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스크랩] 믿음은 구도다-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15. 8. 16. 16:44

 

고린도전서 9:24-27, 주현절후 여섯째 주일, 2012년 2월12일

 

 

      천국에 가서 상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 말은 기본적으로 틀린 건 아닙니다. 절대적인 세계를 다른 말로 설명하기 어려워서 상을 받는다는 말로 설명한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가서 상을 차별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황금면류관을 받고, 어떤 사람은 개털 모자를 받는다는 겁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천국에서 호화주택에 사는 사람도 있고 오막살이에서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이런 주장은 천국에 대한 왜곡이고 희화화입니다. 천국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곳에서도 이 땅에서 차별적으로, 또는 상대적으로 경험하는 만족감이 작동된다면 절대적인 세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이 차별적 상급에 혹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보상심리가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라는 사실입니다. 남보다 낫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경쟁을 통해서 만족을 얻습니다. 신앙생활의 보상을 받고 싶어 합니다. 이런 욕망이 천국에 대한 생각에까지 미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런 걸 정당화하는 성서구절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것을 그냥 인용해서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순진한 믿음이긴 하지만 바른 것은 아닙니다. 사이비 이단에 가까울수록 성경을 그런 식으로 믿습니다. 성경구절에 대한 오해가 대부분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이 그중의 하나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바울은 신자들의 삶을 달음질이라는 비유로 설명합니다. 작년 대구에서 세계육상선수권 대회가 열렸습니다. 달리기, 던지기, 높이뛰기가 주 종목입니다. 모든 운동의 기초가 육상운동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런 운동에 취약합니다. 여기서 달리기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선과 결선을 거쳐서 결국 1등을 뽑습니다. 그 선수가 금메달을 받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받아볼 고린도 지역에도 이런 육상시합이 자주 열렸습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바울의 이런 비유를 생생하게 알아들었을 겁니다. 바울의 이야기는 오늘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천국상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구원의 엄정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결론을 바울은 27절에서 이렇게 내렸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바울이 누굽니까? 그는 기독교 신앙의 뼈대를 세운 사람입니다. 바울이 없었다면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초라해졌을지 모릅니다. 그는 신학적인 내공이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경험과 선교적 열정도 남달리 강했습니다. 신학적이면서도 신비주의적이기도 했습니다. 유대 기독교의 매파 신자들에게서 끊임없이 공격을 받으면서도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적 스텐스를 그대로 유지할 정도로 의지력도 대단했습니다. 그가 구원에서 제외될까 걱정했다는 것은 자신의 믿음이 부족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즉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구원은 과정이다

 

     달리기를 잘 보십시오. 출발을 먼저 했다고 해서 무조건 승리하는 건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바울이 신앙을 달리기로 묘사한 것은 1등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입니다. 최선을 다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긴장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편하게 살려고 하지 긴장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구원을 자동차 운전 합격증이나 영어 자격증, 또는 극장 입장권 정도로 생각합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강합니다. 그 증거를 두 군데서 찾습니다. 하나는 외적인 증거로 세례 받았고, 예배드리고, 교회 봉사하고, 교회에서 직분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런 일에 매진합니다. 한국교회의 과도한 열정들이 이런 현상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적인 증거로 정신적인 자기 확신입니다. 자기 내면에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 확신은 계속되지 못합니다. 곧 불안해집니다. 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교회봉사에 열을 내고, 믿음의 확신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에 매달립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이런 교회봉사와 경건생활이 의미 없다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냉소주의가 절대 아닙니다. 문제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런 일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극단적으로 치우친 이들이 구원파입니다. 이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 모든 영적 에너지를 투자합니다. 그것은 구원의 현실에 직면한 사람들의 영적 태도가 아니라 심리적인 자기 만족감에 불과합니다.

 

     이렇듯 구원을 자격증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밖의 사람들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합니다. 자신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이고 밖의 사람들은 버림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해합니다. 일종의 방주 구원론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방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게 바로 전도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전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우리는 말과 삶으로 증거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도가 단순히 교회 밖의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교회 밖에서도 구원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합니다. 우리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하나님의 구원을 완벽하게 규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방주 구원론은 하나님 구원의 신비를 무력화하고 교회와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합니다. 교회 밖을 멸망의 영역으로 간주합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구원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강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대립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은 결국 구원이 과정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어리석음입니다.

 

     구원을 과정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남의 구원이 아니라 자기의 구원에 매진합니다. 보십시오. 달리기 시합에 나선 사람은 자기가 달리기를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에만 몰두하기 마련입니다. 중력을 가능한대로 가볍게 만들고, 바람과의 마찰도 줄이고, 숨쉬기조차 세밀하게 신경을 씁니다. 바울은 빌 2:12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이루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쓸 틈이 없습니다. 오늘 한국교회 신자들은 남에게 신경을 너무 많이 씁니다.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을 듣기에 맞춤합니다. 온 세상을 자기가 구원하겠다는 듯이 나섭니다. 한국에서 파송한 해외선교사 숫자가 미국 다음으로 많다고 합니다. 해외선교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과유불급입니다. 목사 교육의 내실화, 신학자 육성, 미자립교회 등등의 문제는 제쳐두고 해외선교사를 파송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밖으로 신경을 많이 쓰는 이유는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바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은 특별히 목사 같은 종교 전문가들에게 가장 큰 유혹입니다. 목사는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처럼, 그래서 남을 구원하는 자격증을 가진 사람처럼 행세합니다. 이것도 큰 착각입니다. 목사도 일반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구원에 천착해야 합니다. 철학 교수가 삶을 철학으로 담아내야 하듯이 목사는 자기 구원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은 곧 목회 자체가 자기 구원의 길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목사로서 저는 여러분을 구원할 자신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습니다. 제가 샘터교회 담임 목사로 섬기면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는 것은 엄격히 말해서 여러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저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저는 매 순간 바울이 한 고백을 떠올립니다.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구체적으로 자기 구원을 이룬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핵심적으로는 예수와의 관계를 긴밀하게 맺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긴밀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선 필요한 것은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행하신 구원 사건에 대해서 알고 계신가요? 알고 있겠지요. 그래서 기독교인이 되었겠지요. 그러나 기초적인 것을 아는 것과 더 깊이 아는 것은 다릅니다. 초등학교 산수만 잘해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큰 불편이 없습니다. 그러나 수학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초등학교 산수만으로는 안 됩니다. 대충 알고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되지 목사가 아닌 일반 신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깊이 알 수 있느냐, 그렇다면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냐, 하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물론 세속의 직업을 갖고 사는 신자들이 전문적인 신학을 공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의사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의사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몸과 건강의 원리에 대해서는 깊이 알면 알수록 좋습니다. 모두가 법을 전공해서 법률가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법의 본질과 인간의 삶에 대해서는 상식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개인의 삶이 풍요로워지기도 하고, 공동체가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신앙, 또는 신학도 그렇습니다. 모두가 신학을 공부할 수 없지만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는 모두 알아야 합니다. 지적이지 않는 분들은, 그리고 먹고 사는 일로 도저히 시간을 내기 힘든 사람은 어떻게 하면 되냐구요? 엄격하게 말해서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지적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영적이며 지적입니다. 시간을 낼 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마음이 없을 뿐입니다. 정작 중요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본질적인 일과 단지 시급한 일을 분간하지 못할 뿐입니다. 내일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지나친 과장인가요? 당신은 그렇게 사나고 묻고 싶으신가요? 각자 대답을 찾아보십시오. 저는 성경 말씀만 전할 뿐입니다.

 

     구원을 과정으로 여기는 삶의 태도는, 즉 예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자칫하는 한 순간에 우리는 신앙의 매너리즘에 떨어지고 맙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바울은 27절에서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25절에는 달리기에 전념하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도 했습니다. 26절에서도 방향을 정확하게 잡아서 달린다고 했고, 당시 인기 스포츠인 권투시합을 예로 들면서 허공을 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표현들은 믿음과 구원에 집중하겠다는 뜻입니다. 한 순간도 한눈을 팔지 않아야만 끝까지 달릴 수 있는 것처럼 영적으로 한눈을 팔지 않아야만 구원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생활을 한 순간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긴 과정입니다. 한번 뜨거운 확신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구도적으로 진행됩니다. 구도는 수행입니다. 혹시 귀찮거나 번거롭다고 생각이 드나요? 그냥 대충 살란다, 하고 속으로 생각하시나요? 이건 남이 억지로 그렇게 해라 마라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마치 소리를 배우는 소리꾼의 그런 길과 같습니다. 소리가 즐거운 사람은 남이 말려도 소리연습을 합니다. 소리가 즐겁지 않으면 돈 주고 하라고 해도 하지 못합니다. 다른 일에 재미가 넘치면 소리에 집중할 수 없듯이 세상살이의 재미에 빠지면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을 아는 공부에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하겠지요. 이건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자신의 영적 실존을 진솔하면서도 비장하게 담아낸 바울의 신앙고백을 다시 읽겠습니다. 기억해두십시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이글은 다비아에서 담아 온 것입니다.

출처 : PROTESTANT
글쓴이 : free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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