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슬픔’은 대단히 낯이 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빌어 말씀하십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부패한 자식이로다.”(이사야 1:4)
슬픔은 사랑과 연결되어 있고 사랑에 비례합니다.
사랑이 깊으면 슬픔도 깊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슬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며,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하나님을 우습게 여겼을까요?
아닙니다. 이사야 당시 남왕국 유다는 번영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웃시야 왕뿐만 아니라, 온 백성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모여들었고 하나님께 드리는 정성을 다한 제사의 연기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피어올라 하늘을 뿌옇게 만들었습니다.
웃시야 왕을 칭송하는 백성들의 소리역시 연기를 타고 하늘 높이 오릅니다.
그런데 유다 전역을 뜨겁게 달구는 종교의 불길에 찬물을 끼얹는 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이사야 선지자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행동심리학자 스키너만큼 종교행위의 허구성을 드러낸 사람도 없습니다.
커다란 유리 상자를 만들어 그 안에 비둘기를 한 마리 넣었습니다.
그리고 중앙에 커다란 원을 그려놓고는 그 원안에 발을 들여놓으면 먹이가 쏟아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리저리 다니던 비둘기가 그 원을 밟으면 먹이가 떨어진다는 것을 드디어 알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원을 밟았습니다. 그 때마다 먹이가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일정한 시간이 되어야 먹이가 나오도록 장치를 변경하였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비둘기는 열심히 원을 밟았지만 그전과는 달랐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먹이가 쏟아졌습니다. 허겁지겁 먹이를 삼켰습니다.
이 어찌된 노릇인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비둘기가 어느 날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일정한 형식을 갖춘 행동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먹이가 쏟아졌습니다.
비둘기는 자신의 그 일정한 형식의 행동이 먹이를 가져다준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스키너 박사는 그 행동을 ‘종교적 행위’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심히 하나님께 드렸던 제사가 바로 종교적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2)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열심히 행하여 복만 잔뜩 받으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행위가 바로 ‘종교행위’입니다.
아브라함 헤셀이 말합니다.
“종교가 멍에로, 도그마로, 두려움으로 군림할 경우,
인간의 영혼을 기르기는커녕 오히려 능욕하게 된다.
종교는 마땅히 영혼의 불이 거룩하게 타오르는 제단이어야 한다.”(사람을 찾는 하나님 중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7-38)
사랑하기에 생긴 슬픔은 오직 상대방을 사랑함으로 해소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내 안에서 타오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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