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돈목사

성령의 사역(1)

새벽지기1 2017. 1. 6. 07:09

성령의 사역 

 

이 과목에서는 성령님에 대한 지식에 대해 다룰 것이다. 성령의 신비스런 사역을 다 이해하기는 힘들다. 계시의 한도 내에서 성령님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성경의 증거를 통해 우리는 성령의 길을 추적하려 한다. 예수 안에서 성령은 어떻게, 교회 안에 어떻게 임했으며, 오순절 이전과 이후의 성령의 차이점, 우리 안에서와 세상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살펴보기로 한다. 성령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성령의 실체를 체험적으로 전인적으로 접하기를 원한다. 우리 안에 계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기를 원한다. 성령의 우리 안에서의 구체적인 사역을 살펴보고, 은사를 체험하며, 내적 치유가 일어났으면 좋겠다.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성령께서 가장 효과적으로 우리의 내적인 문제를 치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성령의 임재를 강하게 체험해야 한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어두움의 영의 결박에서 자유 하는 체험을 하기를 원한다. 이 시간에 참여하면서 지적 욕구보다도 마음의 목마름을 가지고 참석해 주세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수업시간에 중요한 것은 현장 속에서 성령의 역사와 임재하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서 론 

 

1. 성령에 대한 새로운 관심
1) 최근에 성령론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20세기 초부터. 그 동안 성령론은 신학 분야중에서 가장 연구가 소홀했으나, 지금은 상황에 역전되어 가장 큰 관심이 집중되는 분야이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첫째, 오순절 성령운동의 영향 때문이다. 성령 세례와 은사를 강조하는 오순절의 입장을 지지 반박하면서 성령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오순절 성령운동이 신학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교회가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신학을 회복하고, 역동적인 삶을 살도록 한 공헌이 있다. 이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교회에서 들어보지 못한 용어들이 유행어처럼 사용되고 있고, 성령 체험을 갈구하고 사모하는 신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단순히 지식적이고 교리적인 것만 알기를 원치 않고, 오히려 느끼고 체험하기를 원한다. IQ→EQ. 이성적인 것에 대한 반박이 감성적이고 영성적인 것을 추구하게 한다. 전통적인 신학은 너무 주지주의적이고 이성주의적, 교리주의적인 경향이 많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이 가지고있는 종교적인 욕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특히, 이런 서구신학이 한국인들의 고유의 심성에 적합하지 않다고 많은 신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안에 한이 서려 있는데, 서구신학이 이것을 풀어주지 못하고 있다. 체험적이고 감정적인 공백을 틈타서 여러 가지 불건전한 spirituality가 우후죽순처럼 자라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참된 영성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성령에 의해 산출된 spiritually가 어떤 것인지를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균형 잡히고 전인적인 영성. 이론적인 뿐만 아니라 체험적아고, 이성적일 뿐 아니라 감성적인 영성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주어야 하고, 이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목회를 해야 겠다는 의식이 늘어나고 있다. 참된 목회, 열매 맺는 목회는 오직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된다는 고백을 일선 목회자들이 많이 하고 있다. 현대 교회는 인간의 테크닉, 열심, 탁월함 등이 성령의 대체해 감으로 황폐화 되고 있다. 말씀을 이론적으로만 전달해서는 강팍한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 성령의 증거나 나타나지 않으면 강팍한 마음이 변화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선교가 아니라 power evangelism.


2) 둘째로, 현대신학의 거대한 흐름이 성령론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현대신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성령론쪽으로 발전되고 있다고 하면 될 것이다. 여기에 대해 알고 싶으면 허순길 박사의 은퇴논문집의 제 논문을 참고하세요. 어떤 신학자는 20세기 전반부는 기독론적 신학의 시대, 후반부는 성령론적 신학의 시대라고 했다. 20세기 전반 신정통주의 칼 바르트의 신학이 기독론 쪽으로 편중되어, 세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역사와 성령의 사역을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했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그의 후예들이 성령론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필요를 느끼고 연구를 하고 있다. 근래의 성령론적 신학의 문제점은 성경에 부합할 수 없는 이질적인 사상을 도입해서 신학을 전개함으로 극단성과 이매성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2. 개혁신학의 과제
1) 현대 신학의 성령론적 전환이 안겨다 주는 도전에 대응해서, 개혁신학의 과제는 첫째, 오순절의 가르침이 제기한 신학적인 문제에 답해야 한다. 성령세례, 방언, 예언 등에 대한 개혁주의적인 입장을 밝혀야 한다. 이것은 전통신학의 미개척분야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혁신학 안에 성령론이 결핍 부재해 있다고 볼 수 없다. 전통적으로 개혁신학은 삼위일체 관점에서 신학을 전개해 왔다.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성령 사역을 강조해 왔다. 오순절신학처럼 성령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성령의 사역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말씀과 성령의 관계, 그리스도와의 연합, 중생, 개종, 성화 등... 칼빈은 성령충만이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근본적으로 성령충만한 사람을 가리킨다. 성령충만한 삶의 구체적인 내용인 soli Deo gloria, sola fide, sola gratia를 강조하고 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죄에서 회개하고 감사하는 삶 이것들이 성령충만한 삶이다. 성령집회에서 성령충만이라는 말은 많이 하는데, 그 내용은 제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흥분주의, 감정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오순절의 가르침에 대응해서 우리는 더 좋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믿을 때 성령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성령충만의 은혜를 갈망하지 않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런 거짓된 안일감 때문에 영적인 침체에 빠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을 따르고 있는데 이것은 실리적인 유익을 준다. 그러나 성경과 신학의 전문가로서 이것이 은혜가 된다고 해서 무분별하게 다 받아들일 수는 없지 않는가? 우리는 더 좋은 대안을 제시해야 하겠다.


2) 둘째, 현대신학의 도전에 대응해서 우리가 해야 할 과제는, 우리의 신학을 성령론적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재고해야 한다. 개별적으로 성령론만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체 신학을 성령론적으로 재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신학이 성령의 활력소가 부여됨으로 다이나믹한 신학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있다. 성령론 중심으로 그 맥락속에서 발전된다면 온전한 삼위일체 신학의 완성된 단계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삼위일체론이 성령론적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삼위일체론이 상당히 기독론적으로 치우쳐 져 있기 때문에 특히 서구신학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삼위일체이지만, 내용적인 면에서는 이위일체에 가깝다. 우리의 신학은 성경에 명백하게 나타난 삼위일체 중심의 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삼위일체론이 어렵고 딱딱한 사변적인 신학이 아니라 체험에서 출발하는 신학이다. 성령 안에서 삼위 하나님이 교회에 오시고,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삼위 하나님의 이 세상에 그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신다. 우리의 구원, 삶이 삼위일체적이다. 성경은 분명히 삼위 하나님에 대한 독특성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고 기도하고 섬기는 삶이다. 교회는 삼위 하나님이 만드시고, 임재하고, 그 곳에 하나님 나라의 실재가 임하는 곳이다. 기독론, 교회론도 성령론적 관점에서 재고되고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Ⅰ. 예수와 성령 

 

1. 육신의 예수와 성령


1) The bearer of the Spirit → The sender of the Spirit
Hendrikus Berkhof는 성령이해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가 두 단계를 거쳐 발전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예수는 The bearer of the Spirit → The sender of the Spirit으로 발전한다고 말한다. 공관복음의 증거에 의하면 성령의 사람이며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다. 종말론적 예언의 영에 사로잡혀 이스라엘을 회복할 메시야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메시야 사역을 완료하시고 교회에 성령을 주시는 성령의 수여자가 되셨다. 공관복음에는 예수가 성령의 사람, 기름부음음을 받은 메시야에 초점을 맞춘다.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만 성령의 사람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예외는 세례요한, 엘리사벳과 사가랴에게 임했는데, 이들에게 임한 성령은 구시대의 것, 구약에 속한 것이다. 구약의 성령사역의 근본적인 특색은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것이다. 구약적 성령사역이 세례요한과 엘리사벳과 사가랴에게 임했다. 그 외에 공관복음에 그 누구도 성령을 받았다고 언급하지 않는다. 공관복음의 저자는 성령의 ............ 제자들의 사역을 묘사할 때도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처럼 성령론적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지 않다. 성령의 사람으로 제자들을 사도행전은 묘사하지만, 공관복음에서는 성령의 사역자로서 일을 한 것처럼 묘사하진 않는다. 공관복음의 저자는 성령을 예수님에게 국한시켜 사용하고 있다. 공관복음에서는 성령에 대한 언급을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것을 최대한 제한하고 예수님에게만 사용하고 있는 내면적 의도는 아직까지 예수님의 구속사역이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있다(not yet). 그런데 좀더 다른 것은 요한복음에서는 이것을 좀 더 명시적으로 아직 성령이 다른 사람에게 임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한다. 요7:39.


요한복음에는 영광을 받으셨다는 말이 나타나는데 그 말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정점을 이루는 중요한 사건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이것이 아직 종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이 이들에게 임하지 않았다. 성령의 오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완성에 근거한다. 요14장과 16장에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내가 아버지께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낸다. 16:7은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혜사가 오지 않지만, 내가 떠나면 보혜사가 오실 것을 말한다.


사도행전에는 예수가 구속사역을 완성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수여자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요한복음은 이 중간에서 일종의 bridge 역할을 한다. 무엇을 근거로 해서 전환되었는지. 어떻게 성령의 담지자가 수여자가 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것을 근거로 해서 바뀐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해 결론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오심은 구속사역의 완성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행2:33, 38에서 성령은 선물, 딛3:6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풍성히 부어짐. 우리는 성령 사역의 기독론적 토대를 바로 이해해야 한다. 

 

2) One Spirit-filled ManMany Spirit-filled men
복음서 사도행전/서신서 

one to many movement가 지금 진행되고 있다. 성령은 구속사역에 근거한 gift다. 예수님의 공로로만 이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성령과 보혈은 직결된다. 현대 성령론의 문제는 성령과 보혈이 직결되었음을 무시한다. 예수와 성령의 불가분리한 관계를 간과함으로 예수 중심적 성령론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 혹은 성령 중심적 성령론을 선호한다. 현대 성령론은 십자가를 회피히고 있다.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성령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을 무시한다. 십자가가 없는 성령론. 십자가를 꺼리는 이유는 그들의 윤리적 교만 때문이다. 십자가를 인정하면 우리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해야 하고, 우리의 구원의 필요성을 인정해야 하는데 현대 신학자들의 교만이 이것을 용납할 수 없다. 예수를 믿지 않고도 선한 사람들 안에 나타난 미덕을 성령의 은혜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의 보혈을 벗어난 성령의 은혜는 없다. 단지 인간의 종교성의 결과물이다. 인가의 영성과 성령으로부터 말미암은 참된 영성을 혼돈하고 있다.


오순절 성령의 특성은 그리스도의 영이다. 오순절 이후 본격적으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 부른다. Dunn은 오순절에 임한 성령을 완전히 그리스도화 된 성령이라고 한다. 이런 표현들은 오순절 임한 성령은 사역의 특색이 기독론적으로 규명되었음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성령이 완전히 그리스도와 되었다는 것은 성령 내에서 변화를 겪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영이시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라고 더 많이 부른다. 오순절 이전과 이후의 성령이 차이가 있고 불연속성이 있지만, 여전히 연속성이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오순절 전에도 구약에도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었다. 베드로전서에서 선지자 안에 있는 예수의 영고 했다. 예수의 영은 후에 온 그리스도의 영과 어떤 면에서 다른가? 구속사역을 이루셨나 안 이루셨나에 따라 차이가 난다.


오순절 성령사역의 특징이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말은 성령 사역의 특색이 예수 중심적이 되셨다는 것이다. 성령은 예수께 영광을 돌리고 구속사역의 열매를 우리에게 적용한다. 이런 면에서 볼때 성령집회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 성령은 자기 이름을 나타내가 위해 운동하시지 않고 예수의 이름을 나타내가 위해 일하신다. 그래서 이런 표현을 재고해야 한다. 성령은 예수의 운동의 다이나믹(원동력)이다. 그래서 성령님의 특성을 어떤 사람은 Shy member of Trinity라고 표현한다. 성령의 사역의 특성이 자기를 나타내시지 않고 자기를 가리시고 역사하신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도록 중매자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와 우리의 사랑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시는 중매자.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려 주시고,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려 준다. 그리고 성령은 또 두 대상 다 사랑하지만, 우리가 성령께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 집중하도록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사역자도 성령과 마찬가지로 shy한 사역을 해야 한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예수 그리스도께 중매하려 한다고 바울이 말했다. 사역자인 우리도 우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예수께 집중하도록 해야 한다.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면 자기를 감추고 성도로 하여금 온전히 예수를 바라보게 한다.


성령체험의 가장 근본적인 특색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예수를 사랑하고 섬기고 본받게 된다. 성령체험의 내용은 우선적으로 기독론적이고, 삼위일체적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나의 삶의 주 되심을 온전히 깨닫게 됨으로 삼위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누린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체험한다. 하나님이 통치하심, 화평의 은혜와 자유함의 축복을 우리가 누리게 된다.


2. 예수의 구속사역과 성령
1) 성령사역의 기독론적 바탕(Christological foundation)

2) 성령사역의 그리스도 중심적 성향 

 

3. 성령강림과 부활하신 주님의 다시 오심
1) 부활하신 주님의 다시 오심
Richard Gaffin은 오순절 성령강림은 부활하신 주님의 다시 오심이라고 표현한다. H. Berkhof는 성령을 그리스도의 또 다른 자(alter ego)라고 말한다. K. Barth는 성령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주님의 새로은 존재방식(mode of existence)이라고 말한다. 바르트는 성령강림을 1.5림(중간림)이라고 했다. 그런데 바르트의 표현은 양태론적 오류에 빠지기 쉽다.
우리는 성경이 단순하게 말하는 대로 성령 안에 부활하신 주님의 새로운 임재로 이해하면 되겠다. 

 

2) Corporal existence / Spiritual existence
이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과거에 오신 주님, 미래에 오신 주님을 섬기지만, 현재에는 부재한 주님을 섬기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현재에는 부재하신 주님을 우리는 힘써서 섬기고 있다는 이 생각으로 말미암아 사신신학, 무신론이 파생된다. 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심리 저변에 축적된 것이, 구약시대는 하나님께서 여러 방법으로 자신의 현현을 보이셨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에는 예수님의 육신의 몸이 현존을 보이셨다. 그런데 교회시대에는 과거의 추억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다. 어떻게보면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이 불리한 것 같다. 이런 의문들을 풀기 위해서도 현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재하심이 더 강력한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스펄전의 설교. 주님께서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보지 않고 성령으로 말미맘아 믿는 사람들이 더 복되다. 어떤 면에서 이것이 더 유익하고 복되고 영적인가를 생각해보자. 좀더 구체적으로 살피자.


① time and space의 문제. 주님이 아직 육체를 입고 계신다면 시공관의 제한을 입고 계신다. 그러나 새로 더 신비한 존재방식을 입으심으로 무시간적으로 그의 인격적인 존재가 확대된다. 종말론적으로 계속된다. 그의 임재의 영역이 장소의 제약에 메이지 않고 우주적으로 확대된다. 우주적으로 확대하심으로 예수님의 인격적 존재가 만물 안에 있게 하심으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 주님이 육신을 입고 계시다면 그 분을 만나기 힘들 것이다. 뉴욕에 있을 때 교황이 방문한다고 하니까 큰 성당에 며칠 전부터 천막 쳐 놓고 사람들이 기다리더라. 유명한 사람도 한 번 만나기 힘든데, 주님이랴... 만약에 육신을 입고 계시다면 다른 사람과 대화하시는 동안 그 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이제는 영적인 존재방식으로 임재하심으로 내 안에 그리고 다른 사람 안에 전인적으로 존재하신다. 예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함께함의 축복과 영적인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② 주님과 내적 연합과 교제가 이루어진다. 육체의 분리된 장벽을 가지고 있는 한 온전한 내적인 교제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같이 주님을 믿고 한 성령 안에서 신앙생활 하지만, 마음이 통하는 사람 한 사람 찾기 어렵다. 우리가 안고 있는 염려와 고민을 다른 사람이 참여할 수 없다.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 부모도 아내도 내 고통에 온전히 참여할 수 없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내가 안고 있는 고민에 한 방울이라도 참여할 수 있는 친구를 얻을 수 있다면 성공된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고독한 존재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이런 근본적인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신다. 효과적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심으로 온전한 내적 연합이 이루어진다. enthusiasm. 종교와 철학에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이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종말론적인 축복이다. 

 

③ 내적인 갱신. 우리의 문제는 속사람이 병들어 있다. 육신의 약함.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없다. 진리를 온전해 깨달을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도 없다. 주님이 아직 육신을 입고 계셨다면 바깥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영으로 오셔서 우리의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내적인 revival을 일으켜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영적으로 거하심으로 우리 존재의 심연에서부터 갱신을 일으켜 주신다. inside out. 신앙생활은 working out of what God is working in us이다. 

 

④ Christ in us의 축복이 주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우리 안에 재생산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재생산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판을 만들어 내신다.

⑤ 더 능력의 주님으로 우리 안에 임재하신다. 육신의 주님은 약함과 죽음의 세력에 종속되셨다. 그러나 부활한 주님은 죽음을 이긴 분, 부활의 능력을 가진 분으로 우리 안에 임하셨다. 우리는 이 부활의주님과 함께 사역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육신을 입으신 주님보다 부활하신 주님으로 더불어 더 큰일을 할 수 있다. 엡 1:19-20.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은 부활의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