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끝없는 오류와 왜곡 속에서 심히 부대끼며 살고 있다. 다들 최선을 다해 살고는 있지만, 깊이의 차원에서 보면 서로를 살리는 살림살이 대신 죽임살이를 하는 경우가 많고,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경우가 많다. 거의 모든 인생살이가 그렇다. 누구라도 몇 번쯤은 인생의 가시밭길에 주저앉아 훌쩍거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칼날 같은 어둠에 찔려 피를 흘린 적도 있을 것이고, 향방을 알 수 없는 번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 적도 있을 것이다.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타인의 무례함과 자기 존재의 남루함에 절망한 적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다 해도, 아무리 높은 영예를 얻었다 해도, 아무리 반듯하게 살아왔다 해도 반추와 교정이 필요치 않은 인생, 허물과 상처가 없는 인생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실 나는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아예 부인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낙관하지도 않는다. 나는 오늘의 인간, 오늘의 세상, 오늘의 나에게 깊이 절망한다. 하지만 또한 절망하지 않는다.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일말의 기대 때문에 나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성품으로 만들지 않았다. 무한한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가진 잠재적 존재, 더 나아가 자기를 초월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존재, 스스로를 대면하고 대화할 수 있는 고상한 존재로 만들었다.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행동과 삶을 반추할 줄을 알고, 반추의 거울에 비추어 스스로 교정할 줄을 안다. 물론 반추하는 능력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모든 인간은 이미 어둠에 휩싸여 있고, 또 반추하는 거울 자체가 심히 더럽거나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반추한다 한들 제대로 보지 못하는 한계, 구원의 세계로 인도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갱생은 가능하고, 그 길은 반추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와 같이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의 자유의지 때문이다. 잘 아는 것처럼 인간은 창조주로부터 자유의지를 부여받았다. 이 자유의지는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근원적 요소이며, 어떤 이유로도 빼앗길 수 없고, 또 빼앗겨서도 안 되는 인간됨의 절대 요소이다. 자유의지가 없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라 할 수 없다. 인간은 오직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을 때에만 인간일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이 자유의지의 존재라는 사실 속에는 외부의 힘이나 압력에 의해 변화되지 않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외적인 동인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진정한 변화는 오직 내적인 동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총과 권력으로도 인간을 굴복시킬 수는 있다. 언론 통제와 끊임없는 세뇌를 통해서도 인간의 행동을 조종할 수 있고, 건강한 교육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진정한 변화와 성숙을 이끌어낼 수 없다. 통제와 조종은 할 수 있어도 변화와 성숙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또 어떤 상황, 어떤 사건, 어떤 만남이 자동적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다. 어떤 상황, 사건, 만남이 반추의 계기로 작동할 때에만 변화와 성장의 촉진제가 되는 것이지 반추하지 않으면 아무런 효용이 없다.
사실이다. 사람의 변화는 오직 반추하는 것으로부터만 시작된다. 내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자신과 대화하는 반추의 시간, 진리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추어보는 반추의 시간을 가질 때에만 비로소 변화의 물꼬가 열린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인간적 진실이다. 정직하게 자신과 대면하고 대화하며, 존재와 삶을 깊이 통찰하는 반추를 하지 않으면 하늘이 두 쪽이 나고 천지가 개벽을 한다 해도 사람은 변화되지 않는다. 의미 있는 변화는 오직 내적 동인이 작동해야만 가능하고, 내적 동인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추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반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모든 인간은 어둠에 휩싸여 있고, 반추하는 거울 자체가 매우 더럽고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반추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 때문에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 조건이 필요하다. 반추하기에 앞서 빛 가운데로 나아는 작업, 맑고 깨끗한 거울을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묻자. 빛은 무엇이고, 맑고 깨끗한 거울은 무엇일까? 예수가 바로 빛이시고, 예수가 바로 맑고 깨끗한 거울이시다. 오직 예수만이 우리를 반추할 수 있는 참 빛이시고, 참 거울이시다. 모든 인간은 위대하기에 복잡하고,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이기에 위태롭고, 죄에 오염되어 있기에 참 빛, 참 거울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다. 예수님은 위대했지만 단순했고,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였지만 하늘 아버지께 순종했고, 어둠에 내려오셨지만 어둠의 종노릇을 하지 않았고, 한없이 옳았지만 끝없이 용서하셨고, 의로우시면서도 아름다움도 잃지 않으셨다. 하여, 예수님만이 우리 존재의 남루함과 삶의 위태로움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하는 참 빛, 참 거울이시다. 예수님은 속죄의 희생양으로만 오신 게 아니다. 예수님은 속죄양이실 뿐만 아니라 반추하는 빛이셨고 거울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반추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앞에 나와야 한다. 예수라는 빛 앞에 나와야 하고, 예수라는 거울 앞에 서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반추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반추하는 행위를 비기독교적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자신에게 몰두하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죄악이라고 말한다. 물론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지나친 반추는 자칫 나르시시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추를 비기독교적인 행위라고 거부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반추는 인간의 본성이자 은총이며, 주의 은총은 본성을 거스르거나 초월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본성과 어울리는 방식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주의 은총을 받은 자는 반추의 거울 앞에 서게 되어 있고, 반추의 거울 앞에 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은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인간은 반추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반추하는 과정이 없이는 변화하지 않는 매우 고상한 존재다.
존재와 삶을 깊이 통찰하는 반추를 하지 않으면 하늘이 두 쪽이 나고 천지가 개벽을 한다 해도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아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도 반추하지 않는 인간을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반추는 하나님이 선물한 인간의 본성이며, 인간의 변화 가능성은 오직 반추하는 능력 속에만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반추하는 지난한 과정을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을 변화시키지 않으신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짚어야겠다. 한 번의 반추로 사람이 변하는 건 아니라는 것. 반추가 내적인 변화와 생활의 교정에 이르기까지는 지난한 수행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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