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8 10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요12:26) / 이금환목사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한복음12:26)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는 것 때문에 의도적으로 믿는 척하는 것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정부터 결과까지, 우리의 마음부터 삶까지 전과정이 다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은 선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량한 의도를 가진, 예수님까지도 하나님의 귀히 여기심, 즉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많이 속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뭔가 한 번 잘하면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2) / 정용섭목사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 아느냐는 어제의 질문을 생각해보셨소? 아마 답을 찾지 못했을 거요. 그걸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소.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이 없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소. 여기서 모른다는 말이 불가지론자들의 주장처럼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오. 일단 다음의 사실을 잊지 마시오. 하나님을 장소나 어떤 공간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안 되오. 세계 전체가 바로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오. 이 말은 하나님이 어느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거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말은 곧 세계 전체를 우리가 직면할 수 없다는 뜻이오. 우리는 한국 땅에 있으면서 동시에 페루 땅에 있을 수가 없소. 그걸 동시에 직면할 수 없다는 거요. 앞을 보면서 동시에 뒤를 볼 수도 없소. 그러니 ..

하나님에 대한 질문(1) / 정용섭목사

그대는 하나님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무엇이오? 만약 그대가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신자라고 한다면 궁금한 것이 별로 없을 거요. 궁금한 게 있다 하더라도 그걸 내색하지 않을 거요. 한국교회에서는 근본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 자체를 불신앙적인 태도로 몰아가는 분위기요. 그걸 넘어서기가 쉽지 않을 거요. 대개의 신자들은 그냥 교회 행사를 따라가면서 무난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소.      이런 신앙태도가 단순히 억압적인 교회분위기 때문만은 아니오.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리 깊이 생각해도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근본적인 문제도 여기서 중요한 요소요. 이왕 모르는 거를 자꾸 생각하면 골치만 아프니까 아예 생각 자체를 포기하는 거요. 이게 바로 위기요. 생각을 포기하면 결국 다른 질서에 길들여져야 하오. 사람은 이것도..

추수감사절 / 정용섭목사

내일은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지키는 추수감사절이오. 한국교회의 고유한 절기가 아니라 미국의 절기를 그대로 따온 것이오. 한국교회는 이런 특별한 절기 문제에 관해서도 좀더 독립적인 정체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소. 세계교회의 일치와 한국교회의 독립성은 대립적인 게 아니오. 만약 온 세계가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킨다면, 마치 12월25일을 성탄절로 지키듯이, 한국교회도 당연히 이를 지켜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한국교회의 실정에 맞는 절기를 정하는 게 마땅하오. 어떤 교회는 추석이 낀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는데, 검토해볼만한 일이오. 그런데 시기적으로 추석은 좀 이른 감이 있소. 과일이나 곡식이 아직 거둘만한 때가 아니오.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절을 중요한 절기로 지키는 이유는 일 년..

진실로 자랑할 만한 것 (갈 6:11-18) / 김영봉목사

해설:바울 당시에 글을 쓰는 일은 전문적인 기술에 속했다. 그래서 사도는 편지를 쓸 때 전문 필경사에게 불러 주어 쓰게 했다. 갈라디아서도 그렇게 썼는데, 11절부터 마지막까지는 바울이 직접 “큰 글자”(대문자)로 쓴다. 우리 식으로 하면 자신이 쓴 편지임을 증명하는 싸인인 셈이다. 또한 쓰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12절)은 이방인 신도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던 유대주의자를 가리킨다. 그들은 자신들도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이방인 신도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요구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기” 위함이다. 바울처럼 십자가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면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어 있다. ..

정직한 질문, 정직한 답변이 사는 길이다.(렘38: 14-28) / 신동식목사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의 예루살렘 침략이 가까워진 상황에 다시금 예레미야를 부릅니다. 그리고 예리미야에게 정직한 질문을 하고 정직한 답을 달라고 말합니다.시드기야의 질문은 정직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이름 앞에 약속을 합니다. 예레미야를 결코 죽이지 않을 테니 정직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달라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정직하게 하나님의 뜻을 답합니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말합니다.이에 시드기야는 정직하게 질문합니다. 시드기야의 두려움은 자기 백성들에게 조롱과 모욕을 당하는 일입니다. "나는 바벨론에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 하노라"시드기야는 선지자에게 정직하였습니다. 그러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무리가 왕을 유다인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라 말하면서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남는 것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남는 것         글쓴이/봉민근분명한 것은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그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사람이 죽은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과심판자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사실이다.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은 자유지만하나님은 죄까지 짓도록 허락하신 적이 없다.하나님을 거역하는 완고함을 버리지 않는 자는 그 완고함으로 망하게 되며 욕심을 멈추지 않고 죄 가운데로 질주하는 자는 지옥이 그 인생의 결승점이 될 것이다.인생살이가 슬프고 괴로운 것은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썩어질 육신만을 위하여 달려가는 인생의 결론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얻을 것이 없다.인생에 종말에 하나님 앞에서 남는 것은 하나님 뜻대로 산 것뿐이요 하나님을 향한 믿음뿐이다.세상의 일로 너무 분..

무관심이 가장 무섭다

무관심이 가장 무섭다현대에 이른바 '4무(無)' 병이 있습니다.무목적, 무감동, 무책임 그리고 무관심입니다.그중 제일 무서운 건 무관심입니다.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유대인 작가엘리 위젤 박사는 현대 사회를 황폐케 하는최고의 악이 무관심이라고 했습니다.간혹 온라인에서 몇몇 사람들은,모르는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거나 힘든 상황에 있더라도모른 척 지나가라고 충고합니다.그들을 순수한 마음으로 돕는다고 해도이후 성추행범이나 그 사고의 가해자로 몰려고초를 치를 수 있다고 합니다.하지만 세상에 대한 무관심은나를 위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무관심이며결국 나 자신을 방치하는 무관심으로이어지는 것입니다.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닌 무관심입니다.아름다움의 반대도 추함이 아닌 무관심입니다.우리는 본질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비본질적인 것..

말씀이 내게 임함은 은혜요 순종의 기회입니다.(렘 39:1-18)

렘 39:1-18 묵상입니다. 말씀대로 유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철저히 훼파되고,시드기야 왕과 고관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됩니다. 심판 중에서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심판의 막대기를 긍휼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예레미야는 석방되고 남은 백성은 안정됩니다. 에벳멜렉을 기억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하나님을 신뢰하고 예레미야를 돌본 결과입니다.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만이 굳게 섭니다. 말씀이 내게 임함은 은혜요 순종의 기회입니다.말씀의 거울 앞에 항상 나를 돌아보게 하시며깨닫고 순종하는 믿음을 허락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