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특강

산상수훈의 ‘의’에 관한 해석학적 문제

새벽지기1 2019. 1. 19. 08:13


산상수훈의 ‘의’에 관한 해석학적 문제


처세술와 설교


 필자는 일전에 한 아무개 목사의 설교를 비평할 일이 있었다. 그가 시무하는 교회는 서울의 한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 교단을 대표하는 대형교회이다. 그는 “여유 있어 보이는 당신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는 제목의 설교에서 산상수훈을 거론하면서 세 가지 여유로운 삶의 태도를 제시했다. 첫째로 오른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을 돌려대라는 말씀은 마음의 여유를 뜻하며, 둘째로 속옷을 달라는 이에게 겉옷까지 주라는 말씀은 물질적인 여유를 의미하고, 셋째로 오리를 함께 가자하는 이에게 십리를 가주라는 말씀은 시간의 여유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이런 세 가지 여유를 보임으로써 세상 사람들과 구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본인으로서는 모든 면에서 풍족하게 살아가는 서울의 중산층이라 할 그 교회 신자들에게 세련된 설교를 전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런 설교는 성서 텍스트의 깊이에 이르지 못함으로써 결국 성서 텍스트의 실체를 은폐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 더 따라가자.


일단 그리스도교 신앙이 여유 있는 삶의 태도라는 그 발상에서 우리는 성서적이고 신학적 근거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우선 예수님이 여유 있는 삶을 사신 게 아니라는 사실이 이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대답이다.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한탄하실 정도로 외로운 삶을 사셨으며, 십자가 처형 앞에서 피가 땀처럼 보일 정도로 존재의 두려움을 느끼셨다. 만약 그리스도교 신앙이 여유를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형편없이 사셨다는 말이 된다. 바울을 비롯한 제자들도 역시 여유 있는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없다. 늘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그들은 하나님 나라와 세속 질서 사이의 긴장과 불안을 안고 살았다고 보는 게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단적으로 순교의 역사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적인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지금처럼 풍요로운 시대에도 기본적으로 순교의 정신을 따르고 있으며, 그럴 수밖에 없다고 보아야한다.  


물론 본문을 멀리 우회하면 여유로운 삶 운운도 역시 가능한 주장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본문을 해석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교 신앙의 변죽을 울리는 것에 불과하다. 변죽을 울린다는 말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이 세상에서 요령껏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처세술로 이용된다는 의미이다. 사실 처세술로서의 설교는 우리 한국교회 강단의 아주 두드러진 특징이다. 예수 믿고 복 받는다는 설교도 역시 기본적으로 처세술이고, 예수 믿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도 일종의 윤리적 처세술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상담과 지도력 개발도 역시 처세술의 일종이다. 심지어 어떤 설교자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근거해서 부부 클리닉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이는 어리석다 못해 비극적인 현상이다. 만약 마음의 여유로만 말한다면 불교의 돈오(頓悟)가, 소크라테스의 자기 인식이, 노장의 무위자연이, 요즘 확산되고 있는 단과 기수련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한국교회 강단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이처럼 일종의 종교적 처세술로 다루어지는 신학적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러 관점에서 모색되어야 하겠지만 오늘 우리의 주제와 연관해서만 본다면, 산상수훈이 일종의 윤리적 강령, 혹은 지속적으로 강화되어야 할 신앙 프로그램으로 간주된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산상수훈이 진술하고 있는 의에 관한 규정들이 일종의 규범으로 인식된다는 말이다. 일단 의가 규범으로 설정되면 설교자는 청중들에게 그것을 준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마련이고, 결국 그것이 처세술의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오른뺨과 왼뺨에 관한 텍스트를 규범으로 선포하는 설교자들도 실제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니면 최소한 일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원수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도 역시 옳기는 하지만 일반적이지 않다. 이게 바로 설교자의 딜레마이다. 전통적인 설교자들은 불가능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이 규범으로서의 의를 거의 무조건적인 율법의 차원에서 강요했지만, 그런 현실을 파악하고 있는 설교자들은 텍스트 자체보다는 그 텍스트를 대하는 청중들의 실존적인 삶에 설교의 중심을 이동시킴으로써 이런 딜레마를 피한다. 즉 위에서 예로 든 설교자에게 볼 수 있듯이 오른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뺨을 돌려대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의 여유라고 해석함으로써 청중들이 크게 갈등을 겪지 않고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적인 삶을 견인해낼 수 있다면 그런 설교는 당연히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런 성서 해석은 결국 성서 텍스트의 도구화와 다를 게 없다. 성서 텍스트의 도구화는 성서 텍스트의 존재론적 능력을 훼손시킨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도구화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을까? 성서 텍스트가 놓인 “삶의 자리”를 정확하게 이해함으로써 그것의 역사적 무게를 확보하는 게 우선적이며 필수적이다. 이제 산상수훈이 제시하고 있는 ‘의’에 관한 역사적 무게를 확보하기 위해서 마태 공동체가 처한 삶의 자리를 들여다보자.

율법과 복음 사이에서


 마태복음 공동체는 기원후 80년대 초라는 시대에 자리하고 있다. 그 시대는 70년에 예루살렘이 붕괴된 이후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의 결속과 부흥이 크게 강조되던 때였다. 그런 상황은 마태공동체에게 일종의 위기였다. 유대교로부터의 압박이 강화함으로써 마태공동체가 유대교로로부터 축출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고조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당시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상당히 오랫동안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원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처음부터 새로운 종교로 깃발을 내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와의 갈등도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쉽게 말하자면 그들은 유대교 안에서 바리새파, 사두개파처럼 나사렛파로 행세할 수 있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을 유대인들의 기도 시간에 맞추어 드나들고 있었다는 걸 보더라도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유대교와의 적대관계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의 등장으로 조금씩 유대교와 구별되는 요소들이, 즉 탈(脫)율법적인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말은 곧 유대교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던 팔레스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거리를 두려던 디아스포라(헬라파) 그리스도교 공동체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사도행전에 서술되어 있는 소위 일곱 집사 사건은 단순히 사도들의 업무를 분담하기 위한 조치였다기보다는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과 디아스포라(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의 공식적인 분열이라는 게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팔레스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의해서 밀려난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은 안디옥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방인 선교를 전개했으며, 급기야 이방인을 위한 사도인 바울의 등장으로 갈라디아와 마케도니아와 아카이나 지역에 그들의 고유한 공동체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들 헬라파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대표 격인 바울은 유대교의 율법과 계속해서 어정쩡한 관계를 맺고 있던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 로마서의 전반적인 기조가 그렇지만 갈라디아서는 율법을 훨씬 단호하게 배격한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9) 그리고 그는 베드로와 바나바를 책망하기까지 했다.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포기하고 새로운 복음 공동체로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예루살렘 공동체 안에서도 율법 무용론이 힘을 얻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율법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하라는 유대교의 정치적 압력 앞에서 마태공동체는 그들의 입장을 천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을 폐기하는 게 아니라 완전하게 한다고 말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17-20)

우리는 바울의 입장과 마태복음의 입장이 서로 대립된다는 사실을 여기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대립도 상당히 극단적이다. 한쪽은 복음과 율법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사람을 가리켜 저주를 받는다고 선언하였으며, 다른 한쪽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에 투철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실제로 바울과 마태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혀 다르게 생각했다는 것일까?
그들의 신앙이 이질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그가 세상의 심판자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믿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새로운 무대인 헬라 지역에서 복음을 선포했으며, 마태는 야고보 및 베드로를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적 배경의 공동체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율법에 관한 입장표명이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어느 쪽이 옳고, 다른 쪽이 그르다는 판단을 내릴 수 없다. 결국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헬라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주류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태공동체가 몸부림쳤던 율법적인 ‘의’의 문제가 과소평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텍스트가 안고 있는 역사적 무게를 얼마나 진지하게 뚫고 들어가서, 오늘의 삶에 재해석해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율법과 복음의 지평융해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전혀 없는,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평지설교로 그 흔적만 남아있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기본적으로 그들 공동체에서 발생한 값싼 은혜를 극복하자는 편집의도에서 기록된 매우 독특한 초기 그리스도교 도큐먼트다. 더구나 마태공동체는 이제 유대교로부터 이단으로 낙인찍힐지 모른다는 위기의 상황 가운데서 그리스도교가 율법을 폐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완성한다는 점을 정확하게 짚으려고 했다. 마태복음은 산상수훈에서 율법인 의로움의 정당성을 누누이 밝히고 있으며, 더구나 그것을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진술하고 있다. 만약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요구보다 훨씬 강력한 의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이 산상수훈을 읽었다면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대감을 누그러뜨렸을 가능성은 높다. 물론 마 5:21-48절에서 율법과의 대구형식으로 제시된 내용이 율법과의 충돌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산상수훈 전체를 놓고 보면 그것은 별로 심각한 수준이 아니다. 전반으로 볼 때 산상수훈은 율법이 말하는 의를 지켜야 한다고, 더 나아가서 훨씬 더 엄격한 의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마태복음 읽기를 이런 정도에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마태복음이 표면적으로는 아주 강력한 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요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율법적인 의가 아니라 복음을 통한 새로운 의의 차원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혀 새로운 윤리적 삶의 지평을 희망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고도의 ‘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산상수훈에 제시된 윤리적 기준은 흡사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예찬이 우리가 무조건 실천해야 할 규범이라기보다는 기독론적인 진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론적인 진술인지 모르겠다. 예수에게서만 가능한 의로움, 예수를 믿음으로서만 우리에게 전가되는 의로움에 대한 진술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사태를 해석학적 개념으로 설명한다면, 율법과 복음이 마태공동체 안에서 지평융해를 일으킴으로써 의에 대한 새로운 지평이 열린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지평을 놓치게 되면 의에 관한 산상수훈의 진술과 그리스도교 일반의 신앙이 모순을 일으킨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논쟁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셨으며, 성전청결 사건에서는 나름으로 폭력을 사용하기까지 하셨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포도주를 마시기 즐겨하고 죄인들과 어울려 다닌다고 비판했다는 일련의 사실은 표면적인 산상수훈의 의와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도 이런 시행착오는 적지 않았다. 즉 이 세상에 평화를 구현하겠다는 생각으로 모든 폭력을 부정한 그리스도교적 비폭력주의는 실제로 이 세상의 폭력을 완화시키지도 못했고, 평화의 질서를 제고시키지 못했다. 경우에 따라서 그들의 이상주의적 순진성은 악한 폭력에 의해서 이용당하는 일들이 더 많았다. 그들이 실패한 이유는 그들이 산상수훈의 비폭력을 율법과 복음의 기독론적인 지평이 아니라 절대적 규범으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결국 오늘의 설교자는 그리스도교적 이상주의자들을 그대로 흉내 낼 것이 아니라 마태공동체가 처했던 역사적 무게를 읽어내면서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적 관계를 포착해낼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오늘의 자리에서 또 한 번의 지평융해를 통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산상수훈의 ‘의’에 관련된 문제가 무조건 따라야 할 규범이거나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 다루어지는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해석학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짧은 글에서 그런 해석학적 문제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는 힘들 것 같다. 다만 다음과 같이 방향만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부분과 전체의 해석학적 순환


 우리의 텍스트 해석 행위는 기본적으로 “부분과 전체”의 해석학적 순환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 산상수훈의 의 문제는 단지 산상수훈 안에서가 아니라 성서 전체가 말하는 의 개념,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학이 말하는 의 개념과의 연관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제시된 법적인 의미의 칭의론 개념을 알고 있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율법적인 성격이 매우 강한 산상수훈의 의를 무조건 강제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선포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 개념을 조직신학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또한 바르트가 말하는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깊이 이해하고 있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산상수훈의 의를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의 빛에서 새롭게 해석해낼 수 있을 것이다. 정치, 경제적인 힘들이 소용돌이치는 이 세속 사회에서 함께 투쟁하며 살아가야 할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윤리 문제를 라인홀드 니버의 현실주의적 사유에서 접근하고, 그런 문제를 오늘의 인문학적 토대에서 풀어낼 수 있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청중들에게 산상수훈의 비폭력을 무조건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위의 글이 산상수훈의 의 문제로 설교해야 할 분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은 별로 안 될 것 같다. 필자의 생각이 미숙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지만, 성서 텍스트가 단순히 암기하기만 하면 극복되는 자동차 매뉴얼이 아니라 해석됨으로써만 탈(脫)은폐가 가능한 신비로운 하나님의 계시라는 근본적인 사태가 가장 결정적인 이유이다. 필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산상수훈의 의는 오늘 우리에 의해서 새롭게 해석되어야만 한다. 문제는 우리에게 복음적이고 진리론적인 해석학적 능력이 주어졌는가에 달려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