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동식목사

국가를 세우는 기독교

새벽지기1 2019. 6. 30. 06:02


기독교와 국가의 관계는 참으로 민감합니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멀리 할 수 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때때로 국가와 동지 관계를 맺기도 하고, 적대적 자리에 서기도 합니다. 한국 역사 속에 존재하였던 교회의 모습을 보면 이 말이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국가에 의하여 엄청난 핍박을 받기도하였지만 때로는 국가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협력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한국 현대사는 이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6.25전쟁 이후에 반공의 기치 아래 교회는 국가를 위하여 헌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독재 정권을 향하여 저항하면서 민주주의를 쟁취하는데 헌신하였습니다. 둘 다 국가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다만 그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기독교와 국가는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성경은 무정부를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나라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실물로 보여 주셨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국가에 대한 가르침들이 존재합니다. 특별히 롬13장은 위에 있는 위정자에 대한 성경적인 순종과 불복종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국가는 이 땅에 공존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어거스틴의 표현대로 두 왕국의 시민으로 삽니다. 이 땅의 백성으로 살지만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비 그리스도인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긴장감이 존재합니다.


보이지 않는 긴장 속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이 땅의 삶에 어떠한 존재여야 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결국 기독교와 국가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가져다줍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기독교는 국가를 발전 지키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문화명령입니다. 그리고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할 것을 강조하였던 역사적 선배들의 유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독교가 국가를 건강하게 세우는 일에 동참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코람데오의 삶을 사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이 분명하게 세워지지 않으면 결코 국가를 세우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먹칠하는 일을 합니다. 우리 시대는 한국 기독교의 융성기에 자랐던 이들이 국가의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국가의 중요한 영역에서 직임을 맡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그런데 청문회를 통하여 밝혀진 모습을 보면 엉망진창입니다. 정말 안타깝게도 물신주의에 가득 빠져있는 모습이 대 부분이었습니다. 더구나 이들 중 상당수는 교회의 직분자입니다.


도대체 해마다 반복되는 이 불의한 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 세상에 흠뻑 젖어 살고 있는 한국 교회를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외식을 알지 못하는 한국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은 이들을 들춰내셔서 한국 교회의 치부를 낱낱이 밝히고 있는 것 입니다. 참된 신앙의 고백과 삶의 성화에 관계없이 세상의 성공이 교회 직분과 존경의 대상이 되는 샤머니즘 신앙을 맹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깨닫지 못하면 사망 선고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이런 모습으로는 국가를 세우는 일에 결코 쓰임을 받지 못합니다. 국가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관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국가를 건강하게 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다시금 정친 차려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는 코람데오와 십자가의 복음을 정직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사회적 성공이 직분의 잣대가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신앙고백을 가르치고 정직하게 사는 법을 훈련받아야 합니다. 국가를 건강하게 세우는 일에 쓰임 받으려면 자발적 불편의 삶이 생활화 되어야 합니다. 고액의 월급이 자랑이 되고,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 어떻게 국가를 위하여 헌신 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의 공직이 그에게 더 높은 돈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이 되지 않는다고 보장 할 수 있습니까? 정말 국가를 바로 세우기를 원한다면 삶의 영역에서 자발적 불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코람데오의 삶이고,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 사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발적 불편의 삶이 살기를 싫어한다면 공직에 나가지 말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