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조지 휫필드

휫필드 4 - 번져가는 말씀의 불꽃 / 송삼용 목사

새벽지기1 2016. 7. 17. 23:14

번져가는 말씀의 불꽃

  

10.조지아(Georgia)선교사로의 결단


런던탑 예배당(Chapel of the Tower of London)에서의 설교 사역을 마치고 옥스포드로 돌아온 휫필드는 다시 연구생활에 몰두하면서 큰 기쁨을 누리기 시작했다. 그는 하루의 일과를 세 등분해서 사용할 정도로 철저하게 시간을 관리해나갔다. 휫필드는 그의 일과를 대강 식사와 잠을 위해서 8시간, 기도시간, 방문, 교리공부 등으로 8시간, 연구와 묵상을 위해서 8시간으로 나누어서 보냄으로써1 시간을 일 분도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렇게 꽉 짜여진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는 영적으로 놀라운 기쁨을 누렸는데 그것을 이렇게 말했다.


'오! 내가 이곳에 다시 오다니 얼마나 기뿐 일인가! 내가 하나님과 매일 나누는 교제가 얼마나 놀라운지 ! 매튜 헨리 성경주석(Matth-ew Henry s Comment on the Scripture)을 읽고 기도하는 중에 은혜 속에 빠져 들어가는 시간들이 얼마나 달콤한지 ! 그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행복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여러 젊은이들이 크게 고무되어져서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서로 증진시키기 위하여 매일 내 방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2


이처럼 석사과정 (그해 7월에 B.A. 학위취득)의 학문적인 연구생활 가운데서도 휫필드가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매일 깊은 영적 세계를 경험한 것은 우리 시대의 신학도들과 목회자들에게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경건과 학문을 겸비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지만 휫필드는 그 양자를 다 겸비한 자로서 장차 한 시대를 복음의 불꽃으로 불사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었다. 옥스포드의 연구생활과 영적 생활을 통해 얻었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6주쯤 지났을 때 더머 (Du-mmer)의 교구목사로 있던 홀리클럽 출신의 찰스 킨친(Charles Kinchin)이 얼마동안 그곳에 와서 설교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휫필드는 곧바로 그 설교 요청을 수락하고 더머 (Dummer)로 갔다. 그곳은 주로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모였다는 점에서 런던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하지만 휫필드는 그곳 사람들로부터 더욱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휫필드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장차 그의 생애에 크게 영향을 끼칠 만한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결정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조지아(Georgia)에 선교사로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3


사실 이 무렵 휫필드는 런던에서 정착하여 사역하도록 초청을 받았으나 그것을 거절하고 아메리카 식민지에서의 부름을 선택했다. 휫필드는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가난했고 그의 활동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런던으로 가면 자신의 능력과 기량을 발휘해서 장차 명성을 드러낼 수도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게 되었다. 하지만 휫필드는 그와 같은 좋은 기회를 포기하고 식민지에서의 고난의 길을 선택하였다.


당시 조지아(Georgia)에는4 홀리클럽의 회원이었던 웨슬리 형제와 인캄(Benja-min Ingham)이 선교사로 가 있었다. 그들은 해외 선교사의 고난이 자신들의 구원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 줄로 생각하여 자진해서 그곳으로 갔다. 그러나 찰스 웨슬리는 일곱 달이 채 되기도 전에 죽음에 가까운 심한 시련과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잉글랜드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래서 요한 웨슬리는 홀리클럽의 회원들에게 원조의 편지를 보냈고, 휫필드는 이미 런던탑에서 사역할 때 그 편지를 받은 바 있었다.


얼마 후에 인캄 역시 식민지생활을 견딜 수 없어서 귀국하자 요한 웨슬리는 두 번째 원조의 편지를 휫필드에게 보냈는데 그는 더머 (Dummer)에서 그 편지를 받았다. 휫필드는 그 편지를 읽고는 “그것을 읽을 때 내 가슴이 뛰었고, 말하자면, 소명이 메아리쳐 울렸다”고 말했다.5 그는 첫 편지를 받은 지 두 달만에 두 번째 편지를 받았는데. 그 동안에 요한 웨슬리의 요구를 신중하게 고려하면서 하나님께서 웨슬리를 지켜주시도록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었다.6 뿐만 아니라 여러 친구들에게도 의견을 물으면서 즉각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가 어디에 있는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7


휫필드는 이처럼 조지아행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을 신중히 고려하면서도 선교사로의 결단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달리모아(Arnold A. Dallimore)는 휫필드가 선교사로 최종적인 결단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곁이 말한다. "첫째는 식민지에서의 생활을 통해서 장차 자신의 목회에 귀중한 체험을 쌓으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둘째는 사람들이 건강상의 이유로 반대한 것은 오히려 장기간의 여행이 자신의 허약한 체질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셋째는 선교사로 간다고 해도 일 년 후면 목사 안수의식을 위해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을 고려한 끝에 마침내 휫필드는 조지아로 가기로 결심했으니 어떤 사람도 그의 결정이 충동적이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휫필드가 선교사로 결단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이것들이 전부라면 '과연 그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선교적 소명을 가쳤는가' , 혹은'그를 과연 선교사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더구나 상당수의 전기 작가들이 휫필드의 조지아행을 단순한 방문으로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휫필드의 최초의 전기 작가인 길리스 박사(Dr.Gillies)는 휫필드의 조지아행을 단순히 웨슬리의 요구에 응해서 그곳에 가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천이백 쪽(I.II)의 방대 한 분량의 전기를 쓴 티어 만(Luke Tyerman)역시 같은 입장이다. '"하지만 가장 최근의 휫필드 전기 작가로서 천이백 쪽(상, 하)의 전기를 쓴 달리모아(nold A. Dallimore)는 휫필드의 조지아행을 선교적 결단으로 간주하면서 휫필드가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 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


달리모아는 자신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휫필드의 조지아행의 결단에 대한 이유를 선교사로의 결단으로 보기는 어려운 몇 가지를 제시함으로써 스스로 논리적인 결함에 빠진 듯하다. 하지만 휫필드가 복음을 들고 자국이 아닌 해외로 갔다는 점, 그가 아메리카에 가서 복음의 불꽃을 지피웠다는 점 등은 그가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했다고 말하기에 조금도 어색한 면이 없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달리모아의 주장을 이해하며 필자도 그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휫필드의 조지아행을 가리켜 선교사로의 결단이라 지칭하는 것이다.

11.온 나라를 놀라게 한 능력있는 설교


휫필드는 지체 없이 조지아로 떠나려고 마음먹고 준비했다. 하지만 보이지 아니한 장애물이 그의 출발을 저지함으로써 그는1737년 거의 한 해를 영국에서 머물게 되었다. 조지아행의 책임자였던 오글토프(Oglethorpe)대령이 출발 준비가 되지 않아 저 배가 출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것은 휫필드가 말씀의 불씨를 던져 영국교회에 새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성령에 사로잡힌 능력 있는 설교로 온 나라를 떠들석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 해는 휫필드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해였다.


휫필드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모인 청중들의 수나 그의 불같은 설교, 그리고 청중들의 반응 등은 영국 교회에서 전에 볼 수없었던 새로운 현상들이었다. 휫필드가 설교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의 탁월한 웅변력과 제스처, 풍부한 성량, 극적인 표현력 등에 의해서 매료되었다. 따라서 그가 가는곳 마다 엄청난 수의 인파가 몰려들어서 들어갈 자리가 없었고 심지어 되돌아가는 사람까지도 많았다. 휫필드의 설교 사역이 이제 막 시작되는 초기단계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의 눈은 그에게 집중되었고, 그의 명성은 브리스톨, 런던. 글로스터, 그 외의 여러 곳에 급속하게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휫필드는 조지아로 떠나기 앞서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하여 브리스톨에 갔는데, 그곳 사람들은 계속에서 자기들과 함께 머물러 달라는 부탁을 간곡하게 했다. 하지만 휫필드는 그들의 부탁을 듣고 브리스틀에 주저앉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휫필드는 런던으로 돌아간 후 아메리카로 떠날 날을 기다리며 다시 브리스톨을 방문해서 4주 동안 설교했다. 그때 브리스톨의 수많은 사람들은 휫필드가 다시 브리스톨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맞으러 도시 외부로부터 도보로 또는 마차를 타고 몰려왔다. " 브리스톨에서 그는 여러 교회의 초청을 받아 설교하였는데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보통 때처럼 일주일에 약 다섯 번 정도 설교했다. 그런데 청중들은 점점 늘어났다. 사람들이 높은 오르간 난간에 매달려 있으며, 심지어 교회의 함석지붕으로 기어 올라갔고, 교회 전제가 그들의 숨결로 너무 뜨겁게 달아올라 곳곳의 기둥에서 물기가 마치 빗방울처럼 떨어지는 광경은 정말 놀라웠다. 교회의 공간이 비좁아 거의 매번 많은 사람들이 되돌아갔고, 때로는 설교자인 나도 기도서를 읽거나 설교하기 위해서 강대상 앞으로 걸어 나가려고 할 때 대단히 힘들 정도였다. 모든 교파의 사람들이 설교를 듣기 위해서 모여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설교를 들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집으로 나를 개인적으로 초대했다.


4주 동안 브리스톨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휫필드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서 조지아로 떠날 날을 기다리며 몇 달 동안 계속해서 설교 사역에 전력하였다. 휫필드는 그 무렵의 사역에 관해 이렇게 진술했다.


'회중들은 계속해서 늘어났고, 두세 번씩 기도문을 읽는 것 외에 나는 보통 주일에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네 번씩 설교하면서 그들을 감동시키곤 했고, 이 교회 저 교회로 옮겨 다니느라 아마도 20킬로는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발걸음을 암사슴의 발걸음처럼 가볍게 하셨고, 하루의 사역을 마칠 때면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거의 세 달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최중이 운집해있는 광경은 경이로웠다‥‥ 나는 보통 일 주일에 아홉 번은 설교했다. "14


이제 휫필드는 더 이상 평범한 설교자가 아니었다. 그는 공적으로 설교를 시작한지 일 년이 안된 짧은 기간에 영국 교회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비범한 설교자로 인정을 받은 셈이었다. 그의 인기는 순식간에 절정에 올랐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 휫필드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그의 진술을 직접 들어보자.


“인기의 물결은 매우 높게 일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나는 보통 때처럼 거리를 걸을 수도 없게 되어 환호하는 군중들을 피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이동해 다녀야 했다. "15


이처럼 휫필드의 인기가 절정에 오르자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성직자의 그룹에서 반발이 심했는데 몇 명의 목사들은 "휫필드를 더 이상 강단에 세워서는 안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16 물론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휫필드가 설교한 '영적 신생' (spiritual new birth)이나 '믿음에 의한 의' (justification by faith)등의 주제는 영국 교회의 교리적 내용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기독교 예전이나 의식을 중시하는 영국 교회의 전통으로 보면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 신생이나 거듭남은 더 이상 요구될 수 없는 쓸데없는 용어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반발한 실제적인 이유는 이제 설교 및 사역훈련을 받아야 할 풋내기 사역자에게 쏟아진 인기에 대한 시기와 노련한 목회자들의 꺾여진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인기의 절정에 있던 휫필드가 어떻게 자신을 관리했는가는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주제이다. 그는 분명 자신이 원하기만 했으면 그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고백에서 볼 수 있듯이 휫필드는 자기 자신과 싸우면서 피어오르는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려고 피나는 노력을 했다. 여기에서 필자는 휫필드가 어떻게 해서 그처럼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오르는 세상의 인기를 물리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두 가지 측면으로 생각해보려고 한다.

첫째, 그가 경험한 영적인 풍성함은 세상의 인기를 물리치기에 충분했다. 휫필드는 종종 영적인 황홀경을 맛볼 정도로 풍성한 영적 경험을 가짐으로써 세상의 것들을 분토처럼 포기할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그가 처음에 브리스톨에서 4주 동안 사역하고 난 후 글로스터 지역의 스톤하우스(Stonehouse)에 머물면서 누렸던 영적 기쁨에 대한 그의 진술은 당시의 영적인 상태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려준다.


"이른 아침과 점심, 저녁, 그리고 새벽, 아니 하루 종일 복된 예수께서 내 마음에 찾아와 새롭게 하셨다. 스톤하우스 근처수풀의 나무들은 내가 복되신 하나님과 누렸던 교제가 얼마나 달콤했는지 말할 수 있었으리라! 때때로 산책을 할 때면 내 영혼이 마치 내 몸에서 빠져나갈 것처럼 강하게 용솟음쳤다. 또 어떤 때 나는 하나님의 무한한 위엄에 너무나 압도되어 땅에 엎드려내 자신을 억누르며 내 영혼을 그분의 손에 백지로 드려 그분께서 쓰고자하는 것을 그 위에 쓰시도록 했다. "17


여기에서 사용한 ‘달콤한 하나님과의 교제' 란 말은 휫필드가 종종 사용하던 말이다. 이것은 그가 늘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면서 영적인 황홀경의 경지에 이르는 경험을 여러 차례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와 같은 휫필드의 풍성한 영적인 경험은 세상의 인기를 능히 극복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둘째, 그의 끊임없는 기도의 생활은 치솟아 오르는 세상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었다. 휫필드는 솟아오르는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다음의 진술은 휫필드가 절정에 오른 인기의 유혹에 물들지 않으려고 얼마나 자신을 철저히 다스리고, 간절히 기도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환호는 점점 더 커졌기에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대제사장이 안계셨더라면 그 인기가 아마 나를 파멸시켰을 것이다. 나는 그분께서 내 손을 붙잡고 이 격렬히 타오르는 용광로 사이로 무사히 인도해주실 것을 간구하곤 했다. 그분은 내 간구를 들으셨고, 그분의 칭찬 외에는 모든 찬사가 다 헛된 것임을 알게 해주셨다. "18


그 무렵 휫필드가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쁜 설교 시적 가운데서도 기도생활로 자신의 영성을 판리하면서 밀려오는 세상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근거는 다음의 진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어느 날 우리 는 기도와 찬양으로 온 밤을 지새웠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설교하고, 글 쓰고, 대화하느라 거의 죽음에 이르도록 지쳐 있는 가운데서도 아침에 한 시간, 그리고 한밤중까지 여러 시간씩 기도했으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내 영혼에 새 생명을 부여해주셨다‥‥"19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휫필드의 능력 있는 설교는 단순히 그의 탁월한 웅변술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무릅쓴 은밀한 기도의 열매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기도생활을 통해서 맛본 영적 기쁨과 환희는 봇물처럼 밀려오는 세상의 유혹과 족히 비교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기에 휫필드는 세상의 것들을 초개처럼 버리고 평생 동안 오직 복음이 전해지는 일에만 관심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

12.조지아로 번진 말씀의 불꽃


런던에서의 설교사역은 12월 말 조지아로 출항하기까지 4개월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리고 나서 휫필드는 마침내 1737년 12월 30일 아메리카의 조피아행 윗태커(Whitaker)호를 타고 그를 환송 나온 수많은 사람들과 다음과 같이 기도하면서 작별의 눈물의 나누었다.


"하나님 ! 제게 깊은 겸손과 잘 절제된 열심과 타오르는 사람과 오직 한길만 바라보는 눈을 주옵소서. 그러면 그 어떤 사람이 심지어 마귀들도 나를 방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20

휫필드를 태운 윗태커 (Whitaker)호는 런던을 떠나 별(Deal)항에 정박하고 있다가 다음 해 2월 2일 조지아로 출항했다. 이미 복음의 불씨를 떨어뜨려 영국 곳곳을 말씀으로 불태운 휫필드는 선상에까지도 그 불길을 번지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뜨겁게 타오른 휫필드의 가슴이 쉽게 식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배 안에서 의자 위에 두꺼운 판자를 깔고 강대상을 만들어서 매일 배 안에 있는 백여 명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을 향하여 설교했다. 선상에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불같은 말씀을 전하고 있는 휫필드나 그 말씀에 매료되어 넋을 잃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배에 올라앉으신 주님과 그 말씀을 기다리며 바닷가에 앉아 있던 수많은 무리들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은가! 육지에서 타오른 말씀의 불꽃이 이제는 선상 예배당의 무리들에게까지 번지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휫필드는 요리문답반, 성경공부반, 주기도강해반 등을 만들어서 진행했으며 , 때로는 밤늦게까지 신앙의 각종 주제를 가지고 선상에서 토론하곤 했다


한때 배 안에는 모든 사람들이 유행성열병으로 인하여 커다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때 휫필드는 밤낮으로 환자들을 돌보다가 자신이 열병으로 눕게 되었다.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은 자기 몸을 돌아볼 겨를이 없게 만든 것이다. 그 열병은 휫필드를 죽음으로 몰아쳐가는 듯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나중에 그는 그때 자신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영광을 얻기에는 내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분께서는 아셨다. 그래서 자비로써 나를 살려주신 것이다. "21


윗태커(Whitaker)호는 영국을 떠난지 넉 달 만에 마침내 조지아 항에 닻을 내렸다. 식민 대륙에 상륙한 휫필드는 다음날 아침 다섯 시에 오십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첫 예배를 드렸다. 그의 사역의 첫 시간을 예배로 시작한 것은 장래의 모든 사역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신앙적 결단이었다. 그가 대륙에 도착한지 5주 후에 글로스터에 있는 그의 친구 하리스(Harris)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일부는 당시 조지아의 상황과 그의 사역에 대해서 알려준다.


“아메리카는 알려진 것처럼 그렇게 무서운 곳이 아니네. 날씨가 덥다거나 땅바닥에서 자야 한다는 것 등은 단지 길가에 그려진 그림 호랑이와 같은 것이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충만한 영혼에게는 그런 것은 언급할 만한 가치조차 없는 것들이라네.‥‥나의 사역에 관해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분명한 보장을 해주셨다네. 우리는 우수한 크리스천 학교를 가졌고, 거의 백여 명이 매일 저녁 기도모임에 참여하고 있다네 ‥‥ 나는 매일 각 가정을 심방하고, 요리문답을 가르치며, 두 차례씩 기도문을 읽고, 사람들이 가득 모인 집에서 한 주일에 세 번씩 신약성경을 강해하고 있다네. 새벽 다섯 시에는 성경강해를 시작하고, 기도문을 읽으며. 주일에는 아침 일곱 시부터 두 번씩 설교하고, 노예들에게는 저녁 일곱 시에 교리문담을 가르치고 있다네."22


뿐만 아니라 식민 대륙의 사무관인 월리엄 스티븐스(William Stephens)는 다음과 같이 휫필드의 사역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5월 21일/휫필드씨는 이날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했고, 그는 일적이 그곳에서 볼 수 없었던 가장 많이 모인 회중들에게 설교하였다. 5월 28일/휫필드씨는 그의 사역을 통하여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6월 4일/휫필드 씨의 청중의 수가 매일 불어난다. 그의 교리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을 수용하기에는 예배 장소가 너무 좁다. 6월 18일/휫필드씨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강론으로 사람들을 계속 감동 시켰다.‥.7월 2일/ 휫필드 씨는 그의 수고와 따뜻한 배려로 직분을 이행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점점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23

이처럼 휫필드가 지피운 복음의 불길은 선상에서 다시 조지아로 번져나가면서 날이 갈수록 점점 뜨겁게 타올랐다. 조지아에 붙여진 말씀의 불꽃은 이제 머지않아 아메리카에 비춰질 복음의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조지아에서의 사역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오갈 데 없는 그곳의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서 영국에 돌아가고 고아원을 세울 수 있는 설립 허가서와 기금을 마련해오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을 소유한 휫필드는 죽어가는 어린 영혼들을 그대로 방치해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계획 때문에 휫필드는 조지아에서의 사역을 다섯 달 만에 그치고 다시 영국행 배를 致다. 하지만 영국으로 돌아오는 석 달 동안의 항해 길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큰 폭풍우로 인한 배의 파손과 굶주림과 갈증, 그리고 방향을 잃은 표류 등으로 죽을 고비에까지 이르렀으나 석 달 간의 사투 끝에 극적으로 영국의 파크게이트(Parkgate)항에 도착했다. 그날은 휫필드가 영국을 떠난지 꼭 열한 달 만인 1738년 11월 30일이었다.

13.야외로 퍼져나간 복음의 불길


영국에 도착한지 일주일 후인 1738년 12월 8일 휫필드는 런던에 다시 돌아왔다. 휫필드가 다시 런던에 왔다는 소식은 그의 친구들에게 큰 기쁨과 기대를 안겨주었다. 따라서 옥스포드에 있던 웨슬리 형제와 다른 네 명의 홀리클럽의 회원들은 휫필드를 만나러 런던으로 달려왔다. 이미 그들의 가슴은 복음의 불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불타는 열심은 나중에 휫필드와 함께 때때로 기도로 밤을 꼬박 새울 정도로 꺼질 줄 몰랐다. 24 횟필드는 긴 항해가운데서 누적된 피로가 풀리기도 전에 여러 곳으로부터 설교 요청을 받았다. 그의 일지(Joumal)의 내용을 보면 그의 사역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12월 24일/저녁에 두 번 설교하고 크룩트 레인회 (Crooked Lane Society)로 갔다 ‥‥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여서 새벽 네 시까지 기도와 시편 읽기와 감사가 계속되었다.12월2쓴 오늘 아침 네 시 경에 레드크로스 거리 (Redcross Street)에 있는 이삼백 명이 모여 있는 다른 공동체로 가서 기도하고 강론했다 ‥‥.12월 30일/이번 주에는 아홉 번 설교했고 열여덟 번쯤 강론했다.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빽빽히 짜며진 시간을 보냈다. 모임에 찾아든 사람들은 끝이 없었다. 그들은 갓난 어린 아이처럼 신실한 말씀의 젖을 먹기 위하여 더욱 사모하였다.12월31일/특히 스피탈펄드(Spitalfield)에서 오후에 거대한 회중들에게 두 번 설교했다. 나는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크게 목이 쉬어서 자신을 잃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나를 강하게 해주셨다. 그 후 나는 큰 감기 때문에 설교하기에는 절망적인 상태였으나 하나님께서 사우쓰웍 (South-wark)에 있는 두 곳에 서 말씀을 강론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25


휫필드는 1월 초 영국 교회의 제2단계안수, 곧 사제(priest)안수의식에 참여하기 위해서 옥스포드펄 갔다. 사실상 휫필드가 비록 제1단계 안수 때 집사(deacon)로 임직되었다 할지라도 이미 그는 '소년목사' (a boy parson)의 칭호를 얻은 자로서 사제 안수를 받은 어떤 사람보다 더 놀라운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휫필드는 영국교회의 정한 법에 따라 안수식에 참여함으로서 본격적인 목회자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휫필드에게 안수를 준 사람은 집사 안수 때 의식을 집례했던 벤손 주교(Bishop Benson)였다. 그는 안수하면서 휫필드를 위해 기도하기를 하나님께서 이 종을 붙드시사 인류의 선과 이 타락한 시대의 참된 기독교의 부흥을 위해서 행하는 모든 일에 위대한 성공을 주시도록 축복했다. 26


사제로 안수를 받고 새로운 사역에 뛰어들고자 하는 꿈에 불타 있던 휫필드는 자신의 위치가 조지아를 떠나기 전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영국 교회의 많은 성직자들이 휫필드를 달갑지 않게여겼고. 그를 열광주의자나 광신주의자로 몰아 부쳤기 때문이다. 그러한 반감은 성직자의 그룹뿐만 아니라 평신도 지도자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심지어 '질서의 파괴' (breaches of order)라고 부르짖으며 분개할 정도였다. 『 그러한 이유 때문에 전에 자신을 초청했던 여러 교회들이 차츰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휫필드는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알아차린 휫필드는 그의 사역의 방향을 바꾸려고 마음먹었다. 얼마 전부터 휫필드는 야외설교를 구상하면서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야말로 야외설교를 시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음의 진술은 휫필드가 야외설교를 고려하게 된 당시의 배경을 잘 묘사해주고 있다.


'오후에 나는 큰 능력과 명쾌함으로 가득 메운 청중들에게 두 번 설교했다. 그때 나는 천여 명이 교회 뜰에 있었지만 들어올 수 없었던 백여 병 이상의 사람들이 되돌아갔다고 믿었다.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야외설교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배경이다. '" 내가 한 친구에게 그것을 이야기했으나 그는 미친 짓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일도 성급하게 이루어지지 않도록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29 기도로 준비했던 그의 꿈이 이제야 그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최초의 야외설교는 19년 2월 브리스톨의 킹스우(Kingswood)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은 브리스툴의 외곽에 있는 넓은 석탄채굴지역으로 수백 명의 광산 노동자들이 힘겨운 노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학교나 교회가 없어서 배움의 기회나 신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브리스톨로 몰려가서 폭력을 일삼기도 하였다. 휫필드는 브리스톨에 도착한 후 그의 동역자 슈어드(William Seward)와 함께 집집마다 방문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한함산(Hanham Mount)에는 약 이백 명 가량의 사람들이 모였고, 휫필드는 만의 얕은 언덕에 서서 마태복음 5장 1-3절의 본문으로 설교했다. 설교를 마친 휫필드는 당시의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노라! 이제 나는 드디어 일을 시작했다! 내가 야외에서 청중들을 가르칠 때 사람들은 주님을 배척했던 것처럼 나를 배척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지 못할 것이다. "50


휫필드가 한함산에서 최초로 가졌던 야외설교의 소문은 급속하게 번져서 다음주 수요일에 다시 열린 집회에는 이천 명 가량의 군중들이 모여 들었다. 금요일에는 사천여명이 운집했고, 주일에는 휫필드가 아침 여섯 시부터 다른 교회에서 세 차례의 설교를 마친 후 오후 네 시경에 그곳으로 갔는데 약 만여 명이 모여 있었다. 휫필드는 그때 군중들이 모여든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무와 울타리에도 사람들이 가득 올라 서 있었다. 내가 설교를 시작하자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태양은 밝게 빛났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한 시간 동안 놀라운 능력으로 설교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며, 또 나중에 들으니 내 목소리가 아주 커서 모든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31

야외집회에 참석한 대부분의 군중들은 탄광에서 바로 나와 시커먼 얼굴을 내민 채 때로는 잔잔한 파도 같은 위로의 말씀을 들으며 감격했고, 때로는 불같은 메시지를 들으면서 가슴을 치며 통회할 때 그 시커먼 얼굴은 눈물 자국과 범벅이 되어진 풍경을 이루기도 했다. 탄광촌의 가난한 사람들은 복음의 메시지를 생전 처음 들어 보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사람의 강연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한결같이 능력에 사로잡힌 휫필드의 메시지는 분명 하늘에서 메아리쳐 온신의 음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 그 복음의 불길은 교회당에서 야외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복음의 불길 앞에서 휫필드는 자신의 젊음을 불태우고 싶은 열망뿐이었다. 한함산에 모여든 수천 수만의 군중들이 복음을 듣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앉아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야외의 조립식 강단에 선 휫필드의 가슴은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이 산에 타오르는 복음의 불길이여 ! 킹스우드와 브리스톨, 그리고 잉글랜드를 태우소서!”


주(註)-

1. John Gillies, Memoirs of the Life of the Reverend George Whitefield, M.A London. Edward and Charies Dilly, 1772, P. 11.2. George Wbitefield' s journals, 6th impression1992, P 78.
3. 휫필드의 선교에 관해서는 Walter B. T Douglas, George Wbitefield: Tbe Man and His Mission을 참고하라.
4 아메리카의 조지아(Georgia)는 영국인 오글토프(0glethorpe) 대령이 박애주의 정신을 가지고 채무자들의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들이 재정착할 수 있거나 가톨릭의 박해를 겪은 유럽인들이 피난처로 삼을수 있는 곳으로 만들려고 터를 닦았던 곳이다 Arno-IdA. Da11imore, 1990, P. 27.
5 Arnold A. Dallimore, 1970(repinted 1995), P107.
6 ibid., P 108
7 ibid.
8.참조 Arnold A. Dallimore, 1990, P. 28.9 'Providence, at length, seemes to open a door to him, for he received letters,, containing what he thought to be an invitation, to go to Georgia, from Mr. John Wesley, ." , John Gillies, 1772, op cit.
10. "In such a frame of mind and heart, young Whitefield went to Georgia, No wonder that he prospered", Luke Tyerman, 1890, P. 105.
11. While at Dummer Whitefield made one of the most far-reaching decisions of his whole career. it largely governed the rest of his days on earth. This was his decision to become a missionary to Georgy.", Arnold A. Dallimore, 1970(reprmted 1995), P. 112.
I2. James Paterson Gledstone, 1900, P. 43.
13. George Whitefield's journals, 6th impression1992, P. 84.
14. ibid., PP. 87-89.
15.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133
l6. John Gi11ies,1772,P,15
17. George Whitefield' s journals, 6th impression1992, P. 83.
18. Arnold A. Dallimore, 1970(rephnted 1995), op
19 The Joumals of George Whitefield, edited by Robert Backhouse, London: Hodder&Stou-ghton,1993,P.43
20. Amold A. Dallimore, 1990, P 33.21. ibid., P. 39.
22. Arnold A. Dallimore, 1970(repnnted 1995), P.202.
23. Collections of the Georgia Histoncal Society, The Journal of Secretary Stephens, Supplement to Vo14, entries of dates indicated, 1738, cited by ibid., PP. 202-3.
24.John Gillies, 1772, P. 34, note. x.
25. George Whitefield's Joumats, 6th impression1992, PP.194-5.
26 Arnold A. Dallimore, 1970(repnnted 1995), P.223.
27. J. C. Ryle, Repnnted 1990(First published1885), P. 37. Arnold A. Dallimore, 1970(repnnted 1995),pp.233-249.
28. 하지만 달리모아(Amold A. Dallimore)는 야외설교라는 아이디어는 원래 휫필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당시에 웨일즈에서 역동적인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던 호웰 하리스(Howell Harris)와서 신 교환을 통해서 얻게 된 아이디어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Amold A. Dallimore, 1970(repinted 1995).pp233-249
29. George Whitefield's Joumats, 6th impression1992, P.200.
30. ibid., P. 216.
31. ibid, P. 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