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교리강좌(3)

제 7 장 조건적 불멸설과 제2의 기회

새벽지기1 2016. 6. 30. 13:51


7 장 조건적 불멸설과 제2의 기회

 

1. 중간 상태의 교리

 

이생에서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우리는 어떠 상태로 있는 것일까? 그것을 중간상태의 교리라고 한다. 연옥에 대한 카톨릭의 가르침은 논하지 않겠다. 성경에는 그에 대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로마가톨릭이 추가한 교리들 중 하나이다.

 

2. 중간 상태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

 

1) 모호한 존재 상태로서의 중간 상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문헌에는 영혼이 어떤 모호하고 불명확한 상태로 나아가게 된다는 믿음이 나타나 있다. 성경적 가르침과는 전혀 관계 없는 개념이다.

 

2) 공통 장소로서의 스올

두 개의 구획이 존재한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품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받는 장소이다. 스올이라는 단어는 여러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단순히 ‘무덤’일 때도 있고,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문맥상 형벌의 장소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3) 영혼 수면설

죽을 때 수면상태로 들어가 무의식이 되며, 부활 때까지 이 상태로 있을 것이라고 한다.

성경적 근거로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고전15:51),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로 내려가는 자들은 아무도 찬양하지 못하리로다”(115:17)를 든다. 이것은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죽음과 부활 사이에 의식을 가진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하나의 구절만 떼어 내서 교리를 만들면 절대로 안 된다. 죽음 이후에 의식을 지닌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더 중요한 확증은 십자가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하신 말씀이다.“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 계시록 6장에도 핍박을 당해 죽은 자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서 종말이 임해 그들을 잔인하게 억압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신원하여 주시기를 간청하고 기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혼은 잠들어 있지 않다. 신자와 불신자 둘 다 의식이 있다. 신자는 말할 수 없는 복락과 기쁨을 누리고, 불신자는 고통의 상태에 있을 것이다.  

 

4) 조건적 불멸설(멸절설)

불신자의 영혼은 완전히 멸망하여 존재가 완전히 없어질 것이라는 믿음이다. 사람들은 원래 불멸의 존재가 아니며 죽어야 하지만, 부분적으로 불멸성의 선물로 해석되는 영생의 선물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은 그 존재가 사라질 것이다. 일정 기간 살아서 고난과 형벌을 받은 후 마침내 멸망하여 영원토록, 그리고 완전히 존재가 사라진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가르침은 상식과 성경 모두에 반하는 옳지 않은 가르침이다. 창세기 첫 구절부터 시작해서 성경을 죽 살펴보면, 세상은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즉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누어져 있으며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영원한 복락을 누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과 멸망을 겪게 된다는 사실 외에 다른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는 인상은 절대로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그 본능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소멸과 멸절을 믿는다면 많은 사람은 오히려 기뻐할 것이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가르치듯이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며, 영원무궁토록 계속될 고난과 형벌이 있다는 믿음을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종 노릇한다.

 

25장은 말한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46). 성경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신자와 불신자의 운명을 대조하며, 그 때마다 정확히 똑같은 단어가 사용된다. 형벌도 영원하며 생명도 영원하다. 그러므로 영원한 멸망이 없다면 영원한 생명도 없으며, 신자들에게 약속된 모든 것은 잠시 동안만 지속되다가 끝나 버릴 것이다.

 

주님 자신이 영원한 형벌을 묘사하셨다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다. “꺼지지 않는 불”“구더기도 죽지 않고”(9:43-48). 벌을 받는 상태로 영원히 존재함을 시사한다.

 

조건적 불멸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잘못된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그와 같은 일을 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상상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내용에 기초해야 한다. 우리는 유한할 뿐 아니라 죄된 존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은 충분히 넓지도, 똑바르지도, 깨끗하지도, 순결하지도 않다.  

 

3. 2의 기회

 

1) 2의 기회를 주장하는 근거

 

불신앙 가운데 죽은 자들에게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지리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주된 논증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그들이 가진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고 마귀까지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데까지 발전한다.

 

주장의 근거는 벧전 3:18-20과 벧전 4:6이다.

(벧전 3:18-20)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전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2) 2의 기회에 대한 반론

 

성경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이 세상에서 결정된다고 말한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부자에게 일말의 희망도 제시되지 않는다.

주님 자신의 완벽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개의 구절만 가지고 교리와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벧전 3:18-20의 올바른 해석

 

이 본문에는 우리 주님이 죽으심과 부활 사이의 기간에 어떤 일을 하셨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육체 가운데 있던 우리 주님과  영적 상태에 있던 우리 주님 간의 차이이다. 이 땅에 계실 때 우리 주님은 육체 가운데 계셨다. 세상에 오시기 전과 세상을 떠나가신 후에는 영적인 상태로 계신다. 분명 이것이 본문의 가르침이다. 주님은 육체를 따라 죽으셨지만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며, 영으로 거하시는 것은 살리심을 받은 후라는 말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도 베드로가 고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와 힘과 격려를 주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7절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하고, 17절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한다.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겠습니까?

베드로는 사실상 다음과 같은 위로와 격려를 주고 있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보라. 사람들은 육체를 따라 예수를 죽였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너희의 육체를 죽일 수 있을 뿐 영혼은 손대지 못한다.” 그것이 18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첫 번째 진술이다.

 

이어서 베드로는 우리 주님은 육체 가운데 행하셨던 일을 영으로 계신 지금도 여전히 행하고 계시다고 주장한다. 주님은 육체 가운데 계셨을 때 사람들을 도와 주셨으며, 격려하고 힘을 주셨다. 베드로는 “주님은 여전히 그 일을 하고 계신다. 그렇다. 주님은 여전히 그 일을 하시고 계실 뿐 아니라, 이전에도 그 일을 하셨다. 심판이 인류에게 임하고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던 또 한 번의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홍수 때였다. 홍수는 온 세상이 심판을 받고 최종적 분리가 일어났던 유일한 사건이었다.





 

왜 사도 베드로가 노아 시대와 노아 방주를 준비하는 일에 대해 언급하는지 이제 아시겠는가? 그것은 고난이라는 문맥을 떠나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 베드로는 말한다. “옛 일을 돌아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마치 육체로 거하실 때부터 지금까지 전파하고 계신 것처럼 그리스도는 그때에도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홍수에 대해 경고하시기 위해 노아를 사용하여 방주를 만들게 하심으로써 120년에 걸쳐 계속해서 경고하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부했다. 믿는 사람들, 즉 노아와 그의 가족 단 여덟 사람은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을 믿고 방주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은 구원 받았으며, 대홍수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베드로는 “지금도 그와 똑같다.”고 말한다. “그 방주는 세례를 나타낸다.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들은 육체 가운데 계시던 그리스도를 죽였던 것처럼 너희도 죽일 수 있을 것이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너희 영혼은 안전하다.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으며 너희는 그 분과 함께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영으로 계속 살아계신 것과 마찬가지로, 비록 그들이 너희 육체는 죽일지 모르지만, 방주(세례가 의미하는 것) 안에 있으면 너희 영혼은 완전히 안전하여, 사람들은 너희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또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벧전3:13)  

 

이것이 본문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전체 요점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극복하셨으며, 그렇기 때문에 홍수 전에 주님의 말에 귀 기울이고 홍수를 극복했던 노아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불같은 시련이 우리에게 닥칠지라도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안전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비록 육체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영으로 살아계시며 지금도 다스리시는 만유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벧전 4:6의 올바른 해석

비슷한 논증이 설득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이 구절은 표면적으로는 죽음 이후에 복음 전파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들은 그 말을 복음이 죽은 자들에게도 다시 전파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하려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누구에게든지 죽은 이후에 복음이 전파 되었다고 말할 내용이 전혀 없다.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복음이 특정한 사람들, 즉 지금은 죽었지만 복음이 전해질 당시에는 살아 있었던 어떤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둘은 전혀 다르다.  

 

그들을 핍박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또다른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들 이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완전히 엉뚱한 이야기다. 말이 안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듣고 믿은 그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육체로는 심판-정죄-을 당했다. 하지만 괜찮다. 그들은 영으로는 살아 있다. 그러니 지금까지 죽어 간 너희의 사랑하는 자들로 인해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

베드로의 논증은 계속 이어진다. “불신자들과 관계하지 말고 더 이상 그들처럼 살지 말라. 더 나아가 그들을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들이 너희 육체를 멸할 수는 있어도 영혼은 건드리지 못한다. 너희는 그들이 죽였으나 그 영혼은 건드리지 못한 그리스도께 속한 존재다. 그들과 관계하지 말라.”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너희가 고난을 받아야 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으라.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그리스도 및 그리스도와 너희의 관계를 분명히 하라. 그러면 어느 누구도 너희를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2의 기회에 대한 결론    

두 본문에는 죽음과 음부 너머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 또다른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 전파가 그토록 중대하고 긴급한 이유는 이생과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주위 사람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기억하도록 하자.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의 영원한 복락과 기쁨 혹은 그들의 영원한 불행과 비참함이 이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을 믿느냐 거부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고후5;11). 주여 우리가 이 일을 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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