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조지 휫필드

휫필드 1 - 조지 휫필드와 그의 어린 시절 / 송삼용 목사

새벽지기1 2016. 7. 14. 07:22


조지 휫필드와 그의 어린 시절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의 설교를 읽을 때, 나는 일생 동안 진정으로 설교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느낀다. "이 말은 일찍이 20세기 개혁신학의 가장 위대한 설교가라는 평가를 받은바 있는 로이드 존스(D.M. Lloyd Jones)가 했던 고백이다. 마지막 청교도라고 불리는 탁월한 설교자, 로이드 존스 목사가 18세기 한 설교자의 설교들을 읽고 나서 “조지 휫필드야말로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가였다.”라고 극찬한 사실에 우리 모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뛰어난 설교학자인 다간(E. C. Dargan)역시 '사도시대 이후 설교의 역사를 더듬어 볼 때 휫필드만큼 위대한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라고 평가함으로써 설교자로서 휫필드의 위대성을 입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점은, 18세기 영국교회의 강단에 그렇게 뜨거운 불꽃을 지폈던 명설교자 휫필드가 정작 교회사가들에게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1.조지 휫필드가 잊혀진 이유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휫필드가 역사 속에서 잊혀지거나 오해를 받아온 이유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측면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그의 겸손함에 기인한다. 휫필드는 마치 캘빈(J. Calvin)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무덤을 남기지 말라고 했던 것처럼 겸손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다음과 같은 휫필드의 고백들은 그의 겸손한 인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내 이름은 사라지게 하고, 모든 사람의 발길 아래 짓밟히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화롭게 될 수 있다면….내 이름은 모든 곳에서 죽어 없어지게 하고, 내 친구들에게서 조차도 나를 잊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복 되신 그리스도의 대의(cause)가 증진 될 수만 있다면….”


위의 고백에서 볼 수 있듯이, 휫필드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는 것 외에는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휫필드는 그리스도의 이름보다 자신의 이름이 더 높아질 것을 우려하면서 자신의 대부분의 설교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고, 저술활동 역시 거의 갖지 않았다. 따라서 왕성한 저술과 설교를 기록으로 남긴 존 웨슬리(John Wesley)에 견주어서 휫필드는 자연스럽게 후대 사람들에게 잊혀져 간 것이다.


둘째는 존 웨슬리에 비하여 휫필드가 조직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존 웨슬리는 휫필드와 같은 뛰어난 성대나 극적인 웅변술을 소유하지 못했고, 설교할 때 모인 회중의 수도 휫필드가 설교할 때보다 적은 수가 모였다. 따라서 휫필드는 탁월한 웅변력으로 그에게 모여든 엄청난 수의 청중을 사로잡았지만 존 웨슬리의 초기사역은 그렇지 못하였다. 달리모아(Arnold A. Dallimore)에 의하면 존 웨슬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항상 휫필드보다 한 수 아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소원했던 휫필드는 웨슬리 형제를 야외 설교사역으로 끌여들여서 그들에게 사역을 맡겼다.


휫필드의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존 웨슬리는 휫필드와 교리상의 문제로 결별하게 된다. 이 때 웨슬리는 남다른 공명심과 뛰어난 조직력을 발휘하여 감리교를 창설한 후 지속된 조직을 남겼으나, 휫필드는 오직 복음전파에 만족하고 교파나 조직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위대한 설교자 휫필드가 잊혀진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휫필드가 늘 중요시한 것은 구원의 복음을 설교하는 사람들의 연합이었다. 그래서 한 때 그가 브리스틀에 위치한 킹스우드(Kingswood)에서 광산촌에서 일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학교를 세웠을 때에도 사심 없이 모든 교육과 조직 관리를 존 케닉 (John Cennick)에게 넘겨주었다. 그 덕분에 나중에 존 케닉(John Cennick)은 매 주일마다 3,4천 명의 회중 앞에서 설교하게 되었고, 심지어 웨슬리는 그 학교의 소유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 조직을 결성한 결과 브리스틀의 감리교도들(Methodists)의 지도자가 되었다.


사실 휫필드는 마음만 먹으면 잉글랜드,웨일즈, 스코틀랜드 등 어느 곳에서든지 조직을 구성해서 당시 구름 떼처럼 몰려든 회중들의 지도자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휫필드가 활발하게 사역할 때 각 곳에서 결성된 여러 공동체에서 자신들이 휫필드의 지도 아래 있고 싶다는 소망을 전해왔다고 한다. 그래서 한동안 휫필드는 그러한 공동체를 각 지역에 정착시키는데 동의했고, 그것은 '휫필드의 감리교 공동체' (Whitefieldian Methodist Society)라 되었다(나중에 그것은 영국 전역에 60여 개 이상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당시에 여러 사람들이 '휫필드의 감리교 공동체' 를 효율적으로 조직화하기 위해서 휫필드에게 그 모임에 참석해줄 것을 부탁하였지만, 휫필드는 자신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전력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그러한 공동체는 '캘빈주의적 감리교 협회' (The Calvinistic Methodist Association)라는 모임으로 발전하여 휫필드를 의장으로 추대하기도 했으나, 1750년에 그는 그 모든 지도자 역할을 그만두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휫필드는 끊임없는 웨슬리의 전략적인 비난과 방해를 받으면서도 어떤 조직을 만들어 세력대결을 하고자 하지 않았다. 휫필드는 모든 결과는 후일 마지막 심판 날에 드러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내 명성을 깨끗하게 지워버릴 심판의 날까지 기다리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리고 내가 죽은 후에 다음과 같은 말 이상은 기록하지 말아라. ‘여기 조지 휫필드 잠들다. 위대한 심판의 날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밝혀줄 것이다.’”


이와 같은 신념으로 휫필드는 오직 복음 전하는 일과 연합을 위해서만 필사적인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조직력을 구성하는데 탁월했던 요한 웨슬리는 감리교도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그 명성이 부각되어왔지만 휫필드의 명성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세째는 휫필드의 설교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 때문이었다. 휫필드가 죽기 2년 전(1768년) 요셉 거니(Joseph Gurney)라는 사람이 휫필드의 설교 18편을 속기로 받아 적어서 「휫필드의 설교」라는 책으로 출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사자인 휫필드는 나중에야 그 책을 보게 되었고, 그 책에 많은 결함과 문제점들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 책의 출판을 금한다고 선언했다.


그 이유는 요셉 거니(Joseph Gurney)가 속기로 적는 과정에서 잘못 옮겨 적는 부분이 많았고, 내용에 있어서도 휫필드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거니(Gurney)의 견해가 많이 들어가 상당히 왜곡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수요일 저녁의 성경공부식 담화는 설교라기보다는 대화에 가까운 것들이었기에 그것들을 자신의 설교로 공식 출판하기에는 어려운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휫필드의 측근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설교들은 정서나 표현에 있어서 휫필드의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할 정도로 그 설교집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그 설교집은 한 세기 동안 재판되었고, 그의 설교를 듣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휫필드 설교를 오해하게 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말았다. 더구나 나중에는 그 18편의 설교가, 널리 읽혀졌던 휫필드의 다른 설교 75편과 함께 출판되어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휫필드에 관한 그릇된 이미지를 심어주게 된 것이다.


넷째는 초기 전기 작가들의 영향 때문이었다. 휫필드의 최초의 전기는 그가 죽은 지 2년 후인 1772년 길리스박사(Dr.Gillies)가 쓴 「조지 휫필드 목사 생애의 약전(略傳)」(Memoirs of the Life of the Reverend George Whitefield, M.A.,)London: Edward & Charles Dilly)였다. 길리스박사( Dr. Gillies)는 거의 30년 동안 휫필드를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고, 휫필드에게 관련된 서류들도 약간 가지고 있었으며, 휫필드를 알고 있는 백여 명의 사람들에게 직접 정보를 듣고 전기를 썼기 때문에 아주 설득력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그 외 작품은357페이지 분량의 간략한 전기였기 때문에 휫필드 생애의 중요한 부분들을 다루지 못한 약점을 갖고 있었다.


다음으로 휫필드를 소개했던 작품은 당시 영국의 계관시인이었던 로버트 사우씨(Robert Southey)가 쓴 「웨슬리의 생애」(The Life of Welesy, vol.2, London: Longmans, 1858)였다. 이 책은 저자의 탁월한 문학적인 필체로 잘 쓰여졌지만, 휫필드와 웨슬리의 관계를 피상적으로 소개한 약점이 있었다. 이 책은 처음 나왔을 때 감리교도(the Methodist)들에 의해서 심하게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웨슬리의 명성이 드러나는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로버트 사우씨(Robert Southey)의 불확실한 판단과 잘못된 진술에 의해서 휫필드의 명성은 치명적인 손실을 입게 되었다.


예를 들면, 휫필드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 받았던 한 젊은 친구(이름 철자가 W로 시작함)가 있었는데, 휫필드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 다소 심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편지를 쓴 적이 있었다.


“당신은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 더 겸손하고, 말을 적게 하고, 생각을 신중히 하며, 기도를 더 많이 하시오”


그런데 로버트 사우씨(Robert Southey)는 그 편지가 웨슬리(Welesy)에게 쓰여진 것이라고 공개하면서, 휫필드가 비열한 태도로 웨슬리를 공격했으며, 휫필드는 교만하기 이를 데 없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그 후에 여러 전기 작가들이 검증도하지 않고 휫필드가 웨슬리에게 보낸 편지라고 단정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휫필드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게 했다. 로버트 사우씨(Robert Southey)이후에, 로버트 필립(Robert Philip)이라는 사람이「휫필드의 생애」(The Life and Times of the Reverend Georse Whitefield, M.A., London: Paternoster Row,1838)를 썼다. 로버트 필립(Robert Philip)은 이 작품을 쓰면서 휫필드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졌지만 결국 연대기에 있어서 혼동된 정보만을 제공하고 말았다.

휫필드는 그가 죽은 이후 한 세기 동안, 이와 같은 전기들과 얼마 되지 않은 설교들, 그리고 휫필드 자신이 쓴 저널(Journals)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하지만 길리스박사(Dr. Gillies)의 제한된 정보, 로버트 사우씨(Robert Southey)의 잘못된 진술과 오해, 로버트 필립(RobertPhilip)의 혼동된 연대기 등으로 휫필드의 이미지는 사실과 다르게 왜곡되거나 오해되기도 했던 것이다.


휫필드에 관한 그릇된 이미지들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해갔다. 휫필드가 활동한지 1세기가 지난 후 영국교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존 라일(J.C.Ryle)의 원성은 그것을 입증해준다.


"휫필드만큼 오해와 무시로 고통받아 온 사람은 없다."


실로 이러한 소리는 2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왜냐하면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18세기의 영국교회의 부흥운동에 있어서 휫필드를 요한 웨슬리의 조력자 정도로, 당대의 평범한 설교자 정도로만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본 논고는 휫필드의 설교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한국교회 설교자들에게 사도시대 이후 영국 최대의 설교가였다고 평가 받아온 명설교자로서 휫필드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적게나마 휫필드에 대한 오해나 그릇된 이미지를 불식시키는데 그 목적이있다.


2.불운했던 어린 시절

어떤 교회사가들은 18세기 영국교회의 부흥운동은 사도시대 이후 가장 위대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던 것으로 말해왔다. 그 정도로 18세기 영국교회의 부흥운동은 강력한 역사를 이루었다. 그렇게 뜨거운 말씀의 불꽃으로 죽어가는 영국교회에 생기를 불어 넣었던 사람이 바로 조지 휫필드였던 것이다.


휫필드의 아버지 토마스(Thomas)는 한때 영국 중부지방의 글로스터(Gloucester)에 있는 세인트 메리 데 크립트(St.Mary de Crypt)교회의 위원으로 섬겼다. 토마스는 원래 영국 남서부지방에 위치한 브리스톨(Bristol)에서 술집을 경영했는데, 나중에는 글로스터에 가서 여인숙을 경영하면서 그곳에서 차츰 자리를 잡게 되었다. 토마스는 브리스톨 출신의 엘리자베스(Elizabeth)라는 동갑내기 처녀와 결혼해서 6남 1녀의 자녀를 낳았고, 조지 휫필드는 1714년 12월 16일, 7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1) 아버지의 죽음

조지 휫필드가 태어날 무렵 토마스 휫필드의 가정 형편은 글로스터에서 중상류층에 속했고, 유력한 시민들 측에 낄 정도였다. 따라서 휫필드는 원래 양친의 사랑을 듬뿍 받고 태어나 남부럽지 않는 유아시절을 보냈다. 토마스 휫필드의 가정은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나 일곱 명의 자녀 수에 있어서나, 당시 영국의 전형적인 중상류층의 수준을 유지했다.


하지만 휫필드가 태어난 지 꼭 2년이 지났을 때 당시 35살이었던 아버지 토마스 휫필드의 죽음은 휫필드의 가정에 불운을 예고해주었다. 아버지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어떤 질병으로 갑자기 죽었던 것으로 보인다. 1716년 12월 23일까지 자신의 뜻을 담은 글을 썼는데, 26일에 죽은 것으로 보아 아마 어떤 질병으로 인해서 갑자기 죽었던 듯하다. 휫필드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그의 어머니는 한동안 글로스터에서 여인숙을 경영하면서 가계의 번성을 이루어 나갔다. 그러나 얼마 후에 휫필드의 어머니는 고향인 브리스톨로 이사해서 선술집과 여인숙을 경영하였으나, 예전만큼 가계가 활발하지는 못했다.


2) 어머니의 재혼과 가정의 위기

휫필드의 아버지가 죽은 후 8년째 되던 해에 그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이웃에 살아온 케이플 롱든(Capel Longden)이라는 사람과 재혼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재혼은 가정의 경제를 점점 더 악화시키고 말았다. 어머니의 재혼에 대한 휫필드의 고백은 당시의 실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재혼을 선으로 바꾸기는 하셨지만, 그것은 누가 보아도 일시적인 이득을 위해서 이루어진 불행한 만남이었고‥‥특히 내게는 좋지 않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한 가정 형편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휫필드에게 또 하나의 불행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의 재혼 후에 휫필드의 가정 경제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휫필드는 12살까지 특별히 내세울만한 교육을 받지 못했고, 12살부터 15살까지 교회 부설 학교에 다닐 정도였다.


3) 여인숙 급사와 사팔뜨기

휫필드는 어려워진 가정 형편 때문에 어머니를 돕기 위해서 그 해부터 약 1년 반 정도는 그나마 교회 부설 학교도 중단하고 여인숙 급사로서 일하게 되었다. 휫필드는 그 때의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진술했다.


“그때 나는 일 년 반 동안 푸른 앞치마를 두르고, 걸레를 빨거나 방을 청소하면서 ,때로는 양초를 자르는 가위를 들고 분주하게 집안일을 도왔는데, 한마디로 직업적인 급사가 되었다.”


휫필드가 비록 어머니를 도와야겠다는 효심(孝心)에서 자진하여 여인숙 급사로 봉사했지만, 한편으로 여인숙 급사라는 직책은 어린 휫필드에게 적지 않은 내면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가 나중에 여인숙급사로 일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고백했던 말은 불운했던 어린시절의 갈등을 잘 대변해준다.


“또래의 친구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볼 때 종종 내 마음이 찢어지는 듯 했다.”


어린시절의 불운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가 4살 때 홍역을 앓았는데, 간호원의 실수로 인하여 눈 부위에 흥이 생겨서 사찰뜨기처럼 보인 것이다(아놀드 A. 달리모아는 휫필드가 처음부터 사팔뜨기로 태어났다고 기록한다). 나중에 그의 명성이 드러난 후에 별명은 ‘사팔박사’로 통하긴 했지만, ‘사팔뜨기’라는 놀림은 어린 휫필드에게 적지 않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휫필드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또 가정 형편 때문에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체 여인숙 급사 노릇을 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사팔뜨기라는 신체적인 결함까지 참으로 불운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어린 휫필드는 가정의 불운이나 신체의 결함에 조금도 좌절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비록 어릴지라도 차가운 현실을 극복할만한 강한 신앙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휫필드에게 불운한 현실에 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은 ‘견고한 신앙심’에서 나왔던 것이 분명하다. 후일 휫필드의 고백은 이것을 분명하게 입증해준다.


“여인숙에서 일을 마친 후에 늘 성경을 읽음으로써 신앙을 견고하게 했다."


4) 어린시절에 읽었던 책들

휫필드가 어릴 때 신앙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것은 성경 외에 「켄의 윈체스터 학자들에 대한 안내서」(Ken' s Maunal for Winchester Scholars)라는 책이었다. 휫필드는 열다섯 살 때 그 책을 구입한 후에 여러 차례 그것을 읽었는데, ‘그것은 그의 영혼에 큰 유익이 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책은 로(Law)의 「경건한 삶에로의 진지한 부르심」(Serious Call to Devout Life)이라는 책이었다. 휫필드는 그 책을읽고 싶었으나 그것을 살만한 돈이 없었어서 늘 마음에 두고 있다가 몇 년 후 그가 옥스포드에 갔을 때 한 친구에게 그 책을 빌려 읽고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그 책을 통해 내 영혼에 강하게 역사하셨다.”


그 외에도 휫필드는 많은 청교도의 책들을 포함해서 고전들과 전기들을 많이 읽었는데, 여러 고전 가운데 가장 즐겨 읽었던 것은 토마스 아 캠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atation of Christ)였고, 전기류는 크랜머 대주교(Archbishop Cranmer),라티머(Latimer),후퍼(Hooper),가드너주교(Bishop Gardner),번역(Bun-yan),루터(Luther),로(Law),할리버톤(Hali-durton),캘빈(Calvin),필립 헨리(Philip Henry)등의 전기를 읽었다.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시인 호머(Hormer)와 당대의 유명한 영국의 조지 헐버트(George Herbert),미국의 에드워드 테일러(Edward Taylor)와 같은 시인들을 좋아해서 그들의 시를 종종 읽곤 했다.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어린 휫필드에게 신앙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닐 것이다.


3.휫필드의 가문과 목사 지망생

휫필드의 가문에 관해서는 거의 2세기가 지나도록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다가 1937년 허들스톤(C.Roy Hudleston)의 조사연구에 의하여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휫필드 가문은 5대에 거쳐서 두 명의 사위까지 포함해서 모두 아홉 명이 옥스퍼드 대학교 출신이었고, 그들은 영국교회의 교구목사들이었다. 18세기를 말씀의 폭풍으로 뒤흔들었던 휫필드가 이러한 가문에서 출생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달리모어(Arnold A. Dallimore)는 조지 휫필드의 아버지 토마스 휫필드(Thomas)가 비록 성직의 길을 걷지 않았지만 그의 가문에 이처럼 상당수가 성직자였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진술한다.


"하나님께서 18세기 부흥의 도구로서 그의 조상 적부터 사람을 준비하신 것이 명백하다."


한 세기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한 가문을 미리 성직자의 가문으로 조성하셔서 그 후손을 예비하신 것이다. 실로 그것은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이처럼 휫필드의 조상들 가운데 아홉 명이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은 휫필드의 어머니로 하여금 휫필드가 성직의 길을 갈 것을 기대하는데 충분한 요건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휫필드의 교육에 매우 신경을 쓰면서 그가 목회의 길을 가도록 소망했었다. 그러한 영향 때문인지 어린 휫필드에게 장래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선뜻 목사가 되겠다고 대답하곤 했다고 한다. 후일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나는 언제나 목사가 된다는 것을 좋아했고, 기도문을 암송하는 목사님을 흉내 내기도 했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러나 휫필드는 자기 교회의 목사님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고 종종 말했다.


"나는 목사가 될 테지만 강단에서 콜(Cole)할아버지가 하는 것처럼 설교하지 않을 거예요"


휫필드가 이렇게 말했던 이유는 아마도 여인숙 바로 옆에 독립 교회의 집회소(Independent Meeting House)가 있었는데, 그곳의 목사가 늙어서 설교할 때 자기에게 별로 흥미를 주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휫필드는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꿈도 있었다. 그것은 휫필드의 극적인 성향(dramatic tendency) 때문에 나온 것인데, 한때 그는 연극연습을 하느라 며칠씩 학교에도 못 갈 정도로 연기하는 일을 좋아했다. 휫필드는 그때부터 무대 활동에 대한 타고난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고, 때로는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할만한 생생한 연기를 해내곤 했다고 한다. 휫필드에게는 뛰어난 연기력 외에도 웅변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서나 글로스터 시에서 연설자로 뽑히기도 했다.


따라서 휫필드는 연기와 웅변에 대한 꿈을 쉽게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휫필드가 17살때의 어느 날 밤에 꾸었던 꿈은 그에게 '목사지망생'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심어준 듯하다. 휫필드는 그날 저녁 을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꿈에 시내산에 하나님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분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그 꿈은 나에게 엄청나게 큰 인상을 주었고, 그 사실은 어떤 여인에게 말했더니 그녀는 ‘조지야, 이것은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너를 부르신 거야’라고 말했다.”


휫필드가 그날 밤의 꿈을 통해서 어떤 영향을 받아들였다는 근거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휫필드는 그날 밤의 꿈을 통해서 휫필드가 목사 지망생으로서 그의 비전을 확실히 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몇 개월 후에 휫필드가 옥스퍼드 대학교 펨브로크 대학(Pembroke College)에 입학하였는데, 그 때 휫필드의 고백 속에서 어느 정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준비하셨다.”


뿐 만 아니라 그날 밤의 꿈은 장차 휫필드의 신학사상, 특히 성령 론에 어떤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생각되어진다. 로이드 존스에 의하면 “휫필드는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에 큰 강조를 두었고, 성령께서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었다.” 이 부분은 나중에 휫필드의 신학사상을 다룰 때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지만,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조지 휫필드가 영감 받은 하나님 말씀이 권위를 신뢰했던 청교도적 개혁신학을 추구한 캘빈주의자였다는 점에서 성령 론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신학사상에서도 그가 신비주의를 추구했을 리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4.죄 문제와 싸움

휫필드는 청소년기에 오늘날 보통 크리스천 청소년들이 겪는 죄 문제에 대한 갈등을 경험했다. 휫필드가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죄 문제에 대한 것들은 그가 26세 때(1740)출판된 「이야기」(Account)속에 잘 묘사되어 있다. 휫필드 자신의 고백에 의하면 어렸을 때 종종 어머니의 돈을 훔치면서도 그것을 하찮게 여겨졌고, 거짓말, 욕설, 저주의 말, 어리석은 농담 등은 아무런 부담 없이 하곤 했다. 그는 안식일을 범하기 일쑤였고 성전에서 불경한 행동을 자주 행하면서도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여겼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어머니에게서 훔친 돈으로 종종 카드놀이를 하면서 내기를 했고, 연애소설을 읽는 데에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한 자신의 어린시절에 대해서 휫필드는 "어린시절의 범죄들과 죄악들은 셀수 없어서 그것들은 내 머리털보다 더 많았다"라고 고백했다. 그는 마치 다윗의 고백처럼 "나는 죄악 가운데서 태어났고,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 내 마음 속에 없었다"고 말했다.


청소년 시절,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열렬했던 휫필드였지만, 동시에 죄의 쾌감을 떨쳐버리는데 있어서는 여느 다른 청소년들과 같이 법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사실은 휫필드가 청소년기에 죄의 문제와 싸우면서 한없는 갈등으로 번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휫필드는 마치 바울처럼 속사람과 겉 사람의 내면의 전쟁을 겪으면서 청소년기를 보냈던 것이다. 휫필드의 전기 작가 글레드스톤(James Paterson Gledstone)은 그가 소년기에 겪었던 갈등의 일면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휫필드의 선한 마음은 늘 죄성과 투쟁했고, 양심은 죄들을 극복해내지 못했다. 휫필드는 청소년기에 하나님을 공경했지만 역시 죄를 사랑했다. "


이 점과 관련하여 특이한 점은, 조지 휫필드는 청소년기 시절에 겪었던 내면의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죄의식을 느낀 후에는 반드시 그것들을 보상하거나 변상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때때로 어머니의 지갑에서 훔친 돈은 가난한 자를 위해서 썼다거나, 훔친 책들은 나중에 네 배로 갚았다는 것 등이다. 티어만(L.Tyerman)은 이와 같은 휫필드의 소년시절을 가리켜 '죄와 회개의 혼합'라고 표현함으로써 그의 내면적인 갈등을 적절하게 묘사해주고 있다. 그러한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 휫필드는 기도와 금식으로 수많은 날들을 보냈다. 휫필드는 죽음을 몇 달 앞두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내가 열여섯 살 때 일 주일에 두 번씩 서른여섯 시간 동안 금식했고, 하루에도 수차례씩 기도했으며, 매 주일 성례에 참여했으며, 사순절(Lent)기간 동안에는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로 금식하곤 했다. 그 기간 동안에 나는 하루에 일곱 번씩 했던 개인기도 외에도 하루에 세 번씩 공예배에 참석했었다."


휫필드가 이처럼 결사적으로 기도와 금식에 매달렸던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장차 한 세기를 말씀의 불도가니로 몰아넣을 목사지망생 휫필드는 이렇게 죄와 싸우면서 어린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한 갈등은 휫필드가 옥스포드에 진학한 후에도 지속되었다고 한다.

주(註)-

1.Iain H. Marray,D.M. Lloyd Jones: The Fight of Faith 1939-1981 Edinburgh: The Banner of Trust, P. 130.
2. D M. Lloyd Jones, The Puritans :Their Origins and Successors,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7(reprinted 1991),p. 104
3. E. C. Dargan, A History of Preaching (seconded.), vol. 2, Grand Rapids: Baker, 1954, P.307
4. Arnold A. Dallimore, George Whitefield: The Life and times of the great evangelist of the 18th century revival, vol. 1,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 1970(reprinted 1995),p.257.
5. Ibid., P. 258.
6. Arnold A. Dallimore, George Whitefield: Evangelist of the 18th-Century RevivaI,
Elephant &Castle: The Wakeman Trust, 1990,p.52.
7. Ibid., PP. 65-66.
8. 로버트 사우디(Robert Southey)는 웨슬리의 공명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웨슬리는 남과 똑같은 위치를 견뎌낼 수 없었지만, 남보다 우월한 위치는 조금 견딜 수 있었다”., Robert Southey, Life of Wesely, vol. II, London: Longmans, 1858, P. 208.
9. 달리모아(Arnold A. Dallimore)는 심지어 웨슬 리가 킹스우드 학교소유와 주도권 문제로 ‘거짓된 태도’ 로 일관했으며, '근거 없는 왜곡된 비난'을 가했다고 주장했다.,1990, P.108.
10.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p. 258.
11.lbid.,P. 13.
12.lbid., PP. 9-11
13.Ibid., P. 577.
14.Ibid., P. 6
15. Ibid , P. 53.
l6. George Whitefield's Journals, Edinburgh : The Banner of Truth Trust, 6th impression 1992, P. 40
17. Ibid.
18. James Paterson Gledstone, George Whitefield, M.A., Field~Preacher,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00, p.6
19. Ibid.,p.5.
201. Robert Philip, The Life and Times of the Reverend George Whitefield, M.A., London: Paternoster Row, 1838, p. 16
21. C. Roy Hudleston, Goerge Whitefield's Ancestry, published in The Transactions of the Bristol and Gloucestershire Archaeological Society for 1937, pp. 221-242, cited by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38
22. Ibid., p.41
23. Arnold A. Dallimore, 1990, p.13
24. Ibid.
25. Luke Tyerman, The Life of the Rev. George Whitefield., B.A., of Pembroke College, Oxford., vol. I., London. Hodder & Stoughton, 1890, p.9.
26. Ibid.
27 D. M. Lloyd Jones, 1987(reprinted 1991), p.120.
28. A Short Account God's Dealing with the Reverend George Whitefield, A.B., from His Infance to the Time of his entering into Holy Orders, Published in Whitefield s Journals, p.38..
29. Ibid., p. 37.
30. James Paterson Gledstone, 1900, p.3.
31. Luke Tyerman, 1890, p. 11
32. Ibid., p.26
(그말씀 199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