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동식목사

선명할 것인지? 편할 것인지?

새벽지기1 2019. 7. 19. 07:00


선명할 것인지? 편할 것인지?


사람들은 교회가 선명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선명한 복음을 전하면 반기지 않습니다. 선명한 복음이 선포되면 사람들의 얼굴에 환희와 즐거움이 아니라 무거움과 찔림이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말씀의 선명함은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삶의 선명함을 원합니다. 하지만 말씀의 선명함이 없이는 결코 삶의 선명함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한국 교회의 문제를 말씀의 선명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선명성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강조하는 것은 그만두고 윤리적 삶을 강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맞지만 정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의 선명성이 없는데 어떻게 삶의 선명성이 나타나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 말과 지혜로 하지 않았다고 강조합니다. 당대에 유행하였던 소피스트들의 철학적 유희와 수사적 화려함에 기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투박하지만 선명하게 십자가의 죽으신 예수를 전하였습니다. 이것은 당대의 기준으로 보면 어리석은 방법입니다. 반역죄로 죽은 저주의 십자가가 삶의 문제, 우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임을 전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한심하게 보이는 일을 감행하였습니다. 도덕적인 삶을 회복하는 길은 선명한 복음이 선포될 때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 선명한 복음은 교리적 순수성을 전제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가감 없이 전하는 것이 바로 말씀의 선명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선명한 복음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는 살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선명한 복음이 선포되면 우리는 힘들게 살아가야 합니다. 선명함은 편안함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바른 교훈이 증거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성경은 말세에 이르면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듣지 않고 자신의 귀를 시원하게 해주는 이야기와 구원과 관계없는 허탄한 이야기를 쫓는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딤후 4:1-5).이렇듯 바른 교훈을 듣지 않는 시대에 선명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편안한 삶을 살고 싶은 이들에게 선명한 십자가를 강조하는 것은 그리 반갑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이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선명한 복음과 함께 자발적 불편을 살 것인가? 가벼운 말씀을 통하여 편하게 살 것인가? 바른 복음은 우리의 본성과 부합하지 않으므로 사는 것이 힘들어 집니다. 그래서 교회로 사람을 모이게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벼운 복음은 삶을 편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사람을 모이게 하는 일에 적절합니다. 일반적으로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신앙이 아니라 긍정의 힘을 가지고 사는 복이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늘 고민하였습니다.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으로 이끌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모이지 않으면 어떻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갈등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하나님이 맡기신 소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러한 갈등이 매우 무겁게 짓눌렸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선배들은 결정하기를 쉽고 가볍게 가는 길을 포기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신앙인이 바로 바울입니다. 그는 말과 지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전했습니다.


십자가가 어떤 이에게는 생명의 길로 가게하고, 어떤 이에게는 멸망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이 화려한 지식임을 알고 있었지만 바울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 전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다른 것을 포기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말과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십자가는 쉬운 길이 아닙니다. 편안함을 담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교회를 허무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전하지 않는 교회는 구원받는 자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십자가의 예수를 전하는 일입니다. 우리 앞에 편한 길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참된 안식으로 이끄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참된 영광으로 이끄는 것은 선명한 복음입니다. 화려한 외형이 아닙니다. 솔깃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불편하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이 길만이 생명입니다. 믿음의 길은 편한 길이 아닙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것은 선명한 복음, 바른 교훈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자랑하고 회복해야 할 것은 성도수와 교회 건물과 권력이 아니라 피 묻은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을 자랑하고, 다시금 선포되어야 합니다. 조금씩 불편하게 살아갑시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