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경강해

사도신경강의 1 :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

새벽지기1 2017. 1. 19. 12:18

사도신경 강의 1 :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

[ 본문: 요 1:1-3, 14, 18, 요 14: 26, 15;26, 16:13-15 ]

이단에 빠지지 않고 바른 신앙 생활을 해 나가는 좋은 길의 하나는 우리의 신앙의 내용이 2000년의 역사를 지닌 공교회의 신앙에 충실한 것인지를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공교회의 신조 가운데서 가장 보편적인 신조는 2세기 로마 교회의 세례 때에 신앙 고백문으로 사용된 이래로 많이들 사용되어 온 사도 신조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내용을 잘 정리해 주고 있는 사도 신조의 내용을 하나하나 더듬어 가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도 신조의 내용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작성자들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즉, 성부와 우리의 창조에 대한 부분, 성자와 우리의 구속에 대한 부분, 그리고 성령과 우리의 성화에 관한 부분으로 나누는 것입니다(제 24 문답). 다른 말로 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사도 신조를 삼위일체적 구조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도 신조 자체가 삼위일체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하는 것도 그렇게 무리한 것은 아닙니다.

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터툴리안이 처음 사용하고 그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사용해서 교회 안에서 일반화된 "삼위일체"(trinitatis)라는 말로서 우리가 의미하는 바를 먼저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의 제 25 문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직 한 하나님이 있을 뿐인데, 왜 당신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에 대해서 말합니까?" 그리고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대답이 주어져 있습니다: "왜냐 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말씀 가운데서 당신님을 계시하신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구별되는 위들이(these three distinct Persons) 하나의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제 25문 답).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님을 이렇게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으로 드러내신 것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참되고 영원하신 한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어떠하신 분이신지를 단번에가 아니라, 점진적으로 계시하여 오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한 분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들이라 칭하는 것들이 많은 상황 가운데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강조하는 것이 아주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마다 암송하는 소위 "쉐마"(shema)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shema Israel),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라고 해서 하나님의 하나이심을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계속되는 가르침이어서 이 한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거나 그와 더불어서 다른 것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 구약의 중요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오직 하나이신 이 여호와는 그가 한 분이시며 유일하신 분이심에 걸맞게 절대적인 관계를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하나님에 대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즉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아주 필수적인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심은 신약에서도 명백히 가르치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딤후 6:15-16). 다른 모든 것보다도 이 선언 속에 하나님이 홀로 한 분이신 분으로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이 잘 드러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2. 삼위 하나님에 대한 계시

그런데 신약에서 가장 현저하게 계시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이 한 분이신 하나님은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한 분이 있다고 하면 그에게 하나의 인격(person)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한 인격이 한 사람, 즉 한 분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계시의 빛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와는 좀 다른 존재 방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그 한 신성이 세 위격(three persons, three hypostasis)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본질(ousia, essentia)은 하나이지만, 이 본질이 구현되어 있는 위격(person)은 셋이시라는 것입니다. 칼빈이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위격들의 삼위일체가 있다"(in the one essence of God there is a trinity of persons)는 말입니다.1)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런 용어의 사용을 통해서 말을 절약해서 표현하기 위함이며,2)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지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고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이를 표현해야 하기 위한 것입니다.3) 이 사실이 신약에서 어떻게 계시되었는지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의 생애와 가르치심을 신약 성경을 통해서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자신을 자신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나님, 그리하여 자신과 아버지를 구별하시면서도 또 자신을 그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시하시기도 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그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니라"(요 10:30)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시고,4) 때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죄의 선언을 하심으로써 자신이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드러내십니다(막 2:1-12 참조). 그리고 그를 신적인 분으로 인정하는 고백을 받아들이시기도 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의 말한 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는 고백을 포함한 신앙고백에 대해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다고 하시면서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5) 또한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도마의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는 고백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가 아버지라 부르신 하나님과 자신을 구별하시면서도 자신을 그 아버지와 동일시하시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그가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이시나, 또 아버지와는 구별되는 분이시라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이것이 잘 이해되지는 않아도 하나의 사실로서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가 사역을 마치실 즈음에 그는 후에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하셨습니다(요 15:26, 요 16: 7-14 참조). 과연 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신 후에 오셔서 교회를 인도해 나가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들 가운데 계셔서 그들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 지도해 가시는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였습니다(행 5: 1-11 참조).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독특한 존재를 계시하시자 사람들은 난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전부터 하나님으로 섬겨 왔고 예수께서 아버지라 부르신 그 분과 자신을 그의 독특하신 아들로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아버지께서 이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의 관계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난제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일까요?



3. 두 가지 잘못된 해결책

교회가 처음 이 난제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교회 안에는 이에 대해서 두 가지 대립되는 잘못된 이해가 발생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을 이제 세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삼신론적 이단). 그러나 이는 앞서 살펴본 구약과 신약의 명확한 증거, 즉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와 명백히 상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있을 수 없는 견해이고 아주 명확한 형태의 삼신론을 교회 안에서 찾기는 좀 힘듭니다.6)

그러나 어느 정도 이에 근접하는 오해로, 성부 하나님만을 온전하신 하나님으로 말하고, 성자와 성령은 좀 못한 하나님, 제 2의 하나님이나, 제 3의 하나님으로 말하는 이들은 많았습니다. 이런 이해도 성경의 진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은 교회에서 이단적인 생각으로 정죄된 것입니다. 이런 오해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를 들자면 그것은 아리우스(Arius)와 그를 추종하던 이들(Arians)의 생각입니다. 아리우스는 성자는 영원에서 창조된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근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하나님의 온전한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원에서는 성자가 "있지 않던 때가 있었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자는 성부보다는 좀 못한 하나님, 선을 선택하여 불변성을 얻고 신성에 이른 존재이고,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영에를 받으시기에는 합당하나 우리의 경배의 대상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7) 성령의 지위는 더 격하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런 생각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따로 계시되, 성부만이 온전하신 하나님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부차적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성부, 성자, 성령의 동등하심과 심지어 하나이심을 강조하다가 잘못된 사상도 있습니다. 소위 역동적 군주론(dynamic monarchianism)은 예수님을 그저 사람으로 보고, 성령을 신적인 영향력으로만 보았고, 양태론(modalism)으로 알려진 이단은 성부, 성자, 성령이란 한 하나님께서 각기 다른 시기에 자신을 드러내신 세 가지 양태(three modes of manifestation)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8) 그러므로 성부가 성자이고, 그가 성령인데, 그것은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형태를 가지고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고 계시하신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자의 수난이 곧 성부의 수난이 되고 (성부수난설, patripassianism), 결국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 뚜렷이 구별되어 계시되어 있다는 것과, 또 때로는 성부, 성자, 성령이 동시에 나타나신 사건들 (예수님의 수세, 변화산 사건 등)을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해는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 됩니다.

이 두 가지 오해는 아주 명확한 형태로 나타난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비록 정통적 삼위일체론을 지니더라도 그런 경향에로 나아가는 모든 것도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삼위일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터툴리안(Tertullian)도 성자를 성부에게 종속시키는 듯이 말을 한 일이 있고, 오리겐(Origen)은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고, 성령은 성자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표현하여 소위 종속론(subordinationism)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9)

이런 문제점들은 과거의 교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들이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기에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성부에 비해서 성자와 성령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자의 인간되심에 충실한다고 하면서 그의 신성을 무시하거나 이를 완전히 감취어진 것으로 여기는 현대의 경향이나, 성령을 향해서 명령하듯이 말을 하는 풍조나 성령의 인격성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언사와 행동이 위에서 말한 첫번째 오해와 연관될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성부, 성자, 성령을 설명하면서 한 존재가 가질 수 있는 세 양태와 관련해서 설명하는 것(예를 들어서, 물질의 삼태(三態)에 따라서 물이 수증기, 물, 얼음으로 될 수 있으나 다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든지, 한 존재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지위와 관계로 [아버지, 남편, 교사 등] 설명하든지 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두 번째 오해와 관련될 수 있는 것입니다.



4. 우리의 바른 삼위일체 이해는?

그러면 우리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신데, 그는 이 세상에 그 어떤 것과도 유비되지 않으시는 아주 독특한 존재 방식을 가지셔서 그 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three persons)로 존재하신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은 그 존재와 영광과 권세에 있어서 동등하시며, 동일 본질을 가지고 계시어서 한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각 위간에는 종속적인 면이 없고, 위격적 엄위에 차이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 분들에 계시하실 때 아버지, 아들의 용어를 써서 계시하시므로 우리는 그 계시를 따라서 성부(아버지 하나님), 성자(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고, 또 이 용어들이 지시하는 관계성과 성경의 표현에 근거해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낳으시고(generate),10)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에 의해서 낳아지시며(is generated), 성령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로부터도(filioque) 나오신다(proceed, spiratio, 요 15: 26)는 표현을 써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의 관계를 우리가 인식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점진적으로 계시하신 것에 근거해서 신약에서야 비로소 온전히 인식할 수 있지만, 이 삼위의 관계는 구약에도 있던 것이고 때때로 비록 그림자적 형태이기는 하지만 그런 시사가 있는 계시도 있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11) 그리고 이 삼위일체의 관계는 사실상 하나님이 계시면서 계속해서 있어 온 관계입니다. 이렇게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로 존재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때때로 본체론적 삼위일체, 존재론적 삼위일체라고 하며, 그 하나님이 자신을 역사적 경륜 가운데서 드러내신 것을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불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본체론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 근거이고, 경륜적 삼위일체는 본체론적 삼위일체의 인식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12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이 삼위일체적 존재이심을 경륜과 계시 가운데서 드러내어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삼위일체적 존재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게 섬겨 나가야 할 것입니다.

[출처] 이승구. 사도신경강의 1 :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작성자 신념과용기

각 주

1)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ans.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0), I, viii, 5.

2) 위의 말을 한 후에 칼빈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한 마디로 성경이 진술하는 것을 말하면서 공허한 잔소리를 다 줄일 수 있을 것이다"(Institutes, I, VIII, 5).

3) Cf. Augustin, cited in Institutes, I, viii, 5: J. I. Packer, "형상을 만드신 하나님", 『포스트모던 세계에서의 기독교 신학과 신앙』 (서울: 엠마오, 1994), 95.

4) 이 "하나"라는 말을 "정신에서의 하나, 목적에서의 하나, 그와 함께 행동함에서의 하나"(one in mind, one in purpose, one in action with him)로 해석하려는 이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Cf. F. F. Bruce, The Gospel of John (Hants: Pickering & Inglis, 1983), 233.

그러나 이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는 다음과 같은 레온 모리스의 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 본질적 통일성이 주장된 것이다. 이 둘은 함께 속하는 것이다. 이 진술은 요한복음서의 서문의 말 이상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들과 같이 서 있는 것이다. ...... 이 말이 형이상학적인 진술로 이해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는 예수님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하나라고 하는 것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는 것도 사실이다"(Leon Morris, The Gospel of John,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71], 522f.]. 또한 그와 호스킨스(Hoskyns)는 이 말씀 이후의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성 모독을 문제 삼고 있는 점을 잘 지적하면서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옳게 제시한다. 부루스와 같은 해석에 반하면서 아주 논리적으로 모리스와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는 D. A. Carson, The Gospel of John (Grand Rapids: Eerdmans, 1991), 394f.도 보라.

5)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주해적 설명의 하나로 G. Vos, 『예수의 자기 계시』 (서울: 엠마오, 1986), 202-208를 보라.

6) 그러나 이런 삼신론에 가장 근접한 이들로 후기 단성론자들 중의 John Ascunages와 6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을 썼던 John Philoponus, 그리고 중세기의 극단적 유명론자였던 Roscelinus와 극단적 실재론 자였던 Gilbert de la Porree를 들 수 있다. 이들을 각기 소이송(Soissons) 공의회(1092)와 라임(Reims) 공의회(1148)에서 정죄되었다. 현대에는 헤겔의 범신론적 견해에 반해서 A. Gunter가 삼신론적 견해를 표했다고 한다.Cf.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41), 82;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42), 1396. 오늘날에는 몰트만의 생각 가운데 삼신론적 성향이 있는지의 문제로 학문적 논의가 제시되곤 한다.

7) Bavinck, 286=『개혁주의 신론』, 420에서 재인용.

8) 이들의 선구자들은 2-3 세기의 Noetus, Praxeus, Epigonus, Cleomenes이고, 3세기에 Sabellius에 의해서 공식화되었다. 사벨리우스는 신 6:4, 출 20:3, 사 44:6, 요 10:38 등에 호소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밝혀 보려고 한다. Cf. Bavinck, 421f.

9) 변증가들에게 있던 종속론적 경향에 대해서는 Bavinck, The Doctrine of God (Grand Rapids: Eerdmans, 1951), 한역, 『개혁주의 신론』 (서울: CLC, 1988), 404-408, 오리겐의 종속론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Bavinck, 411 등을 보라.

10) 그 정확한 의미에 유의하지 않으면 혹시 오해 될 수도 있는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성경 의 용례를 따른 결과임에 유의해야 한다: 요 1:18("독생하신 하나님"), 요 1:14 ("독생자"), 시 2:7("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등. "독생자"라는 말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의 하나로 G. Vos, 『예수의 자기 계시』 , 245-63을 보라.

11) 그러나 이전의 교부들 중 어떤 이들이 생각하듯이 창 18장의 세 천사가 삼위일체의 현현이라고 하는 등의 생경한 주장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늘 계시사적인 의미에 유의해야 한다. 이런 점에 대한 논의로 졸고,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교회와 문화』 5 (2000).

12) 이 문제에 대한 논의로 졸고,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 『개혁신학 탐구』 (서울: 하나, 1999): 52-67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