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조지 휫필드

휫필드 7 - 다시 임한 사도시대 / 송삼용 목사

새벽지기1 2016. 7. 21. 14:39


다시 임한 사도시대 


 

21. 은혜의 교리


휫필드의 신학과 교리의 핵심이 ‘은혜의 교리’(the Doctrine of Grace)라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휫필드 신학에 있어서 은혜의 교리가 확립된 시점에 대해서 여러 종류의 의구심을 제기해왔다. 하나는 휫필드가 뉴 잉글랜드(New England) 사람들을 만나기 전까지 칼빈주의가 확립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때까지 자신이 믿고 있었던 은혜의 교리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휫필드에게 하나님의 은혜(the grace of God)에 대하여 새롭고 깊은 인식을 갖게 된 뚜렷한 동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와 같은 견해들은 지나친 편견임이 쉽게 드러날 것이다.


휫필드는 조지아로 향하는 배 안에서 지금까지 수많은 청중들을 향하여 설교해오던 열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복음을 위한 일을 계속해서 추진하려는 또 다른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은 이미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통해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그는 전에도 종종 편지를 통해서 복음 사역을 감당해오기도 했지만 조지아로 향하는 배 안에서 엄청난 양의 편지를 씀으로써 소위 서신 사역을 추진하였다.


그때 편지를 쓰면서 휫필드는 인간의 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는 죄의 어두움을 깨달았고, 부패한 인간의 본성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죄의 본질을 발견했으며, 자신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아니한 죄의 모습들을 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발견들은 휫필드를 은혜로 인도하기보다는 오히려 영적인 침체상태로 이끌고 갔다. 그래서 휫필드는 한때 그의 사역을 포기하려고까지 했다. 다음의 고백은 당시 휫필드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잘 나타내준다.

“사역을 할 자격이 없고, 사역을 하기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느낌이 나를 짓눌러 나는 이제 물러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일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 나는 내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고 비참하게 느껴졌고, 마치 눈 멀고 벌거벗은 듯한 느낌이었으며, 그래서 사단은 누구에게도 편지를 쓰지 말라고 나를 유혹하곤 했다."

휫필드는 그러한 유혹과 갈등 가운데서 자기 스스로는 영원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지만 오직 주님의 힘으로 사역의 길에 설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결국 휫필드는 죄의 본질을 분명하게 꿰뚫어봄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풍요로움을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체험들은 휫필드가 쓴 몇몇 편지들 속에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739년 8월 29일/…나의 실제적인 죄와 타고난 결점에 대한 의식은 나를 극히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 후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이 값없이 풍성하게 주어져 내 영혼에 빛과 힘으로 임하고, 그 결과 나는 경외로운 마음에 할 말을 잃고 침묵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새롭고 깊은 인식은 휫필드의 신학과 사상 체계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것들은 그의 단순한 신학적인 지식이 아니라 그의 사상의 틀을 형성하는 뼈대요, 그의 일상 생활 속에서 고백되어지는 삶의 원리였다. 배 안에서 썼던 그의 편지의 내용들을 다시 한 번 들어보자.

“하지만 이것이 나의 위안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나를 아셨습니다. 그분은 나를 존재하게 하셨고, 나를 부르셨으며,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아무 값없이 나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성령에 의하여 나를 점진적으로 거룩케 하십니다. 그분은 세상 끝날까지 그분의 영원한 품 안에 나를 보존하실 것입니다. 오, 복되도다! 이 복음의 진리여! 이것이 실로 복음입니다. 이는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 주는 복된 소식입니다."

“사단은 나를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주 예수님께서 나의 의(righteousness)가 되시는데 네가 감히 어떻게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비난하느냐’고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내 옷이 아니라 그분의 옷을 입고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지만 그분께서 나에게 은혜의 상급을 주시리라는 것과, 또 내 안에서나 나에 의해 그분께서 이루신 일이 마치 내 힘으로 이룬 것처럼 보상해주시리라는 것을 압니다. 오, 이 큰 은혜를 주신 거룩하신 예수님께 대해 얼마나 큰 열심과 사랑을 품어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고백들을 살펴볼 때 휫필드의 사상과 신학 체계의 근간이 되는 은혜의 교리(the doctrine of grace)는 휫필드의 지칠줄 모르는 열심과 열정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휫필드는 그리스도께서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에 감격하여 열심을 품는 것 외에 어떠한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잠자는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증거해야 할 것을 그의 편지에서 밝힌 바 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세계는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큰 목소리 외에는 어느 것도 그들을 잠에서 깨울 수 없습니다."

휫필드는 그 은혜의 교리가 열정과 열심이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을 행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을 다음의 편지에서도 분명하게 밝힌 바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값없이 우리를 선택하신 사랑을 그들 마음에 심어주시고, 또 믿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righteousness)를 붙들게 하십시오.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그분의 은혜의 풍요함을 한밤중까지라도 그들에게 이야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그들에게 이야기해주십시오. 그들의 영혼을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지금 천국에서 그분이 그들을 위해 얼마나 간절히 중보의 역할을 하고 계시는지 그들에게 말해주십시오 … 즉시 그분을 믿도록 그들에게 촉구하십시오! 기도 중간중간에 권면의 말을 곁들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리시오! 성령의 불까지라도…. 사랑하는 형제여,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말씀을 전하십시오….”

휫필드에 의하면 이같은 ‘은혜의 교리’는 하나의 통합된 성경적 원리요, 상호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서로 결합된 체계를 유지하는 신학 원리였다. 다음의 편지가 그것을 입증해주고 있다.

“나는 성자를 통해 성부께 영원히 선택되었고, 성자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으며, 그 결과 성화되며 끝까지 보존되고 또 그 모든 것의 결과로서 영화롭게 된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서로 결합시키신다고 믿습니다. 어떤 인간도 또는 마귀도 이 원리들을 서로 떼어놓지 못할 것입니다."

휫필드는 조지아로 향하는 선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함으로써 ‘은혜의 교리’를 확립하고, 칼빈주의자로서 자신의 신학 사상적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었으니, 그것은 장차 더욱 위대한 사역을 예비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품이었으리라! 선상에서까지도 쉴틈없이 복음 사역을 행한 지 열한 주간만인 1739년 10월 30일 휫필드는 아메리카의 루이스타운(Lewistown)에 도착하였다.

22. 베데스다 고아원 건축


아메리카에 도착한 휫필드는 대륙의 중심지인 펜실바니아(Pennsylvania)로 갔다. 하지만 조지아에 고아원을 세우기 전에 먼저 아메리카에 대해 좀더 알려는 계획으로 그는 필라델피아(Philadelphia)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매일 저녁 야외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영국에서와 같이 엄청나게 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휫필드의 탁월한 설교의 능력이 소문나자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큰 교회는 그를 설교자로 초청했으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다시 야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후로 필라델피아에 있는 교회들은 휫필드가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휫필드는 영국에서처럼 또 다시 야외 설교자로 나서서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모여든 엄청난 군중들의 영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했다.


그러한 사역이 왕성하게 진행되는 동안에도 휫필드는 조지아에 고아원을 세우는 일을 준비하면서 마침내 자신의 동역자인 윌리엄 슈어드(William Seward)와 비서인 죤 심스(John Syms)를 데리고 조지아로 향했다. 휫필드는 육로로 여행하면서 매일 만나는 무리들을 모아놓고 설교했지만 저녁에는 대다수의 날들을 통나무 집이 아니면 그냥 땅 바닥에서 잤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무더운 날씨는 영국의 온화한 날씨와는 정반대였기 때문에 휫필드는 더위와 피로에 지치게 되어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휫필드는 수많은 군중들에게 설교하는 순간 그러한 육체적인 피로는 그의 불 같은 복음 전파의 열정에 의해서 쉽게 극복되었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몰려오는 피로 때문에 지쳐서 몸을 가눌 수 없는 지경이 되기도 했다.


조지아에 도착한 휫필드는 그곳 사람들로부터 수십만 평의 땅을 양도받아 고아원을 짓기 시작했고, 그 고아원의 이름은 ‘자비의 집’(A House of Mercy)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베데스다’로 지었다. 하지만 휫필드는 베데스다의 건물이 완공될 때까지 앉아서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휫필드는 다시 복음 전도 여행을 준비해서 필라델피아로 향했다. 그때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휫필드는 그의 생애 동안 계속적인 우정을 나누었던 아메리카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벤쟈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을 만나게 되었다. 수년 후에 프랭클린은 휫필드와의 우정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당시 휫필드의 사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려주었다.

“1739년 우리들 가운데로 휫필드 목사가 도착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든 교파와 교단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거기 모여든 사람의 숫자도 숫자이지만 그 웅변술로 청중들을 감화시키는 그의 탁월한 영향력은 정말 깊이 생각해볼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주민들의 태도에 곧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이다. 별 생각도 없이 살고 종교에는 무관심하던 그들이 모두 점점 경건해지고 있으며 저녁 때 거리를 걷노라면 골목골목의 모든 가정마다 찬양의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다….” 휫필드가 필라델피아에서 만난 또 다른 사람은 당시 장로교의 걸출한 목사인 윌리암 테넨트(William Tennent)와 그의 아들 길버트 테넨트(Gilbert Tennent) 목사였다. 윌리암은 뜨거운 열정을 지닌 설교가요, 목회자로서 순회 복음 전도 사역에 적극성을 지닌 사람이었음으로 휫필드는 그와 쉽게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아들 길버트 역시 아버지의 신학 사상을 그대로 본받아 부흥 운동에 주력한 사람이었다.


길버트 테넨트는 여러 가지 면에서 휫필드와 일치한 면이 있었다. 예를 들면, 교파를 초월해서 복음을 증거하려는 열정이나 설교를 통해서 당시 여러 교파의 사람들에게 영적 각성을 준 것이나, 칼빈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것들은 두 사람이 서로 협력하여 복음 사역을 행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처럼 근본적인 장점을 지닌 데다가 휫필드는 자신의 지도력을 길버트와 함께 나누었고, 길버트는 겸손하게 휫필드의 부흥 사역을 이어받음으로써 두 사람은 불협화음 없이 조화를 이루면서 대각성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한편 대각성 운동 외에 휫필드가 아메리카에서 이룬 일들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업적은 흑인 노예들을 위한 봉사였다. 그는 학문이 전혀 없는 무식한 흑인들에게도 쉽게 설교함으로써 흑인들에게 영적인 진리를 전했으며, 노예들에게는 물질적인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그래서 휫필드는 델라웨어(Delaware) 근처에 땅을 사서 그곳에 불쌍한 노예들을 교육하는 곳으로 쓰일 건물을 지어 흑인들을 도우려고 했다. 휫필드는 그 건물의 이름을 ‘나사렛’이라고 붙이고 공사를 진행시켰지만, 그 일은 주변 인디안들의 계속된 공격과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인해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후에 그 건물은 모라비아 교도들이 완공했으며, 오늘날까지 모라비안 박물관(Moravian Museum)으로 남아 있고, 모라비아교 선교사들의 휴식 센터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상당수의 흑인 영가들은 당시 휫필드의 설교를 들은 흑인들이 야외 강단에서 쏟아져 나오는 위로의 말씀을 듣고 위로를 받은 후 그 내용을 계속해서 되뇌인 끝에 마침내 그것들이 한 편의 노래가 된 것들이다. 이처럼 휫필드는 흑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도우려는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 제도가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지 못했다는 것은 역사 속의 아쉬움으로 남을 뿐이다.

23. 뉴 잉글랜드에 번진 대각성의 불길


휫필드는 대륙의 중앙 부분 전역을 돌면서 야외 집회를 이끌었으며, 그 집회 때마다 수많은 백인들뿐 아니라 흑인들까지 회심시키는 역사를 이루었다. 하지만 휫필드의 설교 사역은 다시 한 번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강한 반감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당시 국교회에서는 다른 교파 사람들에게는 설교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는데, 휫필드는 모든 교파를 초월해서 자신의 집회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휫필드는 성 빌립교회(St. Philip's Church)의 주교의 권리를 위임받은 가든(Garden)이라는 대리 주교로부터 그가 불법을 행하고 있다는 실랄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가든(Garden)은 노예의 소유주들을 선동하여 휫필드를 중상모략죄로 고소할 것을 선언하면서 휫필드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그러나 휫필드 편에 선 여러 사역자들이 대중적으로 휫필드를 방어해주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예를 들면 조시아 스미스(Josiah Smith) 목사는 ‘휫필드 목사의 인품과 그의 설교’(The Character, Preaching, Etc of the Rev. Mr. Whitefield)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휫필드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음으로써 그를 적극적으로 방어하려고 했다. 스미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휫필드의 행동과 태도가 얼마나 힘 있고 예의바른 행동인지에 대해서는 구태여 말하거나 글을 쓸 필요도 없다. 몸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몸가짐에 품위가 넘쳐 흐르는 그는 분명 세련된 설교자이며 설교술의 거장이다…."

뿐만 아니라 쿠퍼(Cooper)와 콜만(Colman) 같은 사역자들은 스미스가 설교한 내용을 출판한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휫필드의 위대한 사역을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이 시대의 경이(驚異)이다. 그보다 더 자주 다른 사람의 글과 대화의 주제가 된 사람은 없다 …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토록 찬탄과 찬사를 받고 또 일부 사람들에게는 정죄와 비난을 받은 사람은 그 말고는 없다."

휫필드의 측근들의 열열한 지지와 방어에도 불구하고 탄압과 공격은 계속되었다. 가든(Garden)은 설교 때마다 휫필드를 사악한 자로 몰아붙이면서 집요하게 공격을 퍼부었고, 마침내 교회의 법정까지 소집하였다. 가든(Garden)의 속셈은 휫필드를 아예 그 지방에서 몰아낼 참이었다. 법정에 선 휫필드는 발언권을 묵살당한 채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했고, 그 법정 문제는 오랜 시간을 끌게 되었다. 그로부터 일 년 후에 교회 법정은 휫필드의 사역 정지 판결을 내렸고, ‘교회 앞에서 공개적으로 그를 탄핵할 것이라고 선언’ 하고 법정 문제를 마무리지었다.


이러한 충격적인 사건이 있은 지 얼마되지 않아서 휫필드에게 다시 한 번 실망스러운 소식들이 들려졌다. 하나는 그의 마음속에 사라지지 아니한 델라모트(Elizabeth Delamotte)에 대한 애정이 그녀의 부정적인 답변으로 인하여 무산되는 아픔이었고, 다른 하나는 웨슬리가 영국에서 분열을 조작하는 기록, 즉 ‘예정론을 반박하며’라는 설교 사본을 유포시키고 있다는 서글픈 소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휫필드의 사역은 그치지 않았다. 다만 휫필드는 지금까지 주일 오전에 영국 국교회의 예배에 출석하던 습관을 버리게 되었고, 이제는 장로 교회나 침례 교회, 독립 교회에서 집중적으로 설교하게 되었다.


휫필드는 근간에 있었던 일련의 실망스러운 사건들을 강단의 열정에 휘날려버리고 계속해서 설교 사역에 주력하였다. 그는 다시 뉴 잉글랜드 전역을 돌며 집회를 주도했는데, 교회 법정의 탄핵 결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은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휫필드가 주도하는 집회는 구름떼와 같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보스톤의 뉴 사우쓰(New South) 교회에서는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교회당 한쪽의 벽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해 다섯 사람이 죽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휫필드는 그와 같은 비극적인 사고 중에서도 군중들을 공용지로 이끌고 가서 눈물어린 설교로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휫필드의 설교는 오전과 오후와 밤낮으로 계속되었고, 종종 하버드대학교와 예일대학교의 학생들에게 설교했다. 하버드에서 휫필드의 설교를 들은 학생들이 변화된 그때의 상황을 콜만 박사(Dr. Colman)는 이렇게 증언한다.

“학교가 완전히 변했다. 학생들은 하나님으로 충만해 있다. 정말 거듭난 것 같이 보이는 학생들도 많다. 기도와 찬양 소리가 학생들의 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 … 그날 설교를 들은 백여 명의 학생 가운데 일곱 명만 아무 감동을 못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휫필드는 탁월한 설교 능력과 영적인 감화력으로 농부, 지식인, 상인, 흑인 등 각계 각층의 사람들에게 언제나 영적 각성을 줌으로써 뉴 잉글랜드의 대각성 운동을 이끌 수 있었다. 그가 보스톤을 떠나는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할 때에는 당시 보스톤 전체의 인구보다 더 많은 숫자인 이만 삼천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으니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휫필드는 보스톤을 떠나서 노쓰햄톤(Northamton)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이미 부흥 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때 에드워즈는 휫필드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1740년 2월 12일/…목사님은 가시는 곳마다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이라면 목사님과 목사님의 사역에 늘 동반되는 그 복이 이 마을 위에도 내려지기를 원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 참되고 생명력 있는 신앙을 진작시키려는 열심에 충만된 정신으로 그처럼 성공적인 사역을 하고 계시다는 소식은 정말 듣기만 해도 영혼에 새 힘이 솟습니다. 그런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영광을! … 저는 목사님과 슈어드씨가 저희 집으로 오시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그러한 손님들을 제 집에서 환대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은총이자 섭리로 여길 것입니다.


목사님의 동역자라 불릴 자격도 없는,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 드림."

에드워즈의 간곡한 부탁으로 노쓰햄톤에 머물게 된 휫필드는 나중에 에드워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에드워즈 목사님은 견실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지만 현재 몸이 약하다. 나는 뉴 잉글랜드 전역을 다녔어도 그와 같은 사람은 보지 못한 것 같다. 그가 시무하는 교회의 강대상에 섰을 때 나는 성도들이 누리는 위안과 특권, 그리고 성도들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거한다는 것 외에 무엇인가 더 말해주기에는 내가 너무나 부족함을 느꼈다."

휫필드는 그 주일의 집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740년 10월 19일/오늘 아침에 설교를 했다. 선량한 에드워즈 목사님은 설교 시간 내내 울었다 … 사람들도 동일하게 감동을 받았고, 주일 오후에는 더 큰 역사가 일어났다."

그 주일 오전과 오후에 휫필드의 설교를 들으러 온 사람들은 가게의 문을 닫고, 일터에서는 연장을 팽개치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날 노쓰햄톤에서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풍성한 은혜를 받은 그날을 자신들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 날로 여길 정도였다.
노쓰햄톤의 집회를 마친 휫필드는 에드워즈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중부 지역을 돌면서 집회를 가졌는데, 가는 곳마다 영적인 각성의 불길이 훨훨 타오르게 되었다. 그후 휫필드는 그 다음 해인 1741년 1월 16일 다시 영국을 향해 출항했고, 휫필드가 붙여놓은 뉴 잉글랜드의 대각성의 불길은 조나단 에드워즈나 길버트 테넨트 등과 같은 능력 있는 사역자들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훨훨 타올랐다.


그당시 휫필드가 이끄는 영적 대각성의 불길을 가리켜서 윌리암 쿠퍼(William Cooper)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그때(1741년 11월 쯤, 보스톤)의 상황을 잘 묘사해주고 있다

“우리에게 사도 시대가 다시 임한 것 같았다. 그의 회중들 가운데는 그 정도로 거룩한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나타났고, 그는 그 정도로 강렬하게 복음의 말씀을 증거했다."

휫필드에 의해서 당겨져서 뉴 잉글랜드 전역에 번진 대각성 운동의 불길은 마치 사도 시대가 다시 도래한 것 같았다. 당시 지성의 요람이었던 하버드와 예일대학 학생들이 휫필드의 설교를 듣고 거꾸러졌으며, 귀족이나 철학자, 정치가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변화되는 셀 수 없는 역사가 일어났으니 거룩한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누가 그 일을 이룰 수 있었으랴!

주(註)

1.「그 말씀」3월호, “6. 칼빈주의 사상 체계의 형성", pp.208~210.
2.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p.408~409.
3. 휫필드의 편지는 George Whitefield's Letters For the period 1734~1742, Reprinted from The Works of Goerge Whitefield 1771, Edinburgh: The Banner of Trust, 1976을 보라.
4. Arnold A. Dallimore, 1990, p.72.
5. George Whitefield's Journals, 6th impression 1992, p.331.
6.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406.
7. Ibid.
8. Arnold A. Dallimore, 1990, op cit.
9.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408.
10. Ibid., pp.407~408.
11. John Gillies, 1772, p.53.
12.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439.
13. 길버트가 사역했던 당시의 미국 장로교 현항에 대해서는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Ch.25. Religious Conditions in American at the Time of Whitefield's Arrival, pp.413~429; 정준기,「현대인을 위한 청교도 연구, 청교도 인물사」,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6, pp.228~236을 참조하라.
14. 정준기, 같은 책, p.236.
15. Arnold A. Dallimore, 1990, p.87.
16.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513.
17. Ibid.
18. Luke Tyerman, vol. I., 1890, p.400.
19. 휫필드는 이미 4개월 전에 그녀에게 결혼을 신청하는 편지를 보낸 바 있었다.
20. Arnold A. Dallimore, 1990, p.100.
21. Iain H. Murray, Jonathan Edwards: A New Biography,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1987, pp.157~158. cited by Arnold A. Dallimore, 1990, p.96.
22.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537.
23. Ibid., p.538.
24. Arnold A. Dallimore, 1990, p.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