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본문은 두 가지 전승을 전한다.
하나는(12-17) 세례 요한의 구금 이후 시작된 예수 활동을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과 연결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18-22) 예수가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이다.
마태가 세례 요한을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요한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다. 선지자 전통이 끝나고 이제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선지자와 메시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선지자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역할을 한다. 요한의 선배라 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여기서 인용된 건 당연하다. 사 9:1,2절에는 흑암, 큰 빛, 사망의 땅, 그늘 등의 단어가 키워드로 나온다. 독자들은 마태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눈치 챌 수 있다. 이사야가 전한 빛이 바로 예수라는 것이다.
빛은 생명, 구원에 대한 메타포다. 창세기의 창조보도에 나오는 첫 창조는 빛이었다. 예수가 빛이라는 성서의 주장을 전하려면 세상이 흑암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왜 세상이 어둠인가? 왜 메시아가 와야만 하나? 1) 인간의 실존은 흑암이다. 인간 스스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지적이다. 오늘처럼 풍요의 세계에서도 흑암이 여전하다. 2) 흑암의 존재론적 근거는 죄다. 교만, 자기사랑, 자기연민, 자기집중이라 할 죄는 인간 삶을 총체적으로 파괴한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유대인은 율법으로, 이방인은 율법 없이 죄에 물들어 있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가 왜 빛인가? 선지자와는 어떻게 다른가?
선지자는 죄를 나열하고 비판하는 반면에, 메시아는 죄의 용서를 선포한다. 메시아인 예수는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포했다. 그에게만 그런 영적 권위가 있었다. 사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일치된다. 이것이 바로 빛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이 예수라고 한다면 그가 빛이라는 말이 옳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답을 잘 알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를 통해서 일어난 종말론적 생명 사건이다.
마태는 예수를 빛으로 말한 뒤에 제자의 소명을 전한다. “나를 따라오라.” 빛을 본 자는 당연히 그 빛을 따르게 되어 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이다. 하나는 말 그대로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가끔 오해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빛이 아니라 빛을 반사할 뿐이다. 다른 하나는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던진다는 것이다. 현재와 미래 운명을 포함한 모든 삶을 예수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모든 세속의 삶을 포기하고 무조건 교회생활에 전념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속의 삶에서 예수와 관계를 맺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대목에서는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를 뒤따름(Nachfolge Christi)에 대한 신학적 개념이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예수가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고 믿는 우리가 이제는 그 사실을 말과 삶으로 전해야 한다.
'좋은 말씀 > 정용섭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분( 딤전 1:12-17) (0) | 2015.12.09 |
---|---|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마태복음 18:21-35) (0) | 2015.12.09 |
심판의 하나님(출애굽기 12:1-14) (0) | 2015.12.07 |
종말과 생명 완성(마태복음 16:21-28) (0) | 2015.12.07 |
알파와 오메가(계 1:4-8) (0) | 2015.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