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을 보면, 힘써야 할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다.
제일 먼저가 우리의 거룩함이고, 다음이 형제 사랑이고, 그 다음이 자기 일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선순위는 매우 중요하다.
그 순서를 따라 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순서를 보면, 먼저가 자기 일이고, 다음이 형제 사랑,
그리고 그 다음이 거룩함이 아닌가 싶다.
1. 거룩함 이루기를 힘쓰라
우리의 삶 가운데 제일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이 거룩함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라고 말씀한다.
4장 3절에도,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말씀한다.
이 거룩함을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5장 23-24에서도 말씀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이 말씀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이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실 것을 기도하고 있다.
우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주님 재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기도한다.
우리를 부르시는 이는 신뢰하실 분이시니 그가 이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거룩함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이를 온전히 하고 이루시는 일에 친히 역사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어느 때까지,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이다.
거룩함이 없이는 주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없다.
거룩한 삶은 거룩한 성품에서 나온다.
그 긴 세월, 하나님의 사람들을 훈련하고 연단한 것은,
이 거룩한 성품을 이루어서 거룩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었다.
먼저 좋은 나무가 되어야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열매를 보고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를 알라고 하셨다.
솔로몬의 실패는 거룩한 성품을 이루는 연단과 훈련이 그에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울 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둘 다 40년을 하나님의 은혜로 왕노릇 하였지만 그 종말은 비극적이고 참혹하였다.
바울은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음은
고난의 훈련이 인내와 연단을 이루고 결국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고난이 우리의 성품의 거룩함을 이룰 때 그 고난이 의미가 있고 소망을 이루는 것이다.
긴 고난을 통해서도 우리의 성품이 거룩함을 못이루고 고약함만 이룬다면
그 고난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남보다 나이는 많으면서, 고난도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 거룩하고 덕스런 성품을 못이루면
그것이야말로 헛나이이고 헛수고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베드로는 죄를 짓고 고난을 받는 것이라면 무슨 자랑이 되겠느냐고 했다.
선을 행하다가 받는 고난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다.
거룩한 성품과 삶을 이룰려다 받는 고난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영광과 축복의 삶을 살려면 먼저 우리의 성품과 삶에 거룩함을 이루어야 한다.
그 일이 우리 삶의 최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일도, 사랑도, 먼저가 아니고, 거룩함이 먼저이다.
성결이 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취나 성공을 이룰 수 없다.
어떻게 거룩함을 이루는가요?
거룩함은 구별된 삶으로부터 온다.
경건의 훈련이 우리의 거룩함을 이루게 한다.
(딤전 4:5-8)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우리의 시간과 소유와 열심에 구별이 있어야 한다.
엿세 동안의 창조도 구별의 역사였고, 우리의 거룩도 구별을 통해 이루어진다.
세상과 구별되는 영역이 없는 곳에는 거룩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시간을 구별해야 한다.
내 시간을 구별해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에 명하시는 일에 드리는 것이 시간의 구별이다.
기도할 시간, 말씀을 공부하는 시간, 예배를 드릴 시간을 세상으로부터 구별해서 사용할 때
거룩은 시작이 되는 것이다. 경건의 훈련은 시작이 되는 것이다.
믿음의 말씀과 좋은 교훈(교리)로 양육을 받으면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된다.
소유를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이 명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에 우리의 소유를 구별해야 한다.
그것이 거룩의 시작이고 경건의 훈련이 시작되는 것이다.
내 소유 중에서 예물과 십일조를 정성껒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내 소유를 쓸 줄 아는 것이 소유의 구별이다.
열심을 구별해야 한다.
내 열심 중 구별하여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에 기뻐하시는 일에 구별해 드려야 한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묵묵히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아야 한다.
(히 10: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내 시간과 소유와 열심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명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에
쓸 줄 아는 것, 그것이 경건의 훈련이다.
이 경건의 훈련은 범사에 유익하고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고 하였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들은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없다.
우리의 영적인 무장을 해제시키고 세상으로 흘러들어가게 하는
망령되고 허탄한 말들을 조심해야 한다.
경건의 훈련 없이도 축복과 영광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거짓 속임수들을 경계해야 한다.
망령되고 허탄한 말들과 신화들이 우리의 게으름을 부축이고 괜찮다고 합리화를 해준다.
구별과 경건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망령되고 허탄한 말들에 귀를 닫아야 한다.
소경이 인도하는 길로 가면 같이 구덩이에 빠지고 만다.
영적으로 축 쳐진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상 일에만 침잠하는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우리 자신의 성품과 삶을 돌아보고 주일을 기하여 결단을 하여야 한다.
결단을 하지 않으면 한 주간 한 주간 거룩과 경건생활과는 점점 멀어지고 만다.
그것은 우리의 축복과 영광을 그만큼 멀어지게 하는 악한 모습들이다.
(살전 5: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호심경-옛날 갑옷에 가슴을 보호하기 위해 붙이던 구리 조각)
2. 형제 사랑하기를 힘쓰라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더욱 그렇게 행하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물질적 도움을 주었다.
그것이 형제 사랑이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다.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야고보 사도는 말씀하신다.
(약 2:14-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형제 사랑은 행함이 따라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행함은 물질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언행심사에 다 관련된 것이다.
마음과 생각과 말로도 우리는 형제를 사랑해야 할 것이다.
내가 조금 더 참고, 내가 조금 더 수고를 하면
형제 자매의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허물을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같은 지체로서 한 식구라는 의식이 필요하다.
바울 사도가 형제 사랑에 대한 권면은 곧 우리에게 하는 권면이기도 하다.
(살전 5:12-15)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형제 사랑도 선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해야 한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하라”
사람들끼리 무작정 좋아하고 게으름과 어둠에 빠져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친하다고 하고
좋다고 하고 사랑 운운하면 안될 것이다.
형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함은 이를 두고 하는 말씀이다.
(롬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형제 사랑도 거룩함에 따른 사랑임을 강조하고 싶다.
거룩함이 없는 사랑은 이기적이고 충동적이고 보복성을 띄우기가 싶다.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맘에 들 때만 사랑하고
또 상응하는 반대 급부가 없으면 괫씸죄로 다스릴려고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형제 사랑 부부 사랑 자녀 사랑에서 문제가 많고 티격 태격 싸움과 갈등이 많은 것은
자신의 거룩함을 이루지 않고 무턱대고 사랑만 앞세우고 강요하다가 벌어지는 사단들이다.
사랑을 자랑하고 강요하기에 앞서 자신의 거룩함부터 이루기를 힘쓰자.
감동이 와야 맘이 와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은 평생 사랑을 못하기가 쉽다.
그 감동과 맘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것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선이기 때문에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형제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먼저 사랑하면 마음과 감동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교회의 참다운 성장도 형제 사랑으로 키워감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엡 4:15-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3.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거룩함을 이루고 형제 사랑을 이루고 그 다음에 우리가 힘쓸 일이 자기 일이다.
이 우선 순위에 대한 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온통 자기 일만 열심히 하고 나서
왜 내 마음에 평강이 없는지, 왜 이웃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많은지 이해를 못한다.
자기 일을 왜 열심히 해야 하는 지에 대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목적이 분명하고 확실해지기를 바란다.
자기 성품의 거룩함과 형제 사랑을 위해서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다.
먼저 사람이 되지 못하고, 다음으로 이웃과의 관계에 화평이 없는 사람은
자기 일을 열심히 해놓고도 그 성과가 빛을 발할 수도 내 마음에 행복을 가져올 수도 없다.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에 대한 목적이 바로 서야 한다.
그것은 내 삶의 목적이고 내 인생의 배가 향해 가는 목적지이다.
일이 목적이 되고 그 성과가 내 삶의 목적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면 반드시 실망하고 돌이킬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그리고 그 난관에서 나를 구할 자가 없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성취 위주로 산 사람들이 흔히 자살하고 정신병에 잘 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식들을 지나치게 성취 위주로 키우지 않기를 바란다.
이웃들을 지나치게 오늘의 성취여부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음지가 양지되고 쥐구멍에도 빛들 날이 오게 마련이다.
내 인생에서도 지나치게 성취의 잣대로 자신을 판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 잣대와 하나님의 잣대가 다름을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 없는 성공은 멸망의 길이고 하나님 있는 실패는 형통의 길임을 성경은 말씀한다.
속히 부할려고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고(잠28:20),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못한다(잠20:21)고 말씀한다.
사도 바울도 부하려 하는 자들에게 경고한다.
(딤전 6:9-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자기 일에 열심인 사람일수록 자신의 거룩함과 형제 사랑에 더욱 힘쓰기를 바란다.
일의 목적을 알고 조용히 자기 일에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1-12)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는 사람은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서도 존경을 받고 품위있게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속히 부할려고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지만 충성된 자는 복이 많다고 하였다(잠28:20).
충성된 자는 꾸준하고 신실하고 성실한 사람을 말한다.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는 사람이
단정히 행하는 사람이고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복이 많다고, 하나님이 축복하신다고 하신다.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는 사람은
아무 궁핌함이 없게 된다고 하였다.
조용히 자기 일 하기를 싫어하고,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가난과 궁핍이 군대같이 강도같이 올 수밖에 없다.
남의 신세를 지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하고 남의 손만 빌려서 살려고하는 사람도 궁핍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잘 모를 때는 발품을 팔아서 나보다 앞선 사람들에게서 열심히 배워야 한다.
그렇지만 거기서만 머물면 항상 얻어먹는 신세를 면할 수 없다.
신세는 신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세가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
배우고 와서는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래야 배운 것이 내 것이 될 수 있고, 그래서 독립할 수 있다.
그래야 풍요하고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남을 가르치고 도움을 주는 스승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구원 받은 후 젖이나 먹고 떠주는 숟갈로 얻어 먹는 어린아이로 머물 권리가 없다.
구원받고 나서도, 자라지 않고, 발전하지 않고, 내내 어린 아이로만 있는 것은 큰 비극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받는 자는 더욱 풍성하여질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될 것이라.”
히브리서 기자도 어린 아이로만 머물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탄식을 하고 있다.
(히 5: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는 우리가 되어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아무 궁핌함이 없게 하자.
자신의 거룩함에 힘쓰고, 형제 사랑에 힘쓰고,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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