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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르트의 '절대타자'의 개념,

새벽지기1 2017. 11. 21. 10:36


칼바르트의 '절대타자'의 개념


약간의 신학훈련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절대타자”(totaliter aliter)라는 신학 용어를 둘러싼 현대신학의 논쟁 역사를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을 “절대타자”로 규정하고 있는 칼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접촉점”이 없다고 생각한 반면에 자연신학적 경향을 보인 에밀 브룬너는 접촉점을 인정했다. 바르트는 인간이 타락 이후에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보는 칼빈의 개혁주의 전통에 근거해서 브룬너의 신학을 로마 가톨릭의 자연신학이라고 몰아붙였다. 브룬너는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 형상의 질료적 의미는 파괴되었지만 형상적 의미는 남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여지를 인정했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적 의미와 질료적 의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 개념에 의한 것이다. 이 형상(form)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할 때의 형상(image)과는 다른 용어이다. 1930년대 중반에 크게 일어났던 이 논쟁은 별로 오래가지 않았다. 서로의 신학적 토대가 다르며, 또한 그들이 나름으로 고유한 신학적 경지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승패로 갈릴 수 없었다. 바르트는 주로 하나님의 계시론적 우월성을 강조했다면 브룬너는 인간의 인식론적 가능성을 강조했다. 우리도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줄 수는 없다. 대신 이 절대타자 개념이 기본적으로 인간의 인식론적 근거를 완전히 배제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하면서 그것이 말하려는 신학적 실질을 찾아보려고 한다. 


절대타자 개념을 소극적인 차원과 적극적인 차원으로 나누어 검토하는 게 이해하기 좋을 것 같다.


 1)우선 소극적으로, 절대타자 개념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존재유비(analogia entis)를 부정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이 세상의 어떤 사물이나 형태와 유비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가장 전형적인 예는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상(像)이다. 페미니스트들이 가장 격렬하게 비판하는 이런 가부장적 하나님 상이 곧 존재유비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페미니스트들에 의해서 제시되는 어머니 상도 따지고 보면 이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이 땅의 사물, 형태,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해명하려는 태도는 기본적으로 존재유비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셨다. 탕자의 비유, 포도원 주인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등등, 예수님의 비유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관한 것이지  존재에 대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아버지의 사랑, 또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비유할 수는 있지만 존재론적으로 일치시킬 수는 없다는 말이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구약성서의 일관된 주장은 바로 이런 존재유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바알 신은 가시적인 형태, 예컨대 암소나 황소 형상으로 구체화된다. 이스라엘의 광야시절에 그들도 한번 금으로 된 송아지를 만든 적 있다. 그런 일로 인해서 그들은 엄청난 재난을 당했다. 가나안 원주민들만이 아니라 근동의 모든 종교와 그 뒤의 모든 종교들은 신을 위한 형상을 만들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모든 신들은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교회의 신인동성동형론도 내용적으로는 그와 비슷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신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은 신을 자신의 능력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존재유비의 유혹을 끊임없이 받는다. 자본주의도 역시 돈을 절대화한다는 점에서 이런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어쨌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구약성서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하나님의 존재를 이 땅의 것과 일치하려는 모든 종교적 욕망의 제거이다. 


2)절대타자 개념의 적극적인 차원은 하나님 계시의 우선성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우선적으로 작동할 때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 인간은 이 세계에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계 전체를 바로 직면할 수 없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는 세계의 실체가 아니라 단지 우리의 인식론적 범주 안에서만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에 불과하다. 마치 물속에 들어가 있는 물고기에게 물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이 세상에 던져진 우리에게 이 세상은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이런 실존적인 상황을 전제한다면 불가지론은 옳은 관점이다. 세계를 창조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가지, 즉 절대타자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 태도를 보인다.
하나의 태도는 불가지론자들처럼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만을 언어로 진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하나의 태도는 불가지의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심으로써 우리가 그를 인식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교가 취하는 태도인데, 특히 바르트의 입장에서 강조된 것이다.
 우리가 무슨 길을 통해서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역사에 참여했고, 그렇게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계시이기는 하지만 예수 사건을 우리가 아직 실체적으로 아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사건은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종말을 향해 열려있다. 오늘 우리는 종말에 완전하게 드러나게 될 절대타자인 하나님과 이 역사 안에서 이미 일어난 예수 사건과의 관계를 해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