄에 암 연구소가 있고 그 암 연구소 소장으로 어네스트 윈더 박사가 있는데 이분이 지금부터 17 개월 전에 흰쥐를 가지고 실험을 했는데 흰쥐에다가 담배 진을 자주 발랐더니 그 담배 진으로 인해서 암종이 생기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직접 니코틴과 암과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실험에서 발견했습니다. 또 윈더 박사가 연구한 책이 작년에 나왔는데『담배의 생물학적 영향』이란 책이며 그 책 가운데는 담배와 암이 어떠하다는 것, 담배와 심장병이 어떠하다는 것, 소화 계통과 신경 계통에 악영향을 준다는 것 등을 과학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성경 말씀에 너희 몸은 너희 몸이 아니고 예수의 피로 산 것이라고 말씀했고 너희 몸은 하나님이 친히 계시는 하나님의 전인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우리의 육체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의 육체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우리 육체에 해를 주는 담배를 피울 필요는 조금도 없는 줄 압니다. 물론 경제 문제나 다른 문제도 많지만 먼저 신앙 양심에서 우리가 이런 것도 철저히 금하는 것이 우리 신앙 생활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절제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항상 우리는 세 가지를 생각하여야 됩니다. 이미 말했지만 첫째는 나는 알고 내 환경을 알아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 한국은 전시 상태에 있습니다. 다 파괴된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 한국은 외국의 원조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경제 사절단이 외국에 가서 내년도의 원조금을 증액해 달라고 교섭하고 있습니다. 증액해 달라고 교섭하는데 미국 측에서 내 놓는 조건이 무엇인가 하면 원조를 주면 이것가지고 사치품 들여오지 말고 실용될 물품을 들여다가 산업을 재건하는 것이 첫 조건입니다 이런 환경 가운데서 우리가 절제를 잊어버리고 사치에 흐르면 믿는 사람이라는 것은 말할 것 없고 그야말로 일본 시대의 문자 그대로 비 국민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며칠 전에 돈암동 로터리에 섰노라니 까 아마 어떤 분이 결혼식을 하는 모양이지요, 좋은 차에 꽃을 늘이고서 십 여대가 계속해서 지나갑니다. 가만히 서 볼 때 그것은 물론 좋습니다. 결혼식도 좋은 일이요, 일생에 한번 있는 것을 잘 하는 것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은 그와 같은 것도 오늘날 한국실정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것이 미국이나 영국이면 으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 실정에는 맞지 않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한국 실정에는 결혼식에 대하여도 절제가 있어야 됩니다. 연회에도 절제가 있어야 됩니다. 우리의 환경을 알아야 됩니다. 둘째는 오늘날 우리 한국에 있어서 이 절제 생활을 특별히 우리 믿는 사람이 솔선해서 수범을 보이고 반드시 우리가 모범을 보이지 아니하면 우리 사회를 바른 길로 인도할 다른 길이 없습니다. 전에 어떤 신문을 보니까 생활 개선 요강을 어떤 관청에서 정해서 발표했는데, 이런 조건이 있어요. 첫째 낮 술을 금할 것, 그러니 밤술은 먹잔 말이지요. 둘째는 양담배를 금할 것, 국산 담배 피우잔 말이지요. 이렇게 생활 개선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도 보통은 안 합니다.
바로 지난 주일인가 봅니다. 서울 문리과 대학 강당에서 전국 대학 총장, 학장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우리 학생들에게 반공 반일 사상을 가르치며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용공주의를 가지는 일본을 반대하는 교육을 학생들에게 함양시킬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문교부 당국과 대학의 총장과 학장이 모여서 논의했습니다 저는 못 하고 대신 갔다와서 보고하는데, 어떤 분 이런 말씀했답니다.
『이런 일하려면 학장부터 학생 과장, 교무과장부터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이런 말을 여러분이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일어나서 우리 그러면 우리부터 먼저 실현해야 되지 않겠소 하고 보니까, 강당 여러 곳에 금연이라고 써 붙이고 우리가 담배를 빨고 앉았으니, 우리가 무엇이라 학생들에게 모범을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 담배 떼 놓자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와서 보고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그런 사회입니다. 절제하자 무엇을 하자 하지만 실제 실행하지 않습니다. 먼저 우리 믿는 사람이 이런 방면에 모범을 보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언제나 그렇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나만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기 위해서 삽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생활입니다.
나만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의 생활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나 먹을 대로 다 먹고, 나 입을 대로 다 입고, 나 쓸데에 다 쓰면 다른 사람 도와줄 돈 남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나 먹을 대로 다 먹고, 나 입을 대로 다 입고, 나 쓸 대로 다 쓰면 고아원이든지, 양로원이든지, 모자원이든지, 좋은 자선 사업 기관이든지, 교육기관이나 교회를 위해서 바칠 돈이 남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생활을 하려고 하면 우리 기독교인의 생활에 근본 이념에서 절제를 하지 않으면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뒤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절제해서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내고 내가 축복을 받고 온 사회를 건질 수 있는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855년 7월 3일)
'좋은 말씀 > 한경직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의와 평화 (히브리서7:1-10) (0) | 2017.02.24 |
---|---|
영생의 확신 (요한1서5:12-17) (0) | 2017.02.22 |
인생고와 사명감 (요한복음9:1-12) (0) | 2017.02.20 |
신앙의 정로 (여호수아 1:1-9) (0) | 2017.02.18 |
목자없는 양 (마태복음 9:35-38) (0) | 2017.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