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스크랩] 정용섭 교수의 << 포플리즘과 설교의 상처 >>

새벽지기1 2015. 8. 16. 16:58

포퓰리즘 과 설교의 상처

                            - 청중으로부터 벗어나기! -

 

설교의 중심에 대해

 

현대 설교학의 주요 관심은 청중을 어떻게 설교행위 안으로 끌어들이는가에 놓여 있다.
예컨대 수요자 중심의 설교, 귀납법적 설교, 스토리텔링 등등, 설교학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용어들은 설교자와 청중의 간극을 좁혀보려는 노력들이다. 이런 노력은 기존의 설교가 청중을 무시하는 독단론에 빠졌다는 반성에서 출발한다. 이런 지적은 일단 옳다. 전통적 설교는 청중들의 실제적인 삶과 영적인 상황을 간과한 채 기독교 교리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이는 흡사 동화책을 읽어야 할 초등학생들에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나 횔덜린의 시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과 같다. 이런 전통적 방식의 설교는 청중들에게 설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고, 따라서 청중들로부터 외면받기 마련이다. 이런 전통적 설교 방식에서 벗어나서 청중들의 눈높이에 맞춘 설교를 해야 한다는 현대 설교학 선생들의 주장은 교회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그들의 주장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기존의 전통적 설교에서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 영적인 소통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현상적 분석은 옳지만 그것의 원인과 처방은 옳지 않다. 영적인 소통이 일어나지 않는 원인이 청중들을 중심에 두지 않았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한국교회 안에서 청중은 언제나 주인공으로 대접받았다. 교회성장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존재이유로 자리하고 있는 한국교회에서 청중들이 외면 받는 일은 일어나려야 일어날 수도 없다. 청중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기껏해야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이나 설교자의 가부장적 태도에 해당되는 것들이었다. 예컨대 부정확한 발음, 불분명한 요지, 내용 전개의 산만성, 부적절한 예화사용 같은 요소들 말이다. 이런 것들은 설교를 결정하는 중심 요소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개선한다고 해서 설교의 위기가 극복되지도 않는다. 설교를 잘 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이 계속해서 생산되는데도 불구하고 설교의 위기가 조금이라도 극복되는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방증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처방들이 청중을 설교 행위 안으로 끌어들이고, 따라서 설교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그들의 주장은 문제의 핵심을 잘못 짚은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어디에 있는가? 전통적 설교가 청중과의 소통에 장애를 일으키는 이유는 청중의 눈높이를 무시한다는 사실이라기보다는 훨씬 근원적인 사태에 놓여 있다. 그것은 곧 설교자가 계시사건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태다. 설교자가 계시를 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전한다는 말인가? 언어가 자기에게 말을 건다는 경험을 못하는 시인이 어떻게 시를 쓴다는 말인가? “생명의 신비에 대한 역사적 경험을 켜켜이 간직하고 있는 성서 텍스트”와의 진정한 만남이 없는 설교자의 설교가 어떻게 청중들의 영혼에 공명을 일으키겠는가? 문제는 설교자와 청중의 소통이 아니라 설교자와 성서 테스트 사이의 소통과 회통이다. 설교자가 성서와 하나님의 통치와 그 구원 현실에 눈을 떴다면 그는 자기가 본 것과 들은 것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그의 경험과 인식이 영적인 지평에 속한 것이기만 하다면 청중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청중들의 영혼과 대화하기 마련이다. 그는 굳이 커뮤니케이션 이론이나 연설방법, 수사학, 또는 대형프로젝터를 비롯한 각종 시청각 교재를 이용할 필요가 없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자신이 본 것만큼 자연스럽게 청중들에게 전달된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설교행위에서 청중에 대한 고려가 별로 필요하지 않다는 게 필자의 지론이다.


노파심으로 한 마디 해야겠다. 설교행위에서 청중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하나님 계시의 존재론적 우위성을 강조하려는 것이지 청중을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의 설교에서도 청중은 빠질 수 없었다. 예언자들에게도 청중은 있었다. 하나님의 계시는 허공을 향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대상을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선포된 계시라 할 수 있는 설교에서 청중이 중요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설교행위에서 청중 중심이 아니라 계시사건, 언어사건, 구원사건이 중심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기본적으로 신탁(神託)이다.


문제의 핵심을 잘못 짚은 오늘의 설교학이 제시하는 청중중심주의는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오히려 악화시키고 있다. 기존의 전통적 설교보다 오늘의 설교는 훨씬 심각한 포퓰리즘에 빠져버렸다는 게 그 이유이다. 오늘 우리에게 복음은 상품*이 되고 말았다. 설교는 그 상품을 포장하는 기술로 전락했다. 청중중심주의는 어쩔 수 없이 그런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민중의 속성이 작용하고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에서 끊임없이 이집트의 삶을 그리워했고, 가나안에서 끊임없이 가나안 농경문명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설교의 청중이라 할 수 있는 민중은 어쩔 수 없이 현실적인 삶에만 민감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민중들도 국가경제가 어떻게 되더라도 자기의 작은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산다. 민중은 이중적이다. 20년 전 6월 항쟁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 변혁의 에너지를 분출하기도 하지만, 새만큼 간척사업을 전북도의 숙원 사업으로 추진하듯이 반(!)생태적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다시,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필자는 이런 민중들의 속성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 역사의 현실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만 설교자는 민중들의 이런 속성의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전통적 설교의 대안으로 등장한 이런 현대적 감각의 위로설교는 전통 설교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극복을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서 찾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아주 세속적인 시대정신에서 찾고 있다. 그런 태도는 현대인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겠다는 일종의 상품논리이자 대중추수주의와 다른 게 아니다. 여기에는 청중을 중심으로 삼겠다는 발상이, 즉 복음을 들어야 할 대상을 포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복음의 정체성을 훨씬 심화시키는 게 아니라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사는 대중들의 욕구에만 눈높이를 맞춤으로써 결국 복음의 역동성과 날카로움을 순치 시키고 만다는 위험성이 숨어 있다. (졸고 “전통설교와 위로설교”, 기독교 사상, 2003년 10월 호)

 

오늘 한국교회에서 설교만이 아니라 가장 거룩한 행위라 할 수 있는 예배 자체가 볼거리를 제공하는 쇼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도 역시 포퓰리즘으로 인한 당연한 결과이다. 소위 ‘열린예배’는 바로 그런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인다. 예배는 청중들의 은혜나 만족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열린예배는 극도로 청중들의 종교적 감수성에만 영적인 안테나를 맞추고 있다.

 

종교적 여흥

 

청중들의 눈높이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설교와 예배로 인해 결국 기독교는 청중들에게 종교적 여흥(entertainment)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마치 한국의 공영TV방송국이 거대 연예오락프로그램 생산기지로 바뀐 것처럼 종교적 오락을 제공하기에 바쁘다. 온갖 종류의 이벤트와 프로그램이 신앙과 선교라는 명분으로 교회 안에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소비자가 왕이다.”는 경제 구호가 설교 현장에서도 진리로 통하는 실정이다. 어떤 설교자는 설교할 때 청중들을 반드시 한번은 웃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흡사 TV 시트콤이나 멜로드라마처럼 그냥 청중들을 웃고 울리는 데만 초점을 맞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의 예배와 설교는 설교자의 입담에 따라서 대중성을 얻는 데 매우 효과적일 수는 있지만 성서의 놀라운 세계를 경험한 설교자의 자리는 아니다. 유진 피터슨의 아래와 같은 경고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북미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소비자 중심의 신앙이다. 미국인들은 하나님을 하나의 생산품 정도로 여긴다. 자신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더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그런 존재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미국인들은 마치 소비자처럼 가장 좋은 제품을 찾기 위해 쇼핑을 한다.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거의 인식하지도 못한 채 거래를 시작하고, 최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끌 수 있는 외관으로 하나님이란 상품을 포장한다. (Eugene H. Peterson, 차성구 역, 성공주의 목회신화를 포기하라, 56쪽)

 

설교의 여흥적인 요소를 극대화한 설교자는 대전중문교회의 장경동 목사이다. 그의 설교는 설교의 희화화이다. 필자는 그것을 설교자의 자학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학대함으로써 대중성을 확보했을 뿐이다. 개그맨들이 인기를 끌기 위해서 익스트림을 구사하듯이 말이다. 어쨌거나 평신도 대중집회만이 아니라 장로 모임이나 심지어는 목사 모임에까지 그의 설교가 상종가를 기록하고 있다는 이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우리는 한국 교회 강단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대중주의의 극치를 볼 수 있다. 오직 청중들의 호응만을 설교 평가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온 한국 강단에서 장 목사의 출현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장이 멈추거나 뒷걸음질 치는 한국 교회가 장 아무개 목사 같은 사람을 통해서 힘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거나, 장 목사가 지나치게 웃기기는 하지만 복음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으니까 큰 문제는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오늘 이런 논의는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필자는 신바람 넘치는 그의 설교에서 일종의 허무주의 영성을 맛보았다는 사실만 지적하려고 한다.(졸고 “허무주의 영성”, 기상 2005년 2월호 참조). 실제로 그의 설교에는 내용이 전혀 없었다. 설교의 내용은 날이 갈수록 심하게 형해화 (形骸化)하고 대신 사람을 웃게 만드는 온갖 재료, 정보, 기술만 그 자리를 지배할 뿐이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 장 아무개 목사의 설교만을 꼬집어서 비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흡사 피에로처럼 연기하고 있는 그는 우리 모두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속도와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런 대중주의를 추종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요즘 목회자들이 상담학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다는 현상도 대중주의의 한 단면이다. 성서 텍스트가 담고 있는,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는 생명의 신비에 들어갈 생각은 없이 청중들의 정서와 심리를 읽는 인간론에 매달린다는 것은 결국 설교자의 영적인 촉수가 오로지 청중들에게만 쏠려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오늘 한국교회 강단이 처한 근본적인 위기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말씀이 제공하는 하나님의 존재론적 통치만이 설교자의 영성이 살아날 수 있는 토대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말씀의 세계는 날이 갈수록 축소되고 청중들의 종교적, 또는 통속적인 욕구에만 기울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설교자들의 영성은 확보될 수 없다. 영성이 소진된 설교자들은 설교의 좌절감에 빠지거나 청중들을 닦달하는 데에 몰두하기 마련이다. 포퓰리즘이 극복되지 않는 한 이런 상황을 면할 길은 요원해 보인다.

 

통속과 자기연민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설교의 포퓰리즘을 한국문학의 그것과 잠시 비교하겠다. 인간구원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지평에 놓여 있는 신학과 문학이 포퓰리즘에 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도 서로 비슷한 메커니즘을 보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공지영의 신작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한국소설 중 최고의 판매량을 기록했다고 한다. 문학비평가 이명원은 공지영의 소설이 “위안의 서사학, 감상주의 또는 문학적 센티멘탈리즘을 통해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놀라운 대중성을 확보했다고 평했다. “공지영의 소설은 깊은 대중주의의 출발점인 것이다.” 이에 반해 정문순은 그네의 소설을 “통속과 자기연민, 미성숙한 자아”의 표현으로 보았다. “그의 소설 전편을 꿰차고 있는 것은 조숙한 여자아이 수준의 인식과 크게 다른지 않다.” 정문순에 의하면 공지영만이 아니라 90년대에 상업적으로 잘 팔린 신경숙과 은희경도 이런 혐의를 피할 수 없다. “여성작가들이 어린아이의 미성숙한 자아를 가져야 했던 것은 세상이 여성작가들에게 어른이 되지 않기를 요구한 지배적인 통념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분석이 한국교회 설교에도 적용된다고 보아 한 대목을 더 인용하겠다.

 

드세지 말고 세상과 맞장 뜨지 말아야 하고 고분고분하며 하며 세상과의 불화를 감당하기보다 쉽게 물러서고 자기연민에 탐닉하는 것은, 공지영 등 여성작가들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상처입거나 패배를 두려워하는 한 공지영의 작품을 화해와 사랑이 유난히 강조될 수밖에 없다. 이는 그녀처럼 각박한 세상에서 극심한 피로에 지친 내면을 위로받고 싶을 뿐 세상과의 장면 승부를 감당할 수 없는 독자들과 출판시장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한겨레 21, 2007년 4월24일 자에서)


세상이 요구하는 것에 치우치는 포퓰리즘 문학이 자기연민(나르시시즘)에 사로잡혀서 내면의 위로만 추구하는 것처럼 포퓰리즘 설교도 역시 이런 틀에 갇힌다는 점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신적 미성숙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들은 홀로 진리의 길을 갈 줄 모르고 옆에서 누군가 옆에서 보아주기를 바란다. 청중으로부터 인정받을 때만 영성이 살아난다면 그는 분명히 성숙한 사람이 아니며, 그런 영성은 사이비이다. 신탁에 사로잡힌 설교자는 청중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것과 상관없는 자신만의 고유한 영적 세계를 열어갈 줄 안다. 그게 없는 사람은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면치 못하는 사람처럼 청중들과의 교감에만 모든 관심을 쏟는다. 그 결과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향한 맹목적인 추구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어떻게 대중들을 거슬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겠다. 한 마디만 한다면 그 당시에 사이비 예언자들의 선포는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반면에 엘리야와 예레미야 같은 예언자들에게서 보듯이 참된 예언자들의 선포는 외면당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요즘 우리와 달리 대중들의 안목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바울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내가 사람들의 호감이나 사려는 줄 압니까? 내가 하직도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닐 것입니다.”(갈 1:10) 결정적으로,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것은 곧 그의 대중적인 지지를 획득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언자와 사도들의 전통에 근거하고, 궁극적으로 예수의 운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설교자의 설교행위는 청중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라는 사실이 여기서 핵심이다. 투르나이젠도 바로 이런 관점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설교는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일이 행해지는 사건이다.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모든 인간적인 것에 등을 돌리고 하나님께 대답하는 것이다. 따라서 청중의 심리를 읽으려고 하거나, 이른바 인간이해를 위해서는 이제모두 모든 노력을 그만두기로 하자.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생활체험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강단 위에서 생활체험을 이야기하는 일(다른 사람의 것이거나, 자신의 것이거나 불문하고)이나 신앙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 두자. 설교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인식, 하나님의 선포가 행해져야 한다.(Eduard Thurneysen, Die Aufgabe der Predigt, 102. 루돌프 보렌, 설교학실천론, 139에서 재인용)

 

이제 설교자들은 청중들에게 그만 아부하고, 그들을 그만 닦달하자. 청중을 풀어주자는 말이다. 그들이 스스로 성서 텍스트와 영적으로 대화할 수 있도록 설교자는 옆으로 비켜서자. 혹시 우리는 성서 텍스트의 놀라운 세계를 볼 줄 모른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청중들에게만 매달려 있는 건 아닌지. 이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리라. 이제 평정심으로 돌아와서 포퓰리즘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한국교회 강단의 상처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예화 과잉

 

오늘 한국교회 강단에서 일어나는 예화의 과잉은 포퓰리즘에 묶인 설교자들의 당연한 선택의 결과이다. 그들은 이런 방식이 아니면 청중들과의 교감을 생산해낼 능력이 없다. 예화 과잉은 모든 설교자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왜 이것이 상처인지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필자는 여기서 예화 사용 자체를 문제 삼는 게 아니다. 예화가 설교에서 차지하는 긍정적인 요인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지만, 필자가 보기에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일단 오늘의 설교에서 예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 요즘 필자는 설교 명망가의 설교를 접할 기회가 많은데, 거기서 꼭 필요한 예화를 적당하게 끊어서 사용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설교를 위해서 예화가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를 일종의 이야기 방식인 ‘비유’로 설명하셨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은 철학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씨 뿌리는 자, 포도원 주인, 탕자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지혜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비유가 훨씬 이해하기 좋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와 우리가 설교에서 사용하는 예화는 구분해야 한다. 예수님의 비유는 그것 자체가 이미 완성된 하나의 설교이지만 우리의 예화는 설교를 보충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이 자리를 빌려 설교학 교수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실험적으로라도 학생들이 예화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설교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헬무트 틸리케는 학생들에게 신앙 용어를 일절 사용하지 않고 일상용어만으로 설교문을 작성하도록 시켰다고 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한국교회 설교자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예화가 주로 미국 사회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라는 사실이다.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의 설교는 거의 기계적으로 미국에서 벌어진 예화로 시작했다. 이 목사의 설교 <지금은 다르게 살 때입니다>에 나오는 15편의 설교 중에서 11편이 서양에서 벌어진 예화로 시작된다. 설교를 이렇게 거의 기계적이다 싶을 정도로 예화로 시작한다는 것도 문제가 적지 않지만 일단 청중들의 관심을 끌어들이겠다는 설교 테크닉으로 보고 그렇다 하고 넘어간다 하더라도 한국 사람을 대상으로 한 설교에서 왜 미국 이야기만 하는지 나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더구나 미국 중심의 예화 활용이 귀국 이후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는 사실은 이 목사의 의식이나 또는 신학적 오리엔테이션에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졸저,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133) 소망 교회 원로이신 곽선희 목사의 경우도 다를 게 없다. 졸고 “궁극적인지 않은 ‘궁극적 관심’”에서 한 대목을 아래에 인용하겠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곽 목사 식의 설교 준비가 얼마나 쉬운지 가르쳐드리겠다. 가장 중요한 작업은 예화모음이다. 감동적인 국내외 이야기를 수집하라. 우화, 동화, 영화, 드라마, 휴먼 스토리, 성공담, 과학정보, 독후감, 신기한 동물의 세계, 최신 뉴스, 연예 이야기 등등, 끝이 없다. 마음만 먹으면 이런 정보들은 간단히 얻을 수 있다. 중대형 교회 목사라고 한다면 설교 도우미를 쓸 수도 있다. 한 주일에 20편의 괜찮은 이야기를 수집한 다음에 설교 주제에 맞는 것만 추려내라. 곽 목사의 설교 유형에 맞추려면 10편 정도면 충분하다. 그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엮은 다음에 적당한 위치에 성경구절을 쑤셔 넣으면, 그것으로 설교준비 끝이다. 설교의 성패는 이제 입담에 달려있다.(기독교사상, 2007년 3월호)

 

위에서 제기한 문제는 예화 사용이 양적인 면에서 과도하다는 것과 그것이 주로 미국에 치우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화 사용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강단의 상처는 그것의 질적인 면에서 훨씬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을 세 가지로 정리하겠다.


첫째는 예화의 진부성이다. 상투적이고 진부한 예화가 우리의 강단에서 남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은 뒤에 술과 담배를 저절로 끊게 되었다거나 못된 습관을 고치게 되었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간증하기도 하고, 그걸 예화로 사용하기도 한다. 또는 <리더스 다이제스트>나 <샘터> 같은 책에 실린 내용들이 자주 이용된다. 록펠러의 십일조 이야기는 단골 메뉴이다. 이런 종류의 예화가 설교의 중심에 자리하게 된다면 인간 삶의 영적인 차원을 언급해야 할 설교의 품격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영성을 확보하기도 힘들 것이다.


둘째는 예화의 선정성이다. 오늘 우리의 강단에서 사용되는 예화의 많은 부분들이 자극적이다. 믿지 않은 집으로 시집간 여자가 온갖 핍박을 이겨내고 결국 믿음을 지켰다는 이야기, 타종교를 냉소적으로 평가하는 이야기, 공산주의에 대한 극단적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들이 교회에서 예화로 사용된다. 개중에는 괜찮은 예화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일반적으로는 말 그대로 선정적(sensational)으로 사용된다.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는 자신이 악마와 싸운 이야기나 병을 고친 이야기를 일상적인 것처럼 예화로 든다. <설교는 나의 인생>에서 그는 이렇게 까지 말한다.

 

전에 느낄 수 없었던 영감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난 다음, 머릿속에 앉은뱅이가 나았다든지, 절름발이가 나았다든지, 귀머거리가 나았다는 것이 알려집니다. 어떻게 알려지는지는 나도 모릅니다. 그러나 병 낫는 사람의 모습이 환히 떠오릅니다. 성령과의 교제가 시작되자 많은 병자들이 낫기 시작했습니다. 일일이 안수하지 못해도 병 낫는 모습을 머릿속에 불러올리면 그 자리에서 다 나아 버립니다.(176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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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예화의 일반화이다. 특별한 경우에 일어날만한 사건을 일반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전달하는 것은 일반화의 문제를 일으킨다. 어느 야외 집회 때 소나기가 내려서 집회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기도를 했더니 비가 갑자기 그쳤다거나, 또는 교회당을 짓다가 결재할 돈이 없어서 공사가 중단될 위기에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했더니 갑자가 외국의 사업가가 돈을 보냈다는 식의 예화가 대부분이다. 일종의 침소봉대라 할 수 있는 이런 예화를 신자들이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보편적인 타당성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진부성, 선정성, 일반화는 약간씩 구별되기는 하지만 서로 연관된 문제이다. 한편으로는 진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정적인 이야기들이 설교에서 일반적인 삶의 내용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문제들은 일시적으로, 부분적으로 설교행위의 역동성을 제고시킬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는 설교행위에 상처를 내고 말 것이다. 그 이유는 설교가 기본적으로 의존해야 할 성령이 진리의 영이라는 데에 있다. 진리를 드러내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가로막는 예화의 과잉이 설교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는 없다.


필자의 생각에 오늘 우리의 강단에서 예화가 과잉 생산되는 이유는 포퓰리즘에 근거한 설교 편이주의에 놓여 있다. 설교의 내용이 부실하더라도 청중들의 감동을 일으킬만한 예화 한편을 전달하기만 하면 청중들의 반응이 뜨겁다는 교회 현실에서 예화 사용은 설교자들에게 거의 숙명적인 유혹이다. 예화가 청중들에게 속된 말로 “잘 먹힌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설교자가 성서 텍스트의 세계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훨씬 근본적인 문제일지 모른다. 성서 텍스트의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작은 세계를 그럴듯한 말로, 또는 장광설로 부풀리는 것뿐인데, 그런 의도에 어울리는 수단이 바로 예화이다. 만약 청중을 동화 듣기를 좋아하는 어린아이로 전제하고 예화에 치우친 설교 구조를 계속 유지한다면 결국 청중들은 성서가 담지하고 있는 구원과 계시의 신비를 만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예화 과잉은 청중 우민화의 지름길이다.

 

감상주의

 

청중들을 어린아이로 끌어내리는, 그런 방식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상처를 만드는 또 하나의 다른 설교 현상은 감상주의(sentimentalism)이다. 오늘의 설교자들은 설교의 내용을 깊이 있게 만드는 작업*에서는 대단히 소홀한 반면에 이미 주어진 설교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청중의 감정과 심리작용을 이용하는 작업에서는 엄청난 수고를 기울인다. 감상주의는 앞에서 거론한 예화의 과잉과 더불어 청중의 실존적 경험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만이 아니라 그 많은 예화들이 거의 청중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서로 소통하는 요소들이다.

 

*이 글의 전체적인 흐름을 조금 더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 성서 텍스트와 설교의 심화 작업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더 짚는 게 좋겠다. 내 생각에 설교의 중심은 ‘성서 계시의 존재론적 능력’에 집중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계시의 존재론적 토대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인간학적 기술을 첨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계시(啓示)로서 부족함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설교 행위는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진리론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청중들을 우리 스스로 조작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가? 그것은 바로 성서 텍스트의 주체였던 성령의 일이다. 우리가 그것을 대신하려는 것은 월권이다. 안타깝지만 우리 설교자들은 그런 계시의 존재론적 능력을 외면한 채 군더더기에 불과한 자신의 인간학적 ‘노하우’로 하나님 말씀에 덧칠을 한다. 그런 행태의 하나가 바로 감성적 ‘터치’이며, 그 밑바탕에는 포퓰리즘이 자리하고 있다.

 

다시 본 줄기로 돌아가자. 설교 행위에 숙명적으로 내재해 있는 이 감상주의는 우리 민족의 정서인 한(o)과 맞물려서 아주 강력하게 작동되고 있다. 이 센티멘털리즘은 논리적 이성을 초월하는 에너지를 그 내부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생활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막강한 역동성으로 발휘되곤 한다. 흡사 어린 소녀가 노총각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경우라고나 할는지. 아무런 논리도 필요 없이 무조건적인 힘으로 어떤 대상을 추구한다. 주일 성수로부터 시작해서 각종 예배와 기도회, 성서공부, 새벽 기도회, 십일조 헌금, 각종 조직 등등, 현재 한국 교회의 신앙생활은 이런 폭발적인 힘이 아니면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설교에도 역시 이런 감상주의가 전반적인 기조를 이루고 있다.


설교의 감상주의는 전달 방식과 그 내용에서 동시적으로 나타난다. 아마 본인들은 설교를 감동적으로 전달하겠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하겠지만 공연히 목소리의 톤을 슬픈 음색으로 내거나(열린교회 김남준 목사) 아니면 고함을 치는 모습들은 한결같이 감상주의적 요소라 할 수 있다. 설교자의 기질에 따라서 그런 감정적인 요소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 자체를 내가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상당한 경우에 설교자의 자연스럽지 못한 감정이 청중을 공격하거나 아니면 현혹하는 현상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조금 더 세밀하게 구별해야 한다. 어떤 설교자는 너무 무식하기 때문에 자연발생적으로 그렇게 흥분하기도 하고, 어떤 설교자는 너무 영악하기 때문에 청중의 감수성을 자극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꾸민다. 그들은 청중들의 사유 세계로 직접 치고 들어가서 하나님 말씀의 진리론적 타당성을 설득시키기보다는 청중의 감정이라는 우회로를 선택해서 늘 변죽만 울리고 있다. 2천 년 전 선포된 그 말씀의 지평과 오늘 청중들이 경험하는 삶의 지평이 설교 행위 안에서 융해됨으로써(H.-G. Gadamer) 구원과 생명의 새로운 지평이 열려야 하는데 그런 노력은 전혀 없이 단지 청중의 감정에만 호소하고 있다는 말이다. 얼마 전에 내가 읽은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의 설교집 중에서 한 대목을 인용하겠다.

 

우리의 사랑은 감정적인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에는 아무 능력도 열매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겪은 고통은 교회를 위하여 흘리는 자신의 눈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전도한 그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교회를 세워 놓고 그 교회를 생각하며 밤잠을 자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여러분, 교회 때문에 밤잠을 자지 못하고 교회 때문에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습니까?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죽고 싶은 것입니다. 다 주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 죽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로마서의 비전, 271)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죽고 싶다”는 표현은 어디선가 들은 듯하지 않은가? 가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동반 자살했다는 뉴스의 주인공들에게서, 또는 “이수일과 심순애” 같은 창극에서, 일본 소녀들과 젊은 아줌마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배용준의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들을만한 신파조 대사다. 약간 다른 상황이지만, 2002년 부산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에 참가한 북한 응원단 여자 청년들이 비에 젖는 김정일의 현수막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통분해 하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이런 감상주의가 설교를 지배하게 되면 신자들은 기독교 신앙의 깊이에 천착하기보다는 그저 막연한 느낌에 의존하는 신앙에 빠진다. 인간은 감정에 쉽게 휩싸이기 때문에 감상주의가 매우 뜨거운 신앙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기독교 신앙을 훼손시킨다. 자기의 감정 표현에는 옆에서 말릴 수 없을 정도로 열정적이지만 하나님 나라와 그의 통치에서는 무기력하거나 나이브하게 되는데, 이런 경향은 사이비나 이단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큰 틀에서 볼 때 “들으라!”(쉐마)에 토대를 둔 유대교는 청중들의 감정을 축소시키고 대신 그들의 신앙경험을 하나님의 언어 존재론적 신비로 끌어들인다면, 볼거리를 많이 제공하는 근동의 종교들은 청중들을 열광주의로 몰아간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열린 예배의 위험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려야 할 예배에서 뒤로 물러나야 할 청중들이 오히려 전면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는 못한다.

 

도덕주의

 

감상주의와는 격을 달리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포퓰리즘의 구도에서 전개되고 있는 설교의 특징은 도덕주의(moralism)이다. 성서 텍스트의 중심 주제를 하나님 통치의 존재론적 능력보다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가치론적 판단이라 할 수 있는 도덕과 윤리에 둔다는 것은 바로 설교자가 청중들의 요구에 기울어져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도대체 도덕주의적 설교는 무엇인가?


과거의 설교가 주로 기복적인 것에 중심을 둠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았고, 따라서 이제라도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반성적 차원에서 도덕주의적 설교가 강조되는 것 같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주장 자체는 결코 문제가 될 수 없다. 오늘의 지성적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윤리적 설교가 어느 정도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휴머니스트가 되거나 도덕군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직시해야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도덕적 가치들은 설교가 근거해야 할 복음의 본질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설교가 지향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근본 가치도 아니다. 도덕주의가 윤리와 도덕은 설교가 근거해야 할 복음의 본질이 아니다. 둘째,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바뀔 수밖에 없는 도덕적 가치들을 복음의 내용으로 채우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와 다를 게 없다.


오늘 우리 강단에서 초등학교 교장 선생의 훈화 같은 설교를 하는 목사들도 적지 않다. 어린이 주일과 어버이 주일이 있는 5월이 되면 “부모에게 효도하자.”는 주제로 설교하기도 한다. 이건 근본적으로 설교가 아니다. 상식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한 삶의 태도를 반복해서 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윤리 교과서로 만드는 격이다. “올바른 부부관계”라는 제목으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 이해하고 관심을 기울이라거나, 선물을 주든지 이벤트를 계획하라고 설교하는 목사들도 있다. 이것은 설교라기보다는 화목한 가정을 위한 상담이나 교양강좌, 또는 주례사일 뿐이다. 이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나는 설교 허무주의에 빠지곤 한다.


오늘의 설교가 도덕주의로 빠져드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리고 그런 설교가 청중들에게 나름으로 먹히는 이유는 인간과 죄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왜곡되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원죄(原罪) 교리로 첨예화하는 그리스도교의 죄론은 기독교 신앙을 도덕주의로 축소시키는 단초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숙명적인 죄를 용서받고 모범적인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도그마가 그리스도교의 뿌리에 자리하고 있다. 니체는 이런 그리스도교 형태를 가리켜 가축 떼 윤리라고 비판했으며, 프로이트는 집단적 노이로제라고 비판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죄는 인간을 죄 숙명주의에 묶어두거나 아니면 도덕주의자로 유도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을 알리는 가르침이다. 이 사실을 놓치게 되면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인간 구원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상실하게 될지 모른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다른 것은 접어두고 예수의 말씀으로 정리하자. 예수가 함께 어울린 죄인들과 세리들을 향해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변화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증이다. 예수는 사람을 그 사회가 요구하는 모범적인 전형으로 만들려고 한 게 아니라 현실 그대로의 사람을, 세리면 세리 그대로, 죄인이면 죄인 그대로 용납하시면서 임박한 하나님 나라로 초청했을 뿐이다. 그의 관심은 계몽이나 훈계가 아니라 수용과 초청이었다. 물론 하나님 나라에 초청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변화될 것이며, 그렇게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나라 앞에서 그렇게 결정적인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 변화라는 것도 윤리적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도덕적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칭의론에 근거해서 본다고 하더라도 도덕주의적 설교는 그 토대를 잃는다. 이 말이 기독교인들에게 윤리가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으리라.

 

성서도구주의

 

필자는 앞에서 포퓰리즘의 문제는 거론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성서 텍스트가 담지하고 있는 하나님 통치와 구원의 존재론적 능력을 포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자들은 하나님 통치의 존재론적 능력이 바로 포퓰리즘과 대립적이라는 점을 여기서 간파했을 것이다. 포퓰리즘에 휘둘리는 설교자는 성서의 그 세계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고, 또는 이미 모든 것을 깨달았다고 전제하고 그것을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데만 마음을 둔다. 그것은 곧 성서도구주의이다. 청중의 요구가 중심으로 작동하는 포퓰리즘과 하나님 통치의 존재론적 지평이 무시되는 성서도구주의는 샴쌍둥이처럼 근원적으로 결탁해 있다.


성서의 도구화가 왜 문제인지, 이게 왜 포퓰리즘과 정비례하는지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설교가 뭐 대수냐, 청중들이 재미있게 듣고 은혜 받으면 좋은 설교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설교자들과 또한 평신도 지도자들도 꽤나 될 것이다. 그런 탓인지 우리나라 설교 명망가들은 거의 이런 방식의 설교에 젖어 있다. 성서텍스트는 양념정도로 다루고 세상살이나 종교 교양을 그럴듯하게 전하는 설교가 청중들에게 어필하니까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설교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 성서는 이미 고정된 어떤 사실을 단순히 보도하거나 열거하는 게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열린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사건을 중층적으로 담고 있다. 따라서 성서텍스트는 종말론적으로, 진리론적으로, 신학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여기 바둑 기보(��가 있다고 하자. 흑 127번과 백 128번은 하나의 번호로만 자리하고 있지만 그 번호에는 수많은 수가 숨어 있다. 바둑을 둔 기사는 그 번호에 돌을 놓기 전에 수많은 수를 생각했다. 기사의 머릿속에서 오간 그런 수는 기보에 나타나지 않는다. 만약 어떤 바둑 해설자가 이런 숨어 있는 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127번의 수로 백을 잡았다는 결과만 지적하면서 이렇게 돌을 잡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설명에만 머문다면 그는 바둑을 모르는 사람이다. 성서텍스트도 일종의 기보이다. 설교자는 그 안에 은폐된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도록 길을 내는 사람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그 수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예 관심도 없고, 다만 청중들을 종교적으로 위로하거나 재미를 주는 것에 만족한다. 성서텍스트가 철저하게 이용되고, 소비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서텍스트는 철저하게 침묵을 강요당한다. 루돌프 보렌은 이런 상황을 이미 40년 전에 지적했다.

 

이 책을 쓰고 있는 동안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설교에서 성서가 선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서 본문의 침묵과 그 강조점으로부터의 이탈, 성서를 너무 성급하게 접근한 채 그 가운데 언짢은 것들을 덮어버리거나, 문자의 차원에서 집착함으로써 본문과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를 길게 끌어가는 설교행위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셈이다. 성서가 설교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 책을 덮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즉 성서가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이 침묵을 깨려면 성서 자체가 말을 하게하고, 그 말씀이 청중들에게 들려야 한다.(박근원 역, 설교학 원론, 1979, 4쪽, 문맥을 조금 고쳐 적었음, 필자 주).

 

설교자들이 반드시 경험해야 할 성서의 놀라운 세계는 창조 설화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언자들의 활동, 그들의 여러 문학 전승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십자가 및 부활 사건, 초기 기독교의 선교 활동과 그들의 신앙 경험 너머에 있는, 또는 그 심연에 있는 고유한 어떤 것을 말한다. 우리는 그 세계를 통칭 하나님, 또는 그의 나라라고 한다.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이든지 착각에 빠진 사람이다. 우리 인간의 인식은 어떤 범주 안에서만 대상을 어렴풋이 포착할 수 있을 뿐이지 그것을 뛰어넘는 세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예컨대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되는 영생이라는 개념을 우리는 단지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지 그것이 어떤 리얼리티를 안고 있는지 실증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부활은 무엇일까? 종말은 개인의 실존적 사건인가, 지구의 사건인가, 아니면 우주론적 사건인가? 그 우주는 어디까지의 세계를 말하는 것일까?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어떤 미래를 갖고 있는가? 더 핵심적으로 우리는 ‘존재’(Sein) 자체를 명명백백하게 인식할 수는 없다. 흙, 나무 같은 어떤 사물이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유를 모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궁극적인 존재 능력을 인식할 수 없다. 우리가 아직 완료형의 방식으로 대답할 수 없는 수많은 질문들을 외면한 채 단순히 성서의 정보 속에 숨어드는 것으로 설교자의 고유한 자리가 확보될 수는 없다. 성서를 해석해야 할 설교자는 성서가 이런 궁극적인 질문과의 연관해서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에서 성서의 고유한 세계를 구도자의 자세로 치열하게 파고들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도구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반드시 철학적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데 있다는 뜻은 아니다. 성서는 명시적으로 드러난 어떤 사태나 현상 너머에, 또는 그 내면에 훨씬 근원적인 세계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설교하는 잘못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이는 흡사 아름다운 시어(時語)를 소유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시인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시인이 되려면 언어와 언어가 결합됨으로써 열리는 어떤 고유한 세계를 인식해야만 하듯이 설교자도 성서의 정보보다도 그런 정보 너머의 고유한 세계를 인식해야만 한다. 이럴 경우에만 내면적으로 설교자의 영성이 살아날 것이며, 외면적으로 설교자의 고유한 카리스마가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신탁(神託)의 담지자로서 말장난이나 처세술, 또는 잔소리로 전락할 수도 있는 설교의 위기를 벗어나야하지 않겠는가. 사람을 향한 설교가 아니라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가 가능한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을 받아내는 설교여야하지 않겠는가. 포퓰리즘을 벗어날 때 생명을 살리는 설교는 살아나리라!

출처 : 행복†충전소
글쓴이 : 대명교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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