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하나님이 우리를 항상 인도하시고 역사하시니까 고난과 시련이 오더라도 서러워하지 말라고 했다. 왜냐? 하나님은 반드시 전화위복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고난을 주신 목적과 뜻을 이루시면 반드시 화가 복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그 대신 고난을 겪으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며, 회개할 것 회개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품과 사람으로 바뀌어가는 것이다. 누구를 탓하지도 말고, 더군다나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우리의 잠시의 가벼운 고난이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룬다고 했다. 이 영원한 영광을 소망으로 붙들고 끝까지 우리는 승리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의 길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시길 소원한다. 딤후 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어떤 일도 결코 우연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시고, 만유 위에, 만유 안에 계신다고 하셨다.
(엡 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주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었다고 하셨다.
(눅 12:6-7) 참새 다섯이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우리는 요셉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 당사자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야곱의 12 아들 중에 특별한 사랑을 받다가 하루 아침에 이국 땅에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때 그의 나이가 겨우 열일곱이다. 고등학교 2학년쯤 되겠지요? 말이 통하겠어요? 음식이 맞겠어요? 잠자리가 편하겠어요? 저도 나이 열 일곱에 가출하여 부산에 가서 돈을 벌어보겠다고 한 달간 살아본 적 있다. 가게 옆 벽에 붙여서 방을 만들어 작은 다다미 한 장 깔아놓고 2~3 사람이 살았다. 처음엔 비좁아서 쪼그리고 앉아서 잠을 청했는데 나중엔 안되겠더라구요. 아예 비비고 엎치락 뒤치락하면서 잤다. 벌이가 시원찮아 한 달동안 국수만 사먹었다. 자존심이 있어서 그래도 한 달을 버티고서는 집에 연락해서 데리러 와달라고 했다. 목욕 한번 못하고 하얀 내의는 검은 옷처럼 되었고 꼴이 말이 아니었다. 누나가 와서 목욕시키고 이발하고 옷갈아입고 식당에 데려가 처음으로 밥을 먹는데 목이 메어서 먹을 수가 없더라구요.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으니 자유도 없고 사람 취급도 못받았겠지요. 노예라는 것은 아예 인권이라는 것이 없고 물건과 같이 여겼으니까요.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나요?’ 하겠지만, 하나님은 그렇게도 하신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사람 만들어서 크게 쓰실려고, 그런 과정을 걷게 하신다. 형들이 요셉을 미워해서 판 것이었지만 그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형들이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했잖아요? 애굽 온 제국과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룰 야곱의 식구들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계셨다.
남자들의 군대생활, 여자들의 시집생활이 어떻게 보면 처음에는 종살이 아니겠어요? 학교 마치고 처음 직장에 들어가면 심부름하는 일부터 하게 되지요. 저도 대기업에 어려운 경쟁을 뚫고 들어갔는데 몇 달 동안을 서류들고 심부름 다니고
복사해 오라면 복사해 오고 급사와 다름 없는 일을 했다.
그러면서 자리도 잡히고 일도 잡히고 하면서 의젓한 한 사람의 역할을 하게 되는 거지요. 그걸 못 견디고 사표내 버리면 그런 사람은 평생동안 이 직장 저 직장 떠돌이 신세를 못면하고, 어디 가서도 사람 대접 받기가 어려워지고 만다. 소림사의 무사가 되기 위해서도 주방일과 청소일부터 해야 하잖아요?
요셉이 이제 가정 총무가 되어 살만할 때쯤 되니까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요셉은 그 고난 속에서도 욥처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 아내에게 하는 말이다.
(창 39:9)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까
요셉은 그 아내를 강간하려 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히고 만다. 미치고 폴짝 뛸 일이다. 이 일은 그 아내가 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었다. 그곳에서 정치범들을 통해 정치를 배우게 하셨다. 대학교 정치학과나 법학과에 가서 배우게 한 것이 아니라 정치범감옥에서 배우게 하셨다. 모세는 궁궐에서 40년, 광야에서 40년 정치를 공부하게 했다.
술 관원을 감옥에서 만나 꿈을 풀어주며 자기의 억울한 처지를 벗어나게 해달라고 사정도 해본다.
(창 40:14)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너무 억울하니 이렇게 권력자에게 사정해볼만 하잖아요? 그런데 그 술관원은 관직이 회복되고 나서도 요셉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성경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창 40:23-41:1) 술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만 2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
술 관원이 요셉을 잊어버리게 한 분이 누구일까요? 하나님이시다. 사람을 의지해서 고난을 풀어 볼려고 한 소리 한 것이
그의 감옥생활을 2년이나 더 연장하게 만들었다. 고난과 시련 중에 말조심해야 한다. 입술로 범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욥은 그 갑작스런 환난 중에도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함부로 사람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믿음이 성숙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이런 말들이 우리의 고난을 연장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요셉의 말은 어쩌면 당연한 하소연이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사람을 의지하는 미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만 것이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을 만드는데 감옥에서 2년의 추가연단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해서 요셉의 고난의 세월은 13년으로 마감을 하게 되었다.
유명하다는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라.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저 유명한 이들도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다”(갈 2:6)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13년동안의 그 고난의 세월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첫 아들을 낳고 므낫세라고 이름 지었다. “하나님이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여러분도 므낫세할 날이 올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내 모든 고난을 잊고 그 고통의 일들을 잊을 날이 온다.
로마서는 말씀한다. (롬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우리에게도 동일한 고난과 고통의 세월이 있다. 그 고난을 통해 인내를 온전히 이루고 연단을 이루면, 우리의 고약한 옛사람의 성품은 사라지고 성숙한 성품과 그릇이 되면, 하나님은 요셉처럼 반드시 므낫세의 날이 오게 하신다.
므낫세의 날이 온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란다.절대로 하나님은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의 미래를 절망으로 만드시지 않는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등불 꺼지듯 꺼질 날이 온다. 그것을 여러분 눈으로 보게 하실 것이다.
(사 41:8-16)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허무한 것같이 되리니,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것을 날리겠고, 회리바람이 그것을 흩어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도무지 변할 것 같지 않던 사람이, 고난에 장사 없다고 변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사업을 이룰려고 능력을 키울려고 아우성들을 치지만 고난의 세월 속에서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건 우리의 업적이 아니고 우리의 성숙한 성품이다.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의탁하는, 믿음의 사람을 기다리신다.
“끝까지 믿음을 지켰으니”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실 때 므낫세로 끝나게 하시지 않고 에브라임을 누리게 하신다. 요셉은 둘째 아들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지었다.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어디서요? 내가 수고한 땅에서. 내가 고난을 겪은 그 땅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번성케 하신다. 요셉을 하루 아침에 대애굽제국의 총리로 세웠다. 에브라임의 축복이고, 영광이다. 하나 하나 계단을 밟아 올라간 것이 아니다.
요셉의 모든 과정은 바로 우리를 위한 교훈이다.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하고 위로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도 고난의 세월을 통과하며, 인내와 연단에 합격하면 요셉처럼 에브라임의 축복과 영광으로 세우신다는 보장이고 약속이다.
므낫세 하며 에브라임 할 날이 반드시 온다. 고난의 세월들을 잊고 번성의 복을 누릴 날이 온다.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가 이루어야 할 것은, 일과 업적이 먼저가 아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쓰실 수 있는 성품과 그릇이 되는 것이 먼저이다.
내 가족, 내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이다. 고난을 통해 가치관이 바뀐 이들에게, 영광 가운데 모든 쓸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이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가 내 힘으로 쌓아올리는 바벨탑이 아니다. 고난의 인내와 연단을 이루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니중에 야곱이 자녀들을 축복하실 때 므낫세가 장자인데도 에브라임을 먼저 축복한다.
(창 48:20) 그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현대인의 성경; “이스라엘 사람들이 축복을 할 때 너희 이름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너를 에브라임과 므낫세처럼 되게 하시기를 원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고난을 잊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번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므낫세로만 끝나고 난다면 뭔가 미흡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어요?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같이 있어야 하되, 순서상으로는 므낫세가 먼저이다. 그렇지만 축복할 때는 에브라임이 먼저이고 므낫세가 나중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에브라임과 므낫세처럼 되게 하시기를 축원한다. 나의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언제 올 것인지는 나의 성품과 삶이 얼마나 변하고 성숙되었는지를 보고 대충 알 수 있다. 얼마나 성공했는지,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얼마나 출세했는지가 아니다.
바울은 주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였다. 또한 그리스도를 닮게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고 했다. 우리 주님의 성품과 삶을 얼마나 닮았는지가 관건이다. 이를 위해서 주님처럼 베들레헴 마굿간의 세월과 나사렛 목수의 세월을 우리도 걷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그동안 이룬 게 없다고 한 게 없다고 모아놓은 게 없다고 한탄할 것이 못된다. 나이가 많다고 가방끈이 짧다고 한탄할 것이 못된다.
우리 주님의 성품과 삶을 얼마나 닮았느냐, 닮아가고 있느냐가 관건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을 성경을 통해 보면서 교훈을 삼고 인내와 위로를 받으시기 바란다. 여러분을 에브라임과 므낫세같게 하실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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