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수로보니게 이방 여인의 믿음 (마가복음 7:24~37)

새벽지기1 2021. 7. 18. 07:35

비가 오고 태풍이 불고, 눈보라가 쳐도 예수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자신의 감정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늘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달려오십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은 그분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에게 상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히 11:6). 신앙생활의 원천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으면 희망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귀신들린 어린 딸을 키우고 있는 수로보니게 여인과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받은 은혜에 대해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귀신들린 딸을 데려온 여인

 

“예수께서는 그곳을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계시려 했지만 그 사실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24절).  예수님은 혼자 계시고 싶어서 북쪽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북쪽까지 자신에 대한 소문이 이미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어디를 가나 쉴 곳이 없었기 때문에 육신이 많이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한 여인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자신의 몸이 피곤하면 누군가를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여인과의 만남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귀신들린 어린 딸을 데리고 온 여인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분명 이 여인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을 것입니다. 귀신들린 어린 딸 때문에 그 여인의 인생은 망가져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귀신들린 어린 딸은 어머니의 상한 마음을 알지 못한 채 이상한 행동과 말을 하며 제멋대로 살고 있기 때문에 여인의 마음은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 괴로움은 다른 병에 걸린 것보다 훨씬 심했을 것입니다.“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여인도 예수의 소식을 듣자마자 와서 그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여인은 수로보니게 출신 그리스 사람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달라고 예수께 애원했습니다”(25~26절). 

 

이 여인은 수로보니게 출신으로 그리스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입니다. 여러분, 귀신은 어른에게만 들어가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에게도 귀신은 들어갑니다. 귀신은 철부지 어린아이에게까지 들어가 인격을 망가뜨립니다. 귀신들린 딸을 가진 어머니는 아침에 눈을 떠서 잠을 잘 때까지 한 순간도 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누군가가 딸에게 들려 있는 귀신을 쫓아내 주기만을 바라면서 어디든지 쫓아 다녔습니다. 불쌍한 딸을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딸을 살리기 위한 여인의 애원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두 번 다시 없을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는다는 소문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에게도 찾아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예수님을 찾아가 그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여러분, 자식이 아프면 부모는 체면이 없어집니다. 또한 자식이 아프면 부모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만큼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간절한 존재였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귀신들린 딸을 볼 때마다 수없이 절망하고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런 자신 앞에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간절히 애원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제 딸을 정상으로 돌려주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심상치 않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떠나는 귀신

 

“예수께서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게 해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가져다가 개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7절).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자녀는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바로 이방인입니다. 예수님이 왜 소외당하고 희망이 없는 가련한 모녀에게 이렇게 혹독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28절을 보면 예수님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여. 하지만 개들도 식탁 밑에서 자녀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를 주워 먹습니다’”(28절). 여인의 대답이 의외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에게 화를 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여인이 예수님에게 화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인의 마음을 자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여인 스스로가 믿음을 고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인에게 믿음이 있어야 딸에게서 귀신이 떠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을 내세우지 마십시오

 

여인의 반응을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자신에게 자존심이 상하는 말을 하셨는데도 본인의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는 것처럼 중요한 덕목은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위기가 오면 쉽게 넘어지는 이유를 아십니까. 그것은 자존심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데…” “나를 눈여겨보지 않고 알아주지 않는구나”, “내가 지금까지 어떤 대접을 받고 살아왔는데…” 등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생각을 하면 결국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이 여인처럼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둘째, 여인은 예수님의 말에 상처를 받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상처를 받습니까. 상처를 많이 받아서 신앙생활이 피투성이입니다. 여러분, 상처는 안 받으면 그만입니다. 누군가가 상처를 주면 받지 않으면 되는데 상처를 환영해서 문제가 됩니다. 사람들이 가장 상처를 많이 받는 일은 자신의 인격이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무시하는 말을 듣거나 오해하는 말 때문에 마음이 상합니다. 또한 마음이 상하면 이성을 잃고 균형이 무너집니다. 때로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옳은 말을 하고 있는데도 본인의 마음이 상하면 감정 때문에 편견을 갖고 듣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이 여인도 충분히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상처가 되는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귀신들려 고생하고 있는 딸을 고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부스러기 믿음

 

셋째, 놀랍게도 이 여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여. 하지만 개들도 식탁 밑에서 자녀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를 주워 먹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실 여인이 한 말은 비참한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본인의 주인이라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발견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그분이 하나님이요, 그분이 예수님이라면 내 자존심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또한 내가 받는 상처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상대가 사람이니까 상처를 받는 것이지 상대가 하나님이라면 상처 받을 일은 없습니다. 넷째, 이 여인의 믿음은 부스러기 믿음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에게 “다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십분의 일이라도 좋습니다. 부스러기라도 좋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스러기 믿음입니다. 얼마나 겸손한 믿음입니까. 큰 은혜가 됩니다. 때때로 우리는 너무 큰 기대와 욕망을 가집니다.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기 때문에 적어도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여러분, 겸손한 사람은 부스러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스러기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의지를 내려놓는 것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은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을 내세우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자존심 때문에 믿음의 세계에 발을 내딛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본인의 자존심에 무너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여러분, 인내하십시오. 비가 오고 태풍이 불고, 눈보라가 쳐도 예수님의 앞으로 나오십시오. 자신의 감정만 따라가는 행동을 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감정이 진정되고 은혜를 받습니다. 상처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믿음이 아닙니다. 아직까지 자신의 의지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과거의 상처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장 중요한 믿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참 메시아요, 나의 구원자요, 나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처에서 벗어나 새 일을 행하실 주님을 기대하십시오.

 

이미 자리 잡고 있는 믿음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위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게 되셨습니다”(히 12:2).

부스러기라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스러기 믿음은 겸손한 믿음입니다.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고 해도 감사해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의심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싹이 트지 않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다고 해도, 올리브 나무에서 수확할 것이 없고 밭은 먹을 것을 생산하지 못해도, 우리 안에 양 떼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다 해도 내가 여호와를 기뻐할 것이고 내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할 것입니다”(합 3:17~18).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이 여인의 내면에는 이러한 겸손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했으니 어서 가 보아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여인이 집에 돌아가 보니 귀신은 떠나가고 딸아이가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29~30절). 예수님이 여인에게 놀랍고도 신기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여인이 귀신을 내쫓을 능력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귀신아 나가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인의 마음속에 믿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귀신은 자연히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겠습니까.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말한 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아무리 복잡하다고 해도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하신 말씀의 의미는 “네 말 속에 이미 응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토록 놀라운 비밀을 모르고 계속해서 이상한 말을 하고, 부정적인 말을 하고, 비판하고 의심하는 말을 할까요. 여러분, 내면에서 부정적인 말을 할 때 그 말을 의도적으로 믿음의 말로 바꾸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말이 바꾸면 평화가 옵니다. 평화의 말을 하면 평화가 오고, 화해의 말을 하면 화해를 합니다. 단순한 논리인 것 같지만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토록 놀라운 비밀을 놓치고 살았습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나쁜 말은 점점 화가 나게 하지만 좋은 말은 긍정적인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네가 그렇게 말했으니 네 말대로 될 것이다”라고 하자 딸에게 들려 있던 귀신이 떠났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을 여러분의 입술을 통해서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합니까. 그런데 능력이 없는 기도를 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반대로 기도에 눈물이 있고, 참회가 있고, 믿음이 생길 때가 있는데 그런 기도를 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부정적인 말은 일생동안 하지 마십시오. 비판하는 말도 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눈은 이상해서 잘 하는 것은 보지 못하고 잘 못하는 것만 봅니다. 부정적인 것을 보면서 이성적이고, 지적이고,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봤다고 자랑까지 합니다. 그러한 눈은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비판하는 말이 아니라 칭찬과 격려하는 말을 듣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족을 격려하십시오. 가족들은 격려와 칭찬하는 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배려는 사랑입니다

 

“그 후 예수께서 다시 두로와 시돈 해안을 떠나 데가볼리 지방을 거쳐 갈릴리 호수로 가셨습니다.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그곳에서 어떤 사람들이 듣지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와 안수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31~32절). 예수님이 이번에 만난 사람은 듣지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보는 것과 느끼는 것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눈치가 빠르다는 장점이 있지만 오해도 많이 하고 수치감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자신이 느낀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멀찌감치 따로 데리고 가셔서 그의 귓속에 손가락을 넣으시고 손에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33절).

 

예수님이 이 사람만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이 사람이 자신의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까하고 수치심을 느낄까봐 배려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배려는 사랑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무시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또 상대방의 수치를 가려줘야 합니다. 상대방의 수치를 떠벌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서 그의 귓속에 손가락을 넣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하셨을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면 믿음과 구원을 가르쳐 줄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배려심과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에바다’라고 말씀하시자 귀가 뚫리고 혀가 풀렸습니다. 예수님은 힘없는 사람은 힘없는 대로, 불가능한 사람은 불가능한 대로 병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늘 가까이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늘을 쳐다보며 깊은 숨을 크게 한 번 쉬고는 그에게 ‘에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그러자마자 그 사람은 귀가 뚫리고 혀가 풀리더니 제대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34~35절).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 고개를 들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하늘을 향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늘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위해 달려오십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풍성한 은혜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가득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