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조지 휫필드

휫필드 5 - 런던을 휩쓴 성령의 불길 / 송삼용 목사

새벽지기1 2016. 7. 19. 11:00


런던을 휩쓴 성령의 불길
 

14.우정의 꽃, 요한 웨슬리를 끌어들임


휫필드는 브리스톨을 거점으로 하여 그 주변에서 약6주 동안 한주에 30회씩이나 설교했다. 하지만 그는 런던으로 갈 계획이었기 때문에 브리스톨에서 자신의 사역을 계속해서 이어갈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요한웨슬리가 조지아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던 것처럼 그에게 편지를 보내서 브리스톨에서의 설교 사역을 맡아 줄 것을 부탁했다. 사실 휫필드는 웨슬리에게 편지를 보내기는 했으나 브리스톨로 오리라는 것은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얼마 후에 웨슬리가 그곳으로 오게 되었다. 브리스톨에 도착한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첫 소감을 피력하였다.

"휫필드 형제는 주일 아침 보울링 그런(Bowling Green)에서 6, 7천여 명의 군중 앞에서 강해설교를 했고, 정오에는 한함 산(Hanham Mount)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했으며 , 다섯 시에는 로즈 그린(Rose Green)의 조그마한 언덕에서 3만여 명의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나는 들판에서 설교하는 이 이상한 방법을 보고 처음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항상 그래왔듯이 ‥‥ 너무나 철저하게 고상하고 질서 잡힌 것만 고집하던 나는, 교회에서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영혼을 구원하려 한다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1


런던으로 가야 할 날이 임박해지자 휫필드는 브릭크야드(Brickyard)에서 웨슬리가 설교하도록 주선하였다. 휫필드는 그 후에 웨슬리로 하여금 브리스틀의 설교 사역을 맡길 참이었다. 그래서 휫필드는 청중들이 계속해서 자신이 설교할 줄로 알고 그곳으로 몰려오겠지만 자신은 빠지고 웨슬리에게 설교를 시킬 계획으로 다음 집회가 있을 것이라고 광고하고 말았다. 휫필드가 그렇게 한 이유 중의 하나는 웨슬리에 대한 사랑과 우정이 가슴속에 싹터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우정은 휫필드가 옥스퍼드대학 초기 시절부터 홀리클럽의 회원들과 나누었던 각별한 교제와 사랑의 열매였다. 그래서 한때 웨슬리가 어려운 순간에 휫필드에게 도움을 구했으며, 이제는 휫필드 역시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설교하는 영광의 길로 웨슬리를 초대할 정도로 그들의 우정은 깊어가고 있었다. 휫필드가 그날 야외 집회의 강사로, 아니 계속 되는 집회를 맡기기 위해서 웨슬리를 초대한 것은 분명 그에 대한 우정의 꽃이었다. 하지만 휫필드의 특별한 부탁으로 브릭크야드(Brickyard)에 온 웨슬리는 처음에는 어쩔 수 없어서 설교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집회를 계기로 웨슬리는 대중 집회의 지평을 열게 되었고, 그 집회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장차 야외설교자로서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거의 억지로 하다시피 했던 그 야외 설교를 통해 웨슬리는 당시 그의 조직의 본산지였던 브리스톨 사역의 포문을 열었던 것이다.


그날의 집회 후 휫필드는 킹스우드에 학교를 세우려는 의중을 말하고 성대한 환송을 받으면서 런던으로 떠났다. 휫필드가 떠난 후로부터 브리스톨의 사역은 웨슬리가 지도하게 되었는데, 집회 때 모여든 청중의 수도 휫필드가 인도할 때보다 적었고, 대중 집회를 인도하는 설교 기량에 있어서도 휫필드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웨슬리는 지적인 내용과 세계 비전, 곧 “내가 설 곳을 달라. 그러면 지구를 흔들어 보이겠다"2, “세계는 나의 교구"3 라는 비전을 제시하면서 집회를 이끌었으며, 탁월한 리더쉽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폭넓은 운동(movement)을 일으켜 마침내 감리교를 창시하게 되었다.


지금도 브리스톨 시내의 한 중심에는 당시에 요한 웨슬리가 사역했던 '뉴룸’(New Room)이라는 '웨슬리 예배당 (Wesley Chapel)이 보존되어 있고, 그곳에는 웨슬리에 관한 수많은 기념품들과 자료와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브리스톨의 초기 사역에 불을 붙였을 뿐만 아니라 웨슬리가 초기에 야외 설교를 하도록 이끌어준 휫필드의 이름은 '뉴룸'의 한쪽구석에 초라하게 보관되어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15.휫필드에게 쏟아진 비난과 배척들


브리스톨의 킹스우드(kingswood)를 떠난 후 휫필드는 런던의 야외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약 3주간을 보내면서 당시에 웨일즈(Wales)에서 야외 집회를 이끌고 있었던 호웰 하리스(Howell Harris)를 만났다. 호웰 하리스(Howell Harris)는 휫필드와 비슷한 시기에 회심한 평신도로서 복음에 대한 열정이 뜨거워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한 모임은 점점 커져서 야외 집회로 바뀌게 되면서 그의 메시지와 열심은 소문을 거듭하여 남 웨일즈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평신도였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교회에서 설교할 수 없어서 자신의 사역을 설교라고 칭하지 않고 '복음전도’ 혹은 ‘권면'이라고 불렀다. 다음의 고백은 하리스가 얼마나 열정적인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는 단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나의 음식, 나의 음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다. 뜨거운 불길이 내 영혼 속에 타오르고 있으며, 나는 그 능력으로 옷 입었다. 국왕이 내 가까이에 있으면 그에게 말할 수 있을텐데 나는 청천벽력과 같은 큰 소리로 귀족들과 세속적인 성직자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었다."4

이와 같은 하리스의 열심과 뜨거움은 휫필드와 비슷했고, 또한 둘 다 칼빈주의 신학을 수용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따라서 휫필드는 웨일즈로 가서 그의 엄청난 사역을 직접 보면서 비전을 나누고 싶었다. 웨일즈에 간 휫필드는 며칠간 하리스와 함께 순회 설교를 하면서 복음을 향한 하리스의 열정에 크게 감동하였다. 휫필드는 하리스와 장차 비전을 나눌 것을 약속하고 곧바로 고향인 글로스터로 갔다. 휫필드가 고향에서 사람들을 만났을 때 고향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휫필드의 변신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불과 7년 전에 그는 세인트 데 메어리 크립트(St. Ma교 de Crypt)교회 부속학교의 어린 학생이었고,8년 전에는 벨(Bell)여인숙에서 급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가 이제 평범한 청년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유명 인사가 되었으니 ‥‥


휫필드는 글로스터에서 며칠을 머무르면서 교회에서 설교하려고 했으나 영국교회의 성직자들과 일부 평신도들까지 교회당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고, 그를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배척하기까지 하였다. 복음을 듣기 위해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이 봉쇄된 교회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으니 휫필드는 참담한 심정으로 야외집회를 결정했다. 따라서 그는 들판에서 설교했고, 부쓰 홀(Booth Hall)이라는 대강당을 빌려서 설교하기도 했다. 아마 이때부터 휫필드는 자신의 사역이 장차 계속해서 야외설교자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결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런던으로 돌아온 휫필드는 아예 처음부터 야외집회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휫필드가 교회당에서 설교하는 것을 반발하거나 그를 노골적으로 배척하려는 움직임이 이미 런던에까지 확산되었기 때문이었다.


런던에서 맞은 첫 번째 주일에 휫필드는 무어필즈(Moorfields)라는 지역에서 야외설교를 했는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휫필드에 대한 반대나 배척운동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군중들의 기세는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휫필드를 거의 30년 동안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면서 그가 죽은 후에는 최초의 전기까지 저술한 길리스 박사(Dr. Gillies)의 증언은 무어필즈(Moorfields)의 집회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려주는 단서이다.

"휫필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은 휫필드에게 그곳에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휫필드는 친구들 사이에 끼어서 많은 군중들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그러나 군중들이 서로 밀고 밀리는 바람에 곧 친구들을 놓쳐버렸고, 친구들마저 휫필드를 군중들의 처분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군중들은 휫필드가 다치지 않도록 길을 비켜주었고 들판 한가운데로 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때부터 휫필드는 아무방해도 받지 않고 엄청나게 많은 군중들에게 설교했다."5

휫필드는 그곳의 집회를 마치고 곧바로 크라이스트 교회(Christ Church)의 오전예배에 참석했었는데, 그는 그 예배 중에 런던에서 가장 유망한 성직자들 중에 한사람으로 알려진 요셉 트랩 목사(Rev Dr. Joseph Trapp)가 휫필드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설교 주제를 삼고 비난과 조소로 일관하는 설교를 듣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휫필드는 이제 자신은 교회당 보다는 들판에 서야 할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하고 야외 설교에 전력하기로 마음먹었다.

16.런던을 휩쓴 뜨거운 불길


휫필드는 자신에 대한 비난을 쏟아 부은 설교를 직접 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배척하기 위해서 퍼뜨려진 소문들을 듣고 마음의 아픔과 고통을 져버릴 수 없었지만, 오전에 자신도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규모의 무어필즈(Moorfields)의 집회를 생각하면서 다시금 용기를 얻게 되었다. 휫필드는 그날 오전 집회의 성공에 힘입어 저녁에는 런던 시내에서 약 3마일 정도 떨어진 케닝톤 컴먼(Kennington-Common)의 넒은 공유지로 가서 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힘차게 설교했다. 이제야말로 자신이 설 곳은 봉쇄된 교회당이 아닌 들판의 강단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늘의 양식을 갈망하여 모여든 수많은 영혼들에게 폭포수와 같은 말씀을 마음껏 외쳤다. 케닝톤 컴먼(Kennington-Common)은 거지들이 우글댔고, 술 취한 사람들의 싸움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각색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휫필드는 그곳 사람들이 아무도 자기 영혼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보고, 오직 복음으로 그들을 치료해야겠다는 불타는 심정으로 설교했다. 그날 저녁의 집회를 마치고 휫필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삼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모인 듯했다. 마침 바람이 불어와 맨 끝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쉽게 내 목소리가 전해졌다. 모든 사람들이 내 설교를 주의 깊게 듣고 서 있다가 한 목소리로 시편과 주기도를 암송했다. 나는 어떤 교회에서도 그렇게 조용하게 설교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말씀이 능력으로 임했고 모든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 ‥‥"6

런던에서 처음으로 가진 야외집회를 성황리에 끝낸 휫필드는 매일 저녁마다 케팅톤 컴먼으로 갔고, 매 주일 아침마다 무어필즈에 가서 집회를 인도했다. 휫필드는 그러한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에 계속적으로 그의 사역의 현황을 일지(Journal)로 남길 정도로 주도면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전기 작가 티어만(Luke Tyerman)은 휫필드의 일지에 대해서 이렇게 경탄한 바 있다.


"젊은 설교자의 일기가 정말 독특하지 않는가! 계속되는 일련의 사역들을 시종일관 일기로 기록한 사람이 휫필드 말고 또 있는가!"7


그러면 휫필드가 런던의 야외 사역을 기록한 일지(Journal)가운데 일부를 보면서 그 당시의 야외집회가 어느 정도였는지 살펴보자.

"5월 1일/공예배 후에 아일링톤(Islington)교회 들에서 일찌기 볼 수 없었던 엄청난 무리들에게 설교했다. 저녁에는 도우게이트(Dowgate)언덕에 있는 어느 성도의 집으로 설교하러갔는데, 이삼천 명의 사람들이 입구에 모여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거리에서 설교하게 되었다. 이제 주님께서 나를 들판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확신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집이나 거리는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들의 절반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5월 2/오늘 저녁에는 케닝톤 컴먼 공유지에서 1만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 이제 옛 것은 지나가고 우리는 성령의 위로 가운데서 일한다.

5월 3일/ ...저녁 여섯 시에 케닝톤에서 설교했고 엄청나게 큰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임했다. 청중들은 어제보다 더 거대했지만 더욱 진지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 ‥‥.

5월 5/어제와 오늘은 보통 때처럼 케닝톤 컴먼에서 설교했는데 모인 사람은 2만명 정도였고 많은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

5월 6일/오늘 아침 에는 무어필즈에서 약 2만 명의 사람들에게 설교했는데, 모든 사람들이 매우 진지하게 설교를 들었고 크게 은혜를 받았다. 아침과 저녁에는 공예배(영국 국교회에 소속한 교회)에 참석했고,6시에는 케닝톤에서 설교했다. 그러한 광경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약 5만 명의 사람들이 모인 듯했고, 80대의 마차가 왔고, 말들도 엄청나게 많았다 ‥‥나는 한 시간 반 동안 계속해서 설교했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과 기쁨과 평강으로 충만했다 .

5월 8일/저녁에 보통 때처럼 케닝톤 컴먼에서 설교했는데 ‥‥ 그곳에 도착했을 때 2만명 이상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

5월 9일/...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케닝톤에서 2만여 명의 사람들에게 한 시간 이상 설교할 수 있게 하신 후, 청중들의 마음을 감동해서 아주 즐겁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고아원 건립을 위해 기부하게 하셨다 ‥.

5월 10일/케닝톤에서 설교했는데 거의 하루 종일비가 내렸다. 모인 사람은 1만 명이 넘지 않았고 마차는 30대 정도 왔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눈에 띨 정도로 간섭하셔서 내가 설교를 시작하자 비가 그쳐 햇빛이 나게 하셨기 때문에 나는 설교 중에 그 역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월 11일/케닝톤에서 어제 저녁보다 더 많은 청중들에게 설교했으며, 고아원 건립을 위해서 26파운드 15실링을 모금했다 ‥‥.

5월 12일/...저녁에는 보통 때처럼 케닝톤에서 약 2만 명의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나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마음에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분을 제시했다 ‥‥

5월 13일/오늘 아침에는 무어필즈에서 엄청나게 많이 모인 사람들 앞에서 설교했고, 52파운드 19실링 6펜스를 고아원 건립 기금으로 모았다 ‥‥두 차례의 공예배에 참석했고 저녁때는 6만명 정도 되는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많은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어서 되돌아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 대부분이 내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내게 능력을 주셨다 ‥‥‥.”8

이와 같이 휫필드가 무어필즈와 케닝톤 컴먼에서 당긴 복음의 불길은 그칠 줄 모르고 훨훨 타올라 마침내 런던 전역을 휩쓸었다. 각 곳에서 쇄도한 설교 요청은 이미 야외 설교자 휫필드의 명성이 런던 전역에 퍼져 있었다는 증거가 되고도 남았다. 그러한 설교 요청이 있을 때마다 휫필드는 "하나님이 찬송을 받으실 지어다! 우리는 이 큰 도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9고 외치면서 거의 모든 설교 요청을 수락했다. 그러한 설교 요청으로 인하여 휫필드는 런던의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설교하는 동안 "많은 죄인들이 죄를 깨우쳤으며 많은 죄인들이 위로를 받았다"10고 말함으로써 복음의 역사가 얼마나 크게 일어나고 있었는지 직접증언해주기도 했다.

17.역사의 신기록, 8만 명의 인파


런던을 휩쓴 뜨거운 복음의 불길은 꺼질 줄 몰랐다. 그러한 뜨거운 열풍 속에서 휫필드는 곧 조지아 주로 건너갈 계획으로 짐을 보낸 상태였기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사역에 최선을 다하리라는 생각으로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휫필드의 야외 집회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촉촉이 적셔주는 능력 있는 말씀에 감복했다. 그들은 칼날 같은 메시지에 의해서 자신들의 영혼이 산산조각 나도록 찢겨지는 아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들판을 떠날 줄 모르고 은혜를 사모했다. 그처럼 은혜의 강수가 넘치는 집회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머지않아 휫필드가 런던을 떠난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그들은 아쉬움의 눈물을 뿌리기 시작했고, 그 후부터는 더 많은 사람들이 집회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일지(Journal)에 기록된 휫필드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5월 25일/아침 7시에 설교했는데 전보다 더 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 설교 후에는 베드포드(Bedford)에서 10마일 떨어진 힛킨(Hitchin)에 약 오후 1시경에 도착했는데, 수많은 영혼들이 나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모여 있었다.

5월 26일/...시내 근처의 야외에서 아침 7시에 약 1만5천명의 군중들에게 설교했다 ‥‥ 저녁에는 케닝톤 컴먼에서 약 1만5천 명 정도의 무리들에게 설교했는데 하나님의 특별하신 임재가 우리 가운데 있었다‥‥.

5월 27일/오늘 아침에는 무어필즈에서 약 2만 명의 사람들에게 설교했는데 ‥‥ 내 설교는 약 두 시간 동안 계속 되었고, 내 마음은 사랑으로 충만했다. 집회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크게 녹아져서 세상에서 제일가는 냉소자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예배에 두 번 참석해서 복된 성찬을 받았으며, 저역에는 케닝톤 컴먼에서 지난 주일에 모였던 수만큼의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약간 목이 쉬었지만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

5월 28일/핵크니(Hackney)에서 ‥‥ 약 1만 명의 청중들에게 설교했다. 나는 설교할 때 '신생'(new birth) 교리의 합리성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령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나님께서는 청중들이 큰 은혜를 받는 것을 기뻐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

5월 29일/...케닝톤의 경건한 성도들에게 능력과 달콤함으로 설교했고, 내가 다룬 주제는 물고기와 보리떡으로 5천 명을 먹이신 우리 주님의 기적이었다. 나는 주님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것처럼 나의 설교를 들은 모든 영혼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의 떡을 먹기를 소망한다.

5월 30일/...저녁때 뉴잉톤 컴먼(Newington Common)의 공유지에서 약 1만5천 명의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그곳에서 설교할 수 있도록 나를 위해 강대상이 세워졌고 말씀의 능력이 임했다 ‥.

5월 31일/오늘 오후에는 몸이 심하게 아팠으나 하나님께서 나를 회복시키시기를 기뻐하사 케닝톤에 갈 수 있었다.

6월 1일/...저녁에는 하이드 공원(Hyde Park)근처에 있는 메이페어(May fair)라는 곳에서 설교했다. 내가 믿기로는 회중의 수가 거의 8만명 정도였는데,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설교했던 어떤 집회보다도 가장 큰 집회였다 ‥‥ 비록 내 자신은 약했으나 하나님께서 나를 강하게 하셔서 아주 크게 말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있었던 것 같다. 모든 사람, 모든 영광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6월 2일/../저녁때 핵크니(Hackney)에서1만 명의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

6월 3일/무어필즈에서 전보다 더 많은 군중들에게 설교했고, 29파운드 17실링 9펜스의 헌금이 걷혔다. 공예배에 두 번 참석했고, 저녁에는 케닝톤 컴먼에서 설교했는데 지금까지 그곳에 모였던 집회 중에서 제일 많은 사람들이 모인 집회였으며, 파운드 5실링의 헌금이 걷혔다. 내가 곧 런던을 떠난다고 말하자 청중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렀다...."

이처럼 일지(Journal)에 기록된 지역 외에도 휫필드는 함톤 히쓰(Hampton Heath), 헤르트포em(Hertford),노쌈톤(Northampton)등지를 순회하면서 연일 집회를 가렸다. 그는 언덕, 시장, 들판, 길거리, 시골길 등 닥치는 대로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지 서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마다 수만 명이나 되는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지금까지 런던에서 뜨겁게 타올랐던 야외 집회의 상황에 대해서 휫필드 자신의 증언을 살펴보았는데, 필자는 여기에서 그의 야외 설교 사역에나타난 특징적인 몇 가지 사항을 언급하려고 한다.

첫째, 휫필드의 야외 설교 사역은 항상 은혜의 잔치였다. 휫필드의 설교는 믿는 자들이나 아직 믿지 않는 자들에게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는 은혜의 설교였다. 그래서 휫필드는 일지(Journal)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설교를 듣고 '크게 은혜를 받았다'고 강조하고 있다. 휫필드의 설교사역이 이처럼 매번 은혜의 잔치가 되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휫필드가 당시 웅변의 천재였다고 할지라도 그의 능변이나 웅변력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자신의 고백대로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능력 외에 다른 외적인 요소를 통해서 강단 갱신을 시도하려는 많은 설교 시역자들에게 하나의 경종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오늘날도 설교자들이 어떠한 전략과 테크닉보다도, 휫필드처럼 오직 '하나님의 능력' 에 사로잡히게 되면 풍성한 은혜의 잔치는 언제든지 가능할 것으로 확신한다.

둘째, 휫필드의 야외 설교사역은 자신이 속한 영국국교회의 규율과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 순수한 말씀의 사역이요, 교파를 초월한 영적 부흥운동이었다. 사실 휫필드는 자신이 어떤 야심만 먹었으면 영국 국교회를 벗어나서 어떤 교파를 만들거나 주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주일마다 새벽부터 야외 집회를 인도하면서도 국교회의 질서와 전통을 중시하면서 매주 두 번씩 어김없이 공예배에 참석할 정도였고, 어떤 교파를 만드는 일에는 더욱 관심이 없었다.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휫필드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연합과 통일을 소원했기에 분열이나 파벌을 철저히 배격했다. 심지어 자신을 배척하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설교할 자격을 박탈한 것과 다름없는 강단 봉쇄를 조치한 사람들까지도 수용하려고 했다.

셋째, 휫필드의 야외 설교사역은 비천하고 가난한 자들 편에 선 자비의 사역이었다. 휫필드는 브리스톨의 킹스우드에 있는 탄광촌의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고, 병자와 거지들이 우글대는 케닝톤 컴먼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조지아주의 불쌍한 고아들을 위한 모금을 쉬지 않았다. 그는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복을을 증거 하는 자비로운 사역을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제임스 스티븐 경(Sir James Stephen)은 휫필드의 자비의 사역을 가리켜서 이렇게 말했다. “전 인류를 보편적 사랑의 정신으로 포용하면서 그 마음에 순전하고도 강렬한 박애주의의 불꽃을 피워 올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마로 조지 휫필드일 것이다 ‥‥ 그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을 돕는 것 외에는 좋아하는 일이 없었다."11

넷째, 휫필드의 야외 설교사역은 상상을 초월한 하나님의 역사였다. 휫필드가 수만 명이 모여 들었던 대규모의 집회를 거의매일 하루에도 몇 차례씩 설교하면서도 지치지 않았던 것은 영국 교회의 부흥운동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 속에 주어진 은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일주일에 열 번 이상 매번 한두 시간씩 수만 명의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켜가면서 설교한 것이나, 비바람이 몰아칠 때에도 그치지 않고 몇 차례씩 설교한 것, 때로는 반대자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집회를 강행한 것들 생각할 때, 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곤에 지쳤을 법도 하다. 하지만 휫필드는 일지(Journal)에서 피곤에 지친 자신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고, 오히려 모여든 군중들에게 설교할 때마다 힘이 넘쳐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사방에서 모여든 수많은 영혼들에게 말씀을 쏟아 부을 때마다 ‘기쁨과 거룩한 황홀함’12으로 충만했으며, 가슴 벅찬 감격을 느낀다고 기록했다. 더구나 휫필드는 집회가 없는 날이면 각 지역에 흩어진 많은 영혼들에게 자신의 야외 설교의 경이로운 사역을 알리는 수백 통의 편지13를 보냈고, 출판을 위해서 스무 편의 설교14를 준비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역사의 신기록을 세운 8만명의 인파가 모인 거대한 집회에서 마이크 시설도 없이 육성으로 설교했다는 것은 기적적인 역사였음에 틀림없다. 휫필드의 육성 설교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장 잘 알려주는 단서로는 벤쟈민 프랑클린(Benjamin Franklin)의 증언을 들 수 있다. 그는 휫필드의 설교들 들을 수 있는 거리에 대해서 말하기를 "나는 휫필드의 설교가 3만 명이상의 사람들에게 잘 들렸을 것이라고 추정한다."15고 했다. 이처럼 수만 명 앞에서 설교했던 휫필드의 육성 설교를 가리켜 달리모아(Arnold A. Dallimore)가 "인류 역사에 전례가 없는 인간의 목소리16가 쏟아져 나온 설교였다”고 극찬한 것은 가장 적절한 찬사라고 여겨진다.

주(註)

1. The Journal of the Reverend John Wesley, London: Epworth, 1938, Vol 2., P. 167, cited by
Arnold A. Dallimore, 1990, P. 51.
2. Ibid., P. 52.
3. John Wesley's Journal, Abridged by Percy Livingstone Parker Edited by Robert Backhouse,
London: Hodder & Stoughton, 1993,P.64.
4.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241.;호웰 하리스에 관해서는 H.J. Hughes, Life of Howell Harris, London: Nisbet, 1892.,또한 R. Bennett, The Early Life of Howell Harris, Edinburgh: Banner of Trust, 1962를 참조하라.
5. John Gillies, 1772, P. 42.
6. George Whitefield's Journals, 6th impression 1992,PP.260-261.
7. Luke Tyerman, 1890, P. 217.;터어만은 휫필드의 일지(Journal)야 말로 야외집회 때 모여든 청중의 수에 대해서 과장되거나 축소되는 위험이 없는 가장 정확한 정보라고 말했다(Ibid.).그 이유는 힛필드를 반대한 사람들이 종종 집회 때 모인 사람들의 수를 터무니없이 축소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8 George Whitefield's Journals, 6th impression 1992. pp.261-265.
9. Arnold A. Dallimore, 1990, P. 56.10. Ibid.
11. Sir James Stephen, Essays in Ecclesiastical Biography, 1883, cited by
Arnold A. Dallimore, 1990, P. 9.
12. George Whitefield's Journals, 6th impression 1992. p. 263
13. 휫필드의 편지들은 “Letters of George Whitefield: For the period 1734-1742"라는 제하에 1771년에 출판되었고, 그것은 1976년에 The Banner of Truth Trust출판사에서 재판했다.
14.Harry S. Stout, The Divine Dramatist: George Whitefield and the Rise of Modern Evangelicalism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P. 85.
15.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p.296.
16.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