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조지 휫필드

휫필드 13 - 설교 스타일과 교리 / 송삼용 목사

새벽지기1 2016. 8. 1. 07:01


설교 스타일과 교리  

 

4) 휫필드의 설교 스타일


벨덴(Belden)의 추정에 의하면, 휫필드는 그의 전 생애에 약 1억 이상의 사람들에게 설교했다.1 당시의 기록으로 봐서 이보다 더 많은 청중들에게 설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많은 청중들에게 휫필드의 설교가 어떻게 전달되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신 비결은 무었이었을까? 웨슬리의 증언은 이에 대한 간접적인 답변을 제공해준다.

 

“수천, 수만 명이 휫필드의 설교를 들을 때 마치 교회 안에서 설교를 듣는 것처럼 진지하고 조용하게 그의 설교를 들었다.”2

 

물론 그의 설교를 들은 수많은 사람들은 회개하고 변화되는 체험을 하였다. 휫필드는 자신이 설교자로 부름을 받은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일생 동안 지칠 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했다. 휫필드의 설교는 주일 아침부터 토요일 아침까지, 정초부터 년말까지,쉬지 않았다. 휫필드의 이러한 사역은 34년 동안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설교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며 새 생명을 얻는 역사가 속출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당시에 휫필드가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었던 뛰어난 복음 전도자요, 설교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휫필드는 그의 설교를 어떻게 전달했을까?

 

첫째, 휫필드는 불 같은 열정을 가지고 설교했다. 로이드 존스(D. M. Lloyd Jones)는 휫필드의 설교 스타일을 분석하면서 “그의 설교를 특징짓는 것은 열정, 불, 정열, 불꽃이었다”라고 평가했다. 휫필드는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면서 성령의 동행하심을 믿었다. 따라서 그는 죽어가는 영혼을 향하여 불같이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탁월한 웅변으로 쏟아져 나온 열정적인 메시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졌다.

 

휫필드와 같은 시대에 사역했지만, 신학적인 문제로 인하여 서로 다른 길을 갔던 웨슬리(Wesley)조차도, 휫필드의 설교를 듣고 이렇게 평가했다. “그에게 타오른 거룩한 사랑의 불꽃은 쉽게 꺼지지 않을 것이다.”4 웨슬리의 예견대로 휫필드가 지피운 거룩한 불꽃은 18세기 내내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둘째, 휫필드는 설교할 때 단순하고 간결한 언어 표현을 사용했다. 휫필드의 설교 스타일에 관하여 벨덴(Belden)은 “그의 설교는 언어의 표현에 있어서 놀랄 만한 특징이 있다”5 라고 했다. 휫필드의 설교 스타일에 있어서 그 놀랄만한 특징이란 ‘언어 표현의 단순성(simplic)과 명백성(plainness)’이었다.

 

휫필드의 언어 구사에 관하여 웨슬리(Wesley)는 이렇게 진술했다. “휫필드는 그의 설교에서 명백한 언어 구사에 탁월했다.”6 벤쟈민 프랭크린에 의하면, 휫필드는, 크고 밝은 목소리를 가졌으며, 단어와 문장을 아주 완벽하게 발음했기 때문에, 그의 말소리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곳에서도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모인 청중들 모두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7

 

휫필드의 지식의 창고에는 무한한 사상과 지식의 보화들이 쌓여 있었지만, 설교를 할 때에는 항상 단순하고 쉬운 말을 명확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그의 목표는 자신의 박식함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휫필드는 그러한 목표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청중들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단순하게 전달하는 것이 최상의 비결임을 알았다. 따라서 그의 설교는 귀족이나 평민, 가난한 자나 부자, 배운자와 못 배운자 등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부담 없이 잘 전달되었다. 단순하고 명백 한 표현은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대화식 이루어졌으며, 거기에다 탁월한 웅변력과 성령의 역사가 가미되어 수많은 청중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셋째, 휫필드는 설교의 주제를 극적(drama-tic)으로 표현하였다. 원래 타고난 웅변가 기질을 소유한 휫필드는 그의 설교 주제를 극화하는데 뛰어났다. 청중들이 휫필드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마음속에 한폭의 그림을 그려주는 듯하였다. 아라비아의 격언에 “눈으로 보는 것처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웅변가이다”8 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휫필드에게 해당된 말인 듯하다.

 

휫필드가 그의 설교의 내용을 그림처럼 묘사했던 예가 있다. 휫필드는 어느날 회개하지 않은 불쌍한 죄인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하여 어떤 거지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그가 상황을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청중들은 마치 거지를 실제로 보는 듯했다. 마침내 그 거지가 벼랑에 떨어지는 장면을 묘사하자,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그 사람이 위험해요!”라고 외치면서 밖으로 뛰어나갔다는 것이다.9 휫필드가 설교할 때 그 상황 묘사가 얼마나 생생했는지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예이다.

 

넷째, 휫필드는 무서울 정도로 진지하고 강렬하게 설교했다. 휫필드의 설교를 들은 어떤 사람은 “휫필드는 마치 사자가 표효하듯이 설교했다”고 증언했다. 이것은 휫필드가 그의 설교에서 얼마나 진지하고 강렬하게 설교했는지를 알려주는 증언이다. 그의 설교는 마치 대포알이 날아가듯이 힘있고 뜨거웠으며, 마치 불 같았고, 생명이 역사하는 힘이 있었다.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구원을 위해 사력을 다해 몸부림을 치던 휫필드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설교에 자신의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그의 설교는 하나님의 생명 자체였다. 휫필드는 거룩한 격렬함(holy violence)에 사로잡혀서 폭풍처럼 무섭고 강렬하게 설교함으로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진지하고 강렬한 설교자 앞에서 졸거나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섯째, 휫필드는 눈물로 설교했다. 휫필드가 죽은 지 백 년이 지났을 때 당시의 영향력 있는 영국 교회의 지도자가운데 한사람이었던 라일 주교는, 휫필드의 설교 스타일을 분석하면서 그가 눈물의 설교자였다는 것을 증거했다. 라일(J. C. Ryle) 주교는 휫필드 생애 말기에 그의 설교를 종종 들어왔던 코넬리우스 윈터 (Cornelius Winter)의 증언을 인용하면서10 “휫필드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설교를 끝낸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했다. 휫필드는 과연 눈물의 설교자였다.

 

필자는 휫필드가 설교할 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처럼 눈물로 설교했으리라 생각된다. 하나는, 청중들의 심령 상태를 생각하면서 동정과 연민으로 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감격으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휫필드가 평소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볼 때마다 뜨거운 가슴으로 늘 불쌍히 여겨왔고, 또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그렇게 기뻐하고 감격해왔던 그의 태도들을 더듬어볼 때 무리한 상상이 아닐 것이다.

 

휫필드의 이와 같은 설교 스타일은 청중들을 감동시키는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뉴톤(Jone Newton)은 휫필드의 놀라운 사역이 하나님께서 성공을 허락하셨기 때문이라고 함으로서 하나님의 손길을 강조한 바 있다.11 스코틀랜드의 목사인 윌리슨(Willi-son) 역시 휫필드 사역의 성공의 원인을 휫필드 자신의 능력보다는 하나님께 둠으로서, 하나님의 손길 곧 성령의 능력을 강조했다.12 결국 하나님께서는 휫필드의 탁월한 웅변 능력과 뛰어난 설교자로서의 자질을 사용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수많은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경이로운 세기의 부흥을 허락하셨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5) 휫필드의 설교와 기도 생활


휫필드가 설교를 준비할 때 독특한 방식으로 각 단어와 행까지도 기도하면서 준비했다는 것은 앞장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그와 같은 독특한 설교 준비가 능력 있는 설교의 비결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휫필드는 자신의 기도 생활에 대해서 설교 시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보다 더 열심일 것이다. 한 주간에 이틀 금식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하루에 아홉 시간씩 기도하곤 했으며...”13

 

하루에 아홉시간의 기도! 그리고 한 주간에 이틀 금식! 실로 이같은 탁월한 기도 생활이 아니었더라면 휫필드가 34년 동안 줄기차게 불 같은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휫필드의 탁월한 기도 생활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달리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사모함이 강해서 기도하는 일이 그의 생활 습관이 될 정도였다. 심지어 휫필드는 열여섯 살 때부터 죄 문제와 갈등하면서 기도와 금식으로 수많은 날들을 보냈다. 그는 하루에 일곱 번씩 기도했고, 심지어 금식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휫필드가 이처럼 기도와 금식에 결사적인 몸부림을 쳤던 이유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기도 습관이 몸에 밴 휫필드는 옥스포드에 가서 공부할 때도 여전히 기도 생활을 쉬지 않았다. 당시 옥스퍼드는 어느모로 보나 경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교회의 영성은 식어져 있었고, 학생들은 세속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휫필드는 아침과 저녁에 정기적으로 기도한 것 외에도 매일 세 차례씩 기도했고, 매주 금요일에는 금식하면서 기도했다.

 

휫필드의 기도 생활의 절정은, 옥스포드에서의 학업을 중단하고 글로스터에서 9개월 머물 때였다. 휫필드는 그곳에서의 기도 생활을,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 (sweet communion)였다고 할 정도로, 기도 생활의 기쁨을 누리면서 매일 기도에 전력했다. 휫필드는 그 이전부터 ‘정기적인 기도 시간’(stated hours of prayer)을 하루 세 차례씩 가졌지만, 그것에 매이지 않고, 때로는 기도로 온종일 보내곤 했다.

 

휫필드의 기도 생활에서 독특한 점은 매일 밤마다 자신의 영적인 상황을 점검하면서 기도 생활을 끊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매일 저녁, 자신의 기도생활을 점검하면서, 개인 기도 시간에 뜨겁게 기도했는지, 혹은 정해진 기도 시간을 지켰는지를 일기에 기록하여, 기도 생활에 실패하지 않으려고 결사적으로 노력했다.

 

휫필드는 성직의 길에 헌신할 때, 자신의 삶을 일생 동안 말씀 연구와 기도하는 일에 헌신하겠다고 결단했었다. 그래서 목사로 안수받고 나서 사역을 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자신의 경건 생활을 관리하기 위해서,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기도로 한 시간을 보낸 후, 5시부터는 말씀 연구를 계속했다. 사실 매일 새벽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 한국 교회의 상황으로는, 휫필드가 가진 새벽 4시의 기도가 그렇게 큰 의미가 있겠는가 라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겠지만, 새벽 기도가 전혀 없었던 당시 영국의 상황으로 볼 때, 휫필드의 새벽 기도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매일 새벽에 한 시간씩 개인 기도로 보내고, 하루에 세 차례씩 정기적으로 기도하며, 계속 이어지는 금식과 하루 아홉 시간의 기도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기도 생활은, 당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신기록이었다.

 

휫필드는 주당 60시간씩 수천, 수만 명에게 설교하면서도, 설교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가서는 휴식을 취하는 것보다는, 그날의 설교를 위해서 기도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중보기도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이로써 그는 처음에 성직의 길을 가려고 결단했을 때 소원했던 바 대로 일생 동안 말씀 연구와 기도로 헌신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찌르는 권세 있는 설교, 밀물처럼 몰려드는 군중들의 영혼을 사로잡는 메시지의 위력은, 그의 기도의 열매였다.

 

사도 시대 이후최고의 설교자요, 한 시대를 불태운 세기적인 설교자였던 휫필드의 설교는, 기도와 눈물로 적셔진 하늘의 메시지였다. 휫필드가 이룬 부흥의 역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었지만, 부흥의 도구로서의 휫필드의 업적을 평가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그의 탁월한 기도 생활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휫필드의 기도가 18세기 부흥 운동의 불씨가 되었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친 평가는 아닐 것이다. 필자는 만약 우리 시대의 목회자들도 휫필드와 같이 ‘하루 9시간의 기도’ 로 돌아간다면, 그 기도가 불씨가 되어 부흥의 불길이 온 교회에 번지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6) 휫필드의 설교에 나타난 교리

휫필드의 설교에 나타난 교리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다. 가장 간략하게 요약해서 말한 사람은 웨슬리(Wesley)였다. 그는 휫필드의 설교에 나타난 교리는 ‘거듭남(the new birth)과 믿음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faith)'14 로 요약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스미스(Smith)는 휫필드의 설교에는 세 가지의 교리적인 내용이 그 주류를 이룬다고 하면서 , 첫째, 원죄(orignial sin), 둘째, 믿음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faith), 셋째, 중생(regeneration)15 을 주장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D. M. Loyd Jones)는 여기에다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하심’(directleading of the Spirit)16을 더하면서 휫필드가 이것을 늘 강조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주장들보다 더욱 정밀한 분석은 엘리어트에 의한 것인데, 그는 스미스의 분석에 “성도들이 최종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은혜”와 “영원하고 무조건적인 선택”17을 더함으로서, 좀더 폭넓은 관점을 제시했다.

 

이러한 분석들은 모두 다 휫필드의 설교 가운데 일부나 상당수의 내용을 검토한 후에 분석된 가치 있는 것들이라 생각된다. 여기에서, 필자는, 엘리어트가 제시한 “성도들이 최종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은혜”와 “영원하고 무조건적인 선택” 등은 앞으로 ‘휫필드의 설교에 나타난 칼빈주의 사상’ 에서 다루기로하고, 여기에서는 스미스(Smith)의 세 가지 분석을 따르면서, 휫필드가 그의 설교에서 강조했던 교리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원죄(orignial sin)

휫필드는 원죄에 대한 교리가 담긴 내용을 종종 설교했다. 그가 설교한 원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아담의 개인적인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아담의 죄 때문에 본성이 타락하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었다. 둘째는 아담의 타락한 죄성이 그의 모든 자손에게 전해졌다. 그 죄성 때문에 인간의 본성은 본능적으로 악해져서 죄 짓기 쉬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휫필드는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심판이 임해서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게 되었다”18 고 설교하고 있다.

 

이러한 원죄론에 입각해서, 휫필드는, 모든 인간은 타고난 죄인이며, 진노의 자손이라고 증거했다. 원죄론에 대한 자각은 휫필드 자신이 타고난 죄의 본질에 대한 체험에 근거한다. 그의 편지에서 죄에 대한 인식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의 죄와 타고난 결함에 대한 의식은 나를 지극히 겸손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이 값 없이 풍성하게 주어져 내 영혼에 빛과 힘이 임하며, 그로 인해 경외로운 마음에 할 말을 잃고 침묵할 때가 많습니다. '주께서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이번 주 후반에는 그분의 얼굴 빛을 다시 내게 비추사 나로 하여금 기쁨이 넘치는 입술로 그 분을 찬양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19

 

하지만 원죄에 대한 교리는 예레미야 6장 14절을 본문으로 한 '은혜의 방식' 이라는 제목의 설교에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 속임수에 능하고 지독하게 악하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인간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존재인가를 아신다.”20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면, 탐욕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속성과 정반대되는 사람의 속성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교만, 악덕, 원한, 시기, 질투가 들어 있다. 이런 속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하나님을 닮았던 형상을 벗어버리고 악마가 된 우리 조상 아담으로부터 비롯되였다.”21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한 허물들을 보고, 느끼고, 슬퍼하고, 통곡해야만 한다.”22

“여러분의 일생 가운데 자신의 죄 때문에 슬퍼해본 적이 있는가? 여러분은 스스로 ‘내 죄가 너무 무거워 머리를 들 수 없구나’라고 탄식해 본 적이 있는가?”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실제로 거역한 허물을 뉘우쳐야 할 뿐만 아니라‥‥그러면 허물의 바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원죄,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 이 세상에 우리 자신과 더불어 타고난 원죄를 말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원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겨대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담의 죄를 우리에게 전가시킨 것을 부당하다고 비난할 것이다.”23

 

휫필드는 인간의 원죄로 인하여 무질서가 생기게 되었고, 자연 질서까지 파괴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질서하다. 나는 밖에 나가 있는 동안, 만일 원죄를 논증할 만한 것이 따로 없더라도, 늑대와 호랑이가 사람을 공격하는 일, 아니 개가 사람에게 짖어대는 일이 원죄에 대한 하나의 증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아담의 타락이 없었더라면 호랑이와 사자가 사람을 공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짐승이 사람을 공격하면 그것은 너희가 하나님께 범죄했다고 말해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24

 

휫필드는 이와 같이 원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구원에 이르려면 거듭나야 함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그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그 나라를 볼 수도 없음을 말씀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요 3장)을 주로 인용하면서 거듭남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설파했다.

 

휫필드가 가르쳐 온 원죄 교리는 당시 영국교회에서 가르친 원죄 교리와 다를 바 없었다. 영국 교회의 신조(9조)에서는 원죄에 대해서 이와 같이 말한다.

 

“원죄는 모든 사람의 본성의 결함과 부패이며, 아담의 후손에게 있어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것이어서 인간은 이것 때문에 원래적인 의에서 아주 멀리 떠나가며 자기 자신의 본성으로서는 악에 기울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25

 

이것을 볼 때, 휫필드는, 말씀 연구를 통해서 자신이 확신한 교리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영국 교회의 교리를 어느 정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휫필드가 야외 설교 사역을 왕성하게 진행하면서도 그의 생애의 중반에 이르기까지 영국 교회의 주일 낮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여해온 것을 보면, 그가 비록 공식적으로 영국 교회의 강단에 설 수 없도록 제재를 받았을지라도, 영국 교회의 교리나 신조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휫필드의 교리 체계는 명백하게 칼빈주의적이었다. 나중에 다룰 것이지만, 예를 들면, 칼빈주의 5대 강령(전적인 타락, 무조건 선택, 불가항력적인 은혜, 제한 속죄, 성도의 견인<궁극적인 구원>)은 휫필드가 가르쳐 왔던 교리와 다를 바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원죄 교리를 통해서 전적인 타락교리를 가르쳤고, 선택 교리와 불가항력적인 은혜, 그리고 십자가의 구속의 교리를 통해서 제한 속죄를 가르쳤으며, 성도들의 궁극적인 구원의 은혜를 끊임없이 가르쳤다. 더구나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원죄로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칼빈의 구원관을 따랐다. 휫필드의 구원관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으며, 죄로 타락한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따라서 그의 구원관은 인간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총에 자신의 자유 의지로 응답해서 구원에 이른다는 알미니안 신학과 대조되는 칼빈주의 신학이었다.

 

주(註)

1. Cited by Marion D. Aldridge, George Whitefield: The Necessary Interdependence of Preaching Style and Sermon Content to Effect RevivaI, Jounal of the Evangelical Theol

ogical Society, vol. 23, 1980, p. 59.

2. Ciced by Marion D. Aldridge, Ibid.

3. D. M. Lloyd Jones, 1987(repnnted 1991), op.cit., p. 122.

4. Cited by Manon D. Aldridge, 1980, p. 58.

5. Cited by Manon D. Aldridge, 1980, pp. 61-62.

6. J. Wesley, Sermon on the Death of the Rev. George Whitefield, Atlanta: Emory University Library, 1953, p. 13.

7.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 104.

8. J. C. RyIe, Christian Leaders of the 18th Century,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885(reprinted 1990), P 52

9. Ibid., p. 53.

10. Ibid., p. 54

11. Ibid., p. 46

12. Ibid

13. George Whitefield's Sermons vol. II,('The method of Grace' ), New Hsmp

dhire: Pietan Publications, 1993, p 119.

14. Marion D. Aldridge, 1980, p. 63.

15. ibid.

16. D. M. Lloyd Jones, 1987(reprinted 1991), p. 120.

17. J. C. Ryle, R. 엘리어트, George Whitefield; [생애와 사역, 사상, 설교], 정영식 역, 서울: 새순출판사, 1986, p.59

18. "Of Justification by Christ(1Cor. 6:11)", George Whitefield's Sermons vol. II, Ne

w Hsmpdhire: Pietan Publications,1993,p.48.

19. Arnold A. Dallimore, 1970(reprinted 1995), p. 404.

20. "The mothod of Grace"(Jer. 6:14), George Whitefield's Sermons vol. II, 1993, p. 109

21. Ibid., p.112.

22. Ibid., p. 110.

23. Ibid.,p. 111.

24. Ibid

25. J. C. Ryle, SeIect Sermons of George WhitefieId: With an account of his(and a summayr of his doctrine by R. E Iliot),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th, 1958(Reprinted 1990), p. 53.Da11imore, 1990, p. 31.

7.보라. Arnold A. Dallimore, 1970(repnnted 1995), p. 223.

8. David Crump, 1989, vol.xxv, no.3. p. 20.

9. D. M. Lloyd Jones, 1987(reprinted 1991), p.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