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조지 휫필드

휫필드 3 - 칼빈주의와 휫필드, 그리고 소년 목사 / 송삼용 목사

새벽지기1 2016. 7. 16. 10:21


칼빈주의와 휫필드, 그리고 소년 목사

 

6.칼빈주의 사상체계의 형성


휫필드가 알미니안 신학체계를 따른 요한웨슬리(John Wesley)와는 달리 칼빈주의적 노선을 걸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로이드 존스(D. M. Llyod Jones)는 휫필드 탄생 250주년(1964) 기념행사에서 '칼빈과 휫필드' 라는 주제로 강연하면서 그것을 확연하게 밝힌 바 있다. 그는 휫필드가 웨슬리와는 대조적으로 칼빈의 가르침을 따랐던 '개혁자'(Reform-ed man)'였다고 주장하면서 칼빈과의 유사성을 제시했는데, 필자는 그 가운데 흥미를 끄는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한다.


첫째, 그들은 둘 다 칼빈주의자(바울주의자)이다. 둘째, 그들은 둘 다 열정을 지닌 사람이다. 칼빈은 저술활동의 열정을, 휫필드는 복음의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셋째, 그들은 둘 다 오십대 중반에 생을 마쳤다. 칼빈은 55세에, 횟필드는 56세에 생을 마감했다. 넷째, 그들은 둘 다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의 연합과 통일을 열망했다. 다섯째, 그들은 둘 다 당대와 후대에 놀라운 영향을 끼쳤다.


그의 교리와 신학사상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여기서는 휫필드에게 칼빈주의 사상체계가 최초로 형성된 시기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언급하려고 한다.


휠필드는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the free grace of God)와 '오직 믿음' (faith only)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함(justification)을 받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 중생 이후 일생 동안 고백하고 가르쳐왔다. 특히 '은혜의 교리' (e doctrines of grace)는 그의 신학과 교리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라일(J. C. Ryle)은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의 교리'(the doctrines of free grace)는 휫필드의 마음속에 심겨진 깊은 뿌리였고, 그에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되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처럼 휫필드는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뼈속 깊이 체험했고, 그 '은혜'를 그의 평생 동안 신앙으로 고백하였다. 특히 휫필드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하면서 죄 문제의 갈등이 오직 '은혜'로 해결되었다고 고백함으로써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free grace)의 사상에 자신이 깊이 젖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그러한 신앙적인 깊은 고백들이 휫필드에게 '은혜의 교리' (the doctrines of grace),곧 칼빈주의 사상체계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만약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grace)를 베풀어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형벌을 받았음에 틀림없다."4"..그러나 그것은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the free grace of God)였다. 이는 부패성이 내 영혼에 그렇게 강하게 역사했지만, 나는 아주 일찍부터 내 마음에 복된 성령께서 감동을 주신 것을 지금도 회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5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grace)로 나를 인도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두움 가운데 있었을 것이고, 죄악의 보상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내 위에 있었을 것이다. "6

이와 같은 고백들 외에도 휫필드는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the freegrace of God)로 인하여 '오직 믿음' (fai-th only)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justi-fication)을 받았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고백했다. 그렇다면 휫필드에게 이와 같은 교리적 신념과 신학체계가 분명하게 형성된 시기는 언제였을까? 이미 주지한 바와 같이 휠필드는 글로스터에서 9개월 동안 철저한 말씀연구와 피나는 기도생활을 통해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영혼의 기쁨을 누렸다. 그러는 동안 휠필드는 점점 기독교 진리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 되었고, 그러한 이해들은 칼빈주의자로서의 사상체계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휫필드가 고백한 말은 이것을 뒷받침해준다.


"이 무렵 하나님께서는 내 영혼에 빛을 비추시기를 기뻐하셨고, 그분 앞에서 '오직 믿음 (faith only)으로 의롭게 될 필요성과 그분의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 (freegrace)의 지식으로 나를 이끄셨다. 이것은 참으로 특별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옥스포드에 있는 나의 친구들은 나와 달리 신비적인 신앙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7

하지만 휫필드 자신의 진술들에 의하면 그는 이미 옥스포드에서 성령의 은혜에 의한 거듭남의 축복 곧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함(justification)과 죄용서의 축복을 한 순간에 체험했다. 그렇다면 휫필드가 글로스터에서 맛보았던 ‘오직믿음’ (faith only)에 의한 칭의교리와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 (e free grace)에 대한 확신은 무엇인가? 이에 관하여 티어만(Luke Tyerman)은 상당히 타당성있는 답변을 제공해준다. 그는 위와 같은 휫필드의 고백에 대해서 해석하기를, 휫필드는 자신이 이미 체험한 '오직 믿음' (faith only)에 의한 칭의교리와 '값없이 주시는 은혜' (the free grace)의 교리를 글로스터에서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8


그렇지만 이같은 '은혜의 교리'(the doctrines of grace)에 대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휫필드는 '홀리클럽' (The Holy Club)의 행위사상을 완전히 정리하지는 못한 듯하다. 휫필드가 글로스터에서 안수를 받고 첫 설교를 마친 후 옥스포드로 돌아온 지 한두 해 동안 진술했던 내용들은 이것을 입증해준다. 그 당시 휫필드가 진술했던 말을 들어보자.

'그 무렵(1736년 6월 30일 이후) 나는 현재의 상태에 더욱 만족하기 시작했으며, 나의 논문을 끝내고 '경멸받는 가련한 계율주의자들' (the poor despised Metho-dists)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유익한 일을 하기 위해서 최소한 몇 년간 옥스포드에 더 머무르려고 생각했다. "9

여기에서 휫필드가 언급한 ‘경멸받는 가련한 계율주의자들' (the poor despised Methodists)이란 '홀리클럽' (the Holy Club)의 회원들을 지칭한다(그 사람들은 나중에 '감리교도들' 이 되었으나 당시에는 그들의 지나치게 철저한 계율 준수 때문에 영국 교회(Church of England)로부터 비난과 배척을 받았다). 이것은 그때까지 휫필드가 여전히 일련의 홀리클럽 (the Holy Club)의 사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사실 휫필드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 (free grace)와 '오직 믿음'(faith only)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체계는 초기에는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휫필드는 글로스터에서 옥스포드로 돌아온 지 3년 후인 1739년에야 비로소 예정론을 반박하는 웨슬리의 설교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와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예정론뿐만 아니라 은혜의 교리(the doctrines of grace)를 확고히 했다. 휫필드는 웨슬리와 결별을 선언했지만 "주께서 나에게 주신 것보다 만배나 더 큰 성공을 그에게 주실 것"10을 위해서 기도했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냄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전달했다.

"존경하는 목사님! 목사님께서 예정론을 반박하는 설교를 출판하시리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니 저에게는 정말 충격입니다! 논쟁 외에 무슨 결과가 나오겠습나까? 양측 모두 침묵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 될 것입니다. "

이처럼 '은혜의 교리' (the doctrines of grace)를 강조한 휫필드의 신학체계는 흔히 '칼빈주의' (Calvinism)라고 불리워졌다. 하지만 정작 휫필드 자신은 그의 교리체계를 '칼빈주의' (Calvinism)라 칭하기보다는 '은혜의 교리 (the doctrines of grace)라고 부르기를 더욱 좋아했다.12 다음과 같은 고백들은 휫필드가 자신의 교리를 '은혜의 교리' (the doctrines of grace)라 칭하기를 더 좋아했던 이유인 듯하다.

“내가 고수해 온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나는 그것들을 하나님 으로부터 배웠다. " 13

"나는 칼빈주의 체계를 받아들이지만 그것은 칼빈이 가르쳐준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가르쳐주셨다. "14

7.헌신의 결단과 성직 안수


휫필드가 옥스포드로 돌아왔을 때 '홀리클럽' (the Holy Club)은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클럽의 리더였던 요한 웨슬리(John Wesley)를 비롯해서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와 인캄(BenjaminIngham) 등이 선교사로서 죠지아(Georgia)로 떠난 상태였고, 상당수의 회원들은 클럽을 떠나서 영국 전역에 흩어져 이미 사역을 하거나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홀리클럽' (the Holy Club)의 활동은 점점 쇠퇴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휫필드가 옥스포드로 되돌아온 뒤에는 그의 리더쉽 아래 클럽은 다시 새로운 활력을 되찾게 되었다.


휫필드는 클럽의 모임을 주도할 때 전에 요한 웨슬리가 행했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많은 책들을 읽고 토론하였다. 그의 일기(Diary)에는 당시에 읽고 연구했던 책이나 저자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호르넥(Horneck)의 「초기 기독교」(Primitive Christiani쇼), 웨이크 대주교(Archbishop Wake)의 「교리 문답서」(The Catechism), 라이트(Wright)의 「중생」(Regeneration),그 외에도 버네트 주교(Bishop Burnett), 우드리지(Woodri-dge), 쉐퍼드(Shepherd), 랑홈(Lang-home), 로(Law),아 캠피스(a Kempis),길(Gill), 왓츠(Watts), 롱기너스(Lonai-nus), 레이놀드(Reynolds), 아쉬톤(Ash-ton),아른트(Arndt), 고듀(Godeau), 하밀들(Hamilton), 폭스(Foxe), 고우그(Gouge), 파트럭(Pathck), 프란케(Fran-eke), 헨리(Hen)의 작품 등.15


휠필드는 클럽의 리더로서 회원들과 함께 내적으로는 위와 같은 책들로 독서에 주력함과 동시에 외적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계속해나갔다. 그는 한 공동체(Society)를 주도해나갔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 교도소를 방문하며, 죄수들의 자녀들을 위해 자선학교(Char School)를 세우기 위해 모금활동을 별이기도 했다. 휫필드의 활동영역은 점점 넓어졌지만, 영국 교회의 관례에 따라 아직 안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공적으로 설교하는 것은 아직 허락되지 않았다. 따라서 휫필드는 소그룹의 연설과 사람들을 권면하는 일을 주로 하면서 열심을 다해 주어진 일들을 해나갔다. 그는 때때로 저녁 늦게까지 몇 시간씩 권면하는 일을 계속했지만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보다는 오직 ‘성령충만으로 권면' 했고, 또 동료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강조하였다.


휫필드는 내적 외적으로 이처럼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도 학위(B.A.)과정의 마지막 학과시험에 통과함으로써 사실상 성직의 안수를 위한 최후의 관문을 통과했다(영국 교회의 성직제도는 대학 과정의 신학수업을 마치면 일단 집사(deacon)로 안수를 받게 되고, 그때부터는 공적으로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게 되며, 1년후에는 목사(priest)로 안수를 받는다). 하지만 휫필드는 목회 시적에 본적적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느끼고 있었던 성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휫필드가 그러한 두려움 가운데서 성직에 대한 확신을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헌신의 결단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셨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일기(Dia, 1736년 5월 16일)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실 나에게 성직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분이심으로 나는 겸손하게 그분의 전능하신 보호에 내 자신을 맡긴다. 나는 하나님께서 합당하다고 생각하시는 일에 쓰임 받도록 하기 위해 나의 영혼과 몸을 그분께 맡긴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도움을 힘 자신을 성경연구와 기도에 바치기로 결단한다.‥‥그분의 복되신 뜻이라면 나에게 건강도 주실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을 전적으로 그분께 드린다. "16

이와같이 휫필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기로 결단한 후에도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기 위해서 며칠동안 계속해서 기도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휫필드에게 확실한 응답을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위해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확신이었다. 휫펄드는 그날의 일기(17년 5월 29일)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성직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서 나를 즉시 부르셨다는 강한 확신으로 나는 완전히 압도되었다. "17

휫필드는 이처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헌신을 결단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을 그의 일지(Journal)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만약 내가 더 이상 지체한다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서 성직을 위해서 내 자신을 드리기로 결단하게 되었다."18

한때 휫필드는 성직이 단순한 직업이라고 생각한 바도 있지만 이제는 그러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어졌다. 그는 이제 목회는 '거룩한 일’ (holy labour)이라고 확신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면 아무도 그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휫필드는 하니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마침내 성직의 길로 들어서기로 작정한 것이다.


성직 수행에 대한 모든 갈등이 종결되고, 이제는 휫필드에게 성직 안수를 위한 자신의 준비만 남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신실하게 사용해달라고 기도했고, 매달 16일은 따로 떼어서 자신의 죄를 위해 은밀히 금식하는 날로 정하고 그것을 실천하기로 작정했다. 뿐만 아니라 휫필드는 바울의 디모데서신(St. Paul's Epistle to Timothy)을 구체적으로 연구하면서 사역자가 되기 위한 모든 요건들로 자신을 엄격하게 시험하기도 했다.


휫필드는 옥스포드의 펨브로크 대학(Pembroke College, Oxford)의 학위 과정을 모두 마친 후에 안수를 받기 위해서 다시 글로스터로 돌아갔다. 그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무릎쓰고 모든 대학과정을 마치게 되었다는 기쁨과 함께 성직의 결단으로 인한 감격으로 옥스포드를 떠났다. 휫필드는 그의 일기(1736년 5월 31일)에서 그러한 감격 가운데서 가졌던 주님을 위한 헌신의 결단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이제 성직과 학위를 얻을 것이고, 세상으로 갈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생에서는 영원한 갈등과 고난을 찾는다는 것뿐이며, 영원 세상의 저편에 있는 동안 십자가외에 어떠한 평화도 소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고, 그분의 것이다. 나는 내 몸과 마음과 피와 모든 것을 그분을 위해서 포기한다! 나는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 나는 주님께서 가라고 하는 곳은 어디든지 그분을 따라 가기를 소원한다. "


글로스터에 도착한 휫필드는 얼마 후에 있을 안수를 위해서 말씀과 기도로 더욱 구체적으로 준비했지만 여전히 성직을 위한 준비에 큰 부담을 안고 있었다. 아마 그것은 성직에 대한 헌신의 결여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두려움과 영적 책임감으로 인한 신령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휫필드에게 안수를 위한 면접시험과 안수를 집례할 사람은 벤슨 주교(Bishop Benson)였다. 그는 영국 교회의 영향력있는 성직자로서 훌륭한 인품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당시 휫필드는 21세로서 23세 이상이 되어야 안수를 받게 되어 있는 영국교회 규율에 의하면 안수를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량과 덕성을 겸비한 벤슨 주교(Bishop Benson)는 휫필드의 성경연구에 대한 열정, 신실한 기도생활, 금식, 감옥의 방문, 그리고 그의 인격 등에 대해서 이미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관례를 깨고 안수를 허락했다. 휫필드가 안수를 위한 면접에서 벤슨 주교(Bishop Benson)를 처음 만났을 때 주교는 이렇게 질문했다.

'당신은 이 성직을 수행하기 위해서 성령으로 감동되었다는 것을 믿습니까? 당신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부름을 받았습나까?"20

이러한 질문 외에도 주교는 여러 가지를 점검한 후 분명한 답변에 대해서 철저히 준비한 휠필드의 성의에 기뻐했고 큰 만족을 표했다. 마침내 휫필드의 안수는 1736년 6월 20일 주일 아침으로 예정되었다. 휫필드는 최종적인 준비로서 전날인 토요일은 온 종일 기도와 금식으로 보냈고, 저녁에는 글로스터 시내 근처의 언덕으로 가서 두 시간 동안 간절히 기도했다. 실로 "휫필드의 능력(power)이 그의 은사나 웅변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경건(piety)에 있다" "라는 티어만(Luke Tyerman)의 평가가 실감나는 장면이다. 이미 주지한 바와 같이 휫필드는 목회의 소명을 확인하기 위해서 피눈물을 흘리며 수 천 번을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성직 안수를 앞두고 영국의 현실로는 거의 불가능하다시피 한 소위 산기도, 금식기도, 철야기도, 새벽기도 등으로 자신의 사역을 준비했던 것이다.


드디어 예정된 주일 아침이 되었다. 휫필드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디모데서신(St. Paul' s Epistle to Timothy)을 묵상하면서 기도로 준비했다. 특히 그는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범전 4:12)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23 의식이 시작되어 휫필드는 안수를 받기 위해 단으로 다가갔는데,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으나 다만 하나님 앞에 서 있던 어린 사무엘을 생각했다."24

8.능력에 사로잡힌 최초의 설교


휫필드는 안수 후 첫 주일인 1736년 6월27일에 휫필드는 자신이 어렸을 때 세례를 받고 종종 성례에 참여했던 세인트 메어리 데 크립트(St.Mary de C교pt)교회에서 최초로 설교하게 되었다. 처음에 휫필드는 설교를 부탁받았을 때 자신은 설교를 할 수도 없고 준비하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휫필드는 설교를 하도록 결정되었는데, 준비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설교 시에 자신과 함께 하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마침내 나는 헨리(Hen)의 사도행전 주석을 읽으면서 다음 구절을 주목하게 되었다. '우리는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행16:7). 그리고 에스겔서에서 ‘너로 벙어리 되어 그러나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내 입을 열리니'(겔 3:26-27)라는 말씀을 보았다. 이것은 내 마음을 아주 평안하게 해주었다. 안수 후 그 다음날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알기 위해서 그 말씀들을 묵상할 때 내 영혼에 큰 능력이 임한 것을 느꼈다. 즉시 내 마음은 확신으로 가득찼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나에게 말씀하셨고, 나는 더 이상 벙어리가 아니었다. "25


휫필드가 최초로 설교한 날 세인트 메어리 데 크립트(St. Mary de C교pt)교회에는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 전(前)시장이었던 하리스(Harris)와 그의 가족들, 출판업자인 라이키스(Robert Raikes),학교 교장인 본드 목사(the Rev. Daniel Bond), 휫필드의 옛 친구들, 한때 그곳에서 휫필드가 주도했던 공동체의 회원들을 비롯해서 약 삼백여 명의 교인들이 모였다. 휫필드가 강단에 섰을 때 그의 외모는 아직 어렸지만, 영적인 힘이 넘쳤고 내적인 거룩함이 흘러나왔다. 최초의 설교였기 때문에 그는 원고를 주변에 있는 목사들에게 보내서 조언을 들을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 했다(휫필드가 그 설교 원고를 보냈을 때 주변에 있던 목사는 설교를 반으로 나누어서 두 번할 것을 조언했다).그와 같이 철저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설교를 시작할 때는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곧바로 분명하고 능력있는 말씀이 강단에서 흘러나오면서 한 순간의 긴장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날 설교는 전도서 4장 9-12절을 본문으로한 '공동체의 본질과 필요성'(The Nature and Necessity of Socie)이라는 제목이었다. 설교의 핵심은 크리스천의 삶 가운데서 상호협력에 대해 설명하고, 중생과 거룩한 삶의 필요성에 대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게 감명을 받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 강렬하게 은혜를 받아 열광할 정도였다. 며칠 후(1736년6월 30일)에 휫필드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사랑하는 친구여!
영광! 영광! 영광! 전능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네. 지난 주일 오후에 나는 처음으로 세인트 메어리 데 크립트(St. Ma de Crypt)교회에서 설교를 했지‥‥자네가 쉽게 추측할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모였다네. 처음에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약간 두려움에 쌓였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느끼고 위로를 받았고, 어릴 때 학교에서 종종 연설하던 일과 옥스포드대학교 시절에 죄수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해서 가르치고 권고하던 일이 말할 수 없는 유익이 되었음을 곧 발견했다네.


그것들 때문에 나는 그렇게 크게 기가죽지 않았네. 설교를 진행해가면서 나는 불길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고, 비록 내 나이가 어리고 또 나의 어린 시절부터 나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 회중 가운데 앉아 있을지라도 나는 어느 정도 복음의 권세를 가지고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네. 몇몇 사람들은 나를 비웃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교에 감동을 받은 듯했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나의 첫 번째 설교가 열다섯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고 주교에게 불평했다는 것을 들었네. 내가 듣기로는, 그 귀한 주교님은, 그 미친 증상이 다음 주일이 오기 전에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졌다네."26

필자는 첫 설교에 대한 휫필드 자신의 해설이 담긴 이 편지를 통해서 그가 첫 설교에서 가졌던 태도나 그 특징을 몇 가지로 분석해보려고 한다.


첫째, 휫필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설교했다. 그는 이미 설교를 준비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실 것을 성령을 통해서 확신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날의 확신은 휠필드가 일평생 동안 그의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불같은 확신으로 설교하는데 큰도움이 되었으리라!


둘째, 휫필드는 성령의 불길에 사로잡혀서 설교했다. 그는 설교하면서 성령의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미 불같은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안수와 설교를 위해 금식기도, 산기도, 철야기도, 새벽기도로 준비한 그의 첫 설교에 임한 성령의 불길은 당연한 축복이 아니었을까?


셋째, 휫필드는 복음의 권세로 설교했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 말씀을 체험한 적이 있다. 휫필드는 자신의 거듭남의 순간에도, 최초로 설교를 준비하는 중에도 말씀의 강한 빛으로 이끌림을 받았고, 말씀의 권세 앞에 거꾸러졌던 사람이다. 그와 같이 말씀의 권세에 사로잡힌 설교자가 설교 때에 그 권세에 사로잡힌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당시에 세속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져서 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아성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최상의 무기는 복음의 권세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복음의 권세 외에 어떠한 교훈과 연설도 영적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계속되는 그의 설교에 역사했던 말씀의 권세를 보면 과연 휫필드는 말씀의 불꽃으로 한 시대를 불사른 권세있는 설교자였음에 틀림없다.


넷째, 휫필드는 탁월한 연설능력과 웅변으로 설교했다. 그는 첫 설교에서 자신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휫필드는 어렸을 때부터 연설과 웅변에 탁월한 면을 보여주었다. 사실 그는 18세기 영국 역사상 당대 최고의 웅변가로 평가받아 왔다. 그래서 휫필드가 설교를 할 때 그의 언어의 표현과 제스처, 성량 등을 갖춘 탁월한 연설능력과 웅변술은 성령의 역사를 제외하고, 많은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휫필드의 설교 능력에 대해서 당대의 뛰어난 비평가요 문장가였던 볼링브로크(Henry St. John Bolingbroke)는 평하기를 '그는 당대의 가장 비범한 인물이다. 그는 내가 일찍이 어느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한 가장 설득력있는 능변의 소유자다."27 라고 극찬했다. 또한 당시 영국에서 가장유명 했던 데이비드 가릭(David Gar-rick)28이라는 배우 역시 휫필드가 설교할 때마다 찾아가서 그의 웅변술을 배우면서 말하기를 "휠필드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기쁨의 눈물로 감동되었다“고 했으니 휫필드의 웅변술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로서의 휫필드의 위대성은 웅변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휫필드의 철저하고도 진지한 설교준비와 평상시의 엄청난 양의 독서는 그가 위대한 설교자로 발돋움하는데 일조(-助)의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휫필드의 설교의 불꽃과 자극은 노력의산물이다" "라고 한 길모아(J.Lewis Gilmore)의 평은 전혀 무리가 아닐 것이다.
휫필드의 탁월한 연설 능력과 웅변, 수많은 독서를 통한 철저한 준비에서 나온 권세있는 설교는 당대의 모든 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사로잡기에 족했다. 심지어 미국의 유명 한 철학자 플랭클린(Benjamin Franklin)이 그의 설교 능력을 극찬한 것이나, 사학자 흄(David Hume)이 휫필드의 설교를 듣기 위해 20마일(약 32킬로)의 거리를 찾아가면서도 '그것은 가치 있는 일' 이라고 선언했던 것은30 이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9. 회중을 사로잡은 소년


목사 휫필드의 첫 설교가 끝나자 글로스터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그에 대한 찬사를 아낌없이 보내기 시작했다. 휫필드는 사람들의 찬사가 계속되자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옥스포드로 떠날 것을 결심했다.

"사람들은 나를 너무 너무 좋아하게 되었다‥‥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 있을진저"31

마침내 휫필드는 첫 설교가 끝난지 사흘째 되던 날 옥스포드 행말(horse-back)을 탔다. 그것은 점점 더 상승해가는 자신의 인기를 방관하지 않으려는 겸손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장래의 사적을 준비하려면 더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먼저 성도가 되고 그리고 나서 옥스포드의 학자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옥스포드로 되돌아간 것이다.


옥스포드에 도착한 휫필드는 졸업논문을 씀과 동시에 석사 과정(M.A.)을 위해 공부하는데 주력했다(18세기 때 영국의 B.A.학위는 완전한 교육의 표징이 아니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석사과정을 위한 예비코스로써 간주되었으나, 학위 취득을 위한 최종적인 과정으로 논문을 써야 했다).그는 옥스포드에서 계속되는 연구생활과 홀리클럽(the Holy Club)을 주도하는 일로 매우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연구에 몰두하고자 하는 휫필드의 포부는 몇 주 지나지 않아서 곧 중단되고 말았다. 런던탑 예배당(Chapel of the Tower of London)에서 목회하고 있던 그의 친구 토마스 브로톤(Thomas Brou-ghton)이 그곳에 와서 설교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휫필드는 설교 초청을 받고 자신은 런던에서는 설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갈등했다. 나중에 그 시절을 상기하면서 휫펄드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는 갈 수 없습니다‥‥저가 이삼 년 동안 옥스포드에 있으면서 백오십 편의 설교를 준비하도록 해주십시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당신의 위대한 이름을 선포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주림 저를 보내지 마옵소서! 다시 한 번 기도하건데, 아직 보내지 마옵소서!"32

이러한 휫필드의 기도를 통해서 필자는 그의 인격과 설교자로서의 태도에 대해서두 가지를 언급하려고 한다.
첫째는 그의 거짓없는 겸손함이다. 그는 이미 첫 설교를 통해서 설교자로서의 자신의 은사를 확인한 셈이고,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동 된 것이나 주변의 찬사가 급증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입증되고도 남았다. 하지만 휫필드는 아직도 자신은 설교자로서 자질을 갖추지 못한자라고 고백하고 있으니 그의 겸손한 인격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그는 목회자로서 헌신을 결단할 때도 '나는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 나는 ‥‥그분을 따라 가기를 소원한다"라고 고백함으로써 거짓없는 겸손함을 보여준 바 있다.


이와 같은 휫필드의 겸손에 대해서 라일(J. C. Ryle)은 '차신의 인기가 가장 높을 때에도 그는 자신과 자신의 일을 가장 낮추어 말했다"고 하면서 편지들 가운데 하나(1753년 9월 11일)를 소개한 바 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그의 무한한 은혜로 겸손한 마음, 감사하는 마음, 양보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진정 나는 죄인 중에 죄인이다. 그러나 나 같은 가련한 것을 불러 쓰시는 그분의 역사에 놀랄 뿐이다."53

둘째, 설교를 위한 철저한 준비성이다. 휫필드의 웅변술의 능력 때문에 흔히 그의 설교 준비에 관한 부분들은 너무 쉽게 지나쳤고 무시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휫필드는 그의 탁월한 연설 능력과 웅변력에 의존하면서 준비없이 행한 즉흥설교자라고도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그가 학자가 되기 위해서 옥스포드에 이삼년 머무르면서 백오십 편의 설교를 준비하려고 했던 다짐은 설교준비에 소홀히 했다거나 즉흥설교자였다는 주장을 일축하고도 남는다. 더구나 휫필드는 첫 설교 원고를 철저히 준비해서 조언을 듣기 위해 그 원고를 전배 목회자에게 보낼 정도로 자기 관리에 충실하며 열심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가 준비없이 설교한 즉흥설교자라고 말하기는 곤란하지 않을까? 또한 지금까지 보존된 설교의 분량을 봐도 한편에 약 이십페이지 이상이 될 정도이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때로는 교리적이며, 때로는 강해적일 뿐 만 아니라 매우 조직적이어서 그것이 즉흥설교였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한 추측임에 틀림없다.


휫필드가 옥스포드에 이삼년 동안 계속 머무르지 못하고 곧바로 설교사역에 뛰어들어서 계획한 설교를 언제 준비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분명 설교준비에 철저한 설교자였음에 틀림없다. 그는 대학시절 내내 일분 일초를 소모하지 않고 철저하게 자기를 관리해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일기(Diary)에서 보았듯이 빈틈없이 자기 일을 행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휫필드의 설교준비는 그의 설교원고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설교를 위한 성경연구와 다양한 독서, 그리고 기도의 준비 등이 포함된다.

그래서 루이스 길모아(J.Lewis Gilmore)는 휫필드의 설교준비에 있어서 지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휫필드의 웅변의 어머니가 정교함이라면 웅변의 아버지는 지성이다. "34


이것은 그의 입술에서 나온 불 같은 메시지는 증성하게 저장된 지식의 창고에서 나온 것이며, 그의 설교는 철저한 준비에서 나온 것이라는 의미이다. 기름이 없다면 불을 붙일 수 없는 것처럼 휫필드의 독서는 그의 설교를 불태울 수 있는 기름의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휫필드의 능력있는 설교의 비밀의 상당한 부분이 그의 독서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보존된 소량의 설교들이나 그의 편지들, 그리고 저널 등은 그것들을 잘 입증해준다. 거기에서 그가 추천했거나 언급한 책들, 그리고 저자들의 통계는 대략적으로120여 명의 저자와 230여 권의 책들이 포함되었다. 35
설교 초청을 받은 휫필드는 그러한 번민가운데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신을 런던으로 보내신다는 것을 확신했고 그곳으로 떠났다. 런던에 도착해서 까운을 입고 예배당을 향하여 가는데 어떤 사람은 “소년 목사 좀 봐!"라고 외쳤고, 많은 사람들이 가게에서 뛰쳐나와 신기한 듯이 쳐다보았다.


휫필드는 자존심이 상했으나 꾹 참고 마음속으로 바울의 권면, 곧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범전 4:12)는 말씀을 기억하고는 기도하면서 예배당안으로 들어갔다.


휫필드가 설교를 시작하기전만 해도 회중들은 설교자가 '소년 목사' 임을 의식해서인지 모두 다 얕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가 설교를 하기 위해서 단에 오를 때 그러한 분위기는 곧 사라져버렸다. 비록 '소년목사' 일지라도 그의 영적인 권세가 모든 회중을 압도함으로써 분위기는 곧 진지해졌다. 설교가 끝나고 휫필드가 단에서 내려왔을 때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큰 경의를 표했고 그를 축복해주었다. 휫필드가 그곳에 있는 동안 각처의 '기독교 공동체' (Religious Societies)에 속한 많은 젊은 사람들과 소수의 귀족들까지 그의 설교와 가르침에 관심을 갖고 찾아왔다. 그때 휫필드는 '신생' (e new birth)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그들에게 강론하였고, 계속해서 설교와 담화의 시간을 가지면서 그곳에서 머물렀다. 두달 후 그 교회를 사역하는 그의 친구 토마스 브로톤(Thomas Broughton)이 교회로 돌아왔기 때문에 소년 목사 휫필드는 사역의 기쁨을 안고 다시 옥스포드로 되돌아갔다.


런던에서 두 달 동안 설교할 때마다 '소년 목사' 휫필드는 복음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회중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하여 휫필드가 지피운 복음의 불꽃은 반세기가 못되어 온 영국에 훨훨 타올랐고, 그 불길은 아메리카에까지 이르렀으니, 그는 과연 하나님이 쓰시는 설교자였다. 그는 보통 한 주간에 40-60시간씩, 어떤 때는 하루에 7번씩 수천, 수만 명 앞에서 설교했다. 그러면서도 휫필드는 모든 집회 때마다 청중을 사로잡았으며, 그의 인기도 수그러드는 법이 없었다. 그는 34년 동안 잉글랜드 전역과 스코들랜드와 웨일즈 지방, 그리고 아메리카에서 최고의 인파8만 명이 모였던 집회를 인도하는 등도 합1먼8천 회의 대중 집회를 이끌었으니, 그의 설교사적은 어느 누구도 상상하기조차 힘든 엄청난 것이었다. 그래서 사무엘데이비스(Samuel Davies)가 이와 같은 휫필드의 설교시적의 위대성과 그 영향을 가리켜서 '시대의 경이'36라고 한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리라!


주(註)

1. D. M. Lloyd Jones, 1987, P. 103.
2. ibid. PP. 103-104.
3.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395
4. A Short Account of God's Dealings with the Reverend Georee Whitefield, A.B. from His Infance to the Time of His entering into Holy Orders, Published in Whitefield's journals, P.37.
5. Robert PhiliP, 1838, P. 4,
6. ibid., P. 38.
7. George Whitefield’s Journals, 6th impression1992, P. 62.
8. Luke Tyerman, 1890, P. 37, note. 2.
9. George Whitefield’s Journals, 6th impression1992, P. 76.
10. Amold A. Dallimore, 1990, P. 68.11. ibid.
12. ibid., P. 73.
13. Am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
14. ibid.
15. ibid., P. 89.
16. Amold A. Dallimore, 1990, P. 25.17. Am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91.
18. George Whitefield’s journals, 6th impression1992, P.67.
19. Am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P.92-93.
20. George Whitefield’s journals, 6th impression
21. Amold A. Dallimore, 1970(rephnted 1995), P.95.
22. Luke Tyerman, 1890, P. vi.23. J. R. Andrews, George Whitefield, London:Sovereign Grace Union(Seventh Edition), 1930,p. 20.
24. ibid.
25. ibid., P. 21.
26. Luke Tyerman, 1890, P. 50.27. J. C. Ryle, Christian Leaders of the 18th
Century,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Reprinted 1990(First published 1885), PP.49-50.
28. D. M. Lloyd Jones, 1987(reprinted 1991),op.cit., P. 117.
29. Cited by John Lewis Gilmore, Preparation: the Power of Whitefield’s Ministry, christianity Today, March 7, 1980, P. 22(302).
30. J. C. Ryle, Reprinted 1990(First published1885), P. 50.
31. Arnold A. Dallimore, 1970(rephnted 1995), P.
32. ibid., P.104.
33. J. C. Ryle, Christian Leaders of the 18th Century,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Reprinted 1990(First published 1885), P. 5634. John Lewis Gilmore, 1980, op.cit.35. ibid., P. 23(303).
36.John Lewis Gilmore, 1980, P. 2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