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특강

성서와 악보

새벽지기1 2017. 9. 28. 07:08


 악보와 소리


 금년은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다. 이를 기념해 얼마 전 모 티브이 방송국에서 모차르트 특집 프로그램을 2회에 걸쳐서 방영했다. 모차르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와 인생 후반부에 주로 활동한 수도 비인의 풍경을 담은 영상이 그림엽서 같았다. 다섯 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한 모차르트는 서른다섯 살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소나타를 비롯해서, 다양한 악기의 협주곡과 수많은 오페라를 작곡했다고 한다. 당대에 나름으로 뛰어난 궁정작곡가였던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향한 콤플렉스로 인해서 정신병원에 갈 정도였다면, 모차르트의 음악세계가 얼마나 풍부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 특집 방송을 보면서 모차르트의 영혼을 울린 그 소리의 원천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안타깝지만 현대인들은 그의 음악을 직접 만날 수는 없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가 오선지에 그려 넣은 악보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악보가 곧 모차르트의 음악은 아니다. 악보는 음악의 기호에 불과하고, 음악의 실체는 소리이다. 우리는 기호와 실체를, 즉 악보와 소리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모차르트의 음악을 배우거나 그의 곡을 연주하려는 사람들은 그 악보를 통해서 모차르트가 경험한 음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한다.


우리나라의 음악교육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음악 세계를 열어가는 소리에 대한 존재론적인 체험보다는 음악이론에 치중한다는 것이다. 피아노를 배우는 어린아이들은 처음부터 바이엘 악보를 보고 수백 번 반복해서 그걸 외운다. 그렇게 해서 손가락을 잘 돌릴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만으로 원래 음악의 본질인 소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건 결코 아니다. 더 근원적인 소리의 세계는 봄비 내리는 소리, 밤꾀꼬리 울음소리, 천둥소리, 눈 오는 날 밤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등등이다.


이런 소리와 존재론적으로 일치하는 경험 없이, 악보를 그대로 연주할 수 있는 테크닉 습득에만 치중한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음악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즉 악보보다는 그것이 담고 있는 소리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모차르트의 악보와 소리의 관계는 곧 우리 설교자들의 관심인 성서와 계시의 관계와 비슷하다. 악보가 기호이듯이 성서 텍스트는 기호이고, 소리가 실체이듯이 하나님의 계시가 실체이다. 악보라는 기호가 소리라는 실체를 담고 있듯이 성서라는 기호는 계시라는 실체를 담고 있다. 오늘의 모차르트 연주자들이 악보를 통해서 모차르트의 소리를 찾아내야 하듯이 오늘의 설교자들은 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야 한다.  

소리의 은폐성과 계시의 은폐성

 
 그런데 음악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악보에 소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번 C 장조, K.279 악보를 보았다고 하자. 이 악보를 뚫어져라 들여다본다 하더라도 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악보는 소리를 향해서 손가락질을 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 소리를 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악보는 연주자에게 소리가 아니라 눈으로 말을 걸 뿐이다. 시각적 차원의 악보에 청각적 차원의 소리가 숨어 있는 셈이다.


우리 설교자들에게 성서도 이와 비슷하다. 성서는 계시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는 바르트의 설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성서가 하나님의 계시 자체와 일치하는 건 아니다. 흡사 음의 존재론적 세계로부터 들려온 어떤 소리를 오선지에 그려 넣은 모차르트의 악보처럼 성서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혹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경험한 성서 기자들의 언어적 진술이다. 이런 점에서 성서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은폐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필자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갖는 원초성, 그 엄밀성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예컨대 엑서더스에 관한 보도인 출애굽기가 여기 있다고 하자. 출애굽기는 신문기자가 현장에서 보고 들은 걸 사실적으로 보도한 기사가 아니라 오래 세월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승된 설화다. 이 텍스트는 곧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적 해석이다. 그것도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여러 사람들의 해석이 결집된 결과물이다. 이 해석은 하나님의 계시와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앙적 해석을 뛰어넘는 종말론적 진리이며 생명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은폐와 노출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우리가 어떻게 성서 텍스트를 통해서 원래의 구원 사건인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다행스럽게도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간 피아니스트라고 한다면 모차르트의 악보를 보기만 해도 소리를 전달받을 수 있는 것처럼 설교자들도 성서 텍스트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모두에게 전제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곧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설교자들도 역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성악가들이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 나오는 아리아를 부르기 위해서 쏟아 붓는 훈련과 노력이 성서 텍스트를 해명해야 할 설교자들에게도 똑같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설교자의 전문성은 물론 신학적 통찰을 말하는데, 이럴 때만 악보에 은폐된 소리가 노출되듯이 성서에 은폐된 하나님의 말씀이 노출된다.  


어떤 설교자들은 필자의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들은 신학적 통찰보다는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기술을 설교의 전문성으로 간주한다. 설교는 청중의 지성에 호소하는 신학 강연이 아니라 영혼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선포이기 때문에 대중 설득력이 우선한다는 말이다. 이런 말에 굳이 크게 이의를 달고 싶지는 않지만, 필자의 생각에는 설교자들이 이런 포퓰리즘에 빠지게 되는 경우에 결국 성서 텍스트는 계시의 존재론적 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설교의 포퓰리즘이 왜 문제인지 예를 들어보자. 가수들은 청중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멋지게 노래를 불러서 인기를 얻으려고 한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노래하는 궁극적 목적이다. 또한 청중들은 신바람 나게 노래하는 가수를 통해서 어떤 정서적 합일을 느끼고, 나름으로 심리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여기에서는 가수나 청중들의 감정과 감수성만 중심 과제로 작동될 뿐이지 본래 중심이어야 할 음악 자체는 주변부로 전락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설교 현장도 설교자와 신자들의 신앙적 감수성이 득세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위한 도구로 사용될 위험성이 높다. 이것이 곧 설교의 포퓰리즘에 의한 말씀의 도구화이며, 이런 상황에서 성서에 은폐된 계시는 결코 노출될 수 없다.


필자의 생각에 설교자는 대중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유행가 가수가 아니라 음악의 도를 추구하는 클래식 성악가에 가깝다. 성서라는 악보를 앞에 두고 계시의 ‘소리’를 찾아가는 사람은 오직 그 사실 자체만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기쁨이 곧 설교자의 고유한 영성이기도 하다.  
(영신학보, 2006년 5월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