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을 만나는 복, 제자를 만나는 즐거움
사제의 정리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사람들은 아무도 스승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학생은 있어도 제자가 없다. 물질적 교환 가치에 의한 거래만 남았다. 마음으로 오가던 사제의 도탑고 절박한 정은 찾아볼 길이 없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슬퍼한다. 이 글을 쓰는 이유이다.”
다산 정약용과 그의 제자 황상의 만남과 삶을 기록한 책인 “삶을 바꾼 만남”의 저자 정민은 우리 시대의 아픔을 한탄하면서 스승과 제자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록하였습니다. 스승과 제자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저자는 “삶을 바꾼 만남”이라고 정의합니다. 스승과 제자는 단지 두 사람의 만남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생을 통째로 바꾸는 일입니다. 그래서 스승을 만나고 제자를 만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비교할 나위없는 축복입니다. 정민 교수의 말처럼 학생은 있어도 제자가 없는 시대에 삶을 바꾼 만남이 있다면 그처럼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산 정약용은 우리나라 역사 가운데 최고의 학자 중 한 분입니다. 그에게는 많은 학생들이 배웠고 성공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산이 가장 아끼는 단 한 사람은 바로 황상이었습니다. 강진에 유배되어 있을 때 황상은 15살이었고 이 때 다산을 만나 삶이 바뀌고 일생을 다산의 가르침에 따라 살았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다산이 어려울 때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다산의 아들이 황상을 추억하며 쓴 글 한 대목입니다. “곁에서 과문과 팔고문을 익힌 자가 있었고, 시와 고문을 섭렵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막판에는 창을 들고 방으로 뛰어 들어와 욕하고 헐뜯으며 등 돌린 자도 있었다. 문하는 흩어져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유독 황군 제불만은 어렵게 지내시던 초년부터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오시던 그날까지 시종일관 법도를 넘어섬 없이 자세에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다산이 사랑한 단 한명의 제자가 틀림없습니다. 황상은 다산이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위하여 자원봉사 하였던 때에 들어왔다. 15세의 황상이 60년이 지난 75세에 쓴 “임술기”라는 글에 스승을 만난 장면과 자신을 변화시켰던 스승의 말을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다산은 황상에게 공부할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자 황상은 다산에게 자신의 문제를 말합니다. “첫째 저는 너무 둔합니다. 둘째 저는 앞뒤가 막혔습니다. 셋째 답답합니다.” 그러자 다산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배우는 사람은 보통 크게 세 가지 큰 문제가 있다. 첫째는 민첩하게 금세 외우는 것이다. 그 폐단은 소홀한데 있다. 둘째 예리하게 글을 잘 짖는 것이다. 그러데 폐단은 들뜨는데 있다. 셋째 깨달음이 재빠른 것이다. 그런데 그 폐단은 거친데 있다. 그런데 둔한데도 들이파는 사람은 그 구멍이 넓어진다. 막혔다가 터지면 그 흐름이 상대해진다. 답답한데도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그러면서 다산은 황상에게 [삼근계(三勤戒)] 즉,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글을 써줍니다. 황상은 나이 칠십이 넘을 때까지 그 글을 만지면서 지냈습니다. 나중에는 종이가 너덜거리자 이를 본 다산의 아들 학연이 다시금 글을 써줍니다. 황상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무덤에 들어가는 날 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비록 대단한 성공을 하지 않았지만 다산은 가장 아끼는 제자로 황상을 말합니다.
황상은 스승의 모습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를 “과골삼천(踝骨三穿)”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은 “두 무릎을 방바닥에 딱 붙이고 공부에만 몰두하다보니 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는 의미입니다. 황상은 책을 너무 읽는다는 사람들의 말에 이렇게 대꾸하였습니다. ”우리 선생님은 복사뼈에 구멍이 세 번 나도록 공부하고 또 공부하셨다. 내 뼈는 아직 건재하다..... 그러니 말리지 말라“
그 선생에 그 제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평생을 함께 갑니다. 바울은 스승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를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의 아름다움은 엘리사의 고백에서 보는 것처럼 끝까지 함께 하면서 스승이 간 길을 가기 위하여 갑절의 은혜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선생과 학생이 아닌 스승과 제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일생을 살면서 스승을 만나고 제자를 만나는 것은 최고의 복입니다. 서로를 알아주고 일생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멋진 호강입니다. 이 땅에는 세상을 사랑하여 선생의 곁을 떠난 데마도 있고, 죽음이 갈라놓을 때 까지 함께 한 디모데도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바랍니다.
사제의 정리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사람들은 아무도 스승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학생은 있어도 제자가 없다. 물질적 교환 가치에 의한 거래만 남았다. 마음으로 오가던 사제의 도탑고 절박한 정은 찾아볼 길이 없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슬퍼한다. 이 글을 쓰는 이유이다.”
다산 정약용과 그의 제자 황상의 만남과 삶을 기록한 책인 “삶을 바꾼 만남”의 저자 정민은 우리 시대의 아픔을 한탄하면서 스승과 제자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록하였습니다. 스승과 제자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저자는 “삶을 바꾼 만남”이라고 정의합니다. 스승과 제자는 단지 두 사람의 만남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생을 통째로 바꾸는 일입니다. 그래서 스승을 만나고 제자를 만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비교할 나위없는 축복입니다. 정민 교수의 말처럼 학생은 있어도 제자가 없는 시대에 삶을 바꾼 만남이 있다면 그처럼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산 정약용은 우리나라 역사 가운데 최고의 학자 중 한 분입니다. 그에게는 많은 학생들이 배웠고 성공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산이 가장 아끼는 단 한 사람은 바로 황상이었습니다. 강진에 유배되어 있을 때 황상은 15살이었고 이 때 다산을 만나 삶이 바뀌고 일생을 다산의 가르침에 따라 살았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다산이 어려울 때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다산의 아들이 황상을 추억하며 쓴 글 한 대목입니다. “곁에서 과문과 팔고문을 익힌 자가 있었고, 시와 고문을 섭렵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막판에는 창을 들고 방으로 뛰어 들어와 욕하고 헐뜯으며 등 돌린 자도 있었다. 문하는 흩어져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유독 황군 제불만은 어렵게 지내시던 초년부터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오시던 그날까지 시종일관 법도를 넘어섬 없이 자세에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다산이 사랑한 단 한명의 제자가 틀림없습니다. 황상은 다산이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위하여 자원봉사 하였던 때에 들어왔다. 15세의 황상이 60년이 지난 75세에 쓴 “임술기”라는 글에 스승을 만난 장면과 자신을 변화시켰던 스승의 말을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다산은 황상에게 공부할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자 황상은 다산에게 자신의 문제를 말합니다. “첫째 저는 너무 둔합니다. 둘째 저는 앞뒤가 막혔습니다. 셋째 답답합니다.” 그러자 다산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배우는 사람은 보통 크게 세 가지 큰 문제가 있다. 첫째는 민첩하게 금세 외우는 것이다. 그 폐단은 소홀한데 있다. 둘째 예리하게 글을 잘 짖는 것이다. 그러데 폐단은 들뜨는데 있다. 셋째 깨달음이 재빠른 것이다. 그런데 그 폐단은 거친데 있다. 그런데 둔한데도 들이파는 사람은 그 구멍이 넓어진다. 막혔다가 터지면 그 흐름이 상대해진다. 답답한데도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그러면서 다산은 황상에게 [삼근계(三勤戒)] 즉,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글을 써줍니다. 황상은 나이 칠십이 넘을 때까지 그 글을 만지면서 지냈습니다. 나중에는 종이가 너덜거리자 이를 본 다산의 아들 학연이 다시금 글을 써줍니다. 황상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무덤에 들어가는 날 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비록 대단한 성공을 하지 않았지만 다산은 가장 아끼는 제자로 황상을 말합니다.
황상은 스승의 모습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를 “과골삼천(踝骨三穿)”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은 “두 무릎을 방바닥에 딱 붙이고 공부에만 몰두하다보니 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는 의미입니다. 황상은 책을 너무 읽는다는 사람들의 말에 이렇게 대꾸하였습니다. ”우리 선생님은 복사뼈에 구멍이 세 번 나도록 공부하고 또 공부하셨다. 내 뼈는 아직 건재하다..... 그러니 말리지 말라“
그 선생에 그 제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평생을 함께 갑니다. 바울은 스승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를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의 아름다움은 엘리사의 고백에서 보는 것처럼 끝까지 함께 하면서 스승이 간 길을 가기 위하여 갑절의 은혜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선생과 학생이 아닌 스승과 제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일생을 살면서 스승을 만나고 제자를 만나는 것은 최고의 복입니다. 서로를 알아주고 일생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멋진 호강입니다. 이 땅에는 세상을 사랑하여 선생의 곁을 떠난 데마도 있고, 죽음이 갈라놓을 때 까지 함께 한 디모데도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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