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조지 휫필드

휫필드 2 - 옥스포드 광야시절과 휫필드의 거듭남 / 송삼용 목사

새벽지기1 2016. 7. 15. 07:31

옥스포드 광야시절과 휫필드의 거듭남

 

5. 옥스포드 시절과 거듭남

휫필드는 짧은 기간 동안 교회 부설학교에 다니면서 많은 고전들과, 헬라어성경, 그리고 라틴어까지 공부하였다. 휫필드의 어머니는 아들이 계속해서 교육을 받을 수없는 형편에 대해서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지금은 공부를 중단하고 있지만 인젠가는 가문의 조상들처럼 옥스포드에서 공부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한 청년으로부터 아들이 옥스포드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는 희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청년에 의하면, 자신처럼 옥스포드에 근로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면 아주 적은 비용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즉시 휫필드에게 의사를 물었고, 휫필드 역시 옥스포드에 대한 동경이 있었기 때문에 기쁨으로 진학을 결정하게 되었다.

1)굴욕적인 근로장학생


휫필드가 옥스포드의 펨브로크대학(Pembroke College, Oxford)에 입학한 것은 만 18세에 조금 못미치는 1732년 7월이었다. 물론 입학조건은 근로장학생으로 식비와 수업료를 면제받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는 근로장학생이라는 일이 서너 명의 부유층 자제들의 시중을 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야심에 찬 청년 조지 휫필드에게 있어서 그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로 같은 또래의 학생들을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잠 깨우기, 구두닦기, 잔 심부름, 방 청소 등의 일을 하는 것이 휫필드에게는 굴욕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학교 당국은 그러한 천한 일을 하는 학생들에게 다른 학생들과 특별히 구별되는 옷을 입게 함으로써 근로장학생이라는 신분을 나타내도록 했으니, 휫필드로서는 무척 곤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달리모아(Arnold Dallimore)에 의하면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는 학생이 그 굴욕을 참아내지 못하고 그 대학을 떠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라고 했으니 당시의 상황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근로장학생의 굴욕은 때때로 수업시간에서도 드러났다. 당시 펨브로크대학의 규정은 매 주일마다 있었던 철학 토론시간에 근로장학생들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지 못하고 정규시간 외에 다른 날 그들과 토론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든 학생들이 성례에 참여할 때에도 근로장학생들은 따로 다른 시간에 참여해야 했다.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깊숙히 스며있는 귀족계급 체제나 그 문화는 오늘날까지도 명맥이 유지되고 있을 정도니 당시의 상황은 충분히 이해된다.


어쨌든 잉글랜드 최대의 지성의 산실이라는 옥스포드의 영예에 걸맞지 않게 휫필드의 옥스포드 생활은 어두운 그늘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휫필드는 전에 여인숙에서 급사로 일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어려웠지만 굴욕적인 그곳 생활을 잘 극복할 수 있었다. 휫필드에게 있어서 옥스포드는 자신의 조상들이 공부했던 곳이고, 또 그의 어머니와 본인이 그렇게 소원했던 곳이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이라도 감내할만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휫필드는 그와 같은 어두운 상황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휫필드의 옥스포드 생활을 면밀하게 연구해보면 그가 힘에 겨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두 가지 요인들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지도교수 로크(George Hernry Rooke) 박사의 영향인 듯하다. 그는 휫필드에게 끊임없는 격려를 아끼지 아니한 아버지와 같은 인자한 선생님이었다. 아마도 어릴 때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던 휫필드에게는 그가 부어준 남다른 사랑을 통해서 친근한 부성애를 느꼈던 것 같다. 훗날 휫필드는 로크 박사를 가리켜서 '나의 친절한 지도 교수 (my kind tutor)라고 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지도 교수는 참으로 귀한 분이었다 … 그는 나에게 책들을 빌려주거나 돈을 주기도 했고, 내가 아팠을 때 방문해서 의사를 불러주기도 했다. 요컨데 그는 나에게 마치 아버지처럼 행동했다. 나는 그를 위해서 드렸던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을 베풀어주실 것을 믿는다."


이와 같은 지도교수의 격려와 관심은 휫필드에게 늘 학업에 대한 동기를 부여해주었고, 마침내 그는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하고 학업에 있어서도 유능한 학생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휫필드의 개인적인 성품의 영향인 듯하다. 그는 학업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매사에 진지함과 근면함과 열심으로 임했다. 따라서 비록 자신의 처지가 남과 같지 않다 하더라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성실하게 학생의 신분을 다했다. 특히 휫필드는 학교생활에 있어서 어떤 형태로든지 시간이 낭비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시간을 낭비하면서 학업을 등한시하고 있을 때, 그는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도록 철저한 계획에 의해서 생활하면서 자기관리를 해나갔다. 그는 다른 학생들이 학업 외에 다른 일로 시간보내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했고, 학생으로서의 근면한 자세를 한번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많은 젊은 학생들이 사치스러운 생활로 학생의 본분을 잃어버릴 뿐 아니라, 그로 인해 학업수행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볼 때마다 내 영혼은 슬프다."


옥스포드 생활은 처음부터 휫필드가 의기소침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늘진 상황들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같은 선생님과의 만남과 열정적이고 근면한 성품은 휫필드가 성공적으로 4년간(B. A. 코스 3년, M. A. 코스 1년)의 옥스포드 생활을 마치는데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2) 홀리 클럽(The Holy Club)과의 만남


당시 옥스포드 대학교의 분위기는 종교적, 도덕적으로 상당히 침체되어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를 이해하고 있었던지 휫필드가 글로스터(Gloucester)를 떠나기 전 그의 형들 가운데 한사람이, 그가 옥스포드에 가면 신앙생활을 하기 힘들 것이라고 조언해주었다. 그 형의 조언대로 정말 횟필드는 옥스포드에 도착한 후 근로장학생으로서 학업이나 생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경건생활에 있어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같은 방에 있던 친구들로부터 자기들과 같이 어울려서 방탕한 생활을 하자는 유혹을 늘 받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러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다. 한번은 매우 추운 날씨가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으려고 혼자서 방에 앉아 공부하다가 손발이 마비되어 밤새도록 거의 잠을 잘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곧 그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음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을 알게 되었고, 그들은 나를 유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아예 나를 별난 친구로 생각하고 제쳐두기 시작했다."


옥스포드 생활이 이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휫필드가 그동안 글로스터에서 경건생활 기초를 쌓지 않았더라면 그곳에서의 신앙생활은 유지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당시 옥스포드 전체가 영적으로 어두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사회적, 종교적 상황은 점점 퇴락의 길로 접어들어가고 있었지만, 옥스포드에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가득찬 소수의 사람들이 차분히 자신들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명 옥스포드의 '홀리 클럽'(The Holy Club)회원들이었다.


'홀리 클럽' 은 웨슬리 형제를 비롯한 8-9명의 학생들이 자기훈련의 방편으로써 '초기 기상, 철저한 시간관리, 금식, 경건훈련' 등에 주력하는 옥스포드의 써클 모임이었다. 원래 그 모임은 1728년 당시 옥스포드 대학교 학생들이었던 로버트 키르캄(Robert Kirkham), 윌리암 몰간(William Morgan),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등 세 명이 만들었는데, 그 다음 해 요한 웨슬리(John Wesley)가 가담하여 후에는 대표직을 맡기도 했다. 이 모임은 '홀리 클럽'이라는 명칭 외에도 '성경 벌레들(Bible Moths), 성경쟁이들(Bible Bigots), 경건 클럽(The Godly Club), 성례주의 자들(Sacramentals), 그리고 계율주의자들(Methodists)' 등으로 불려졌다.


그들은 매 주일마다 성례에 참여했고,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금식했으며, 옥스포드에 있는 두 군데의 감옥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그들은 모두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에 소속했으며, 그러한 선행이 자신들의 구원에 영향을 끼친다고 믿고 있었다. 휫필드는 옥스포드에 오기전부터 소문에 의해서 '홀리 클럽'을 알고 있었다. 휫필드가 옥스포드에 와서 지금까지 소문으로만 듣던 클럽의 회원들을 주시해 보았을 때 그들은 휫필드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휫필드와 같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휫필드는 그 클럽에 속한 회원들의 영적인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떠한 사람도 그들만큼 열렬하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심지어 자기 몸을 극단적으로 절제했다. 그들은 세상에 대해 죽었고, 모든 것을 기꺼이 배설물과 찌꺼기로 간주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얻으려고 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타올랐으며, 자신들에 대한 악의에 찬 말들을 들을 때마다 그들의 속사람은 더욱 풍성해졌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가득 찬 '흘리 클럽'의 회원들은 휫필드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도 남았다. 하지만 자신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동료들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없다는 점에서 늘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휫필드는 다른 학생들과 신분이 다른 옷을 입고 있었던 근로장학생이어서 자신은 그 모임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휫필드가 그 클럽에 대해서 얼마나큰 관심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다음의 고백 속에서 잘 나타난다.


“열두 달 내내 나의 영혼은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알기를 갈망하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좋은 모범을 따르기를 소망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문을 열어주셨다."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찰스 웨슬리가 휫필드의 종교적인 열심을 소문으로 듣고는 어느 날 아침식사에 초대함으로써 횟필드의 '홀리 클럽'과의 접촉이 시작된 것이다. 그후 휫필드는 '홀리 클럽'의 회원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많은 유익한 시간들을 가졌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이제 나도 그들처럼 규율에 의해 살기 시작했고, 한 순간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일 분 일 초까지 아꼈다. 나는 먹든지 마시든지, 혹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려고 노력했다."


당시에 휫필드가 가까이 교제했던 사람들로는 창단 멤버였던 로버트 키르캄(Robert Kirkham), 윌리암 몰간(William Morgan),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그리고 대표인 요한 웨슬리(John Wesley), 요한 웨슬리 다음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던 요한 클라이톤 (John Clayton), 나중에 유명한 모라비안 주교가 되었던 요한 감볼드(John Gambold), 여러 해 동안 휫필드와 절친한 친구였던 요한 허칭스(John Hutchings), 후일 유명한 모라비안 전도자가 되었던 벤쟈민 인캄(Benjamin Ingham), 휫필드와 동갑이었던 제임스 허비(James Hervey), 그 외에도 토마스 브로톤(Thomas Broughton), 찰스 킨친(Charles Kinchin)등을 들 수 있다.


이제 휫필드는 '홀리 클럽' 의 회원들이 추구했던 것처럼 철저한 자기훈련으로 경건생활을 유지했다. 이때부터 휫필드의 종교적 열심은 더욱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자신의 영적 상황에 대해서 휫필드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아침 저녁 외에도 매일 세 차례씩 기도하고 시편을 노래했으며, 매주 금요일에는 금식했고, 대학 근처의 교회에 나가서 성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3) 헨리 스쿠갈(Hen Scougal)과의 만남


'홀리클럽'의 영향 가운데서 휫필드는 어느날 자신의 비전과 내면의 세계까지 송두리째 바꾸어줄 만한 결정적인 변화를 체험했다. 실로 그것은 휫필드의 생애를 바꾸어 놓은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죄 문제와 갈등하면서 참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몸부림치던 휫필드에게 진리의 빛이 임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휫필드는 지금까지 행한 경건의 훈련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righreousness)를 이루는 수단이 될 줄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홀리 클럽'의 회원이자 친구 사이였던 찰스 웨슬리가 스코틀랜드 사람 헨리 스쿠갈(Henry Scougal)이 쓴 「인간의 영혼 속에 거하신 하나님의 생명」(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 1677)이란 책을 휫필드에게 주었다. 그 책은 휫필드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모든 생각을 허물어뜨리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도록 안내했다. 휫필드는 그 책을 읽어가면서, 지금까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가 새로운 세계로 들어섰다는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한번 갈등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휫필드는 그 당시의 갈등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 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듭나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또한 나는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가 기도를 하고 성찬에 참여할지라도 그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책을 테워버릴까? 아니면 던져버릴까? 아니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한번 추구해볼까?‘ 나는 그 책을 계속 읽었고, 그 책을 손에 들고 하늘과 땅의 하나님에 말씀드렸다. ’하나님, 제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제가 마지막에 멸망당하지 않도록 저에게 기독교가 무엇인지 보여주소서!’"


휫필드는 그러한 근심과 기도 가운데 계속해서 그 책을 읽어나갔다. 그는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전력투구하며 책을 읽었다. 계속해서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금식을 했고, 철야도 했으며, 기도, 성례참여 등 오랫 동안 많은 것들을 해보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친구를 통해서 영원히 잊지 못할 그토록 귀한 책을 나에게 보내주시기 전까지 나는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나는 그 책을 읽어가면서 '사람들은 기독교를 어떤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며, 교회 청소의 의무를 계속하고, 언제든지 가난한 이웃에게 구호품을 주기 위해서 손길을 펴면서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잘 몰랐다. 오히려 '아니 이것이 기독교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나에게 몇 줄을 더 읽어가는 동안에 '참된 기독교 신앙이란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그리스도의 형상이)우리 안에 형성되는것' (that true religion was a union of the soul with God, and Christ form within us)'임을 보여주셨다. 그 순간부터 거룩한 빛의 광선이 즉시 내 영혼 위에 비추어졌고, 그때야 비로소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4)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함


휫필드는 책을 통하여 헨리 스쿠갈을 만남으로써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지금까지의 신앙관을 깨뜨려버리고 거듭남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휫필드는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하게 되었고, 그것을 위해서 수많은 날들을 고민하며 기도하면서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열망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휫필드는 더욱 큰 고통으로 몸부림쳐야 했다. 그 이유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하나님의 생명은 자기 부정과 불타는 경건을 통해서 오는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휫필드는 몇 날 몇 주 동안을 땅에 엎드려 지내기도 하고, 더러운 옷이나 신을 신고, 말을 삼가면서 결사적인 노력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학업이 부진하게 되자 지도교수는 휫필드가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휫필드는 어떠한 오해나 소문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영적 생활이 진전되기만을 소원했다. 그래서 어떤 날은 길 옆에 있는 나무 아래 엎드려서 얼굴을 땅 바닥에 대고 두 시간씩 몸부림을 치며 기도하기도 했다.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실이 없자 휫필드는 '홀리 클럽'과의 관계를 끊기로 결심했다. 휫필드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극심한 시련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못하는 것보다는, 소중한 모임이었지만 '홀리 클럽'을 포기하는 것이 옳다고 결정을 내렸다."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하고자 하는 휫필드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횟필드는 6주동안 간단한 빵과 차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는 각오로 금식하며(일반적으로 영국에서는 금식이라 해도 간단한 빵을 먹거나 차는 마신다)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그는 간절한 기도와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육체의 쇠잔과 정신적인 고통뿐이었다.

결국 휫필드는 더이상 일어날 수 없게 되었고, 계단도 기어올라가야 할 형편이 되고 말았다. 결국 휫필드의 상태를 진단한 의사는 침대에만 누워있어야 한다고 진단할 정도로 그 상태는 심각해졌고, 휫필드는 의사의 처방대로 7주간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참으로 목숨을 내건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이제 휫필드에게는 다른 것을 선택할만한 여유나 기력조차 없었다. 다만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하고 싶은 것이 마지막소망이었다. 휫필드의 집요한 노력은 계속되어 침대에 누워있으면서도 모든 죄의 목록을 작성해서 밤낮으로 회개하였다. 휫필드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얼마나 많은 밤들을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며 침대 위에서 몸부림을 쳤는지 하나님만 아신다. 나는 온종일, 그리고 몇 주일이고 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승리를 주시기까지 나는 그분과 싸우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

 

마침내 휫필드는 1735년 부활절 이후 일곱 번째 맞는 주간에 로마서 8장 15-16절을 통해서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다(그날 휫필드가 체험한 은혜의 축복은 웨슬 리가 경험했던 것보다 3년 전의 일이었고, 당시 '홀리 클럽'의 회원들 가운데 최초로 경험한 것이었다). 사단의 꾀임에 빠져서 늘 죄의식에 시달리던 휫필드는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양자의 영'(the spirit of adoption, 롬 8:15)을 받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체험했다. 그후부터 휫필드는 놀라운 영광과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했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은혜는 휫필드가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였다. 그날 비추어주신 은혜의 빛을 통해서 휫필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만이 구원의 길인 것을 깨달은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내맡길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혼 속에 '신적인 생명'(Divine Life)을 주셨던 것이다. 휫필드는 그 당시의 체험을 이렇게 간증한다.


“어느날 나는 은혜를 갈망하면서 '내가 목마르다!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면서 침대에 몸을 던졌다. 나는 잠시 후에 곧바로 나를 매우 심하게 억압하고 있는 속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탄식하는 영께서 나를 취하셨고, 나는 내 구주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가는 곳마다 시편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후 내 기쁨은 점점 나의 영혼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따라서 나의 탄식하던 날이 증결되었다."


헨리 스쿠갈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휫필드의 내면적인 고뇌, 즉 생명을 내건 죽음에 이르는 싸움은,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의 빛줄기에 의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휫필드의 거듭남의 체험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고, 그후부터 휫필드는 새로운 영적 세계로 접어들었을 뿐 아니라 훨훨 타오르게 될 미래 시적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휫필드가 그때 체험했던 '신생'(new birth)에 대한 확신은 그의 영적 생활과 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신생' 이라는 주제가 휫필드의 설교가운데서 죽을 때까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은 그때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횟필드가 당시에 체험했던 영적인 감격에 대해서 자신이 고백한 말들을 들어보면 그것이 휫필드의 생애에 얼마나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던 그날을 회고하면서 휫필드는 고백하기를 "그 기쁨은 마치 강둑을 범람하는 홍수와 같아서 말로 형언할 수 없었으며, 그날은 영원히 기억될 날이었다"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까지 그 사건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그곳을 안다! 아마도 미신적일지 모르지만 내가 옥스포드에 갈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계시하시고, 나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던 그곳으로 뛰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휫필드는 자신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생명'(Life of God)으로 인하여 그의 삶이 바뀌어졌다. 이로써 휫필드는 ‘설교자의 정상'을 향하여 한걸음 더 가까이 나가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한시대의 위대한 설교자로 준비시키기 위해 바울의 아라비아 광야와 같은 글로스터행을 예비하셨다.

5) 피땀 흘린 수천 번의 기도


휫필드는 거듭남을 체험하고 난 후 그가 느낀 기쁨을 억누를 수 없어서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간증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모든 형제와 자매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 사실을 알렸고, 내 방에 찾아오는 학생들에게도 그 일을 말했다." 하지만 휫필드는 몇 달 동안 죽음을 각오하고 몸부림치면서 자신과 싸워온 대가로 너무 쇠약해져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돈 한 푼 없는 빈털털이 신세로 허약해진 몸을 이끌고 글로스터로 돌아가게 되었다. 휫필드의 글로스터행은, 그를 준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 감추어져 있었다고 할지라도, 당시에 그것은 누가 보아도 대학생활에 실패한 처량한 발걸음이었다.


휫필드는 글로스터에서 당시 그곳의 시장이며 서점을 경영하고 있었던 가브리엘 해리스<Gabriel Harris)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해리스와 그의 가족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휫필드는 글로스터에 9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건강의 회복을 위해 힘씀과 동시에 성경을 연구하고 독서하는 일에 주력했다. 그의 몸은 비록 연약해졌지만 마음과 영혼은 날마다 생기로 가득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이 되었기 때문에 성경연구와 독서는 가능했다. 휫필드는 글로스터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누렸던 영적인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이제 더욱 재방되고 넓어진 마음으로 다른 모든 책들은 제쳐두고 가능한한 성경본문의 모든 단어와 구절들에 대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읽어가기 시작했다. 실로 그것은 내 영혼의 음료요 앙식이었다. 나는 매일 위로부터 나오는 신선한 생명과 빛과 능력을 공급받았다. 나는 한달 동안에 하나님의 책(the Book of God)을 읽음으로써 내가 일찍이 모든 사람들의 책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횟필드는 기도를 통해서도 이와 유사한 기쁨을 누렸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오! 나는 글로스터에 다시 온 이후에 매일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과 얼마나 달콤한 교제(sweet communion)를 누렸는지 모른다. 들판에서 달콤하게 묵상에 잠기면서 내 자신을 잃어버린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다는 것을 얼마나 확실하게 느꼈는가! 그리고 나는 매일 성령의 위로 가운데서 생활할 수 있었으며, 놀라운 평화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의 덕을 쌓아갔으며, 새 힘을 공급받았다."


이러한 기도의 체험은 휫필드가 가졌던 '정기적인 기도의 시간‘으로부터 나온 은혜의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하루에 세 차례씩 기도의 시간 (아침, 점심, 저녁)을 가진 것은 틀림없지만, 그의 기도는 결코 정해진 기도의 시간에만 제한되지 않았다. 휫필드는 하루 종일 기도하는 마음의 태도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한편 이 기간 동안 휫필드의 생활을 알려주는 그의 일기(이 일기는 이 기간 동안에 쓴 것으로, 출판되지 않고 오랫 동안 알려지지 않은 채로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왔다)는 그가 무서울 정도로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해나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체적인 예로, 그의 일기에는 하루 동안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판단하는 근거로써 매일 밤마다 점검했던 목록들이 있다.


"1. 나는 개인기도 시간에 뜨겁게 기도했는가? 2. 정해진 기도시간을 지켰는가? 3. 모든 시간을 아꼈는가? 4. 모든 대화나 행동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는가? 5. 어떤 기쁨 후에 즉시 감사했는가? 6. 하루의 일을 계획 가운데 진행했는가? 7. 모든 면에 검소하고 침착했는가? 8. 무슨 일을 행할 때 열심히 혹은 힘있게 행했는가? 9.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면에서 온화하고 상냥하며 친절했는가? 10. 거만하거나 허영을 일삼거나 난잡하거나 다른 사람을 시기하지 않았는가? 11.먹고 마시는데 점잖았는가? 그리고 감사했는가? 잠자는 일을 절제했는가? 12. 로(William Law)의 법칙대로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는가? 13. 연구하는데 최선을 다했는가? 14. 어떤 사람에게 불친절하게 말하지 않았는가? 15. 모든 죄들을 고백했는가?


휫필드는 이러한 항목들을 염두에 두고 매일 두 부분으로 나눠서 일기를 썼다. 한 페이지에는 그날의 매 시간마다 특별한 활동들을 기록하면서 위의 각 항목을 근거로해서 매 시간의 장점과 단점을 표시해서 자기를 점검했다. 다음 페이지에는 그날에 있었던 일상적인 일들을 기록했지만, 우선적으로는 자신의 내적인 상태나 자기반성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처럼 빈틀없이 철저한 휫필드의 자기관리는 그의 성경연구나 기도생활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집중적으로 유지해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흔히 전기작가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휫필드의 생애 가운데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엄청난 업적(예를 들면, 어떤 때는 한달 중 28일 동안 매일 만 명의 사람들에게 설교했다)들은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라고까지 말해왔다. 하지만 필자는 휫필드가 옥스포드에서 근로장학생으로서 뼈아픈 마음으로 쌓았던 훈련들, 즉 일 분 일 초도 낭비하는 법이 없을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한 성품이나 불같은 열심, 진지함, 근면 등을 생각하면서 그의 엄청난 업적들은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횟필드는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면서도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독서하는 일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이 '은혜와 지식' 에 있어서 동일하게 장성해지기를 원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교리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를 위해서였다. 그래서 휫필드는 몇 년 전에 읽기를 원했지만 돈이 없어서 살 수 없었던 로(William Law)의 「경건한 삶에로의 진지한 부르심」(Serious Call to Devout Life)을 읽었고, 백스터(Baxter)의 「회개하지 않는자를 부르심」(Ca11 to the Unconverted), 알레인(Allein)의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 대한경고」(Alarm to Unconverted Sinners), 제인웨이(Janeway)의 「생명」(Life), 그리고 성경 주석으로 버키트(Burkitt)의 주석, 그밖에 고전과 청교도 서적들을 집중적으로 읽었다.


특히 그는 매튜 헨리 주석(Matthew Henry's Commentary)을 무척 갖고 싶어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거금에 해당되었던 7파운드 짜리(당시 노동자가 15-16주 동안 일해서 벌 수 있었던 액수) 주석집을 살수는 없었다. 하지만 휫필드는 그 소망을 포기할 수 없어서 그 주석서를 가브리엘 해리스에게 외상으로 구입했다(횟필는 일 년 후에 그 외상 값 7파운드를 해리스에게 보냈다). 휫필드는 그 주석집을 구입한 후 "여러 달 동안 그 책들(버키트와 매튜 헨리 주석)을 연구하면서 거의 항상 무릎을 끊고 기도해왔다”고 할 정도로 매튜 헨리 주석을 아꼈고, 그후에 휫필드에게 그것은 일생 동안 뗄 수 없는 동반자가 되었다.


휫필드가 매튜 헨리 주석을 얼마나 소중하게 다루고 연구했는지 그의 일기는 어느 정도 소상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그는 새벽 다섯 시부터 여섯 시나 일곱 시까지 그 주석을 읽었고, 때때로 오전과 오후에도 다시 읽었다. 그는 낙심될 때 위안의 수단으로써 헨리의 강해를 읽었고, 중요한 결정을 할 때에도 성경구절을 강해한 헨리 주석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게 되었다. 휫필드는 “헨리 주석이 나의 신앙 인격 확립에 얼마나 귀한 수단이 되었는지!"라고 감탄했고, 또 어떤 때는 ”헨리 주석을 놓고 기도하며 읽을 때면 내 시간이 얼마나 달콤하게 지나갔던지!"라고 고백할 정도였다.
그래서 휫필드는 늘 아침 다섯 시면 영어성경과 헬라어성경 그리고 헨리의 주석을 무릎 앞에 펼쳐 놓고 말씀을 구하기 시작했다. 이때에 휫필드는 자신의 독특한 성경연구방법을 터득했는데, 먼저 영어성경을 한 부분 읽은 후, 헬라어 단어와 시제를 절절이 연구해서 완전한 통찰럭을 얻었고, 그리고 나서 헨리의 주석에 나타난 설명과 대조해보는 형식으로 연구했다. 여기에서 휫필드가 터득한 독특한 연구방법은 영어와 헬라어의 모든 절과 단어를 기도하면서 그 구절의 본질적인 의미가 그의 영혼에 와 닿을 때까지 즐거움으로 연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독특하고도 집중적인 성경연구를 통해서 휫필드는 후에 설교를 준비할 겨를도 없었던 바쁜 사역, 즉 한 주일에 40시간 이상씩 설교할 때도 전혀 어려움없이 지식의 창고에 쌓인 무한한 보배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부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이처럼 글로스터에서의 생활은 장차 휫필드의 본격적인 목회사역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의 기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곳에서 9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휫필드는 말씀을 구체적이고도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정기적인 기도생활을 통해서 표현할 수 없는 영적인 풍성함도 체험했다. 그 무렵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영적 생활의 극치를 맛보고 있던 휫필드는 불타오르는 복음의 열정을 억제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되었다. 찰스 웨슬리는 휫필드의 열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제 모든 멍에로부터 해방된 그는, 그의 사역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의 열심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서 그루터기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처럼 타오르며 날아갔다. 그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이 집에서 저 집으로 하늘의 불꽃을 지피웠다…"


마침내 휫필드는 불같은 열정을 갖고 글로스터에서 처음으로 하늘의 불꽃을 지피우기 시작했다. 그는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곧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한 것이다. 휫필드의 사역은 생각 밖에 좋은 반응을 얻었고, 차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따라서 휫필드는 시편을 노래하고,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형식으로 그 모임을 이끌었다. 때때로 그는 그 모임에서 교리서를 읽게 하고, 경건서적을 읽으며, 경건한 삶에 대한교훈을 하기도 했다. 이 조그마한 공동체는 역사적인 중요한 의의를 지졌다. 왜냐하면 그 공동체는 엄격한 의미에서 '최초의 감리교 공동체' (the first Mothodist Society)였고, 휫필드의 일생을 통해서 그의 사역의 한 모습(unit)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임은 일부사람들에 의해서 심한 반대를 받기도 했다. 휫필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도구로 삼으사 몇몇 젊은이들을 일깨우게 하셨고, 그들은 곧 조그마한 공동체를 만들었으며, 그들은 곧 전에 우리가 옥스포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글로스터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취급받는 영예를 누렸다."

그 즈음에 사람들은 휫필드의 열심과 뜨거운 복음의 열정을 보고 그가 목회의 길을 갈 것을 희망하면서 목사안수를 받도록 권면했다. 하지만 휫필드는 이미 자신은 목사가 되기를 소원해왔지만 막상 주변 사람들로부터 목사안수에 대한 강력한 요청을 듣고보니 안수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목회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과 설교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깊은 염려를 해왔는지 하나님만이 아신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당신의 사역을 하도록 밀어 넣으실 때까지도 내가 교회에서 사적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비오듯이 땀을 흘리며 수천 번을 기도했다."


다시 말하면 횟필드는 목회자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확인할 때까지 수천 번을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았다는 것이다. 피땀 흘린 수천 번의 기도!!! 아마도 그것이 없었다면 휫필드는 글로스터 주변의 한 교회 목사는 되었을지 몰라도 한 시대를 움직일 만한 위대한 설교자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렇게 처참하고 초라하게 되돌아갔던 휫필드의 글로스터행은 인생의 낙오자의 발걸음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를 향한 발걸음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휫필드에게 목사안수에 대한 갈등이 계속되었지만, 정념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사로 세우시려고 한다면 다시 옥스포드로 갈수 있는 모든 여건, 즉 모든 재정을 조성해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마치 기드온처럼(삿 6:36-40)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기다렸다. 얼마되지 않아서 휫필드는 목사로 세우심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옥스퍼드로 돌아가기 위한 모든 재정이 충당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휫필드는 아흡달만인 1736년 3월에 다시 옥스퍼드로 돌아갔고, 그후 학부괴정을 다 마치고 학사학위(B.A.)를 받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휫필드의 초기생애에 있었던 몇 가지 사건들은 그가 위대한 설교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헨리 스쿠갈의 「인간의 영혼속에 거하신 하나님의 생명」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 1677)이라는 책과의 만남. 휫필드는 그 책을 통해서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죽음을 무릅Tm고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함으로써 마침내 자신 안에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신비한 생명이 있음을 체험하게 되었다. 따라서 휫필드의 불같은 설교는 '하나님의 생명'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있을 것이다.


둘째, 말씀의 체험. 휫필드가 어릴 때부터 말씀을 가까이 해왔다는 것은 이미 주지한 바이다. 그런데 휫필드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말씀은 로마서 8장 15-16절이었다. 그 말씀은 휫필드가 참 자유와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하기 위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매달려 기도하고 있을 때 깨달았던 말씀이다. 횟필드가 그 말씀을 통해서 받았던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었던 소중한 체험이었다. 그러한 말씀의 체험이 횟필드로 하여금 평생 동안 말씀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갖도록 했을 것이다. ‘성경만이 나의 유일한 연구대상’이라고 한 그의 고백이 이것을 입증해준다.


셋째, 글로스터에서의 말씀연구와 피땀 흘린 수천 번의 기도 휫필드가 처음에 글로스터로 되돌아갈 때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실패자였다. 하지만 휫필드는 그곳에서 피나는 말씀연구와 기도로 깊은 영적 세계를 체험하였고 그곳은 휫필드에게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광야와 같은 곳이 되었다. 그는 옥스포드에서부터 쌓아온 철저한 시간관리로 피나는 기도생활을 해나갔다(그는 보통 아침 4시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5시부터는 말씀을 묵상하거나 연구했다고 한다. 이러한 새벽의 기도는 예나 지금이나 영국의 상황으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경우이니,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의 영성을 관리했는지 알 수 있다). 횟필드가 그곳에서 새벽부터 밤늦도록 성경을 연구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성경연구 스타일을 쌓아나간 것이나, 목사의 소명을 확인하기 위하여 수천 번이나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한 것은, 그가 위대한 설교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으리라 본다.

이처럼 '하나님의 생명'의 체험과 '말씀‘의 체험, 그리고 ’말씀연구와 피땀 흘린 수 천 번의 기도‘등은 휫필드가 평생 동안 불 같은 말씀을 전하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고, 그것들은 휫필드가 위대한 설교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리라 확신한다. 덧붙여 필자는 휫필드가 위대한 설교자로서 ’설교자의 정상' 을 차지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확신하는 몇 가지 요인을 더 말하고 싶다. 그것은 탁월한 웅변술, 지칠줄 모르는 불타는 열정, 철저한 자기관리, 무서울 정도의 진지함, 근면 등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요소들과 그가 일찍이 체험했던 '하나님의 생명'과 말씀'의 체험들, 피나는 '기도‘의 준비,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가 하나로 어우러져 '사도시대 이후 최대의 설교자'라는 하나님의 작품이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註)--------------------------------------------------------------------------------------------
1.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P 61-62,
2. Douglad Macleane, A History of Pembroke College, Oxford, Oxford Historical Society, 1897, P. 189, cited by Ibid., P. 61.
3. V. H. H. Green, The Young Mr. Wesley, London; Edward Arnold, 1961, P. 162.이 책은 "성령강림주일(Whitsunday)에는 대학의 모든 학생들이 성례에 참여했지만, 근로장학생들은 다음날 따로 참여 했다"라고 밝힌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의 말을 인용한다., cited by Ibid., PP 6l~62.
4. 지금도 왕족이나 귀족층의 자녀들은 '이튼 칼리지'(Eaton College)에서 공부를 마치고, 개인의 성적 여 하에 따라 옥스포드(Oxford)나 캠 브리지(Cambridge)에 진학한다.
5. Luke Tyerman, 1890, P. 19.
6. Amold A. Dallimore, 1990, P. 18.
7.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 64.
8. Cf, ibid., PP. 67-68.
9.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 68.
10. Luke Tyerman, 1890, P. 16.
11.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op. cit.
12. ibid.
13. ibid., P.27.
14. Robert Philip, 1838, P. 17.15.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
15.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 75.
16. George White field's Journals, 6th impression 1992, P.52.
17. Luke Tyerman, 1890, P. 25.
IS. James Paterson Gledstone, 1900, P. 14.
19. Arnold A. Dallimore, 1990, P. 21.
20.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 77
21. J. I. Packer, Great George, Christianity Today, September 19, 1986, P. 12.
위대한 설교자 조지 휫필드 연구 233
22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 79.
23. Luke Tyerman, 1890, P. 36.
24. ibid. p. 37.
25.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 80.
26. 예를들면, 글래드스톤(Gledstone)은 “휫필드의 사역의 위대성은 쉽게 설명될 수 없으며, 심지어 그것을 세 권으로 쓴다해도 다 쓸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James Paterson Gledstone, 1900, P.v.
27.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 82.
28. ibid.
29. ibid., P. 85.
30. ibid., P. 83.
31. George Whitefield's Journals, 6th impression 1992, P. 60
32.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 86.
33. Luke Tyerman, 1890, P.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