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돈목사

성령의 사역(1-1)

새벽지기1 2017. 1. 7. 11:49

 

은혜에 대한 갈망과 목마름을 준비해 오라.


참된 부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할 때이다. 한국교회와 우리 교단과 우리 개교회와 우리 개인이 절실하게 성령에 사로 잡혀서 영적인 깨어남이 필요한 때이다. 인간이 원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만 주어지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갈망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전인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라. 숙제는 기도를 하고 오는 것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영적인 문제가 해결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라. 영적인 억압과 구습들과 병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강의안과 책 두 권, 소논문 3편을 읽게 될 것이다. 이 소논문은 합동신학교에 칼빈강좌에서 특강한 내용이다.


예수와 성령의 관계


예수와 성령과의 관계가 헨드리쿠스 벌코프의 말처럼 두 단계를 따라 발전한다. 예수가 성령의 담지자(the bearer)로서 메시아 사역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그 완성하신 구속사역에 근거하여서 성령을 보낼 수 있게 되셨다. 즉 수여자(the sender)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사도행전이 증거)

이것을 조금 더 발전시켜서 생각해 보자.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냄과 동시에 당신이 성령과 함께 임하셨다. 성령과 함께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우리 안에 역사하시고, 성령과 함께 동반하셔서 이 땅 위의 구속사적인 열매를 적용하셔서 우주를 갱신하신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보내실 뿐만 아니라 성령과 함께 하시는 co-dweller, co-worker, companion이시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부활하신 주님의 다시 오심”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 전에 계셨던 성령과 다른 점은 부활하시고 온 세상의 주님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다.
은혜의 교리(theology of grace) 부활하신 주님의 공동 사역의 바탕 위에서 이해해야 한다. 공동 사역의 맥락과 빛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은혜 교리에 포함되는 것(구원론, 성화론, 은혜론, 성령론)이 그러하다.
in christ and in the spirit. 삼위일체적인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전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공동체. 교회 선교도 마찬가지로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사역이다. 그래서 초대 교부 이레니우스Irenaeus는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을 하나님의 두 손Two Hands of God이라고 말하였다.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을 통하여서 성부의 뜻과 경륜이 세상 속에서 성취된다. 세상 속에 성부의 사랑이 두 분의 사역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어느 정도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구원의 교리를 이해할 때 두 분의 공동 사역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런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의 사역이 긴밀하게 연합되어 있다. 대표적인 구절이 롬1:4, 고전15:45, 고후3:17,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고전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육체가 획기적인 변형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영적인 존재가 되셨다.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은 부활을 통해서 아주 영적인 존재가 됨으로 이제는 성령과 별 차이가 없어졌다라고 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로 해석하면 문제가 된다. 그분이 바로 영이 되셨다면 본질론적으로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이 동일화되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볼 수 없다. 삼위일체를 부인하게 된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ontological identity본질론적인 동질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점에서 “주님이 영이시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까? functional, economical, dynamic identity 기능적, 경륜적, 역동적인 동일성이다. James D. G. Dunn이 바로 이러한 점을 강조하는 신학자이다. 사역적으로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이 긴밀하게 연합하여서 역사하신다고 강조한다. 사역적인 구별성을 구분하기가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우리 신자의 경험 안에서는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이 구별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거하신다.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하는 것과 성령을 경험하는 것은 엄밀하게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 어려운 점이 실제적으로 경험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적인 의식을 갖지 아니하고서 신앙생활을 우리가 해왔기 때문에 어려운 점도 있다.


그러나 두 분(Person, 인격, 위격)의 사역의 구별성을 또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 안에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의 사역의 구별성을 인정한다면 어떤 점에서 인정할 수가 있을까? 간단하게 생각한다면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안에 내재하시지만 우리의 신앙의 객관적인 대상으로 역사하신다.

구별성을 인정하기 전에 동일성은 무엇인가 살펴보고 구별성을 살펴보자.


동일성:
1)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이 예수님의 이 지상에서의 구속사역의 모든 열매를 전달하시고 적용하시고 체험케 하신다는 점에서 두 분은 동일하다.
2) 우리 삶의 인도자, 주관자 되신다.
3) 우리 안에 내재해 계시지만, 초월하신 분이다.
4) 경배의 대상이고 믿음의 대상이다. 

 

구별성:
1) 주님은 우리의 믿음의 객관적인 대상이시다. 성경에는 예수를 믿으라고 하지, 성령을 믿으라는 말은 없다. 예수를 본받으라고 하지, 성령을 본받으라는 말은 없다. 분명 성령을 믿어야 하지만, 삼위 하나님의 사역의 독특성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내가 사랑해야 할 당신(Thou)이다. 당신은 문제가 없으시다. 항상 나(I)에게 문제가 있다. 성령은 주관적인 나(I)의 안에 은밀히 역사하셔서 나로 하여금 내가 되게 하신다. 주님이 기뻐하시고, 받으심직한 나를 만드신다. 성령을 체험하면 참 나를 체험하고, 참 나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성령충만하지 못해서 참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방황하지 않는 것이다. 참 자아 속에서의 삶을 살지 못한다. 성령의 역할을 내 안에서 내 편에서 내가 주님께 바쳐드려야 할 신앙의 책임과 의무를 잘 감당할 수 있게 내 안에서 은밀히 역사하신다. 이론적으로, 경험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을 체험하면 자유로워진 나를 체험하는 것이다. 죄의 억압에서, 시기와 질투와 미움, 인기에 대한 욕망, 구속의 결박에서부터 자유로워진 나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해진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신비이다. 성령은 많은 경우에 mother이미지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성령론의 필요성


1) 우리의 영성과 자율성의 출처를 규명할 수 있다.
: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전적 타락을 강조한다. 거듭난 후에도 우리의 죄성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전적인 타락성을 극복케 하고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기는 영적인 다이나믹을 제공하시는 성령에 대한 강조를 해야 한다. 신앙 생활에서 책임과 윤리를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은 우리를 성화를 율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된다. 내재하시는 성령으로부터 경건의 책임과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밸런스를 맞출 필요가 있다. 그래야지만 영적인 엘리티즘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다. 내가 잘한 것이 하나도 없고, 오직 성령의 은혜로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영적으로 예민해지만 어떤 것이 성령에서 자극된 것이고, 어떤 나의 욕심과 욕망에서 자극된 것인지 구별할 수 있게 된다.


2) 신앙생활의 삼위일체적인 특성과 부요함을 좀 더 구별할 수 있다.
: 우리 안에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의 특성이 도무지 구별이 안된다면(James Dunn), 우리는 실제와는 다르게 경험적으로는 2위1체를 섬기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의 경험에 있어서도 삼위 하나님으로 경험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너무나 삼위일체적인 의식이 없었다. 성령론의 관점에서 다이나믹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론적으로 삼위일체를 정교하게 이해를 해서 고백을 하지만 실제 경험을 통해서는 삼위일체 신학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앞으로의 우리의 신앙생활은 삼위일체의 부요함과 은혜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바르트 신학의 약점은 신앙 체험에 있어서 삼위일체적이지 못하고 양태론적이라는 점이다. 바르트 신학이 슐라이어마허 신학의 반작용으로 일어났다. 슐라이어마허는 정통주의 신학의 약점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다. 슐라이어마허는 주관성에 치우쳤고, 바르트는 객관성에 치우쳤다. 그런데 바르트의 신학 뿐만 아니라 우리 개혁신학도 그러한 위험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