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남으로 기독교는 시작되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 생애에 임함으로 나는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기독교도 구원도 없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나타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말한다.
역사 속에서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즉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는 표현은 신약에서는 단 한번 사용된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확실성과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시되었음을 말해 준다.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대속하셨다.
이 대속이 있었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우리의 죄를 처리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인간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구원을 이룰 수도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다”(엡1:7). 이를 근거로 하여,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역사를 일으키신다.
(딛3:3-7)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의 명령으로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은 이를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성찬식에 참여할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를 묵상하고,
주님의 갈보리 십자가와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묵상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구원역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 역사인 것을 알고 감사해야 한다.
프란시스 쉐퍼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이 이루어짐을 강조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한 자녀관계로의 연합이 이루어진다.
성자 예수님과 영원한 연합이 이루어진다. ‘포도나무와 가지로’,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로의 연합이 이루어진다.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 영원한 연합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구원에 하신 역사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지,
말씀공부를 통해서 확인하고, 우리의 구원을 확신하고 흔들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 서두에서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양육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와 분리될 수 없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고 은혜를 힘입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여줌이요 그 증거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죄의 왕노릇에서 은혜의 왕노릇의 영역으로 옮겨 왔다고 강조한다.
(롬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가운데 왕노릇하고 있음을 알고,
그 은혜가 우리 심령과 삶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인도하고 있음을 알고,
우리는 그 은혜 가운데서, 양육을 받아야 한다.
양육은 ‘가르침’과 ‘훈련’을 뜻한다.
교리와 교훈을 가르치고 배우고, 훈련을 하고 훈련을 받는 것을 말한다.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 성도들이 해야할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이다.
말씀의 가르침과 영성의 훈련은 항상 같이 가야 한다.
영성 훈련만을 앞세워 말씀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지면 신비주의의 늪에 빠지고 만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살아있고 활력이 있음을 알고, 영과 생명임을 알고,
기록된 말씀의 깊이와 넓이를 우리는 청교도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위대한 청교도들은 신비한 영적 체험을 많이 하였음에도
기록된 말씀의 가치와 위대성을 결코 폄하하지 않았다.
말씀의 지성과 성령의 영성과의 균형을 유지하기에 힘썼다.
청교도의 에베레스트 조나단 에드워즈는 ‘지성과 영성의 탁월한 균형’이라 불리웠고,
로이드 존스도 ‘불타는 논리, 불타는 설교’라 불리웠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 성경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주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 말씀을 열심히 배워서 삶 가운데 지켜야 한다.
그것이 주님의 마지막 분부를 우리가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지혜로 가르치고 힘을 다해 수고를 했다.
(골1:28-29)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교회 안에서 이 가르침이 중요하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들을 귀하게 여기라고 하였다.
(딤전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살전5:12-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교회 안에서 인도하고 가르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할 것을 명하고 있다.
(히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가르침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
오늘 본문에는 양육의 내용이 나와 있다.
첫 번째 양육할 내용이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먼저 버려야 할 것이 있고, 다음으로 살아야 할 것을 말한다.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도록 양육을 받아야 한다.
'경건치 않은 것'은 부도덕과 우상 숭배와 탐욕, 분쟁, 사기, 망령되고 헛된 말 등을 말한다.
'세상 정욕'은 죄악에 대한 강력한 욕망으로서 죄를 짓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쾌락과 권력, 그리고 소유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을 말한다.
이것들을 버리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은혜 가운데 가르침과 훈련을 계속 받아야 한다.
믿음과 순종(‘믿어 순종케’)은 가르침과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말씀을 배우고 훈련 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를 주셔도,
믿음에서 자라지 못하고, 하나님과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
은혜를 구하고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훈련을 받아야 한다.
(딤후3:14-17)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모든 고난의 목적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기 위함임을 알아야 한다.
(신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사는’ 양육을 받아야 한다.
살아야 할 내용이다.
‘신중함’(근신함)은 자제로서 자신의 욕망이나 경향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며,
‘의로움’은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공명정대하고 순수함을 의미한다.
‘경건함’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경외심을 가지고 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만이 근신과 의로움을 살 수 있다.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전광석화같이 찌르고 자기 잘못에 대해서는 모른척하는 것은
근신과 의로움을 완전히 거꾸로 사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이 남에게 공명정대한 삶을 살 수 있다.
나 자신의 근신과 자제와 신중은 하나님께 대한 경건으로부터 나온다.
세상 사람들이 참으로 모르는 이치이다.
나 혼자 힘으로 수양으로는 한계가 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몸과 같이 이웃도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그리고 남으로 가야 한다.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나에게 자제하고 남에게 공명정대로 가야 한다.
이 순서가 안된 사람이 공명정대를 부르짖고 함부로 남에게 칼질을 하는 것은
세상을 어지럽히고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본인도 그 대가를 치룰 날이 오게 된다.
하나님 앞에 경건, 자신에게 근신, 연후에 남에게 공명정대로 가야 한다.
그런 사회가 와서 사람들이 다 안심하고 드높은 사기로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하루 아침에 되지 않고 배우고 훈련을 쌓음으로만 가능하다.
배우기를 싫어하고 훈련받기를 싫어하면 그것은 부메랑이 되어 나와 내 자녀에게로 온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이렇게 어지럽고 공의와 정의가 이름 뿐이고 세워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는’ 양육을 받기 싫어한 결과이다.
또한 우리가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사는’ 양육을 받기 싫어한 결과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신 목적을 우리는 잘 잊어버린다.
나와 내 가족들 잘 먹고 잘 살고 천국가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를 죄와 불법에서 그의 피로 속량하신 것은 죄의 무서움을 알고 그 대가를 알고
깨끗한 성품과 선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다.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을 만들기 위함이다.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우릴 대신하여 자신을 주셨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와서 우리들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들을 모든 불법에서 구출해 내시고, 자기처럼 우리들을 거룩하게 하시며,
모든 선한 일에 우리들을 쓰고자 바라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이 주님의 목적을 알고, 자신을 거룩하고 깨끗하게 하는 일에,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관심이 온통 어디에 가 있는가요?
종일 무슨 생각을 하며 어디에 시간과 에너지들을 쏟고 있나요?
깨끗하지 않고, 선한 일(주의 뜻)에 열심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바랄 수 없다.
3.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복스러운 소망을 갖게 하신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이 복스러운 소망 또한 우리가 양육받아야 할 중요한 두 번째 내용이다.
내 사는 동안 이 땅에서 내가 누리는 복과 영광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전혀 양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서도 죽어서도 가장 복스러운 소망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시는 것이다.
성경 안의 성도들, 초대교회들,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이 복스러운 소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고난과 핍박을 이겨냈다.
오늘 우리에게는 왜 주님의 영광스런 재림이 복스러운 소망이 되지 못하고 있느냐?
대부분의 교회의 가르침과 성도들의 관심이 이 땅에서의 축복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1200년동안 카톨릭이 세속화되면서 우리 신앙을 기복신앙으로 땅의 신앙으로 만든 결과다.
근래 100여년 동안 청교도신앙이 자취를 감추면서 우리 신앙을 땅에다 메다꽂은 결과이다.
성경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하지만,
우리는 ‘아니에요, 땅의 것을 찾아야 해요. 여기서 잘살고 행복해야 해요’라고 하고 있다.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사람들은 땅의 것만을 생각하고 자기 배를 채우는 영광만을 추구하고 자랑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멸망이 왔을 때에야 비로소 알고 후회하지만 소용이 없을 것이다.
(왕하17:13-20)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또 내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목을 곧게 하기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그들 조상들의 목 같이 하여 여호와의 율례와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들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뒤따라 허망하며 또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따르지 말라 하신 사방 이방 사람을 따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들을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심히 노하사 그들을 그의 앞에서 제거하시니 오직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유다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든 관습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온 족속을 버리사 괴롭게 하시며 노략꾼의 손에 넘기시고 마침내 그의 앞에서 쫓아내시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인에게 재림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게 한다.
재림하실 그리스도는 재판장으로서 사탄을 결박하시고,
온 세상을 평화와 공의로 다스려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시며 기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경건치 않은 것과 세상 정욕을 버리도록 양육한다.
또한 우리가 근신과 의로움과 경건으로 이 세상에서 살도록 양육을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 세상에서 내세를 기대하는 자로서 바르게 살아가도록 양육해준다.
소망이 복스러운 것은 그 소망이 성취되어질 때,
우리는 영원히 온전한 행복에 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재림하실 때 그는 자기의 종들에게 보상하실 것이며
그들로 자기와 함께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이 복스런 소망이 있기에,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기에,
우리는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기꺼이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깨끗한 삶을 살고,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주님의 백성으로서 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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