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경강해

사도신경 강해 요약

새벽지기1 2017. 2. 10. 14:08

 

도 신경은 전통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문서로 기독교 강요,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 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등에서 주기도문, 십계명과 더불어 가르쳐지고 있다.

사도 신경은 삼위일체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삼위일체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대표적인 잘못된 이해가 삼신론과 양태론이다.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란 오직 한 하나님 안에서 그는 어떤 것으로 유비되지 않으시는 존재 방식으로 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하심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삼위는 그 존재와 영광과 권세에 있어서 동등하시며, 동일 본질을 가지고 계시어서 한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습니다.

기독교 유신론적 창조 신앙은 세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창조와 섭리에 대한 신앙),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아버지시다(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의 하나님과 아버지가 되신다(구속에 대한 신앙?).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섭리하신다. 그러므로 이신론과 범신론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이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인내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

 

성자 예수님에 대한 고백


I) 예수님의 위격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성자 하나님은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분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분이다. 그는 그리스도 즉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 궁극적이고 완전하며 영원한 직분을 받으신 분이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데 이는 성자께서 하나님임을 뜻하며 동시에 성부와의 관계성을 알려 준다. 그는 또한 ‘주’로 불리는데 이는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이신 것이다.

 

ii)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 후로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짧은 요약에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사건들이 역사적 사실이고 그 자체로서 중요성을 띈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말해서 인간편에서는 사건이 있고 의미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사건들의 의미는 이미 이 사건이 발생할 때부터 그 사건들에 붙박혀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성경의 역사성을 믿지 않고 문자적 사실에 대한 기록임을 부인하는 상황에서 사건 자체를 살피는 것은 중요하다. 따라서 본 강해서는 각 장에서 각 사건들 자체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성육신이 이뤄진 것으로 “죄 있는 육신의 모습”을 입으셨지만 죄가 있으신 분은 아니었다. 이 초자연적인 일은 또한 자연과의 밀접한 조화 가운데 이뤄진 것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뼈로부터 인간성을 취하며, 태 중에서 자라서 태어날 때까지 다른 아이들과 같은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우리는 그가 우리의 중보자가 되실 수 있으며 구속주가 되실 수 있음을 알 수 있고 큰 위로를 얻을 수 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음부에 내려가셨다.

이 진술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분이 받으신 고난이 “전체적”이라는 것이다. 그 고난의 극치는 십자가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형으로 돌아가신 이유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죄에서 씻김을 받고(소극적)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감사의 제사로 드릴 수 있다(적극적). 장사되었음은 죽음을 공식적으로 확언해 준다. 그의 죽음의 저주를 받으심으로 성도에게 있어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워 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성화의 최정적 수단이요, 영혼의 성화를 위한 징계의 극치”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음부에 내려갔다는 고백은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영의 고뇌”를 지옥과 같은 극심한 고난을 당하신 것이라는 비유적 표현인 것이지 베드로 전서 3장이 이 고백의 근거가 아니다. 이에 대한 로만 카톨릭, 루터파, 성공회에 대한 설명은 바르지 못하다.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를 살펴보았고 이제는 그의 승귀를 살펴 볼 차례이다. 그리스도의 승귀에서 첫째 일은 그분의 부활이다. 그는 부활 하셨고 직접적인 증인들에 의해 증거되었고 기록되었다. 우리는 그 일을 듣고 믿은 ‘간접적’ 증인들이다. 부활은 구속사적, 구원적, 종말론적 사건이다. 부활 후에 하늘에 오르셨다. 우리와 더 이상 물리적으로 함께 계시지 않은 것이다. 다만 성령의 능력으로 무소부재하시다. 이 승천이 의미하는 바는 희생 제사 후에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간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그는 이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이는 지금까지 보았던 것과 달리 비유적 표현으로 권능과 영광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심을 의미한다. 그는 은혜의 왕국(하나님 나라)와 권능의 왕국(피조 세계)를 통치하신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지금도 살아 계셔서 그 분의 교회와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언젠가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 분의 나라를 극치에 이르게 하셔서, 그 메시아 왕국을 성부께 돌려드리고, 영국의 왕국을 이루실 것이며, 그 영광의 왕국에서 삼위 하나님으로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 이 후의 모든 조항은 성령님의 사역이다.

성령을 믿사오며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는 하나님으로 ‘나오신다’는 표현은 삼위 간의 관게성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참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와 그 분의 모든 유익에 참여하게 하시고 우리 안에 주어져 영원히 내주하신다. 따라서 성도는 성령님으로 살고, 성령님으로 행하게 된다.

 

거룩한 공회를 믿습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죄를 사하여주는 것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하여 성령님의 사역으로 세워지는 교회를 믿는다는 것은 교회의 의미와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보호하시며 보존하심을 믿는다는 것이다. 교회의 속성은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이다. 이 교회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고 죄 사함을 받는다. 따라서 교회 밖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들을 누릴 수 없고 구원에 참여할 수 없다. 즉 성도의 삶(감사와 용서의 삶)을 살 수 없다.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종말에 대한 고백

영생은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지금 여기서 영생에 참여한 자들에게만 이 후에도 영생의 참여가 보장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죽은 성도들의 영은 그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면전에 있게 된다. 이들의 영혼은 죽음으로 성호가 완성되지만 완전한 영생에 이른 것이 아닌 이미와 아직의 기다림 속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전한 영생 곧 몸의 부활을 통해 영육의 온전한 사람을 시작할 수 있다. 부활체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같는다. 썩지 아니함, 영광스러움, 강함, 신령함 등이 그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는 피조 된 존재로서 온전한 의미를 다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왜냐하면 온전한 의로 가득 찬 상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된 평강(shalom)으로 가득 찬 삶이요 또한 영광으로 가득찬 삶이며 무한한 진보와 발전으로 가득찬 상태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완성된 나라를 소망할 뿐 아니라 그 나라의 의와 평강을 드러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