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1973

마가복음 후기(12)(막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16:17) 막 16:15절에는 복음 전파가, 16절에는 세례가 언급됩니다. 이 두 가지는 초기 기독교가 존재할 이유인데, 부활의 주님이 열한 제자에게 준 말씀입니다. 이제 17,18절에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따라오는 표적이 거론됩니다. 표적은 다섯 가지입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표적은 주로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기초로 작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 표적은 귀신 축출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악한 귀신을 내어 쫓는다는 이야기가 흔하지는 않지만 종종 나옵니다. 예를 들면 막 5:1절 이하에는 예수님이 거라사인들이 사는 지역에서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고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에게서 나온 ..

마가복음 후기(11)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 일반적으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데, 위 구절에서는 믿음만이 아니라 세례까지 거론됩니다. 믿음과 세례가 병치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곧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거꾸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기자가 위 구절에서 세례를 명시적으로 거론한 이유는 믿음의 본질을 더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데에 놓여 있습니다. 믿음이라고 할 때 ‘누구’를 믿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명백하지 못하면 사람의 믿음은 방향을 찾지 못하고, 따라서 믿음의 능력도 확보할 수 없습니다. 세례에서는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죽음과 생명입..

마가복음 후기(10)(막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 문장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귀결이라고 보면 됩니다. 구원을 얻을 사람과 정죄를 받을 사람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초점은 구원을 얻을 사람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믿지 않는 사람이 정죄를 받는다는 말은 당연합니다. 위의 설명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할 분들도 있겠지요. 이렇게 노골적으로 묻고 싶을 겁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지옥에 가는 거 아닌가요? 그게 바로 위 구절이 말하는 정죄가 아닌가요?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거..

마가복음 후기(9)(막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 복음은 사람들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를 말입니다. 결단에 따라서 그의 운명도 달라집니다. 받아들인 사람은 구원을 얻겠지만, 거부한 사람은 정죄를 받습니다. 이를 도식화하면 ‘예수 구원, 불신 멸망’입니다. 이런 도식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안티-기독교 세력으로부터 공격당할만한 도식이기도 합니다. 이 도식이 기독교 패권주의를 옹호하는 방식으로 이용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고 자기 밖의 세계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한국교회는 이런 도식에 덧붙여 칼뱅의 이중예정론을 전가의 보도로 여깁니다. 하나..

마가복음 후기(8)(막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부활 생명은 종말에 완성되지만 지금 여기서 이미 은폐의 방식으로 시작되었다는 어제 묵상의 마지막 대목을 오늘 보충하겠습니다. 이런 신학개념들이 이해되지 않으면 기독교 영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기독교 영성의 깊이를 잘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포즈를 취하거나 아예 관심을 보이지 않은 이들도 많습니다. 이런 습관은 빨리 벗어버리는 게 좋습니다. 종말은 우리에게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직 죽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 종말이 와야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듯이 부활 생명을 확실하게 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부활 생명, 즉 종말론적 구원은 분명히 미래의 사건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이런 미래에만 자신을 걸어..

마가복음 후기(7)(막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꾸짖으신 부활의 주님은 다시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십니다. 세상으로 나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이런 명령을 따르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명령을 따르려면 먼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겠지요. 이 명령은 아직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내리신 게 아니라 앞으로 믿음을 갖게 될 제자들에게 내리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다녀야할 ‘온 천하’는 세상입니다. 그 세상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그 세상은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현실의 세상은 악합니다. 그 악을 단순히 반인륜적이고 반사회적이며 부도..

마가복음 후기(6)(막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막16:14) 위 구절에서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의 식사 자리에 나타나신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굳이 음식 먹을 때라고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은 음식을 먹으면서 한가롭게 지낼 때가 아니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한 것인지 모르겠군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이 장면에서도 제자들이 부활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이 반복해서 거론되었습니다. 위 구절에서는 믿음 없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이 완악하다는 사실도 지적되었습니다. 완악보다는 완고함이라고 번역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틴 루터는 ‘Hä..

마가복음 후기(5)(막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막16:13) 누가복음의 엠마오 이야기를(눅 24:13-35) 단 두 구절로 압축하는 마가복음의 두 제자 이야기는 마가복음에 나오는 다른 부활 전승과 거의 똑같은 형태를 보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현현하셨지만 아무도 그것을 믿지 못했다는 겁니다. 막 16:1-8절에는 세 명의 여성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천사에게서 자세한 말을 들었지만 놀라고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막 16:8) 막 16:9-11절에는 사람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막 16:11) 이어서 두 제자의 말을 듣고도 제자들은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막 16:13) 위에서 확인했듯이 마가복음 ..

마가복음 후기(4)(막16: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막16:12) 막 16:12,13절은 그 유명한 엠마오 두 제자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누가복음 24:13-35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빈 무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의 주님이 끼어들었습니다. 제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저녁밥을 먹을 때 주님이 축사하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순간에 주님은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열한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경험담을 전했습니다. 누가복음이 전하는 엠마오 두 제자의 부활 경험은 부활 전승 중에서 가장 깁니다. 길이가 무려 23..

마가복음 후기(3)(막16:10,11)

'마리아가 먼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막16:10,11) 예수의 부활을 최초로 경험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행동은 이해가 갑니다. 대략 3년 가까이 스승으로 모시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으니 그들의 슬픔이 오죽하겠습니까. 사람의 슬픈 감정은 아주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복음서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 별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주제는 사람의 감정과 행동이 주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