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스크랩] 침묵 명령-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15. 8. 16. 16:44

 

 

마가복음 9:2-9, 주현절후 일곱째 주일, 2012년 2월19일

 

 

     하나님의 아들

 

     오늘 설교 본문 막 9:2-9절에 나오는, 소위 ‘변화산 사건’은 좀 이상해 보입니다. 복음서에 이상하게 보이는 이야기가 이것 하나만은 물론 아닙니다. 장애인들과 병자들이 고침을 받는다거나 예수님이 호수 위를 그냥 걷는다는 이야기도 오늘의 자연과학적인 세계관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중에서도 변화산 이야기는 유별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세 명의 제자들, 즉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옷에서 광채가 나면서 환하게 빛났습니다. 그 순간에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종교적 카리스마가 가장 강력한 이들입니다. 이들의 카리스마는 특히 산과 연관성이 깊습니다. 모세는 호렙산과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놀라운 방식으로 경험했습니다. 호렙산에서는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는 가시떨기나무를 보았습니다. 그 산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시내산에서는 빽빽한 구름, 우레, 번개, 나팔소리 같은 현상으로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모세는 거기서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도 모세 못지않은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갈멜산에서 이방 제사장들과 영적인 힘겨루기를 벌였습니다. 이방 제사장들은 자해를 하면서 큰 소리로 자신들의 신을 부르짖었지만 제물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에 반해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모든 제물을 완전히 불살라버렸습니다. 모세의 영적 카리스마가 얼마나 강력했든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그의 후광을 사람들이 볼 수 없을 정도였고, 엘리야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현상일까요? 줄잡아 예수님보다 1천5백 년 전에 살았던 모세와 1천 년 전에 살았던 엘리야가 실제로 변화산에 나타난 것일까요? 가끔 요즘도 그런 이야기들이 들립니다.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주로 로마가톨릭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모든 걸 완벽하게 해명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을 무조건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경험을 근거로 기독교 신앙을 해명하는 건 건강하지 못한 겁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관점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기독교 신앙이 보편적인, 또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해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을 초월하는 성서의 진술이 실질적으로 말하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 출현을 사실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건 이 두 가지 관점과 다릅니다. 이것이 객관적으로 사실적인 현상으로 인정받으려면 모세와 엘리야가 죽지 않고 살아 있어야 하며, 또한 그들이 거하고 있는 저 세상과 이 세상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은 상식적이지도 않고 성서적이지도 않습니다. 마가복음 기자를 비롯해서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이 사건을 사실적인 것처럼 기록했을까요?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 이야기를 통해서 다른 어떤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이 무엇일까요?

 

     변화산에서 또 하나의 신기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구름이 제자들을 덮었고, 구름 속에서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7절) 변화산 이야기가 말하려는 핵심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더 사실적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모세와 엘리야를 등장시켰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사실로 경험됩니다. 그것보다 더한 것도 경험됩니다. 코엘료라는 작가는 <연금술사>에서 연금술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연금술은 납을 금으로 만드는 비술(秘術)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물을 금으로 보는 시각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시각에 따르면 모래 한 알이 우주입니다. 구름 속에서 들린 소리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도 똑같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면서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 변화산에서는 주어가 3인칭으로, 요단강에서는 1인칭으로 나온다는 것만 다르지 실제 내용은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자식을 낳는다는 끗은 아닙니다. 더구나 성적인 관점에서 딸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점을 강조해서도 곤란합니다. 아들이라는 단어는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설명하는 메타포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당시 사람들이 알아듣게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메시아 비밀

 

     여기까지는 오늘 본문 이야기를 그런대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경험한 이 사건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는 9절 말씀은 이해하기가 까다롭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사건이라면 거꾸로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침묵 명령을 내린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즉 메시아라는 사실은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비밀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전해 들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오해를 사기 쉽습니다. 이런 오해는 예수님 공생애에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사람들은 신성을 모독한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급기야 십자가에 죽게 했습니다.

 

     이런 오해는 일반 사람들만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5절)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모세나 엘리야에 버금가는 예언자라는 사실을 놀랍게 생각했겠지요. 모세나 엘리야와 똑같은 카리스마를 통해서 예수님이 당시 세상을 확 바꿔주실 것을 기대했겠지요.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고난을 당하고 죽고 부활할 것을 예고했을 때도 베드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아니 되옵니다.’ 하고 극구 말렸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주장을 사탄의 짓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즉 메시아라는 사실을 언제 알았을까요? 그것을 9절이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 침묵 명령을 내리시면서 단서를 붙였습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제자들은 몰랐습니다.(10절) 나중에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뒤로 모든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그 전에도 죽은 자를 살리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물 위를 걷고, 등등의 일들이 있었지만 그것이 증거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카리스마가 뛰어난 많은 인물들이 그런 일을 행했습니다. 심지어는 악령에게도 똑같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 초능력적인 것만 놓고 본다면 예수님이 모세나 엘리야와 다를 게 없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는 그의 부활이었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행위는 새로운 빛을 내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부활 경험이 세례 이야기와 변화산 이야기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부활의 빛에서만 예수님의 세례와 변모 사건은 참된 의미를 얻을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변화산 이후

 

     변화산 사건은 그것 자체로가 아니라 그 뒤의 사건과 연결해서 생각해야만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서는 똑같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예수님과 세 명의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와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 왔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곤란한 일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간질병 걸린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왔던 어떤 사람이 예수님이 안 계신 것을 알고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했지만 제자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런 장면은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있을 때 산 아래서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과 비슷합니다. 양쪽 모두 두 상황이 대비됩니다. 산 위에서는 초월적이고 황홀한 신적 능력이 나타났고, 산 아래서는 생존의 위기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불안과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이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갑니다. 하나의 세계는 신비로운 메시아 경험입니다. 거기서는 시간을 초월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도 등장합니다. 궁극적인 생명인 부활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으면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의 세계는 부조리한 현실입니다. 고난, 분노, 배반, 허무, 경쟁이 지배하는 일상입니다. 금송아지와 간질병으로 묘사될 수 있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기독교인은 무기력합니다. 제자들이 간질병 아이를 고치지 못했던 것과 같습니다. 이런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간다는 게 가능할까요? 이 두 세계를 조화롭게 살아낼 수 있을까요? 이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양극단으로 떨어집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는 상관없이 변화산의 신비롭고 황홀한 세계로 도피하거나, 아니면 세상을 새롭게 변혁하는 일에만 매진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어떤 구체적인 대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완전한 해결책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각자의 영적인 수준에 따라서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다만 저는 변화산의 경험을 사람들에게 발설하지 말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더 확인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겠습니다.

 

     앞에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이 비밀이기 때문에 침묵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발설할수록 오해만 산다고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떠들어도 좋을까요? 이제 메시아는 비밀이 아니라 드러난 진리가 된 것일까요?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우리도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며, 메시아라는 사실을 용감하게 전해야 할까요? 저는 침묵 명령이 오늘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이 명실상부하게 다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지금 기독교인들에게만 확실한 생명 사건입니다. 교회 밖은 아직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나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라는 주장은 여전히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모든 이들에게 완벽하게 인식되는 순간이 종말입니다. 그때가 되면 더 이상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메시아 비밀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은 침묵의 시간입니다.

 

     여기서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전도도 안 하고, 설교도 안 하고, 하나님 말씀도 읽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메시아 비밀을, 생명의 비밀을 직면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비밀이라는 말을 실질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100년 후에 여러분의 실존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지도 않은 채 기독교를 보험 상품처럼 선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종말에 드러날 부활 생명의 비밀을 직면하고 오늘의 현실을 보십시오. 간질병이 걸린 아이와 그 아버지의 고통을 보십시오. 그 현실에서 무기력했던 제자들을 보십시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여러분 각자가 소명의 수준에 따라서 선택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은 침묵할 수밖에 없는 메시아 비밀을 직면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글은 대구성서아카데미에서 담아 온 것입니다.

출처 : PROTESTANT
글쓴이 : free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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