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조지 휫필드

휫필드 11 - 휫필드의 사역 평가 / 송삼용 목사

새벽지기1 2016. 7. 27. 07:24


휫필드의 사역 평가  

  

 

33.휫필드의 인격적 특징들1

 

휫필드의 인격적 특징은 사실상 그의 생애를 다루면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언급되어졌지만, 필자는 그것들을 다시 한번 체계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 휫필드는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역의 준비시기인 학교시절에 학업에 최선을 다했을 뿐 아니라, 30년 동안 사역을 수행해오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어김없이 해내는 성실성을 보여주었다. 휫필드의 성실성은 몸이 연약해져서 죽음에 임박하게 된 상황에서도 설교자의 임무를 거절하지 않은 데서 잘 드러난다. 휫필드의 사후, 플랑클린은 이러한 그의 성실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30년 이상 그와 가까이 지냈다. 선한 일을 실행할 때의 그의 성실성과 사욕 없는 태도.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열심은 그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는 본 적이 없다. 어느 누구도 그가 보인 성실성, 그 이상을 보이지는 못할 것이다. "2

 

둘째, 휫필드는 거짓 없는 겸손의 사람이었다.

그가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그의 인기는 폭발적으로 급상승했고, 대적자들의 비난과 공격으로 인해서 잠시 동안 청중들이 떠난 것을 제외하고는 30여 년 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러한 인기 속에서 그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이나 명예에는 전혀 집착하지 않았고, 겸손한 자세로 일관했다. 1753년 9월 11일자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무한한 은혜로 겸손한 마음. 감사하는 마음, 양보하는 마음을 허락하시기를‥‥ 진실로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다. 그러므로 나같이 가련한 것을 불러 쓰시는 그분께 놀랄 뿐이다. "3

 

휫필드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인기와 영광이 오로지 하나님께서 불러 쓰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일 뿐. 오히려 자신의 이름은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기를 원할 정도였다. 그는 1753년 12월 27일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무도 나같이 게으르고. 미지근하며, 아무 쓸데없는 벌레에게 ?수고를 아끼지 말라?고 말하지 말라. 오히려 나를 일깨워서?이 잠꾸러기야. 일어나서 네 하나님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 시작하라? 고 질책해주기를 바란다.?4

 

실제로 휫필드가 얼마나 부지런하고 열심을 다해 사역했던가! 그가 자신을 게으른 사람, 쓸데없는 벌레 등으로 표현했던 것은 그의 겸손함을 잘 보여준다.

 

셋째, 휫필드는 근면한 사람이었다.

그는 옥스포드 시절부터 죽는 순간까지 한순간도 한가롭게 보낸 적이 없었다. 옥스퍼드에서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하루를 8시간씩 세 등분해서 사용할 정도로 일분 일초를 아껴가면서 부지런히 장래 사역을 준비했었다. 그는 복음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곳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때로는 선상에서 설교 하기도 했고, 때로는 한밤중 혹은 새벽까지 설교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역을 마치고 집에 와서는 기도하는 것과 편지 쓰는 일로 시간을 보낼 정도로 부지런한 삶을 살았다. 실로 그는 복음전하는 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했던 것이다. 헨리 벤 목사(Rev.Henry Venn)는 휫필드가 근면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엄청난 양의 사역을 행하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주의 일을 행함에 있어서 이 보기 드믄 하나님의 종은 불과 몇 주만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 년 동안 힘써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던 것이다."5

 

넷째, 휫필드는 뛰어난 극기의 사람이었다.

그는 규모있는 삶을 위해서 부단히 자신과 싸워나갔다. 서구 문화와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휫필드는 일생 동안 어김없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기도와 말씀 연구로 시간을 보냈고, 저녁 10시에는 어김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기도와 독서, 그리고 명상으로 밤을 지새울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이처럼 그는 뛰어난 극기로써 시간 관리에 성공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물질에 있어서도 자신을 잘 다스렸던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이 휫필드에게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금이었던 7천 파운드를 준다고 제의했을 때 과감히 거절했으며, 아메리카에서는 아메리카 최대의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라는 제의도 거절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 구제금 외에 돈에 대해서는 무관한 삶을 살았으며, 장래를 위해 돈을 저축하거나 행복한 가정 생활을 위해 돈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다섯째, 휫필드는 변함 없는 삶의 목표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일생 동안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는 것을 그의 유일한 목표로 삼고 그것만을 위해 살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보다 자신의 이름이 드러날까 우려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적 감리교 협회의 수장직을 포기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는 죽는 한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휴식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설교를 강행했는데, 이는 복음을 듣기 원하는 사람들을 보고 한치도 물러설 수 없을 만큼 사명으로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섯째, 휫필드는 명랑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계속 강행되는 사역으로 몸이 지쳐있는 때가 많았지만, 항상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사실 그는 평생 동안 대적자들에 의해서 비난과 공격을 당했고, 심지어 동료 성직자들로부터 거센 반발과 미움을 받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그러한 공격이나 비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늘 밝고 명랑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의 사후 어떤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휫필드의 명랑한 모습 때문이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 휫필드의 지극히 명랑한 모습에 이끌려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

 

34.휫필드의 사역 평가

 

휫필드는 짧은 생애를 보내면서 오직 한가지 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만을 위해 살았다. 비록 단명했지만,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살다가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죽은 거룩한 사도였다. 그는 번연 (Bunyan)의「천로역정」과 같은 불후의 명작을 남기지는 않았다. 또한 요한 웨슬리처럼 교단을 만들거나 자신의 교리를 전수하기 위해서 많은 저서를 남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생을 불살랐던 뜨거운 열정과 지칠 줄 모르는 열심, 그리고 자신의 이름은 짓밟히게 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높이려는 종(從)의 정신 등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

 

지금 웨슬리파나 루터파는 있어도 휫필드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휫필드가 웨슬리나 루터만큼 영향력을 끼치지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고자 했던 그의 숭고한 사상과 정신에 기인한 결과인 것이다. 실로 휫필드는 짧은 생애 동안에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사역을 감당했다.

 

이제 필자는 휫필드 사역의 위대성과 그의 사역에 나타난 결점과 사역의 결과 및 영향과 교훈 등을 언급함으로써 그가 생전에 이루었던 사역을 평가해보려 한다.

 

1)휫필드 사역의 위대성

첫째, 헤아릴 수 없는 설교의 시간이다. 휫필드가 평생했던 설교의 시간은 측량할 수 조차 없다. 그가 생전에 했던 설교의 시간에 대해서 휫필드 사후에 헨리 벤 목사(Rev.Henry Venn)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30여 년의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을 감당했는지, 그의 위대한 사역을 돌아볼 때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다.‥‥한 사람이 일 주일 동안(그것도 수년에 걸쳐) 보통 40시간씩 이야기를 하며, 때로는 몇 주간 동안 주당 60시간씩 수천 여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일이 끝나면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며. 자신이 초청받아 간 집이 어디든 간에 찬양과 신령한 노래와 중보기도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뿐만 아니라 제임스 스티븐 경 (Sir James Stephen)은 이렇게 말했다.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는데 걸린 시간을 빼면 휫필드의 전 생애는 계속 이어지는, 거의 중단된 적이 없는, 설교에만 종사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8

 

둘째, 셀 수 없이 많은 설교의 수(數)이다. 휫필드는 안수를 받고 글로스터의 세인트메리 데 크립트 교회에서 최초로 설교한 이후 뉴베리포트 장로교회의 조나단 파슨즈 목사(Rev.Jonathan Parsons)집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기까지 약 1만 8천 번의 설교를 했다. 이것은 물론 공식석인 설교의 횟수이고, "권면" (exhorting)이나 "강론"(discourese) 등은 제외한 것이다. 그의 설교에 강론이나 권면 등을 포함한다면, 제임스 스티븐 경 (SirJames Stephen)의 말대로 삼십 년 동안 1년에 천 번씩 총 3만 내지 4만 번의 설교를 한 셈이니, 지상에서 감히 누가 이러한 설교 기록을 깰 수 있을 것인다!

 

셋째, 거대한 회중의 수(數)이다. 휫필드가 설교할 때 모여든 회중의 수는 보통 수천수만 명이었고, 그 가운데 최고의 인파를 기록한 것은 하이드 파크(Hyde Park) 근처에 있는 메이페어 (Mayfair)에 8만 명 정도가 모인 경우이다. 휫필드가 설교하러 온다는 소문만 퍼지면, 아무런 광고나 권유가 없어도 그 지역 뿐 아니라 주변 각 처에서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수많은 인파가 구름떼처럼 모여 들었으니, 하나님의 부흥의 불길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그러한 엄청난 역사가 이루어졌겠는가!

 

넷째, 헤아릴 수 없는 개종자의 수(數)이다. 휫필드는 성령의 능력과 그의 탁월한 웅변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켜서 개종하게 했다. 그는 설교에서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일에 뛰어난 은사가 있었다. 이에 대해서 뉴톤(John Newton)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휫필드의 인격을 빛나게 하는 요인, 곧 그의 기쁨의 면류관이 되고 있는 요인은 주께서 그에게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일에 한결같은 순적함을 허락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는 전도할 때 마다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었다.‥‥가 애써서 일했던 모든 곳에서 아직도 그를 그들의 영적인 아버지로 감사하면서 인정하지 않는 곳은 아마 거의 없으리라."9

 

다섯째, 광범위한 사역의 대상이다. 휫필드의 사역의 대상은 신분이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광범위한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원래 휫필드가 처음으로 야외 설교를 시작한 킹스우드의 한함산 집회는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집회였다. 그후로 휫필드의 설교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들이 많았고,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까지도 모여들었다. 또한 아메리카에서는 흑인 노예들을 위해서 설교하면서 그들에게 소망을 심어주기도 했다. 그의 사역은 여기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귀족층과 주요사회 인사들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흔히 영국 역사에서 복음 전도자들이 귀족들에게 복음을 증거해서 그들을 변화시킨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휫필드는 헌팅톤 백작부인이 섬기는 교회의 목사로 사역하면서 많은 귀족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복음을 들은 귀족들이 개종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정치인, 학자, 경제인, 연예인 등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휫필드의 설교를 즐겨 듣고는 그의 설교를 극찬했다. 예를 들면, 당대의 뛰어난 비평가요 문장가였던 볼링브로크 경(Sir Herney St. John Bolingbroke)이나 체스터필드 경(Sir Philip Chesterfield)등이 휫필드의 설교의 능력과 웅변력에 깊이 심취되었고. 철학자 플랭클린(Frankline)이나 사학자 흄(David Hume)등도 휫필드의 설교를 즐겨 듣고 그의 설교 능력을 극찬할 정도였다.

 

2)휫필드의 사역에 나타난 결점들

휫필드는 한 세기의 빛을 밝힌 위대한 사역자였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의 사역이 위에서 밝힌 위대하고 밝은 면으로만 장식된 것은 아니었다. 그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에 옥에 티와 같은 결점들이 그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첫째, 영국에서 야외 설교를 최초로 시작하던 1739년에 자신을 공격하던 일부 성직자들에 대해 지나치게 극단적인 태도로 대항했던 것은 초기 사역의 약점으로 남게 되었다. 휫필드는 그때 자신을 반대하던 사람들에 대해서 지나친 역공격을 퍼부었는데, 이것은 그의 의도가 옳았다고 할지라도 그 방법과 태도에 있어서는 너무 무리했다는 지적을 받아 그의 약점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들은 그의 사역이 점차 성숙되어 감에 따라 원만하게 극복해나갈 수 있었다.

 

둘째, 휫필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습관은 초기 사역에서 그의 '느낌' (im-pression)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했고, 심지어는 자신이 매일 꾸는 꿈도 의미가 있는 것으로 해석하곤 했다.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 한번 그려진 비전을 무조건 하늘에서 온 계시로 간주할 정도였다. 그러나 초기에 가졌던 이런 단점들도 나중에는 잘 극복되어, 그가 칼빈주의적 노선과 종교개혁의 전통을 신봉하게 됨으로써 신비주의적인 경향으로 빠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셋째, 모든 사람을 너무 부드럽고 온화하게 대함으로써 대중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있어서 과감함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천성적으로 그는 너무 친절한 성품을 지녔기 때문에 수많은 대중을 상대로 일하기에는 힘든 면이 있었던 듯하다.

 

넷째, 편지 쓸 때는 다른 사람들보다 너무 지나치게 경어를 씀으로써 사람들의 의문을 사기도 했다.

 

사실 이러한 결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극복된 사소한 문제 이였지만, 다음의 결점은 그가 죽고 나서도 오랫 동안 아쉬움으로 남기고 말았다.

 

다섯째, 그는 네 번째 일지(Fourth Journal)를 출판할 때, 너무 무성의하게 씀으로써 그의 생애에 있어서 커다란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당시에 휫필드가 그의 일지를 출판하려고 했던 것은 측근들이 출판을 부추겼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공격을 가하는 사람들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써 일지를 출판하게 되었는데, 너무 급하게 쓴 바람에 날림으로 출판하게 된 오점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여섯째, 휫필드는 노예제도의 악에 대해서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는 베데스다 농장에서 노예들을 사용함으로 노예제도를 묵인하고 말았으니, 이것은 그의 생애에 가장 큰 약점이 되었다. 하지만 휫필드가 이끌었던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영국에서는 18세기 노예 무역 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린(J. R. Green)은 이를 다음과 같이 입증해주고 있다.

 

“기독교 부흥 운동이 폭발하여... 새로운 박애주의가 우리의 감옥들을 개혁시켰고, 우리의 형법에 관대함과 지혜를 주입시켰고, 노예 무역 제도를 폐지시켰으며, 대중 교육을 시작하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1o

 

3)휫필드의 사역의 결과 및 영향


첫째, 휫필드의 사역은 개신교의 사역자들에게 설교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주었다.

당시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열심이나 열정 없이 단지 교리를 변론하는 딱딱한 설교를 했기 때문에 청중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처럼 설교의 영광이 사라진 어두움의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을 설교로 감동시킨 휫필드의 설교 방식은 획기적이었다. 그의 설교 방식은 열정과 열심을 가지고 오직 말씀을 삶에 직접 적용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한 설교 방식은 휫필드 이후의 개신교 설교자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었고, 말씀 중심의 부흥 운동에 지대한 영항을 끼치게 되었다.

 

둘째, 휫필드의 사역은 교회의 개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의 교회는 교조주의의 벽에 쌓여서 부패한 사회를 변화시킬 만한 힘을 잃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 가운데서 휫필드의 사역은 교회를 개혁시키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야외 설교에서 평신도 설교자를 기용하는 것, 잡지의 발행, 연합 사업으로 평신도로 하여금 일하게 하는 것, 협의회에 평신도 대표를 참여시키는 것 등은 모두 휫필드에 의해서 최초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휫필드는 아메리카에 가서도 이러한 일들을 주도함으로써 국제적으로 평신도 사역의 길을 열어준 개혁자였으니, 그는 라일(J. C.Ryle)이 평가한 대로 “18세기에 영국이 낳은 최초의 개혁자?였음에 틀림없다.


셋째, 휫필드의 사역은 야외 설교의 장을 열었다.

사실 그는 교회 내에서 설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방해와 비난을 받았다. 특히 국교회 성직자 그룹은 의도적으로 휫필드가 예배당에서 설교하는 것을 반대했다. 결국 휫필드의 사역은 '야외 설교'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고. 그의 대중적인 집회는 그후 수많은 복음 전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넷째, 휫필드의 사역은 18세기 영국 부흥 운동과 아메리카의 대각성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18세기 영국의 부흥 운동을 웨슬리가 먼저 주도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사실은 영국의 부흥 운동이 시작되었던 때에 웨슬리는 조지아 주에 가 있었을 뿐 아니라, 아직 복음 전도자로 알려지지도 않았던 때였다. 따라서 18세기 영국의 부흥 운동은 휫필드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그가 지속적인 대규모 야외 집회를 이끌면서 부흥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이다(물론나중에 웨슬리 역시 부흥운동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휫필드가 당긴 부흥의 불길 때문에 가난한 노동자 계층과 거지들, 그리고 폭도들이 선량한 시민이 되는 일이 속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휫필드가 이끈 부흥운동은 잠자는 교회를 일깨웠고, 사회 전체를 변화시켰다. 당시의 부흥운동의 결과에 대해서 그린(J.R.Green)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기독교의 부흥운동이 폭발하여‥‥ 전 영국 사회의 체질을 몇 년 안에 바꾸어놓았다. 교회가 소생하여 활력을 되찾았다. 기독교는 사람들의 마음에 도덕적 열심이라는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한편, 우리의 문학과 생활 자세를 정화시켜주었다.”12

 

또한 휫필드가 당긴 복음의 불길은 아메리카 대각성 운동의 초석이 되었고, 그후에도 일곱 차례에 달하는그의 방문은, 길버트테넌트 등과 같은 사역자들에 의해 영적 각성 운동이 지속되게 하였다. 아메리카에서 휫필드의 사역이 얼마나 뜨겁게 불타올랐으면 대 부흥사였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Edward)가 자신의 교회에 그를 초청해서 부흥의 열기를 일으키려고 했겠는가!


다섯째, 휫필드의 사역은 복음주의적 연합 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사역은 교파를 초월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려는 진정한 복음 사역이었다. 그래서 휫필드가 가는 곳이면 모든 교파(침례교, 독립교회, 장로교, 국교회 등)를 초월해서 복음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는 칼빈주의적 노선을 걷고 있었지만, 교파적인 색채를 드러내는 것을 반대하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증거하기에 온 열정을 쏟아부었다. 심지어 그는 모라비안 교도들과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에 근거해서 그들과 따뜻한 교제를 나누었다. 그처럼 교파를 초월해서 복음의 교제를 나누려는 그의 정신 때문에 휫필드는 모라비안 교도가 되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더구나 그는 베데스다 고아원의 경영난 때문에 모라비안 교도들에게 그 건물까지 아무런 조건 없이 넘겨주었으니, 그러한 오해는 당연할 수밖에‥‥. 하지만 휫필드는 모라비안교의 신학에는 동의하지 않고 교리적인 논쟁도 피하면서 복음주의적 노선을 걸어갔다. 그와 같은 휫필드의 사상은 곧 복음주의적 연합을 가능하게 했고, 마침내 그는 그동안 이끌었던 칼빈주의적 감리교도들의 수장직을 포기하고 자신을 비난하고 공격하기에 열을 올렸던 웨슬리측 감리교도들과의 연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휫필드의 복음주의적 운동은 국교회 내에서 복음주의를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국교회 내에서 복음주의자들이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었다.

 

여섯째, 휫필드의 사역은 선교사적(宣敎史的)인 측면에서 큰 의의를 지녔다.

선교사적으로 볼 때 선교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는 19세기였다. 따라서 소위 '선교의세기'13가 도래하기 전 시대인 18세기 중엽에 휫필드가 수차례씩이나 생사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모진 항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경을 넘나들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선교적 측면에서 바라볼 때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당시의 선교 상황은 대체로 제국주의적 선교 방식으로 인하여 진정한 선교의 동기가 극히 약화되었던 시기였다.14 그와 같은 상황에서 그가 문화적 우월감이나 정치적인 세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복음 그 자체를 무기로 삼아 식민지 대륙에 복음의 꽃을 피웠다는 것은 참으로 획기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곱째, 휫필드의 시역은 문서 전도에 대한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

그는 편지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했다. 심지어 그는 조지아로 향해 가는 배 안에서까지 수백통의 편지를 써서 복음을 전했고, 그렇게 바쁜 설교 일정 가운데서도 틈만 나면 편지로 그리스도를 소개했다. 실로 그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끼치는 수단이라면 무엇이든지 동원해서 오로지 그리스도를 증거하려고 했으니, 복음에 대한 그의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가1734년부터 1742년까지 쓴 편지의 일부는 무려 516쪽에 달하는 방대한 책으로 출판되었다. 15

 

여덟째, 휫필드의 사역은 교회의 진정한 관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휫필드의 진정한 관심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생 동안 영혼을 구원 하는 일에 몸을 불사른 것이다. 특히 그는 사회로 부터 소외된 가난한 거지들이나 교도소에 수감된 죄인들, 그리고 폭도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해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했다. 더구나 휫필드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은 영적인 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려고 많은 자선 사업도 했다. 가난한 노동자들의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브리스톨의 킹스우드에 학교를 세웠으며 , 아메리카에서는 고아원을 세웠고, 흑인들을 위한교육 기관까지 세우려고도 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당시 부흥운동은 다만 영적인 각성으로 끝나지 않고 자선 사업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교회의 진정한 관심이 무엇인지를 많은 교회들에게 보여주었다.

 

4)휫필드의 사역이 준 교훈

휫필드의 사역은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 후세대 사람들에게 엄청난 감동과 도전을 주고 있음에 틀림없다. 필자는 오늘날 교회를 섬기는 모든 사역자들이 휫필드의 사역을 통해서 본받을 수 있는 중요한 사항들을 언급해보려고 한다.

 

첫째, 휫필드의 사역은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었다.

어떤 사람은 그의 복음을 듣고 변화된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던 것을 보고는 마치 사도 시대가 도래한 듯하다고 했으니 , 그가 증거한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컸었는지 짐작이 간다. 필자는 휫필드가 그처럼 능력 있는 설교로 수많은 영혼들의 가슴을 자신과 같이 불타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설교자였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가롭고 편하게 보내거나 잠자고 있을 그 시간에 온 밤을 지새며 기도하면서 성령의 능력을 구했던 당신의 종을 하나님께서 어찌 그냥 내버려 두셨겠는가!

 

둘째, 휫필드의 사역은 설교의 영광에 대해서 교훈해준다.

당시 설교자들은 설교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을 변화시킨 설교자들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고,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딱딱하고 틀에 박힌 교리를 풀어나감으로써 강단의 영적권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상당수의 설교자들이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교조주의의 틀에 매여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는 술취함과 방탕함이 난무할 정도로 도덕적인 부패가 심각할 정도였으니 , 그와 같은 냉냉한 설교로 사회를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영적인 권위를 갖고 강단에서 진정한 거듭남과 그리스도인의 거룩을 외친 휫필드의 설교는 설교의 영광을 되찾기에 충분했다. 휫필드는 강단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선포함으로써 설교의 영광을 회복했던 위대한 설교자였다.

 

셋째, 휫필드의 사역은 참된 부흥에 대해서 교훈해준다.

그는 한 번도 부흥을 위해서 인위적으로 조작하거나 노력해본 적이 없었다. 참된 부흥은 쇼맨쉽(showmanship)이나 선정주의나 어떤 분위기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주도한 부흥은 오직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그에 의해서 주도된 캠버슬랑의 부흥은 단순히 신앙의 본질적인 원리들에 대해서 설교할 때 성령이 강하게 역사함으로 일어났다. 그 외에도 하나님의 현존, 죄에 대한 자각, 복음의 필요성, 거듭남, 믿음에 의한 칭의 등을 설교할 때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와 같은 그의 사역을 볼 때 참된 부흥은 인간의 노력이나 인위적인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역사, 곧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註)--------------------------------------------------------------------------------------------

1. 이 부분은 주로J. C. Ryle, Reprinted 1990(First published 1885), PP 56-59를 참조했으며, 또한Robert Philip, 1838, pp. 552-572와J. R. Andrew, pp. 415-420도 이 주제에 관해서 도움이 된다.

2. Arnold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Volume 2, p. 453.

3.J, C. Ryle, Reprinted 1990(First published 1885), p. 56.

4. Ibid.

5. ibid., p. 57.

6. ibid., p. 59.

7.Arno1d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Vo1ume2,p. 521

8. Ibid.

9. J. C. Ryle, Reprinted 1990(First published 1885), p. 47.

10. J. R. Green, A Short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 Harper ed, 1899, pp. 736-737,

cited by Arno1dA.Da11imore,1990,p.222.

11. J. C. Ryle, Reprinted 1990(First published 1885), p. 44.

12. Ibid.

13. J. H. Bavinck, An 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Mission, Ners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60, p. 297

14. Ibid., pp. 290-291.

15.보라.George Whitefield's Letters: For the period 1734-1742,1771(reprinted by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6)

 송삼용 목사 (그말씀 1997.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