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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신경 강해 (5) 창조와 섭리 신앙의 유익 / 이승구교수

새벽지기1 2016. 8. 9. 23:33

사도 신경 강해 5 - 창조와 섭리 신앙의 유익  

창조를 믿는다는 것과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그저 과거에 그런 역사적 사실이 있었고, 또 지금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 이상의 실천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창조와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창조와 섭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이런 분명한 사실들에 대해서 맹목적이게 되고, 그 사실들을 아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전혀 얻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로(엡 2:12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창조와 섭리의 사실을 알고 인정한다고 해도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전혀 생각해 보지 않는 이들은 이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는 것의 유익에 의미 깊게 동참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섭리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는 이들인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시간을 내어서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관심을 가지고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28문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까?"라고 묻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태가 우리에게 불리할 때 인내할 수 있으며,

사태가 잘 되어 갈 때 감사할 수 있고,

미래에 대해서도 우리를 그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우리의 신실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선한 신뢰를 둘 수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온전히 그의 손에 있어서,

그의 뜻이 아니면 그들이 움직일 수도 없고

움직여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설명을 따라서 믿는 이의 태도를 찬찬히 생각해 가면서 창조와 섭리의 유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창조와 섭리를 믿는 이는 인내할 수 있는 이이다.

여기에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하다가 이 세상의 복잡한 삶의 과정 가운데서 모진 시련과 어려움 가운데 있게 되었다고 해봅시다. 이런 상황 가운데 잇는 그는 이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 과연 어떻게 생각해고 행동해야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일까요? 어려움이 있으므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하거나, 하나님이 계셔도 자신을 돌보아 주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가 그렇게 한다면 그는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 이가 아니거나, 적어도 그 순간에는 불신앙의 태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는 그 순간에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믿지 않거나,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를 나타내 보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탄회(坦懷)하신 일이 있습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사 40:27, 28). 이처럼 모든 것이 자신이 생각한대로 잘 될 때만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참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 안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도무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역경도 모두 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욥의 상황과 같이 그런 어려움이 우리게 임하는 이유를 도대체 알 수 없는 경우라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도 참으로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어떤 경륜 가운데서 내게 임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그 어려움을 참고 인내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참된 신앙인들은 모두 다 이같은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갔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에 섭리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이들에 대해서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巖穴)과 토굴(土窟)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6-38).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그런 어려움이 자신들에게 임하는 제2의 원인(the second cause, causa secunda)이 된 다른 사람들이나 상황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와 섭리를 믿으며 인내하는 이의 바른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인내하는 이는 다른 이들을 참으로 용서하는 이입니다. 다른 이들이 관여되어서 우리에게 어려움이 임하여 왔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그들보다는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우리에게 잘못 행하는 것을 관대히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 가운데서 섭리를 믿기 때문에 자신에게 잘못한 이들을 참으로 용서할 수 있었던 대표적인 인물을 들자면 우리는 구약에서는 요셉을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물리치고 (따라서 통역도 물리치고) 아마도 그의 모국어로 그의 형들에게 그가 했던 다음 말을 잘 생각해 보십시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 4-5, 8).





많은 이들은 "요셉 기사 전체에서 핵심이 되는" 이 말이 하나님의 "섭리적 통제에 대한 고전적 진술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이 일에 사람들의 잘못과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음을 보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뜻에만 눈을 집중시키는 그것에 섭리에 바른 이해와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비록 형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자신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서 자신을 아비에 집에서 떠나게 하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 과정 가운데서 자신이 모진 고생을 하였음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요셉이었지만, 그는 또한 이 모든 어려움이 그저 형들의 죄악과 미움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결국 궁극적으로 따져 올라가면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통해서 자신에게 임하였다는 것을 그는 알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 이야기 전체의 본질, 주제, 또는 큰 구조(macrostructure)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어려운 과정이 결국은 자신의 모든 가족을 보존하고, 결국은 이스라엘 족속을 보존하며 번성시키기 위한 것임을 그는 인정하면서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가 정확히 언제 이런 인식을 확연하게 가지게 되었는지를 알 수 없고, 본문도 그런 시사를 전혀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명확히 이런 인식 가운데서 움직여 나갔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가 이 과정을 겪어 가면서 점점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고백을 하는 요셉도 이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런 섭리적 통제를 깨닫고 고백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깨닫게 된 후에 요셉은 자신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판 형들이나, 자신은 그 집안 일을 최선을 다해 잘 돌아보았음에도 자신을 유혹하고 누명을 씌워 옥에 넣도록 한 보디발의 아내나, 상황을 잘 알아보지 않고 자신에게 모지게 대한 보디발이나, 꿈을 잘 해석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돌아 볼 시간을 갖지 못한 관원장에게 대한 원망의 마음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이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기에 참으로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악된 사람들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원하시는 목적을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참으로 믿는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원인이 되어서 당하는 이런 어려움 속에서라도 그 원인이 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원한을 표하거나 그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믿으면 다른 이들을 얼마든지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고, 또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식이나 빈말이 아니었음을 야곱이 죽은 후에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요셉이 복수할까봐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말하는 요셉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 19-20).



이 말씀을 포함한 요셉의 대답에 대한 가장 좋은 정리와 언급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데렉 키드너의 요약적인 그러나 풍성한 분석을 언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의) 삼중의 대답의 각 문장은 구약(과 신약)의 신앙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에게 대해 행해진 악행들에 대해서 모든 일이 바르게 되는 것을 다 하나님 손에 맡기는 것(19절, cf. 롬 12:19; 살전 5:15; 벧전 4:19); 사람의 악함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찾는 것(20절; cf. 창 45:5); 그리고 악에 대해서 용서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애호와 돌봄으로 갚는 것 (21절; cf. 눅 6:27ff.) -- 이 모든 것들은 '기독교적인' 아니 심지어 '그리스도와 비슷한'(Christlike) 태도를 선취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요셉의 태도, 이와 같이 관대한 마음은 모두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주관하심 가운데 있다는 것을 믿는 섭리에 대한 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하시는 이 말씀은 한편에서 생각해 보면 신성을 가지신 주님이시기에 하시는 말씀이시지만, 또 한편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음을 분명하고도 확실히 믿는 믿음으로부터도 나오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런 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드신다고 해서 죄악을 범하는 사람들이 책임이 없거나, 그들이 아무런 죄책을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결과만 좋으면 그것으로 다 된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경우에 있어서도 잘못을 행한 형들과 보디발의 아내 같은 이들의 죄와 죄책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치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섭리를 인정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참고 인내하며, 용서한다고 해서 그것이 죄와 책임에 대해서, 그리고 정의에 대해서 맹목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나 다름 모든 이들이 분명히 의식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런 죄에 대해서 판단하시고 공의롭게 처리하실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들도 창조와 섭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서 역경과 환난 가운데서도 잘 인내하여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 특히 억울함과 원한을 십자가의 구속의 빛에서 다 주께 맡기고서, 따라서 자신은 그로부터 참으로 벗어나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빛에서 생각해 보면 억울함, 원한, 한(恨)에 묶여 사는 이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 사상 중의 하나인 한(恨)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해결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그 인식에 근거해서 그 한(恨)으로부터 자유로와 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풀이가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미 십자가가 한의 문제를 비롯한 모든 문제를 극복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섬기는 이들의 선을 위해 선으로 인간들의 악을 이기실 수 있음을"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



2. 창조와 섭리를 믿는 이는 감사할 수 있는 이이다.

섭리를 믿는 이들이 역경(逆境) 가운데서는 이와 같이 어려움을 인내하며 견디어 나갈 수 있다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 가는 순경(順境) 가운데서는 그 모든 일이 자신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서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엄격하게 따져 보면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할 수 있는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왜냐 하면 되어지는 모든 일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는 이는 오직 섭리를 믿는 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섭리를 참으로 인정하는 이는 순경(順境) 가운데서 만이 아니라, 역경(逆境)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 그것은 되어지는 모든 일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모리스가 잘 말하는 바와 같이, "모든 정황 가운데서 감사하는 것의 중요성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리스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면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기를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하는 일은 참으로 섭리를 믿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매우 자연스럽고 마땅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근원적 원인은 참 신자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의 구원에 대해 감사하면서 우리는 모든 정황 가운데서도 그 구원을 이루신 분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범사에 감사하는 일은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잘 알다시피 쉽게 되어지는 일은 아닌 듯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살전 5:18). 그는 "모든 정황 가운데서"(?? ?????) 감사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역경 가운데서의 상황도 포함하는 포괄적인 말입니다. 감사하는 일이 쉽게 되어지는 일이라면 교우들에게 이를 명령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니기에 이를 명령한 바울 사도는 (그가 명령한 다른 것들도 염두에 두면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렇게 감사해야 하는 근거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알기만 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그대로 행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바라시는 바의 하나가 분명히 명시(明示)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해서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우들에게도 같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그 감사의 최종적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이루신 구속의 행위로 주신 유익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창뗄?섭리를 믿는 성도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무엇이 잘 되었을 때 그것이 자신의 선행이나 애씀과 노력의 결과로 그리되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물론 그 자신이 노력하지 않거나 애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신의 노력과 애씀으로 좋은 결과가 왔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 따지면 자신 이렇게 애쓰고 노력할 수 있는 그 동기와 힘과 마음과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셔서 가능하게 하신 것이며,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정황을 이루셔서 좋은 열매가 있도록 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리면서 하나님께 참된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사하는 마음은 스스로를 자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이는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레미아서 9:23-24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을 여러 번 하는 것입니다(고전 1:31; 고후 10:17).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연합 가운데서"라는 뜻을 전달하는 이 "주안에서"(?? ?????) "자랑하라"는 말은 주안에서 무엇을 자랑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해주신 것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참된 신자에게는 자랑할 것이 주님뿐이시라는 말입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강하게 말하듯이, 그들이 가진 것 가운데 주께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고전 4:7),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3:21ff.). 이를 제대로 깨달은 이들은, 칼빈이 잘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자신들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 전체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증진시키는 데 힘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이가 참으로 감사하는 이인 것입니다. 창조와 섭리를 참으로 인정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참으로 그렇게 실재적인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에게는 그 자신이나, 자신이 이룬 일이나, 자신의 옷이나 부나 명예나, 학식이나, 자신의 힘이나, 자신의 노력이나, 자신의 자녀나, 심지어 자신의 교회나 자신과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자랑거리로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님맛?자랑의 근거요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만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창조와 섭리를 믿는 이는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이이다.

창조와 섭리를 믿는 것은 이렇게 과거와 현재와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와도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손길 안에 있는 것만큼이나, 미래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28문답의 마지막 부분이 분명히 말하듯이 "모든 피조물들이 온전히 그의 손에 있어서, 그의 뜻이 아니면 그들이 움직일 수도 없고 움직여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기에 섭리를 믿는 이는 미래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게 됩니다. "사망이나 ......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 38-39)는 바울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이는 그 불변하는 사랑을 믿기에 장래를 과감히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미래를 맡기는 이는 장래에 대해서 쓸데없는 걱정과 불안을 가지지 않습니다.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상황 가운데서의 우리의 불안과 걱정을 제거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해서 공연한 불안에 사로잡히고 걱정하는 이는 마치 그에 대해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는 실천적으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가 참으로 이런 상황 가운데 있다면 그는 실천적 무신론자(practical atheist)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상황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데도, 그 자신은 마치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와 돌보심이 전혀 없는 듯이 생각하며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을 한다니 말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불신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성도는 미래에 대해 고민하거나 근심하지 않고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 6:25, 32상).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우리는 이런 염려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2하). 그러므로 창조와 섭리의 주이신 천부께서 "이 모든 일 것을 [우리]에게 더하시리라"는 것입니다(마 6:33하). 따라서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불안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벧전 5:7) 베드로가 권면하지 않습니까? 또한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빌 4:6) 권면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하나님께 미래를 맡기는 이는 미래 일을 생각하고 계획할 때 하나님을 배제하고 생각하거나 계획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어리석은 농부는 하나님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수확에 대한 생각을 하고 계획을 세웠고(눅 12: 16-21), 이것 때문에 예수님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또한 야고보가 예를 들고 있는 사람도 하나님은 전혀 배제한 채 장래의 계획을 세웠으나(약 4:13-17), 야고보는 그에 대하여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가 잠시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도시에서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산중이나 농촌에서 새벽에 안개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 이들은 이 말의 의미를 직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 같은 존재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고 물을 사람들을 위해서 야고보는 친절하게 대답하여 주기를 우리는 도리어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고 말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강조 점은 "주의 뜻이면"(??? ? ?????? ????, deo volente, D. V.)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고대 희랍어에 자주 등장하여 나중에는 그저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기는 하나, 야고보가 이 말을 사용할 때는 그저 희랍적인 경건을 편입시키거나 일반적인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참으로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서 계획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장래에 대해서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고 하는 일을 해야 하나, 이 때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서 이 일을 하며, "주의 뜻이면" 이런저런 일들을 하리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로 야고보는 그가 이전에 강조한(약 4:7)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을 모든 삶에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이면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고 계획할 때에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적 통제를 믿는 이다운 모습을 나타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온 천하를 참으로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 같은 우리들의 진정한 모습을 깨달은 이는 그와 같이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주님의 뜻 안에서의 미래에 대한 계획도 언제나 戮?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과 연관되어야 합니다(마 6:33). 우리의 모든 계획은 주께서 크신 힘으로 세우시는 그 나라의 진전과 그의 의의 온전한 실현을 위한 계획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와 그 의(義)를 위해 사는 이들만이 미래를 참으로 창조와 섭리의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와 우리의 미래조차도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경영하시고 세우시고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의를 위해 사는 존재들이니 말입니다.



4.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창조와 섭리를 믿는 이가 현세의 삶을 살면서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역경(逆境)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인내할 수 있고, 순경(順境)과 번영(繁榮) 가운데서도 자만(自慢)하지 않고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할 수 있으며, 미래에 대해서 쓸데없이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믿고 염두에 두면서 그의 뜻을 따르는 계획을 세워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와 섭리를 믿는 이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바로 아는 이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있었으며, 지금도 있고, 또 있게 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울과 같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말하는 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living), 기동하며(moving), 있느니라(being)". 부디 우리 모두는 이런 것을 잘 알기만 하지 말고, 그것을 잘 아는 사람답게 그 모든 유익을 잘 얻어 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미래를 포함하여 우리 전체를 주께 맡기고서, 우리의 모든 정황 가운데서 참으로 인내하며, 주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