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조지 휫필드

휫필드 9 - 시련 가운데서도 타오른 거룩한 불꽃 / 송삼용 목사

새벽지기1 2016. 7. 24. 20:04


시련 가운데서도 타오른 거룩한 불꽃

 

 

26.칼빈주의적 감리교 협회

흔히 휫필드의 능력과 업적을 과소평가해온 사람들은 그가 조직을 만드는 능력과 지도력이 빈약해서 공동체 결성에 실패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최초의 감리교를 조직한 사람은 당연히 요한 웨슬리였고, 휫필드는 감리교 조직과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휫필드의 사역을 정밀하게 연구해보면, 그러한 주장은 사실과 다르며, 상당 부분이 휫필드를 경솔하게 다룬 결과였다는 것이 쉽게 드러난다. 그것은 웨슬리의 역사가로 유명한 티어만(Luke Tyerman)조차도 인정한 바인데, 다음과 같은 그의 진술은 최초의 감리교 조직을 시도한 사람이 요한 웨슬리가 아니고 휫필드였다는 사실을 확연히 드러낸다.

“최초의 칼빈주의적 감리교협의회가 웨슬리의 첫 번째 감리교 협의회보다 열여덟 달이나 빨리 열렸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1

더구나 이무렵에 있었던 휫필드의 활동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그가 공동체를 조직화하는 능력이 없었다거나 감리교를 최초로 조직화한 사람이 요한 웨슬리라는 지금까지의 정보들이 얼마나 편파적인 판단이었는지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났던 부흥의 불길을 기점으로 한때 침체에 빠겼던 휫필드의 사역은 정상을 되찾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 런던으로 돌아온 휫필드는 전에 하던 대로 대규모의 야외 집회를 통해서 복음 전파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이미 서론에서 언급한 대로 휫필드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 외에 어떤 조직을 만드는 일에는 그렇게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2 하지만 이 무렵 휫필드의 사상과 정신을 따르는 2-3천 명의 무리들이 무어필즈에 있는 장막(Tabernacle)에 정기적으로 모여들어서 그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점 자발적으로 모여든 무리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휫필드는 그곳에서 일하는 전임 사역자들을 두었고, 정기적으로 모인 사람들을 고정 회원으로 받아들여서 효율적으로 조직을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휫필드는 공동체의 회원 관리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활동을 위해서 다양한 계획을 추친하였다. 예를 들면, 그는 무어필즈 장막(Tabernacle)의 부설기관으로 두 곳의 학교와 도서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소그룹과 직업 소개소 등을 두어서 치밀하고 계획성있게 조직을 운영하였다.


무어필즈의 장막(Tabernacle)에서 시작된 대외적인 활동들 때문에 휫필드의 활동본부는 자연스럽게 장막(Tabernacle)이 되었다. 따라서 공동체의 본부에서는 계속해서 새롭게 조직된 각 지역의 공동체들의 모든 활동을 엄격하게 통제해서 일사불난하게 지휘해 나갔다. 물론 이때 본부의 모든 계획과 각 공동체의 활동은 휫필드가 직접 세웠고, 심지어 본부에 소속된 전임 사역자들이 밀리 떨어진 공동체에 가서 설교하는 일정까지도 휫필드가 직접 계획하면서 모든 공동체들을 다스렸다.


그 무렵 무어필즈 장막(Tabernacle)에서 발행하는 「장막의 순간들」이라는 소식지에는 ‘주간사역 활동’ (Weekly Exercise of the Ministry)이라는 코너가 있었는데, 그 코너에 소개된 활동 스케줄은 당시에 휫필드가 공동체의 조직을 관리하는 일에 얼마나 세심하고 철저했는지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1)토요일 아침을 제외하고 매일 아침과 저녁 6시에 설교,(2)금요일 저녁 6시 이후 라트클리프(Ratclif)에서 설교, 화요일 저녁 6시 반 이후 버로우(Burrough)에서 설교 (3)매 주일 두 번 뎁포드(Deptford)설교, 화요일 정오와 오후 1시 혹은 저녁 6시에 설교,(4)람베쓰(Lambeth)에서 주일 오후2시 설교.(5)주일 아침 설교 후에 과부들을 만날 것,(6)사역자들은 안식일 아침 설교 후에 방문자들을 만날 것,(7)사역자들은 월요일 저녁 회의에 참석해서 회윈들을 권고할 것,(8)수요일 아침에는 가난하고 병든 여자 회원들을 만날 것‥‥‥”3

한편 잉글랜드에는 이미 '종교 공동체'(Religious Societies)라고 불리우는 모임들이 곳곳에 결성되었는데. 그러한 공동체들 중의 상당수가 휫필드의 지도 하에 있고 싶다는 뜻을 표했다. 그러한 공동체의 수가 주목할 만하게 늘어나자, 1742년 말에는 휫필드의 공동체들을 통들어서 ‘휫필드 감리교 공동체’ (Whitefieldian Methodist Societies)라고 칭하게 되었다. 물론 그 무렵에 쓰여진 ‘감리교도’ (Methodist)라는 용어는 아직 교파와 관련된 의미가 아니라 국교회 (the Chu-rch of England)에 소속해 있으면서도 뜨거운 복음주의적 신앙과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또한 다른 교파, 곧 독립 교회나 장로교, 침례교. 퀘이커교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러한 사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감리교도’ (Meth odist)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휫필드 공동체들은 런던 근교에 본부인 장막을 비롯하여 네 곳의 공동체가 되었고, 1743년까지 잉글랜드 전역에 60여 곳 이상의 공동체가 세워졌다. 그리고 그때까지 공동체가 세워지지 않는 각 지역에는 전임 사역자들이 매주 그곳에 가서 설교했는데, 이 사람들이 소위 ‘말을 타고 순회하는 감리교 설교자들 (The Methodist Cur-cuit Rirers)의 효시가 되었다.


당시 잉글랜드와 웨일즈 전역에 휫필드의 조직체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졌는지 다음 몇 사람의 증언을 들어보면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먼저, 휫필드의 비서였던 존 심스(John Syms)는 1743년 이렇게 말했다. “잉글랜드나 웨일즈에서 한가지의 일이라도 시작되지 않은 지역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4 또 1744년 옥스포드의 펨브로크 대학의 한 신사는 휫필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온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최신식 공동체들을 세운다.”5 그리고 같은 해에 아메리카의 하버드대학 총장인 에드워드 위글스워드(Edward Wigglesworth)는 휫필드에게 보낸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당신의 관심이 미치는 한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구석구석까지 다니면서 당신의 추종자들로 일단의 무리들과 연합체들을 형성시켰고... 그들 위에 권면자들과 감독자들과 방문 설교자들을 세워주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은 그 모든 일들을 관할하는 ‘대 조정자’(Great Moderator)이다.”6


필자는 에드워드 위글스워드(Edward Wi-gglesworth)가 친필드를 가리켜서 ‘대 조정자’(Great Moderator)라고 한 것은 조금도 지나치지 않는 적절한 평가라고 확신한다. 그 이유는 휫필드는 한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수많은 공동체를 관할했고, 그 조직을 직접 지휘했던 조직력과 지도력이 탁월한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지도력은 조직을 이끌어가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내리는 명령이나 물리적인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영적 권위와 거룩한 삶에 의해서 본을 보이는 지도력이었다. 휫필드를 따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사람들로서 휫필드에 대한 자발적인 존경과 사랑에 의해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당시의 한 시민의 증언에 의하면, 휫필드의 추종자들은 전국적으로 십만명 가량 되었다.7


휫필드가 주도한 그 운동은 런던, 브리스톨, 윌트셔, 글로스터에 각각 협회를 두었고, 각 협회를 대표하는 한 명의 감독이 협회의 상황 보고서를 런던에 있는 휫필드의 비서인 존 심스에게 보내면 심스는 휫필드에게 그것을 보고하는 식으로 조직을 운영하였다. 한편 웨일즈에 있는 공동체에서도 휫필드의 지도를 강력하게 희망해왔다. 그래서 1743년 1월 5일 남 웨일즈의 왓포드(Watford)에서 웨일즈와 잉글랜드의 성직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최초의 회합을 가겼다. 이 모임에서 휫필드는 아침 저녁의 설교를 맡았고, 회원들은 휫필드에게 모든 회의를 주재하도록 만장일치로 정하였다.8


그후 다시 한 차례의 회합을 가진 후 웨일즈 지부와 잉글랜드 지부가 연합하여 '칼빈주의적 감리교도 협회‘ (The Calvinistic Me-thodist Association)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 모임에서 휫필드는 종신의장으로 지명되었고, 휫필드의 부재시에는 웨일즈의 해리스(Howell Harris)가 그 직무를 대신 감당하도록 정해졌다. 이때 휫필드는 마음만 먹었으면 온 나라에 퍼진 공동체들을 기반으로 거대한 조직을 이끌어가면서 독립된 교파를 창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750년에 휫필드는 그 공동체 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그만 두었다.


당시 휫필드가 공동체의 지도자 역할을 그만 둔 이유에 대해서, 대부분의 전기 작가들은 언급하지 않지만, 필자는 그의 인격과 당시의 정황을 고려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지금까지 활발하게 이루어했던 공동체 운동들이 기존의 국교회 (the Church of England)와 공식적으로 분리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휫필드는 웨일즈에 있는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것을 분명하게 밝힌 바 있다. “...이 모든 일은 기존의 국교회와 공식적으로 분리되는 일 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9 휫필드는 기존의 조직을 이끌고 새로운 교파를 창시할 수 있는 지도력과 조직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교파의 분열보다는 일치와 연합을 부르짖으면서 공동체의 지도자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둘째, 웨슬리와 더이상의 분열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휫필드는 자신이 주도해서 조직된 ‘칼빈주의적 감리교 협회’ 가 1년 6개월 후에 조직된 웨슬리의 ‘감리교 협의회’와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휫필드는 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내의 감리교도 운동의 분열을 막고 오히려 웨슬리로 하여금 감리교도의 단일 수장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현재의 수장직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셋째, 휫필드의 주된 관심이 오직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방해되는 요인이 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휫필드는 그리스도의 이름보다 자신의 이름이 드러날 것을 우려하면서 지도자의 지위를 포기한 것이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높이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휫필드는 한 세기가 낳은 탁월한 설교가였을 뿐 아니라, 지도자로서 조직을 이끌 만한 뛰어난 능력과 역량을 겸비한 지도자였다. 사실 휫필드는 킹스우드에서 야외 설교자로 웨슬리를 이끌어주었던 것이나 웨슬리가 주도했던 감리교 협의회보다 훨씬 먼저 전국적인 감리교 협회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휫필드는 늘 웨슬리보다 앞서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보다는 자신의 업적과 기량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쓴 사람의 편에 서왔으니 세인들의 눈에는 친필드보다 웨슬 리가 드러날 수밖에.


27.폭도들의 공격과 꺼질 줄 모르는 부흥의 불길


휫필드의 공동체들이 활기를 띠면서 각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이중적인 고통을 겪게 되었다. 하나는 국교회의 성직자들로부터 당하는 정신적인 고통이었고, 다른 하나는 폭도들로부터 직접 받은 육체적인 고통이었다.국교회의 성직자들은 경건하고 거룩한 삶의 운동을 주창하면서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감리교(Methodists)운동을 거부하면서 설교자들에게 설교 장소를 제공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데서 설교하는 것조차도 간접적으로 방해를 가해왔다.


1741년 웨일즈의 어떤 마을에서 호웰 해리스(Howell Harris)가 당했던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그 광경을 목격했던 한 사람의 증언을 직접 들어보자.

“여자들도 남자들과 다름없이 극악하여, 한 패거리가 그를 진흙투성이로 만들고 있는 동안 다른 한 패거리는 그를 주먹과 곤봉으로 때려 상처를 입혔으며, 이 상처로 인해 그가 지나간 길에는 핏자국으로 얼룩이 질 정도였다. 원수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막대기와 장대로 그를 내리쳐 기진맥진한 그가 땅에 일어질 때까지 핍박을 계속했다....”10

이같은 폭도들의 공격은 휫필드의 지지자들이 모여 설교를 듣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연달아 일어났다. 폭도들이 예배 중에 건물을 부수고 들어와 몽둥이를 휘두르며 난동을 피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한 공격을 받으면서도 설교자들은 전혀 요동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려고 죽을 힘을 다했다. 이미 여러 차례 폭도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겼던 해리스의 생생한 증언을 들어보자.


‘나를 향해 탄알이 날아왔어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폭도들은 광분했다. 나는 목소리를 높였고, 그 소리에 들어간 힘 때문에 내 머리는 거의 산산조각이 날 정도였지만, 오히려 나는 그런 열심을 가지고 이렇게 외쳤다. ’나는 내가 산산조각나 쓰러질 때까지 그리스도를 선포할것이오!‘”11

잉글랜드 평신도 설교자 존 케닉 (John Cennik)은 스윈돈(Swindon)에서 설교하던 중에 당했던 폭도들의 공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폭도들이 우리 얼굴 가까이에 총구를 들이대고 총을 쏘는 바람에 우리 얼굴은 탄약가루로 뒤범벅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가슴을 펴고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지독한 도랑물 냄새가 나는 동력기를 우리를 향해 틀었다 ‥‥ 다음날 그들은 우리가 묵고 있는 로렌 씨의 집으로 몰려와 돌로 온 집안의 유리창을 다 깨고 식구들 네 명을 채찍으로 때려 상처를 입혔으며 그의 딸 하나를 기절시켜버렸다.”12

폭도들의 무차별한 공격은 휫필드에게도 예외없이 가해졌다. 한 번은 휫필드가 엑세터(Exeter)에서 설교할 때 일어났던 폭도들의 무차별한 공격을 목격한 한 시민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폭도들은 감리교 집회소로 거칠게 밀고 들어와 추잡한 말로 목사의 설교를 방해했으며. 거친 태도로 그를 때리고 발로 차 넘어뜨렸다. 그들은 손에 잡히는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때리고 말로 다할 수 없는 모욕을 가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는 것은 가엾은 여인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였다. 어떤 여인은 완전히 벌거벗겨지기까지 했다... 난동은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폭도들은 사방을 휘젓고 다녔다. 살해된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 공동체 전체가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게 되었다...”13


잉글랜드와 웨일즈 전역에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은 어느 곳을 가든지 이러한 공격을 당했다. 폭도들의 공격이 심해질수록 사역자들에게 복음의 열정은 더욱 뜨겁게 타올라서 부흥의 불길은 꺼질 줄 몰랐다. 하지만 폭도들의 공격이 수그러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늘어나자 마침내 휫필드는 폭도들을 법정에 세우기로 결정하고 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을 고소하였다. 그러나 피고소인들은 변호사를 동원하여 다음과 같은 변론으로 맞섰다.

“첫째, 감리교도들은 어디서나 광신자로 알려졌다. 둘째, 그래서 피고소인들은 마을의 안녕을 위해서 광신자들을 대항하여 싸웠다. 셋째. 감리교도들이 먼저 피고소인들을 공격해서 소요를 일으켰고 피고소인들은 단순히 방어만 했을 뿐이다.”14

배심원들은 변호사들의 변론을 들었지만 최종적으로는 피고소인들의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하게 되어 고소인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따라서 그때부터 휫필드는 난동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들을 용서하기로 했다. 그 이후부터 각종 집회에서 일어나는 난동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폭도들의 난동이 점차 수그러들면서 휫필드는 그 동안 불타오르는 복음의 열기 때문에 잊고 있었던 아메리카의 사역들을 회상하면서 자신이 곧 아메리카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이 없는 동안 영국의 사역을 존 케닉(John Cennik)15 에게 맡기고 아내와 함께 아메리카로 갈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플리머쓰(Plymouth)항에 도착한 휫필드 부부는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해서 배가 출항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6주 동안이나 머물러야 했다. 그 사이 휫필드는 폭도들로부터 살해당할 위기까지 겪으면서도 매일 세 차례씩 설교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휫필드는 그때의 상황을 그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744년 7월 26일/나는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사람들을 부르고 설득하는 은사가 나에게 내렸다. 나는 설교하는 일과 수많은 각성된 영혼들에게 개인적으로 이야기 하는 일에 계속 매진했다.”16

휫필드는 전에 그곳에 와본 적이 없는 생소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에 두 개의 공동체를 결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나서 8월 7일 아내와 함께 아메리카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28.시련 가운데서도 타오른 거룩한 불꽃


영국을 떠난지 두 달 반만에 휫필드는 뉴 햄프셔 (New Hampshire)의 요크(York)에 상륙하게 되었다. 휫필드가 그곳에 도착한다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주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를 환영하였다. 아메리카의 대각성 운동은 4년 전 휫필드가 그곳을 떠날 당시처럼 그가 떠난후에도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올드 사우스 교회 (Old South Church)의 토마스 프린스(the Rev. Thomas Prince)목사는 그 무렵 일어났던 복음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휫필드씨가 우리를 떠난 후로 일 년 반 이상 이 거룩한 일은 이 마을에서나 이 지역에서 분열을 알리는 잡음 하나 없이 성공적으로 진척되어나갔다.”17


뿐만 아니라 라임(Lyme)의 한 목회자는 당시 복음의 역사가 자신이 9년 동안 사역하면서 이룬 것보다 더 많은 변화들이 단 여섯달 동안에 일어났다고 증언할 정도였다.18 하지만 아메리카의 대각성 운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대각성 운동의 대열에 참여한 일부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영적인 체험을 극단적으로 강조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되어 각 교회나 가정 등이 분열되는 아픔을 경험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어떤 열성적인 평신도들은 극단적인 체험이 신앙 부흥에 반드시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하고 예배 중에 큰 소리를 치거나 예배당 바닥에 엎드러지는 일을 흉내내기도 했다. 또 소위 ‘권면자들 ’(exhorters)이라고 알려진 상당수의 청년들이 지도자로서 훈련도 되지 않는 상태에서 자기 마음대로 사역하면서 기존의 목사들을 비난하는 일들을 일삼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일들은 한참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던 대각성 운동의 평판을 크게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대각성 운동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한 가지 사건은 제임스 데븐포트(James Davenport)라는 목사의 무분별하고 과격한 행동들이었다.


처음에 데븐포트는 대각성 운동의 대열에 서서 열심을 가지고 복음 사역에 전력했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이 꿈과 이상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더구나 자신이 설교할 때 사람들이 경련을 일으키거나 기절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났는데, 그는 스스로 그것을 성령의 역사로 간주했다. 뿐만 아니라 데븐포트는 자신이 생각하는 어떤 수준의 체험을 갖지 못한 목사들을 비난하면서 추종자들에게는 그러한 체험을 계속해서 가져야한다고 설득했다. 그러한 영향으로 인하여 마침내 회중 교회와 장로 교회, 침례 교회 등이 각각 두 파로 나누어지는 아픔을 경험하게 되었다.


바로 그 즈음 휫필드가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러한 극단적인 행동들과 분열의 책임이 일차적으로 휫필드에게 있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휫필드는 자신에게 가해진 비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성직자와 평신도들 중의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한동안 환상을 믿음으로, 상상을 계시로 착각하여 아주 몰염치하게 행동하는 죄를 지었다. 그런데 내가 지난 번 영국으로 떠날 당시에는 이런 성질의 일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제 내가 그 모든 사태의 제 일차적인 원인 제공자로 모든 책임이 나에게 전가되고 있다.”19


그 무렵 휫필드의 건강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쏟아진 비난들을 해명하기 위해서 모든 설교 요청을 하나도 거절하지 않고 응한 나머지 나중에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러나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불타오르는 열망과 또한 자신에게 가해진 오해들을 집회를 통해서 바로 잡아주려는 생각 때문에 휫필드는 그대로 누워 있을 수만 없었다. 그래서 때때로 너무 무리하게 집회를 인도하는 바람에 초죽음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 결국 혼수 상태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휫필드의 건강이 조금씩 회복되면서 그가 보스톤에 갔을 때 그곳의 영향력 있는 목사들은 휫필드에게 광신주의를 발생시킨 자로 낙인이 찍힌 그 진상에 대해 해명하도록 요구해왔다. 휫필드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들은 내가 분열을 조장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나는 내 자신이 결코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원리를 소유한 사람이 아니며, 다만 평화의 복음을 전파하고 모든 사람들 중에 사랑을 증진시키려고 뉴 잉글랜드에 온 것인데, 혹시라도 내가 말한 것이 분열을 장려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면 참으로 유감이다..."

휫필드의 해명으로 인하여 그동안 오해되었던 부분이 풀리면서 보스들의 목사들은 휫필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전과 같이 광범위한 설교 사역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휫필드가 가는 곳에는 또 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설교하곤 했다. 이처럼 보스톤에서는 휫필드에 대한 오해가 풀려 정상적인 활동을 되찾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또 다른 양상으로 휫필드를 공격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것은 휫필드를 공박하는 유인물들이 계속해서 쏟아져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유인물들 가운데는 ‘하버드 대학의 총장, 교수, 강사, 그리고 히브리어 전임 강사가 조지 휫필드를 논박하는 증언’ 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그 '증언' 에서는 휫필드를 가리켜 ‘광신자, 비판적이고 무자비한 사람, 대중을 기만하는 자’ 라고 주장했다.21


이처럼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 휫필드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그 증언에 대한 답변을 쓰면서 과거에 자신의 미숙한 요소가 있었음을 시인하고 사과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입장을 단호하게 밝혔다. 휫필드에게 다가온 또 하나의 정신적인 고통은 적대자들의 여론 때문에 고아원을 위한 헌금을 한푼도 받지 못해서 고아원 경영에 급박한문제가 된 것이었다. 이때 벤쟈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e)은 개인적인 기부금 형식으로 돈을 보내기도 했으나,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것은 한때 고아원 경영을 돕겠다고 휫필드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토마스 노블(Thomas Noble)이 자기 전 재산을 모라비아 교도들에게 주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버림으로써 빚 독촉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신적인 시련에도 불구하고 보스톤에서는 휫필드를 위해 아메리카에서 제일 큰 교회를 지어주겠다는 제의를 하면서 그곳에서 남아 사역해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으며, 필라델피아 사람들도 그곳에서 6개
월 동안만 설교해주면 연봉 8백 파운드를 주겠다는 제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휫필드는 이 모든 제의들을 정중히 사양함으로써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쳤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누가 나에게 엄청난 액수의 생활비를 주겠다고 한다... 내가 받아들이기만 하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영광 안에 안식하기까지 나는 결코 안주할 생각이 없다.”22

휫필드는 베데스다 고아원의 재정적인 문제로 고심하던 중에 그의 친구들이 그 지방의 식민 농장과 노예들을 비싼 값으로 사서 ‘프로비던스’(Providence)라는 농장을 만들고 난 후 고아원에 후하게 기부하겠다는 제안에 동의하고 말았다. 이로써 휫필드는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심지어 휫필드 자신이 노예의 소유주가 되었으니, 그것은 휫필드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오점이 되고 말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영국으로부터 온 한 통의 서신은 휫필드를 다시 한번 절망케 했다. 영국을 떠나오기 전에 자신의 후계자로 세워 놓은 존 케닉이 자신과 그 모든 사역을 버리고 모라비아교로 떠나버렸다는 소식이었다. 케닉을 않은 장막(Tabernacle)의 직분자들과 호웰 해리스는 휫필드가 영국으로 속히 돌아와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하지만 휫필드는 당장 아메리카를 떠날 형편이 못되었다. 아메리카 전역에서 쇄도해 오는 집회의 요청을 뿌리치고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메리카에서 당한 많은 시련들 가운데서도 휫필드의 가슴 속에는 거룩한 불꽃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의 건강 상태는 극히 악화되어 일정 기간 동안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휫필드는 쓰러질 때까지 계속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계속 설교를 강행해나갔다. 다음의 편지는 휫필드가 당시에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뜨거운 열망을 갖고 있었는지 잘 묘사해준다.

“1747년 5월 중순/더위가 나를 시험하고 있다...그러나 주 예수께서...나로 하여금 수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말을 타고가 하루에도 두 번씩 설교할 수 있게 하신다. 오, 그분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오, 내가 순결하고 거룩하게 타오르는 불꽃이었으면!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귀하신 구속자를 섬기는 삶을 살게 했으면... 그 수많은 영혼들이 멸망해가는 광경은 내 마음을 깊이 움직이고 가능하면 남극에서 북극까지라도 가서 구속의 사랑을 전파하고 싶은 열망을 갖게 한다.23

주(註)-------------------------------------------------------------------------------------------
1. Luke Tyerman, vol. II, 1890, p.50.
2.보라 「그말씀」 1월호, pp. 187-188
3.이 활동 스케쥴은 이러한 방식으로 모두 열아홉 가지가 소개되었다 . Arnold A.Dallimore, 1970(reprinted 1995), Volume2, pp. 150-151.
4. Ibid., p.154
5. Ibid.
6. Luke Tyerman. vol 11,1890, p. 136.

7. Ibid., p. 287.
8. 이 모임에 참석한 지도자들은 잉글랜드의 성직자 휫필드와 평신도 지도자 존 케닉(John Cennick), 조셉 험프레이스(Joseph Humphreys),토마스 아담스(Thomas Adams)등 3명, 그리고 웨일즈의 성직자 다니엘 로랜드(Daniel Rowland),호웰 데이비스(Howel Davies),윌리암 윌리암스(WiIIiam Willims),존 포웰(John PoweIl),토마스 루이스(Thomas Lewis)등 5명과 평신도 지도자 호웰 해리스(Howell Harris), 허버드 젠킨스(Herbert Jenkins)외 7명이었다. Eifion Evans, Daniel Rowland and the Great EvangelicaI Awakening In WaIes,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5, pp. 212-213.
9.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Volume 2, p. 156.

10. Arnold.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Volume 2, p. 161.
11. Ibid. p. 162.
12. Cennick's manuscript, "Memorable Passages Relating to the Awakening in Wiltshire" (unpublished), 1741. 6,23일자.cited by Arnold A.Dallimore, 1990,p.142
13. Luke Tyerman, vol. Ⅱ,1890,p.115.
l4.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Volume 2, P. 170.
15. 존 케닉은 휫필드의 가장 가까운 조력자였고, 당대의 가장 유명한 설교가의 순위로 말하자면 최소한4-5위권 내에 들어갈 정도로 능력 있는 설교가였다.

16. Ibid., p.174.
17. Ibid., p.180.
18. Ibid., p.181.
19. Arnold A. Dallimore, 1990, p.154.
ZO. Arnold A. Da11imore,1970(reprinted 1995),Volume 2,p 195.
21. Ibid, p.197.
22. Ibid, p. 220.
23. Ibid.,p 22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