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조지 휫필드

휫필드 10 - 지상에서의 모든 싸움을 마치고 / 송삼용 목사

새벽지기1 2016. 7. 26. 06:51


지상에서의 모든 싸움을 마치고


 

29.“휫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라”


휫필드가 아메리카에서 보냈던 4년간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길이었다. 대각성 운동을 흠집내려는 사람들의 비난과 그를 광신주의의 원조로 몰고 가려는 이들의 공격들, 그리고 물질적 어려움과 명예에 대한 유혹들 때문에 휫필드는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휫필드는 모든 것들을 지혜롭고 신중하게 대처함으로 이러한 위기와 어려움들을 잘 극복해냈다. 그 결과 휫필드의 사역은 예전보다 더욱 활성화 되어서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을 누릴 정도로 활력이 있었고, 아메리카의 대 각성 운동에 치명타를 가했던 광신주의도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아메리카에서의 죽음을 무릅쓴 뜨거운 열정과 열심은 그의 몸을 상하게 하기에 충분했고, 급기야는1748년 초 서른세 살의 나이에 병약해진 몸을 이끌고 안식할 장소를 찾기에 이르렀다.


휫필드는 그해 3월에 아내를 필라델피아에 둔 채 휴식을 위해서 홀로 '버뮤다' (Bermuda)섬으로 향했다. 섬에 도착한 휫필드는 그곳 주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사람들은 즉시 그에게 설교를 요청했다. 결국 휫필드는 휴식을 취하러 간 그의 목적과는 다르게 계속적인 설교 요청에 응함으로써 다시 한번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다. 몸이 지쳐서 가눌 수 없을 정도가 되어도 그는 복음을 듣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휫필드는 모든 설교 요청에 응했고 11주동안 온 섬 주민들에게 하루에도 두세 차례씩 설교를 하게 되었다. 휫필드의 몸은 점점 쇠약해졌지만 정신적으로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왜냐하면 버뮤다에서는 누구의 방해나 비난도 없이 평안하게 설교할 수 있었고, 또한 어떤 곳에서보다 더 큰 영적인 축복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볼 때, 휫필드의 생애 가운데 그의 사역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수 있다.


휫필드가 버뮤다에 있는 동안 영국에 있는 '장막’(Tabernacle)의 사역자들은 휫필드가 속히 영국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강력하게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들이 휫필드에게 속히 귀국을 요청했던 것은 '장막' 내에 심상치 않은 일들이 잇달아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휫필드의 후계자로 활약하던 존 케닉이 모라비아교로 개종해버렸고, '장막’ 내의 유능한 설교자 월리엄 컷모어(William Cudmore)가 삼백여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다른 곳에 독자적인 공동체를 세웠으며, 존 케닉의 후임으로 호웰 해리스가 장막의 책임을 맡고 있었으나, 그의 지도력에 한계가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휫필드가 속히 귀국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결국 휫필드는 버뮤다에서 고국으로 귀국할 것을 결심하고 아내를 아메리카에 남겨둔 채 영국행 배를 타게 되었다. 4년만에 영국으로 돌아온 휫필드는 런던에서 수많은 인파의 환영을 받았다. 당시에 사람들은 휫필드가 이미 병들어서 죽었다는 보도1를 접했던 터라 휫필드가 살아서 돌아온다는 소식은 그를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을 흥분케 했다. 휫필드가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장막’ 의 일은 활기를 되찾았고, 예배 때마다 회중들이 차고 넘치게 되었다. 휫필드의 야외 설교장이었던 무어필즈에는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모여든 인파로 가득했으며, 글로스터와 브리스틀에까지 그가 증거한 복음의 열풍이 다시 한번 뜨겁게 타올랐다.


이처럼 휫필드의 사역이 눈에 띄게 왕성해지자 ‘장막’ 측의 사람들은 그동안 휫필드와 그 추종자들이 웨슬리측 사람들에게 당해온 일들을 생각하고는, 자신들의 승리를 주장하면서 분파적 경쟁에 휘말려들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휫필드는 그러한 경쟁적 심리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알미니안 감리교와 칼빈주의 감리교를 연합해보려는 시도로써 웨슬리에게 다음파 같은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웨슬리 목사님‥‥ 당신은 연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외적인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당신의 설교에 의하면 원칙적으로 제가 생각했던 것과 훨씬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조만간에 아메리카에서 사역할 예정이기에 제가 영국에서 머무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을 것입니다 ‥‥ 저는 목사님께서 저를 잊지 않고 기도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저도 목사님을 늘 기억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웨슬리 목사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을담아 ? .."
- 조지 휫필드(G.W.)-2

휫필드는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요한 웨슬리, 찰스 웨슬리, 그리고 호웰 해리스 등과 만나 여러차례 의견을 주고 받았으나 결국 그 문제는 결말을 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휫필드는 감리교의 수장지위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휫필드는 이미 웨슬리에게서 ‘첫째가 아니고는 만족하지 않는’3 공명심을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싸움과 분열을 막기 위해서 그에게 감리교의 단일 수장이 되게 했던 것이다. 이때 휫필드를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가 연합체 수장의 지위를 포기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까지 자신들은 4년 동안 휫필드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연합체를 존속시켜왔기 때문에 이제는 웨슬리 측 앞에서 통쾌한 승리를 누리고 싶은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휫필드의 단호한 결단 앞에서 그들의 모든 소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휫필드가 수장직을 포기한 것을 본 대다수의 추종자들은 장차 그의 명성은 사라질 것이며, 마침내 후세대에게 잊혀진 존재가 될 것이라는 우려를 금치 못했다. 그때 휫필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휫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고 모든 사람의 발길 아래 짓밝히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화롭게 될 수 있다면 ‥‥내 이름은 모든 곳에서 없어지게 하고, 내 친구들 조차도 나를 잊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복되신 그리스도의 대의(cause)가 증진될 수만 있다면‥‥ 그러나 도대체 칼빈은 무엇이고 루터는 무엇인가? 제발 분당과 파당을 넘어서자. 예수님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삼자. 그리하여 그분만이 전파되도록 하자‥‥ 나는 누가 제일 윗 자리에 앉는가에 관심이 없다. 나는 내 자리를 안다‥‥ 설령 그것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자리일지라도‥‥ 나는 마지막 날이 올 때까지 만족하며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죽은 뒤 묘비에는 ‘여기 조지 휫필드 눕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최후의 심판날이 밝혀줄 것이다’ 라는 말 외에는 쓰지 말라.”4

필자는 이같이 '그리스도의 영광’ 을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명예와 특권을 과감히 포기하고 오직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자 했던 휫필드야말로 진정한 칼빈주의자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는 스스로 칼빈이나 루터를 추종하는 교조주의자가 아니라고 고백했지만, 그의 사상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그는 평생 그리스도의 영장을 위해서 살았고 이러한 그의 삶과사상은 칼빈주의가 추구하는 근본 정신과 사상에 너무나 적합하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자로서 자신의 이름은 땅에 묻어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휫필드의 열망이야말로 오늘날 모든 설교자들이 따라야 할 본이 아니겠는가!

30.웨슬리와의 화해


휫필드가 칼빈주의적 감리교의 수장직을 포기하고 난 후에 새로운 사역의 길이 열렀다. 헌팅톤 백작 부인(Countess Of Hunting-ton)5이 휫필드를 자신의 예배당 목사로 지명하자 이를 수락함으로써 새로운 사역이 시작된 것이다. 더구나 헌팅톤 백작부인은 일주일에 두 차례씩 자신의 집에 귀족들을 초청해서 휫필드에게 설교하도록 배려했다. 당시에 귀족들의 세계는 술취함과 도박등 부도덕한 삶으로 일관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부담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휫필드는 높디 높은 귀족의 세계에 복음을 들고 들어가서 정기적으로 설교함으로써 청중들에게 계속적으로 설교를 요청 받는 놀라운 반응을 얻게 되었다.


그때 헌팅톤 백작부인 집에 초청되어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당시에 내노라 하는 귀족들과 탁월한 학문적 소양을 지닌 사람들과 유명한 정치인, 그리고 저명한 사회인사들과 부인들이었다. 영국 역사에서 이처럼 유명하고 비판적인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증거한 설교자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그런 자리에서 설교할 기회를 갖는 것도 어려웠지만 그런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휫필드의 말이 이를 입증한다.

“위대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들 앞에 섰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나에게 충만히 임했다.”6

휫필드의 사역은 킹스우드의 광부들이나 아메리카의 노예들, 그리고 평범한 시민들에게도 적절했지만, 아메리카의 지식인들과 영국의 귀족들, 심지어 왕가(웨일즈의 프레더릭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휫필드는 기존의 공동체를 직접 지도하지는 않았지만, 회원들과는 계속적인 교류를 가지면서 새로운 사역에 전념했다. 하지만 그 무렵에 공동체의 회원들은 휫필드의 의장직 사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집요하게 설득해왔다. 그러한 설득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휫필드는 흔들림 없이 자신의 사역을 계속해 나갔다. 그는 어떤 특정한 교파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주의적 원리들을 끊임없이 증거함으로써 복음주의적 노선을 따르는 사역자들이 그 원리에 따라 사역하도록 돕고자 했다. 그 결과 나중에는 휫필드의 영향으로 인하여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내의 복음주의파가 발전하였으니, 영국 교회의 복음주의 신학의 영향은 휫필드에 의한 결과라고 하겠다. 그에게 있어서 복음주의적 원리란 복음전파를 가장 중시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목회자들에게도 촉구하기를, 주일 하루 설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일주일 내내 설교하라고 했다. 목회자들은 잃어버린 영혼이 있으면 어디든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직접 들어보자.

“…그대는 하나님께서 분발시키사 길과 산울가와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불쌍한 죄인들을 불러오게 하실자라‥‥오 형제여! 귀하신 주님의 교회를 불쌍히 여기시오. 그분께서 자신의 보혈로 값 주고 사신 자들이니 그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목자없는 양이 되게 하지 마시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눈먼 지도자가 눈먼 자들을 인도하여 그들을 멸망하게 만드는 것이라오”7

세월이 지나면서 친필드는 요한 웨슬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휫필드는 웨슬리와 결별한 이후에 우정의 회복과 화해를 위해서 이미 많은 노력을 해왔다.8 휫필드가 요한 웨슬리로 인하여 그렇게 많은 상처와 아픔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웨슬리에 대해서 한번도 경쟁자나 적대자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휫필드는 웨슬리 형제가 지도하고 있는 공동체에 가서 설교하게 되었고, 웨슬리 사역의 본부였던 파운더리에 가서도 설교하게 되었다. 이천여 명이 모인 '파운더리'앞에서, 휫필드는 설교하고 웨슬 리가 기도문을 읽었으며, 그 다음 주일에는 웨슬리는 설교하고 휫필드가 기도문을 읽을 정도로 둘은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는 휫필드가 희생적인 결단으로 수장직을 포기한 후에 이루어진 결과였으니 우정을 회복하기 위한 그의 노력이 이제야 열매를 맺은 것이다.


그 후에도 웨슬리 교인들이 아일랜드에서 폭력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을 때, 휫필드는 귀족들과의 친분을 이용해서 왕에게 이 일을 고해서 폭력을 근절하려 했고 자신이 직접 아일랜드까지 찾아가서(1751년)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1753년 웨슬리가 폐병으로 죽을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도 친필드는 즉시 웨슬리를 방문했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냄으로써 웨슬리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다.

“사랑하는 목사님‥‥ 휘황찬란한 보좌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며, 머지않아 당신은 주님의 기쁨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웨슬리 목사님, 사람들이 기도로 당신을 붙든다면, 당신은 아직 우리를 떠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 예수 안에 잠들어야 한다면 승리하는 사랑을 껴안고 잠드시기를 ‥‥ 그리스도의 영존하시는 팔이 당신을 안으시기를 ..”
-조지 휫필드(G.W)-

웨슬리는 그후에 병이 회복되어 약 40여년 동안 활발하게 사역했고, 휫필드가 먼저 하니님의 품으로 갔다(1770년). 휫필드는 자신이 죽으면 장례식 집례는 요한 웨슬리가 하면 좋겠다고 당부할 정도로 죽는 순간까지 웨슬리와의 우정을 지키려고 했다.

31.모든 사람의 종으로 삼김


휫필드가 칼빈주의적 감리교의 수장직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르던 지지자들은 ‘장막’의 책임자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휫필드는 수장직은 포기했을지라도 ‘장막’ 에 출석하는 수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설교를 담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런던의 ‘장막’ 에 그의 사역을 제한하지 않고, 영국과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 전역을 순회하면서 설교하는 일에 주력했다. 그러는 사이에 1753년에는 지금까지 휫필드사역의 본부로 사용되었던 '장막’의 건물이 너무 낡고 비좁기 때문에 새로지어 약4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집회소를 마련했다. 또한 휫필드는 ‘장막’ 에서 사용하도록 [공중 예배를 위한 찬송] (Hy- mns for Social Worship)이라는 새 찬송가를 편찬하여 예배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휫필드 이후에도 '장막’ 에서 활약한 여러 목회자들10 이 있었는데, 그들의 사역은 항상 휫필드가 주창한 ‘은혜의 교리’ (the doctrine of Gra-ce)를 설파함으로써 칼빈주의적 노선을 유지하였다.


영국에서 휫필드의 사역이 한창 진행되어 가던 1755년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끈질긴 반대와 위협을 겪었던 불운의 한 해였다. 그러나 휫필드에게는 그러한 반대와 위협은 또 하나의 거대한 예배당을 짓는 계기가 되었으니 그 건물이 바로 당시 비국교회 예배당으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였던 ‘토텐함 코트로드 예배당’ (Tottenham Court Ro-ad Chapel) 이다.


그때 휫필드는 예배당 지하에 죽은자를 매장하기 위해서11 지하 납골소를 지어서 자신의 부부와 그 예배당의 목사들과 요한 웨슬리, 그리고 찰스 웨슬리까지 그곳에 묻힐 계획을 세웠다. 이처럼 지하 납골소에 웨슬리 형제와 자신이 같이 묻힐 계획을 가진 것은 웨슬리와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때까지 ‘장막’ 과 '토텐함 코트로드 예배당’ 에서 휫필드를 전적으로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은 휫필드와는 달리 웨슬리에 대한 감정이 수그러지지 않은 터였다. 그것은 휫필드가 자신을 따르던 교인들에게 했던 말을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나는 이 예배당에 지하 납골소를 만들어 놓았으며, 죽으면 거기 묻힐 작정이고 또 요한과 찰스 목사님도 거기 묻힐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누울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그 두 형제가 살아있는 동안이 예배당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을 압니다. 그러나 죽은 그들은 여러분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습니다.”12

휫필드는 그의 생애 말기에 거의 이십여년간을 영국과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와 아일랜드, 그리고 아메리카를 몇 차례나 다녀오면서 복음증거로 생애를 보냈다. 휫필드가 설교할 때마다 적대자들의 방해와 비난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주지한 바이지만, 심한 경우 설교하다가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로 공격을 당한 적도 많았다. 예를들면, 1757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수많은 군중들에게 설교했을 때, 폭도들의 공격을 받고 죽음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휫필드의 최초의 전기 작가인 길리스(John Gillies)박사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 .설교 시간과 기도 시간에 몇 개의 돌이 날아왔다. 그러나 다행히도 다치지는 않았다. 일정을 마친 그는 왔던 길을 통해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그 길에 접근할 수가 없어서 수백 명의 가톨릭 교도들을 뚫고 거의 1킬로미터 이상을 걸어서 가야했다‥‥사방에서 일제히 그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앞뒤로 비틀거리다가 거의 호흡이 멈출 정도가 되었다. 그의 주변에는 유혈이 낭자했다‥.”13

휫필드는 생애 말기에는 심지어 몸이 허약해서 도저히 복음을 증거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설교를 강행함으로써 복음주의자들에게 커다란 도전을 주었으며,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수많은 성도들을 일깨워주었다. 영국에서는 감리교도나 국교회 교인들을 막론하고 복음을 듣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불 같은 메시지를 증거했으며, 아메리카에서도 가는 곳마다 수많은 인파가 환영하는 가운데 복음을 전했는데, 그를 환영한 인파들 속에는 모든 교파(독립 교회, 침례 교회, 장로교회 등)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휫필드가 이처럼 모든 사람들을 섬기면서 복음을 위해 평생을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가슴 속에 사라지지 않는 한가지 정신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은 곧 그리스도와 같은 종(從)의 정신이었다.

“나는 다만 모든 사람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

32.모든 싸움을 마치고 하나님의 품에 안김


1761년 휫필드의 건강은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로 악화되었다. 그의 건강 상태가 그처럼 악화된 것은 하루 이틀 사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건강은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심상치 않은 기미를 보여왔었다. 예를 들면, 18년 스코틀랜드를 방문했을 때 세찬 바람 속에 파묻혀 있는 수많은 인파에게 설교하느라 무리하게 목을 사용하는 바람에 호흡할 때 통증을 느낄 정도가 되었는데, 그후부터는 연달아 많은 청중들에게 설교할 때면 큰 소리로 설교한 후에 곧바로 엄청난 양의 각혈을 하여 그의 건강을 크게 손상시켰던 것이다.


1760년 초 결국 휫필드는 몸이 너무 약해져서 더 이상 설교를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45살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복음의 열정과 죽음을 무릅 쓴 설교 일정의 강행으로 너무 무리하게 몸을 사용한것이 화근이 되어 설교를 중단해야 할 상황에 이르게 되었으니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렇게 휫필드의 건강이 악화되어 죽음에 이를 정도가 되었음에도 런던의 유명한 배우 사무엘 푸즈 (Samuel Foote)는 휫필드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희곡을 써서 연극을 상연함으로써 사람들에서 헛소문을 퍼뜨리는데 일조했다. 횟필드에게 들려오는 비방과 거짓 소문들은 극도로 쇠약해져 있는 휫필드에게 더욱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휫필드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서 이제 거의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 휫필드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때가 아님을 직접 보여주셨다. 휫필드의 건강을 극적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이다. 그의 건강이 차츰 회복되어 설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휫필드는 또 다시 브리스톨과 플리머쓰에 가서 사역을 감당했고, 얼마 후에는 화란에서 설교 초청을 받아 그 곳에서 한달 동안 설교하였다. 한달 후에 휫필드는 런던으로 돌아와서 인근 지역을 순회하며 설교했는데, 이 때에는 그의 건강이 훨씬 좋아졌다. 그래서 그는 다시 스코틀랜드에서의 설교 요청을 받고 그곳에 가서 설교했다. 그 곳에 있는 동안 휫필드는 자신의 건강 상태가 어느정도 회복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웨슬리가 바라본 관점은 전혀 달랐다. 스코틀랜드에 있는 휫필드를 방문한 웨슬리는 휫필드의 건강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그는 이제 상할 대로 상한 고물이었다. 그의 몸은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져 있다."14

이같은 주변 사람들의 우려와 염려 가운데서도 휫필드는 그의 사역을 강행했다. 이미 그의 가슴속에 복음의 불이 훨훨 타올라서 꺼질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763년에는 여섯 번째로 아메리카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때 휫필드는 베데스다 고아원을 짓기 위해서 짊어진 부채를 모두 갚게 되었고 베데스다에 부속 대학을 설립하려는 애당초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조지아주 총독의 허락을 받아냈다. 그리고나서 1765년에 대학설립 준비를 위해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휫필드는 이미 환자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학 설립을 위한 준비와 설교 사역에 정신없이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휫필드의 대학설립 계획은 캔터베리 대주교와의 견해 차이로 정부의 허락을 받을 수 없었다. 교회 측에서는 대학을 영국국교회 소속기관으로 세워줄 것을 요청했으나, 휫필드는 대학 설립을 위해서 비국교도들이 기부금을 많이 내었고, 그 대학은 초교파적인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 그 입장이 서로 달랐다. 결국 1769년에 일곱번째 아메리카를 방문해서 식민지 의회의 하원법에 따라서 대학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때도 휫필드는 육신적으로는 베데스다에서 편히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타오르는 복음의 열정은 그를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설교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느곳이든지 가서 설교했다. 휫필드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번 달에 9백킬로미터 이상을 순회 설교하며 여행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목회자들과 일반인들로부터의 초청이 쇄도했다. ”15

1770년 9월 29일 휫필드가 보스톤으로 가는 도중 '엑서터'(Exeter)라는 마을에 이르렀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설교해 달라는 요청을했다. 그때 휫필드의 건강은 도저히 설교할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휫필드는 자신의 설교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의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강단으로 나갔다.

"1770년 9월 29일 토/...주 예수여, 저는 지쳐 있지만 싫증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제가 아직 갈길을 다가지 못했다면, 저로 하여금 다시 한번 들판에 가서 당신을 위해 말하게 하시고 당신의 진리로 인치게 하신 뒤 죽어 본향으로 가게 하소서."16

그날의 설교는 고린도후서 13장 5절을 본문으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는 말씀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 설교가 휫필드에게서 들은 설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설교였다고 말한다. 아마 휫필드는 이 설교가 그의 생애의 마지막 설교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잠시 후면 자신이 가야할 하늘의 보좌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간절하게 기도드렸다.

“나를 위해 예비된 안식을 향해 갑니다. 태양이 떠올라 하늘로부터 도움을 받아 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었습니다. 이제는 해가 질 시간입니다. 아니, 영원한 영광의 정점으로 떠오를 시간입니다. 이 지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 오래 살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나보다 오래 살 수 없습니다.  생각만 해도 거룩합니다. 나는 곧 시간도,나이도 고통도,슬픔도 알지 못하는 세계에 있게 될 것입니다. 내 육신은 쇠하나 영혼은 영원히 삽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 살려 했는지‥‥ 그러나 나는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하여 죽습니디!"17

엑서터에서 설교를 마치고 휫필드는 ‘뉴베리포트’ (Newburyport)에 있는 ‘올드사우스’ (Old South) 장로교회의 조나단 파슨즈목사(Rev. Jonathan Parsons)의 집으로 갔다. 휫필드가 동네에 왔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동네와 인근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집에 몰려들었다. 휫필드는 이미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사람들의 요청에 못이겨 창문을 열어놓고 촛불을 든 채 그 촛불이 꺼질 때까지 설교했다. 실로 그날 저녁에 휫필드가 들고 있었던 촛블은 마치 온 세상의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춰주고 말없이 죽어가는 자신의 삶을 상징하는 것과 같았다. 휫필드는 그날 저녁 촛불이 꺼질 때 설교를 마치고 편안한 밤을 보낸 후, 다음날 주일 아침 7시, 지상에서의 모든 싸움을 마치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으니, 1770년 9월 30일 그의 나이 55세였다. 이로써 휫필드는 자신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던 복되고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로 들어갔다. 그 날 아침 휫필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슬픔을 안겨주고 육신의 장막을 떠났지만, 하늘의 천군 천사들의 영접을 받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있게 되었다.


10월 2일, 휫필드의 장례 예배가 뉴베리포트 제일 장로교회에서 거행될 때, 수많은 사람들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고, 그의 죽음이 영국의 '장막‘ 과 '토텐함 코트로드 예배당' 사람들에게 전해지자 그들은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휫필드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후 11월 11일에는 휫필드의 유언에 따라 웨슬리가 '장막'과 '토텐함 코트로드 예배당’에서 눈물로 장례 설교18를하면서 다음과 같이 휫필드를 극찬했다.

"어느 누가 그처럼 수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으며, 그처럼 엄청나게 많은 죄인들을 회개시켰다는 말을 읽거나 들은 적이 있는가? 어느 누가 그처럼 많은 사람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고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하나님께 인도하는 복된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듣거나 읽은 적이 있는가?”19

뿐만 아니라 휫필드의 오랜 친구였던 찰스 웨슬리도 다음과 같은 시로서 애도했다.


모든 인류의 연인인 그는
그리스도를 높이고,
귀한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쳤네
나이도, 질병도,
주님의 뜻에 따라 양떼를 먹이려는
그의 열정을 누구러 뜨릴 수 없었네
끊임없는 수고와 고통의 세월을 보았지만
묵묵히 수고하며 결코 싫증내지 않았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면서
인생 끝나 주님 뵙기를 열망하면서
알 수 없는 능력으로
그의 사역을 다 이루기까지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신비하게 살았네
그리고 마지막 호흡까지 그리스도를 위해 쓰여
자신의 삶과 수고가 함께 끝나기를 바랐다네 20


이렇게 하여 휫필드는 그의 설교를 기다리는 수많은 영혼들을 지상에 남겨둔 채,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 그는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어떤 사람보다도 값지고 귀한 삶을 마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그렇게 뜨겁게 살다가 생을 마감한 사람을 언제 다시 찾아볼수 있을런지

주(據)
1.1748년 5월호 「젠틀맨스 메거진」(The Gentleman's Magazine)의 부음(訃音)난에는 '유명한 순회 설교자이며 감리교의 창시자 조지 휫필드 목사' 라고 광고되어졌고, 그외 신문들에도 그와 비슷한 기사가 실렸다. Arnold A.Dallimore, 1970 (reprinted 1995), Volume 2, P. 247
2.Ibid.,PP 250-251.
3. Arnold A. Dallimore, 1990, P. 168.
4. Arnold A. Dallimore, 1970. op.cit, P.257-258.
5. 당시에 귀족이었던 헌팅톤 백작(Couut of Huntington)은 그 부인과 함께 휫필드의 사역 초기부터 집회에 참석했으나 그가 죽자 그 부인은 더욱 말씀에 헌신되었고 휫필드와 지속적인 서신 교환으로 교제를 나누였다.
6. Arnold A. Dallimore ,1990,p, 173.
7. Ibid,P.181
8. 휫필드가 웨슬리와의 화해를 위해서 노력한 부분에 대해서는 Arnold A.Dallimore, 1970(reprinted 1995) ,Volume 2 Ch 9 Seeking Reconciliation with Wesley, PP. 139-147을보라.
9. Ibid, P. 347
10. 이들 가운데는 나중에 유명한 신학자가 된 데일(R.W.Dale). 남 태평양에 선코사로 갔다가 순교한 존월리암(John William)등이 있다.
11. 영국코회에서는 교회의 사역자나 공로자등을 예배당 밑에 매장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12. Luke Tyerman, vol. II., 1890, P. 373.
13. John Gillies, 1772, PP. 224-225
14. Arnold A.Dallimore, 1990,p.210.
15. Ibid, P. 214.
16. John Gillies, 1772,P.270.
17. Joseph Belcher. A Biography of George Whitefield. New York,1857,P.435,cited by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Volume 2, PP. 503-504
18. 참조. 휫필드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했던 설교는 The Works of the Rev. John Wesely, Sermon LVI, P. 1-19, vol. IX. London: The Conference office ,1811에 수록되어 있다.
19. J. C. Ryle. Reprinted 1990(First published 1885), P. 47.
20. The Journal of the Rev. Charles Wes1ey, M.A., vol.2(Grand Rapids Machigan: Baker, 1980, PP.418-431, lines 445-456. cited by Arnold A. Dallimore, 1990, P 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