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조지 휫필드

휫필드 6 - 비난받는 휫필드와 싹트는 사랑 / 송삼용 목사

새벽지기1 2016. 7. 20. 12:11


비난받는 휫필드와 싹트는 사랑

 

18. 찰스 웨슬리를 야외 설교자로 끌어들임

이 무렵 휫필드는 얼마 전에 요한 웨슬리를 브리스톨의 야외 설교자로 끌어들였던 것처럼 찰스 웨슬리를 야외 설교자로 끌어들임으로서 다시 한번 웨슬리 형제와의 우정을 꽃피웠다. 당시 찰스는 소수의 무리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면서 몇몇 교회와 공동체에서 설교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었다. 찰스는 감정이 풍부하고 지적인 성향이 강한 시적(詩的)인 사람이어서인지 휫필드와 같이 야외 집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휫필드는 찰스가 야외 설교 사역을 맡아줄 것을 기대하면서 은근히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러한 계획 가운데서 어느날 휫필드는 자신이 설교하는 야외 강단에 찰스를 데리고 나가 설교를 듣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하였다. 찰스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휫필드와 함께 블락히쓰(Black-heath) 집회에 참석했다. 그는 빛 속에 서서 귀를 귀울이며 듣고 있는 많은 청중들에게 설교했다."

블락히쓰(Blackheath)집회를 경험한지 며칠이 지난 후 찰스는 어떤 시골 지방을 방문했다가, 자기 들판에 와서 설교해달라는 한 농부의 요청을 받고 처음으로 야외 설교를 하게 되었다. 찰스는 그곳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제목으로 5백여 명 가량의 회중들 앞에서 설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이로써 휫필드의 계획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진행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찰스는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자신이 야외 설교 사역에 뛰어드는 것에 대해 쉽게 용납할 수 없었다. 하나는 그렇게 계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자신에게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였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시적(詩的)인 재능과 은사에 비추어서 야외 설교 사역은 자신에게 무거운 짐이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휫필드는 찰스의 우려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가 런던에 돌아온 다음 주일 날 아침 무어필즈(Moorfields)에서 자신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에게 설교해주기를 부탁했다. 휫필드의 부탁을 받은 찰스는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의 내적인 갈등은 계속되었다. 나는 그것이 인간적인 두려움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휫필드가 나에게 재촉하는 대로 다음 주일날 아침 야외에서 설교를 하게 되면, 나는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내 속에 세워놓았던 다리를 부숴뜨리는 셈이 될 것이다. 나는 복음과 그리스도를 위해서 한적한 곳을 찾아가 기도했다. 지금까지 나는 어느 정도 부담이 덜 되는 짐을 졌다. 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기까지 나는 결코 편안함을 누릴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두려움과 염려 가운데 있었지만. 막상 주일을 맞이했을 때 찰스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의 예상대로 모든 것을 포기했으며, 자신이 마음속에 세워놓았던 다리를 끊어버렸다. 찰스는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무어필즈에서 말씀을 기다리고 있는 천 여 명의 의지할 데 없는 죄인들을 보았다. 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는 말씀으로 그들을 주님 앞으로 초청했다. 주님은 나와 함께 하셨고 내 마음 속에 부담으로 남아 있던 짐은 사라졌다. 모든 의심과 의혹도 사라졌다. 하나님은 나의 길에 빛을 비추셨고, 이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다.”

무어필즈의 첫 집회에서 찰스는 비로소 그동안 자신이 교회의 고유의 속성에 너무 집착해왔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는 야외 설교 사역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주 후에 휫필드는 무어필즈와 케닝톤의 주일 설교 사역을 찰스에게 넘겨주었고, 그날 아침 찰스는 무어필즈에서 약 1만 명의 군중들에게, 저녁에는 케닝톤에서 약 두 배나 되는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그 후에 찰스는 계속해서 야외 설교에 주력했고, 곧바로 탁월한 설교자의 자질을 마음껏 발휘하게 되었다.


그는 한때 성공에 대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며 야외 설교를 중단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찰스가 계속되는 설교 사역을 통하여 마침내 위대한 야외 설교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생각이 일시적이었다는 것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지금까지 찰스웨슬리가 런던에서 야외 설교 사역에 뛰어든 것은 마치 요한 웨슬리가 브리스톨에서 휫필드에게 야외 설교 사역을 물려받은 것과 거의 흡사했다. 그것들은 분명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증거되기를 소원하며 살아왔던 휫필드의 우정 어린 배려에 의해서 피어난 꽃이었음에 틀림없다.

19. 옥에 티과 같은 오점들


휫필드의 생애와 사역에 있어서 지울 수 없는 한 가지 실수와 과오는 그가 조지아로 다시 건너가기 위해 런던에서 기다리며 야외 설교시역에 주력하던 해인 1739년에 있었다. 휫필드의 실수는 자신을 반대하는 성직자들과 논쟁하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휫필드는 자신을 반대하는 어떤 비난이나 공격에도 전혀 응수하지 않고 침묵해왔으나, 이제는 그러한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 휫필드는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을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어떤 사람들의 비난에 대해서도 답변을 회피했지만, 성경의 진리가 명확히 왜곡되거나 크리스천의 삶의 표준이 허물어질 때에는 분명하게 해명해왔다.


그와 같은 휫필드의 행동은 매우 바람직하고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처신이었다. 그러나 휫필드의 결점은 자신에 대한 왜곡된 소문들을 변명하는 방법에 있었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런던의 크라이스트 교회(Christ Church)의 주일 오전 예배에서 휫필드를 신랄하게 비난한 요셉 트랩 목사(Rev. Dr. Joseph Trapp)는 오후에 다른 두 곳에서 똑같은 주제로 설교하면서 휫필드에 대한 맹공격을 퍼부었다. 뿐만 아니라 그후 연속 세 주일에 걸쳐서 런던의 각 교회에서 휫필드를 비난하는 주제로 계속 설교하고 다녔다.


요셉 트랩 목사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수로서 몇 년간 봉사한 적이 있었고, 그 당시에는 런던의 세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논쟁에 있어서 자신의 입장을 주저함 없이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지적인 사람이었고, 당시에 런던에서 영향력있는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더구나 나중에 그의 그 설교는 ‘the substance of(the) four discourses’ (네 가지 담론의 실체)라는 소책자로 출판됨으로써 휫필드에 대한 일방적인 오해와 왜곡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그때 트랩 목사가 공격했던 내용 가운데 일부는 다음과 같다.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가 시골의 들판이나 도시의 거리에서 설교하고 기도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들판이나 거리에서 설교하거나, 기도하고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터무니없는 폭력으로 강단을 방해하는 것이며 평화를 깨뜨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기꾼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와 교회의 적들이다…”

트랩 목사의 공격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혹은 소책자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자극했다. 이때 휫필드는 지금까지 침묵으로 일관해왔던 자신의 입장을 바꾸어 왜곡된 부분들에 대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애썼다. 다음은 휫필드가 그당시 떠돌고 있던 왜곡된 소문들이 근거가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말한 내용 가운데 일부분이다.

“나는 우리가 성령을 받지 않고 '신생'(the new birth)교리와 열광주의에 빠졌다고 말하는 지식층의 사람들의 사악함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당신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근거해서 당신들을 비난할 것이다. 성직 안수 때에 당신들은 내가 교회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 내적으로 성령에 감동되었다는 것을 주교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당신들은 지금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행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지금 당신들은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휫필드는 반대자들에 대해서 역공격을 퍼부음으로서, 그의 의도는 옳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부분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어서 그가 옥에 티와 같은 오점을 남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실수에 대해서 휫필드는 나중에 “나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말하거나 쓰고 있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빈번하게 내 자신의 영으로 말하거나 썼던 적이 있다” 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당시에 휫필드가 범한 또 하나의 오점은 그의 일지들(Journals)을 추가로 출판한 것이었다. 그의 첫 일지 (Journal)는 조지아에서 돌아오자마자 곧 출판되었다. 휫필드의 측근에 있던 사람들은 첫 일지의 좋은 반응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말함으로써 그를 부추겨 세워 계속된 일지를 출판하도록 자극했다. 휫필드는 측근들의 격려에 힘입어 곧바로 네 번째 일지 (Fourth Journal)까지 출판했다. 그 일지들의 내용은 주로 첫 일지의 결점들을 보완하면서 조지아사역과 야외 설교 사역, 그리고 국교회로부터의 제명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아마도 휫필드와 그의 측근들이 그 일지들을 그렇게 성급하게 출판한 이유는 당시에 떠돌아다니던 왜곡된 소문과 비난 등에 대해서 해명하는 방편으로 삼기 위함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 일지들은 휫필드 자신이 나중에 인정한 바 있지만 너무 조급하고 무성의하게 씀으로서 그의 생애에 있어서 커다란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더구나 그 일지들이 쓰여질 당시 주인공은 이제 막 사역을 시작하는 초년생이었고 나이도 24세에 불과했으니, 그 일지들은 누가 봐도 무리한 출판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20. 분열의 아픔 속에 피어난 애정의 싹


1739년 한 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휫필드에게 중대한 한 해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휫필드는 그 한 해 동안 얼마나 많은 야외 집회를 이끌었으며,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공격적인 비난들이 얼마나 심했던가! 바로 그 해에 휫필드에게 또 다른 두 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하나는 교리적인 차이로 인해서 웨슬리와 결별하는 아픔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아픔가운데서도 생전 처음으로 한 여인에 대한 애정이 그의 마음 속에 싹터 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휫필드가 요한 웨슬리와 교리적인 견해 차이로 인해 서로 결별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이 결별의 사건은 두 사람의 사역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 결별의 과정을 분명하게 다루어볼 필요가 있다. 더구나 휫필드보다는 웨슬리의 사역과 교리 체계가 더 많이 소개되어진 한국 교회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두 사람 사이의 결별에 대해서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편파적인 시각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한때 웨슬리는 '페터 레인회' (Fetter Lane Religious Society)라는 모임과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그 모임은 교리나 관습에서 점점 모라비아교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임의 리더였던 피터 볼러 (Peter Boehler)가 아프리카로 떠나자 당시 모라비아교의 총수로서 모임을 이끌었던 진젠돌프(Zinzendolf)는 헨리 몰더 (Peter Hen겨 Molther)라는 리더를 독일에서 영국으로 직접 파송했다. 그러자 페터 레인회의 차기 리더를 꿈꾸고 있었던 웨슬리는 점점 그 모임에서 마음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달리모아(Arnold A. Dallimore)에 의하면 웨슬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항상 수위에 있기를 갈망하는 특성”있었다. 따라서 웨슬리가 생각할 때 그 모임에서의 자신의 동요는 전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에 그 모임에서 가르친 교리에 대해서 수용할 수 없는 부분이 드러나자 그것들을 반박하면서, 페터 레인회는 이제 모라비아교의 특징을 그대로 답습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후에 곧바로 열아홉명을 이끌고 나와 파운더리(The Founde)라는 건물에서 모임을 갖고 있던 한 공동체와 연합하여 모임을 갖게 되었다.


그 후에 웨슬리는 브리스톨에서 휫필드에게서 이어받은 야외 설교 사역에 전력했다. 휫필드는 브리스틀을 떠나오면서 웨슬리에게 예정(predestination) 교리에 관해서는 아무런 논쟁을 하지 말자고 말했다. 사실 그들은 서로 자신의 입장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휫필드는 칼빈주의(Calvinism) 신학체계의 본질을 이루는 예정론을 깊이 신봉해왔고, 웨슬리는 칼빈주의와 정반대되는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의 체계를 따르고 있었다.


그 무렵 웨슬리가 인도하는 브리스톨의 집회에서는 전에 한번도 보지 못했던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그러한 현상들은 몸부림을 치는 일종의 경련 같은 것이었는데, 웨슬리는 그것을 가리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회에서만 나타내시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확신했다. 여기에서 확신을 얻은 웨슬리는 지금까지의 침묵을 깨고 교리 문제에 대해서 휫필드가 따랐던 예정 교리를 반박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자신의 확신에 대해서 더욱 분명한 증거를 원했다. 따라서 그는 가장 사도적인 방법으로 제비뽑기 방식을 택해서 자신의 행동지침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삼으려고 생각했다. 결국 제비뽑기에서 선택된 것은 설교를 출판하라는 것이었고, 여기에서 확신을 얻은 웨슬리는 즉시 예정론을 반박하는 설교를 했다. 그날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설교함으로서 자신의 절친한 친구와의 교리적인 싸움, 곧 두 사람의 분열을 급속하게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이것은 참람함으로 가득찬 교리로서, 그 참람함은 감히 입에 담기조차 두려운 것이지만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영광과 진리의 대의(大義) 때문에 나는 침묵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나는 이 끔찍한 교리가 담겨 있는 무시무시한 참람함에 대해 약간만 언급하려 한다. 이 교리는 우리의 복 되신 주님,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를 위선자요, 사람을 속이는 자요, 상식적인 성실성조차도 없는 천박한 사람으로 제시한다. 이것이 예정론이라는 끔찍한 강령에 내포되어 있는 참람한 내용이다. 여기서 나는 마음을 정했다. 이에 덧붙여 나는 이 교리를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까지도 함께 비난하는 바이다. 그대들은 하나님을 마귀보다 나쁜 분, 마귀보다 더 그릇되고 더 잔인하며, 더 불의한 분으로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웨슬리의 결심은 비장했고, 그의 비난은 예상보다 훨씬 강도가 높았다. 그는 이미 교리의 전쟁에 뛰어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웨슬리가 예정론을 반박하며 설교했던 그날은 그동안 아름답게 피워왔던 휫필드와의 우정의 꽃이 시들어가는 불행한 시점이었다. 물론 그들의 우정이 그날 이후 송두리채 꺾여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상반된 교리적인 견해 차이 때문에 서로 다른 길을 갔을 뿐이다. 그것은 나중에 휫필드가 세상을 떠났을 때 휫필드의 부탁으로 장례예배의 설교를 웨슬리가 맡아서 하면서 사랑하는 친구의 뛰어난 자질과 그가 이룬 업적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던 것을 보면 분명하게 입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가 모라비아교도들과 결별한 것이나 오랜 친구사이였던 휫필드와 결별하게 된 근본적인 동기에 대해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웨슬리가 계속해서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과는 일체의 타협도 없이 과감하게 결별을 선언하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펼쳐온 지도자의 용단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자신과 입장을 달리하는 교리에 대해서 그렇게 맹공격을 퍼부으며 비난하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선언해야 옳았는가를 생각하면 그 당시에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웨슬리의 내면의 다른 동기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더구나 휫필드는 예정론을 반박하는 웨슬리의 설교와 그 설교에 대한 출판 소식을 듣고 충격을 금치 못하면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간곡한 편지로 더이상 논쟁을 금하고 침묵하자고 우정어린 충고를 보낸 바 있었다. 하지만 웨슬리는 자신의 생각 외에는 그 누구의 입장과도 타협할 수 없었고, 마침내 그는 계속해서 분열을 조장하는 자신의 교리를 전국에 배포했다. 이렇게 휫필드와 웨슬리가 서로 분열하게 된 저변의 정황을 면밀하게 검토해보면서 필자는 달리모아(Arnold A. Dallimore)가 내린 웨슬리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한 번 인용하고 싶다.

"그(웨슬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일종의 우월감을 갖고 있었고, 원대한 야심도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성향들이 바로 그의 모든 행동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다면 웨슬리가 휫필드의 예정 교리를 반박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이 이제 더이상 휫필드에게 ‘종속된 위치’에 속할 필요가 없다는 어느 정도의 자신감과 확신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평가일까?


웨슬리는 자신의 교리를 ‘그리스도인의 완전’ (Christian Perfection)이라고 불렀고, 그에 의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전적인 무죄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휫필드에게 있어서 그러한 가르침은 성경적인 관점에서 벗어난 위험한 교리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대신에 휫필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만 성결을 유지할 수 있다는 하나님 은혜 사상, 곧 칼빈주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따랐다. 휫펄드가 평생 동안 주장하고 따랐던 ‘은혜의 교리’ (The Doctrine of Grace)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지만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성결에 대한 휫필드의 입장을 한번 들어보자.

“복 되신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이식되어야 한다. 우리는 죄의 권세에서 건짐받는 것이지 이 생에서의 삶에 내재하는 죄의 실제로부터 건짐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야 티나 주름잡힌 것들이 없이 흠이 없게 보존되어야 하는 것이다.”

웨슬리가 심중에 갖고 있던 결별의 동기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이와 같은 교리적인 차이는 결과적으로 웨슬리로 하여금 감리교라는 새로운 분파를 창설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이 무렵에 웨슬리는 앞서 언급한 브리스톨의 뉴룸(New Room)이라는 웨슬리 예배당(Wesley Chapel)을 세워서 자신의 집회 장소로 삼았고, 런던에서는 그가 페터 레인회에서 나와 합류했던 공동체가 모임을 갖고 있었던 파운더리(Foundery)라는 건물을 자신의 활동 거점으로 삼고 집회를 주도해 나갔다.


한때 휫필드의 생애에서 활짝 피어난 우정의 꽃이 시들어갈 무렵, 이제는 그의 마음 속에 한 여인에 대한 애정이 싹터 오름으로써 고통스러운 분열의 아픔을 달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엘리자벳 델라모트(Elizabeth Delamott)라는 젊은 여인을 알고 지냈는데, 어느 사이 그 여인에 대한 애정을 억누를 수 없음을 느끼게 되었다. 사실 휫필드는 지금까지 이성과의 친분에 대해서 극히 부정적인 생각을 해온 터였는데, 지금은 자신도 모르게 그 여인에 대한 애정이 깊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휫필드는 다시 조지아로 출발할 시일이 임박해지자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웨슬리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해주어야 함을 느꼈다. 그래서 휫필드는 웨슬리가 조장해온 분열의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모든 집회는 웨슬리가 인도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이처럼 휫필드가 자신과의 결별을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교리적으로 차이가 많았던 웨슬리에게 앞으로 일 년 이상 동안 자신을 따르던 수많은 추종자들을 맡기고 또 다른 복음 사역을 위해서 미련없이 조지아로 떠났던 것은 한국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이 깊이 본받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휫필드는 과연 어떤 조직이나 지위보다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심을 둔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휫필드는 조지아로 떠날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마침내 1739년 8월 14일, 수많은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그레이브젠드(Gravesend) 항구로 갔다. 이제 그는 출항 준비를 마친 선상에 올라서서 그동안 웨슬리가 야기시킨 분열의 아픔을 끝없는 대서양 바다 위로 휘날려 보내고, 한편으로는 델라모트에 대한 깊어져 가는 애정을 마음에 간직한 채 조지아로 향하였다.


주(註)----------------------------

1. Charles Wesley's Journal. May 16, 1739. cited by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 371.
2 Charles Wesley's Journal June 23. cited by Ibid., p. 372
3. Charles Wesley's Journal, June 24. cited by Ibid.
4. Luke Tyerman, 1890. vol.Ⅰ, p. 210.
5. George Whitefield's Journals, 6th impression 1992, p. 276.
6.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 340.
7. Amold A. Dallimore. 1990. p. 66.
8. 이 부분에 관해서는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p. 321-331참조.
9. Ibid
10. 이에 대한 휫필드의 편지 내용은 「그말씀」, 3월호 "6. 칼빈주의 사상 체계의 형성" 참조.
11. Arnold A. Dallimore. 1990, pp. 67-68.
12. Arnold A. Dallimore, 1990, op. cit.
13. John Wesley, 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 London: Epworth, pp. 15~l6.
14. Arnold A. Dallimore. 1990, Ibid. pp. 6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