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박영돈 교수의 정용섭 비판을 읽으며 느낀 의문점들

새벽지기1 2015. 10. 25. 16:47

박영돈 교수의 정용섭 비판을 읽으며 느낀 의문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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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돈 교수의 정용섭 목사 비판을 읽으며 느낀 의문점들

(이 글을 쓴 저는 신학전공자가 아님을 미리 밝혀 둡니다. 따라서 신학적 오해와 몰이해가 포함된 글일 수 있습니다.)

고신대 박영돈 교수님(이하 박영돈)께서 <일그러진 한국 교회의 얼굴>에서 정용섭 목사님(이하 정용섭)의 설교비평에 대해 비평하셨다. 위 책의 '한국교회 설교 이래도 되는가'에서 박영돈은 이동원, 곽선희, 장경동, 김진홍, 조용기 목사의 설교에 대한 정용섭의 비평 작업에 대체로 동감하면서도 정용섭의 성경이해가 급진적이며 성령론과 경건훈련에 대한 이해에는 문제가 있다며 거리를 두려 한다. 정용섭의 비평이 한국교회에 도전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판넨베르크의 신학에 의존한 주관에 치우친 비평이라 아쉽다는 것이 박영돈의 평이다. 위 책의 부록에 실린 '한국교회의 설교 비평을 비평하다'에는 정용섭의 작업에 대한 날선 비판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내 관점에서 이 글은 교조주의적인 비판이며 논거에도 문제점이 있다. 이 글에서는 박영돈이 부록에 쓴 텍스트를 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박영돈이 정용섭의 비평을 비판하는 논거는 다음과 같다.

1) 정용섭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보편적인 해석을 주장하지만 그는 실제로 노아의 홍수와 같은 사건을 신화로 이해하는 등 성경을 재단하고 있다.

2) 정용섭은 '타락/속량 중심의 영성'에서 '창조/종말 중심의 영성'으로 신앙적 전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종교개혁 전통에서 벗어난 것이다. 죄 영성은 기독교의 주류 영성으로 죄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지표다. 또한 정용섭이 주장하는 영성은 구원의 탁월성을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 

3) 정용섭은 목사가 신자들을 변화시키려고 애쓰는 것이 헛수고라고 하는데 이는 그의 구원론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즉 신분적 변화인 칭의 이후 성화는 실제적 변화라는 점에서 성화는 경건의 노력과 훈련이 요구되기 마련인데 정용섭은 성화와 칭의를 구분하지 않은 채 성화까지도 존재론적으로 이뤄진다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성화에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견해는 바르트의 견해로 판넨베르크도 비판했던 것인데 정용섭은 이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4) 정용섭은 사람의 변화보다 하나님의 신비에 집중하라고 한다. 그러나 정용섭이 성화를 칭의와 거의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5) 정용섭이 말하는 하나님의 신비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공허하다. 그가 말하는 대로라면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인간의 갱신과 이분법적으로 분리해서 다루게 되며 이는 하나님체험의 실체를 신비주의의 진공 속에 증발시켜 버릴 위험이 있다.

6) 정용섭의 성령론에 문제가 있다. 정용섭은 성령의 역사와 인간의 역할을 이분법적으로만 이해하고 둘 사이의 유기적인 연결성은 파악하지 못했다. 경건의 연습은 우리가 담당해야 할 역할이지 성령이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정용섭은 초월주의적인 성령이해를 가지고 있다.

7) 정용섭의 이러한 성령이해는 설교자가 지나치게 적극적이서는 곤란하다고 하는데 이는 자칫 설교자와 성령의 연합과 협력 관계를 포착하지 못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그는 설교자가 감정을 드러내며 눈물을 흘리는 것에 부정적인데 이는 바울이 교인들에게 자주 눈물로 호소했던 것에 비춰볼 때 이해되지 않는 태도이다.

8) 정용섭은 판넨베르크의 종말론적인 신학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성서를 윤리적 규범으로 여기는 것을 한심하게 생각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절대적인 정언명령이 아닌 상황윤리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만들고, 구원과 심판을 확신있게 전하지 못하게 한다. 즉, 정용섭의 설교에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그 실체가 모호하며 사람의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침이 없다.

9) 정용섭은 성경의 놀라운 세계를 경험해야 한다고 외치지만 그 경험을 성경적으로 설명해주지 못한다. 이는 그가 의존하고 있는 신학적 입장(해석학적 입장) 때문 혹은 그의 신학적 식견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10) 정용섭이 제시하는 대안은 긴급한 회개와 영적 갱신이 요구되는 한국교회에 적용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의 신학은 미래의 존재론적 우위를 강조하는 판넨베르크의 신학과 신비주의 사상이 기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11) 정용섭의 설교 비평에는 그의 신학적 견해가 지나치게 투사되어 있어 객관성을 잃고 있다. 정용섭은 보수 신학에 대한 편견을 갖고 비판한 듯 하다.



2. 박영돈의 논거를 다시 몇 가지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a) 정용섭은 성경에 대한 잘못된 입장을 전제로 하고 있다. 1)
b) 정용섭은 성화와 칭의를 구분하지 못하고 인간의 역할을 지나치리 만큼 축소시킨다.2)3)4)5)6)7)8)(경건훈련,설교자,성화)
c) 정용섭의 하나님 나라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실체가 모호하다.9) 10)
d) 정용섭의 비평은 객관성을 잃고 있다.


3. 내 생각에 박영돈의 비판에는 몇가지 문제점이 있다.
 
그 중 박영돈이 정용섭을 비판하는데 가장 공을 들이는 논거는 b)이지만 논의 전개의 편의상 역순으로 c-b-a로 그의 논증을 간략히 검토해보자.

c) 누군가가 하아데거에게 '선생에게는 왜 윤리학이 없는지' 물었던 적이 있다. 이에 하이데거는 존재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면 되기 때문에 윤리학은 필요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것은 윤리학에 대한 존재론의 우위를 선언하는 말이었다. 정용섭이 도덕이나 윤리를 강조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성경을 하나의 절대적인 규범, 정언명령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고 한다. 만일 아멜렉을 멸절하는 것이 신의 명령이었다면 그것이 그 '당시의' 존재의 음성에 응답한 행위였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그 음성에 따른 것은 윤리가 되는 것이지, 그것이 윤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부합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해석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윤리는 시간적 한계와 잠정성을 지닌 것이다. 정용섭은 은폐된 진리가 탈은폐되는 중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종말의 때에 모두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 비판에는 내 관점에서는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다. 내가 <현상학적인 봄과 영적인 봄> http://spermata.egloos.com/1604551 에서도 썼듯이 정용섭의 설교에는 해석학적 주장이 반복되고 있는데 반해 영적 세계에 대한 현상학적인 봄에 대한 진술은 다소 불충분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하나님은 통치하신다. 고로 하나님은 말씀이자 통치 그 자체이다. 말씀이자 통치 자체라는 말이 와닿느냐? 그 말이 와닿지 않고 있다면 여전히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정용섭, 설교 중 다른 부분, 기억에 의존하여 인용하였음) 라는 말이 나로서는 공허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말은 해석학적으로는 충분히 납득되고 이해가 되는 말이지만, 사태적으로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사태적으로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는 말은 실증적인 근거를 대라는 뜻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실증적으로 엄밀한 증거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사태적인 것으로서 사태에 대한 엄밀한 기술은 필수적임과 동시에 가능하다. 존재의 사태가 현존재인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것의 사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영돈이 비판한 바 정용섭의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무엇인지 모호하다는 주장에는 대체로 동의하는 바다. 


b) 내가 보기에 정용섭에 대한 박영돈 비판은 기본적으로 판넨베르크 신학에 대한 몰이해를 전제하고 있는 까닭에 힘을 잃고 말았다. 정용섭이 윤리나 도덕에 대한 강조를 거의 하지 않는 이유, 또한 그러한 강조가 주를 이루는 설교에 비판적인 까닭은 경건훈련의 가치나 성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으로 기독교의 영적 세계로 진입했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따라나오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하이데거가 비본래적인 삶을 사는 현존재가 불안과 같은 근본 기분으로 탈은폐되는 '존재'의 세계로 진입하게 될 때 본래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듯이, 신앙의 본질로 들어간 자라면, 혹은 칭의가 이뤄진 후의 성화의 과정은 설교자가 강조하거나 신자가 훈련하는 것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오물에 뒤덮힌 채 서 있는 남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러나 그 자신은 오물에 뒤 덮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남자에게 아무리 깨끗하게 하라고 누군가 이야기한들 어둠 속의 남자는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빛이 이제 그를 비춘다고 해보자. 그는 그 빛으로 인해 자신이 본래부터 오물을 뒤집어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것은 전적으로 빛이 있었기에 가능한 깨달음이다. 그는 빛이 비추자 자신을 깨끗이 하려 한다. 누군가가 말해주지 않아도 된다. 오물과 악취는 몸에서 쉽게 빠지지 않지만 그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자신의 몸을 정결케 한다.

따라서 정용섭이 성화를 존재론적인 것으로 보는 이유는 마치 성화가 칭의처럼 일회적 선언으로 이뤄지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즉 하나님의 주도 하에 이뤄지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존재,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로 진입하지 않고서 성화, 경건훈련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 성경이 열어젖히는 저 도저한 신앙의 세계를 그저 도덕 규범으로 사상화, 화석화 시킬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과연 정용섭을 하나님의 임재체험과 인간의 갱신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초월주의적 성령론자라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정용섭의 이해야말로 온전한 일원론적 이해 아닌가.

정용섭이 창조/종말의 영성을 타락/속량의 영성에 비해 강조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만일 정용섭의 성화론이 위와 같다면 정용섭은 타락/속량의 영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는 두 영성의 존재론적 우위가 아니라 다만 논리적 선후를 가리고 있는 것이다. 창조/종말의 영성은 우리가 얼마나 타락한 존재인지를 직시하게 한다. 하나님의 순결하심을 보는 것은 나의 죄성을 파악하는데 최선의 방편이다. 

정용섭이 설교자의 소극성을 강조한 것을 두고 그가 설교의 청중과의 소통 능력을 가볍게 여기고 있다거나 감정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지성주의자의 오만함으로 평가한 대목도 아쉽다. 내가 아는 정용섭은 아바도의 베르디 레퀴엠 연주를 사랑하고, 아이리쉬 휘슬의 그 떨리는 소리에 누구보다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다. 정용섭이 김남준 목사의 눈물에 왜 그토록 실망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진정으로 경계하는 것은 성자가 아닌 강단에서의 목사의 눈물이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취지였을 것이다. 눈물의 은사도 있지만 오정현 목사가 사랑의 교회 강단에서 1부부터 준비된 원고를 읽으며 똑같이 우는 것이 은사로 인해 가능한 것인지 연기로 인해 가능한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논리와 지성에도 수준이 있듯이 감정에도 수준이 있다. 경박한 감상주의에 대한 정용섭의 경고를 오만한 지성주의로 매도하는 것은 곤란하다.


a) 박영돈은 정용섭을 극단적인 역사비평에 경도된 성경관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왜 경도된 성경관인지 논거가 충분하지 않다. 신앙의 선진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대교부나 중세 신학자, 개혁신학자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편적인 성경해석이 어째서 문자주의와 동일시될 수 있는지가 먼저 해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정용섭이 역사 비평에 경도된 해석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성경 해석이 성경을 도덕 규범이나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강조하는 수단 내지 주술적인 텍스트로 이해되고 있는 현상황보다 더 극단적이거나 위험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9)에서의 박영돈의 비판과는 다르게 나는 정용섭 목사에게서 희망을 본다. 그는 성경을 온전히 살아있는 것으로 대하도록 도와준다. 영적 회개는 빛 앞에 있을 때, 살아있는 텍스트인 성경이 열어주는 기독교 진리의 영적 심층으로 들어갈 때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4. 기타

박영돈은 정용섭에게 315쪽에서 "설교 비평을 위해서는 설교자의 황제라고 불리는 스펄전의 설교에는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묻고 있다. 나는 왜 설교 비평의 조건이 스펄전에 대한 일가견을 갖는 것이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자동차를 리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롤스로이스나 페라리를 타봐야 하는 것인가. 어떤 일에는 경험 보다는 원리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아마도 박영돈이 이런 말을 한 취지에는 정용섭도 보수주의자들의 글을 좀 읽어야 하고 그래야만 진보와 보수 사이의 반목이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읽기에는 박영돈이 쓴 <일그러진 한국 교회>에서 '한국교회 설교 이대로 되는가'에서 정용섭을 다루는 태도와는 달리 부록 '한국교회의 설교 비평을 비평하다'에는 다소간 비아냥이 섞여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특히 315쪽에 로이든 존스를 모르는 것이 놀랍다고 한 대목은 정용섭의 지적 솔직함을 멋쩍게 하는 것 아닌지. 또한 부록 초반 283쪽에 설교자들이 정용섭의 '칼날'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었고, '금서로 폐기 처분되지 않는 한' 등의 표현, 그가 설교자의 말들을 '꼬투리 잡는다'(290쪽) 등의 표현은 다소 아쉽다. 

 


황현산은 <밤이 선생이다> 첫 머리에 "나는 내가 품고 있던 때로는 막연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생각을 더듬어내어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 그것을 가능하다면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쓰고 있다. 조직신학이 하나님의 영적 현실에 대한 총괄적인 해명이라면 조직신학자의 글이 좀 더 아름다운 표현이었다면 어땠을까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