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동식목사

고난의 길에서

새벽지기1 2020. 1. 4. 06:43


고난의 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주신 분은 다름 아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하나님은 지극히 높여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이 힘 듬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쉽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여 편함을 구하려고 합니다. 편함의 모습에는 일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신앙의 영역에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좀 더 쉽고 가볍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합니다. 누구라도 무거운 마음으로 왔다가 더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겁게 왔지만 평안을 얻고 가는 것을 원할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어렵고 힘든 것이 아니라 가볍고 편한 것을 원합니다. 누구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부정하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편함을 원합니다. 우리가 천국을 소망하는 이유는 영원한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천국에 가도 결코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면 누가 그 천국을 소망하겠습니까? 성경은 천국에 대한 소망을 줄 때 눈에서 눈물이 멈추고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계14:16] 그리스도인의 마지막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영원한 안식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대하여 소망을 가지게 합니다. 주님 품안에서 누릴 그 안식을 기대하는 것만큼 이 땅에서의 삶을 인내하게 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안식을 약속하시면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합니다. 참된 안식은 십자가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고난이 좋은 일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고난만큼 우리를 피폐하게 만드는 일이 없습니다. 고난이 좋은 일이라면 누가 피하려고 하겠습니까? 고난은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더구나 이해 할 수 없는 재난을 만났을 때 우리는 참으로 혼돈에 파지게 됩니다. 그래서 욥은 그렇게 항변하였던 것입니다. 아내도, 친구도 고난이 지속되면 저주 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무슨 일입니까? 피를 토하여 우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없을 때의 그 비참함은 이룰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십자가를 지어야만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탄식하며 부르짖는 것입니다. 때로는 저주까지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의 항의를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고,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고난이 분명 유익이 되기에 주신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유약한 존재인지를 다시금 인식하게 합니다. 정신 차리라는 의미입니다. 잘났다고 까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유약한 것인지를 처절하게 알게 합니다.

 

또한 고난은 고난 받은 이의 아픔을 헤아리게 합니다.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것은 경험하기 전까지는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고난 가운데 있으면 그 마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것은 고난 받는 이의 아픔을 헤아리게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고난 받은 자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가난한 사람들, 고난 받는 사람들을 만나시고 섬기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 역시 가난한 사람들, 고난 받는 사람들과 함께 울 수 가 있습니다.

 

동시에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불의한 세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고난이 오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하나님의 뜻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악에 대한 징계일 수 있습니다. 물론 스스로 고난의 길에 들어 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특별히 재난에 대하여는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재난은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 모두의 불의함을 생각하게 합니다. 불의함이 한계치가 되어서 떠져 버린 일들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불의함을 청소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개인적인 불의함과 교회와 사회적인 불의함에 대한 경고를 주십니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의 실체를 보게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 존재인가를 보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지 냉철하게 보게 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거룩함의 자리로 돌아오게 합니다. 특별히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가 바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쳤는지, 세상과 타협하지 않기 위하여 담대하게 진리를 선포하였는지, 교회 역시 맘몬의 지배를 받고 시시닥거리며 살지는 않았는지, 한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살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치명상이기 때문입니다. 재난의 자리에서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에게 눈물을 흘리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천국을 보게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외에는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없음을 보게 합니다. 우리의 소망이 이 땅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임을 알게 합니다. 쉽고 가변적인 우리의 본성은 평안하다, 평안하다는 소리에 모든 영적인 감각이 마비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 땅이 전부인양 살아가게 합니다. 온갖 허영과 부와 탐욕과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서 살아갑니다. 땅의 왕국을 위하여 온갖 추악한 일을 합니다. 그래도 평안하다는 말에 취하여서 살아갑니다. 고난이 없으면 보이는 것이 전부인양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하여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고난을 통하여 천국을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는 힘든 시간을 보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힘들어집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항의합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느냐고 울부짖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울부짖어야 합니다. 우리의 피가 토하는 것과 같은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고난을 이기는 길입니다.

 

시편 기자가 고난 받음이 내게 유익이라 말한 것은 결코 쉬운 말이 아닙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하여 선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아픔이 치유되고 다시금 살 소망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받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들이 고난의 자리에서 소망의 자리로 올 수 있도록 탄원하여 합니다. 동시에 이러한 사악함이 이루어진 일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징계가 임하여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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