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거룩은 악을 미워합니다 (신명기 7:16~26)

새벽지기1 2018. 7. 28. 07:15

 

“악을 미워하고, 악에 대항하여 싸우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권세를 사용하면 우리가 승리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성경의 진리성을 부인하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원주민들을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말고 완전히 멸망시키라고 명령하는 내용입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넘겨주시는 모든 민족들을 멸망시켜야 할 것이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그들의 신들을 섬기지 말라. 그것은 너희에게 덫이 될것이다. 너희는 스스로 ‘ 이 민족들은 우리보다 강하다.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쫓아내겠는가?’ 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이집트에 어떻게 하셨는지 잘 기억해보라”(신 7:16~18).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24절에 보면 그들의 이름까지 하늘 아래에서 완전히 없애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그들의 왕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실 것이고 너희는 그들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완전히 없애 버릴 것이다. 어느 누구도 너희에게 대항해 들고 일어날 수 없으며 너희는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다”(24절). 

 

하늘 아래에서 이름을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엄청난 저주입니다. 고대나 지금이나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이 영예이고 축복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내어 쫓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그들을 하늘 아래에서 완전히 제거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 어떻게 똑같은 인간인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이럴 수 있습니까. 비윤리적이고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역사를 통해서 이 명령을 보면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런 명령을 하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고, 자비로운 분이시고, 은혜로운 분입니다. 어떻게 이런 결론이 내려지게 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 나온 명령의 근거가 창세기에 나옵니다. 

 

멸망에 대한 명령 

 

“네 자손은 4대 만에 여기로 돌아올 것이다.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창 16:16). 

 

이때는 아브라함에게 한 사람의 자손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이 미래의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4대만에 다시 돌아올 것이며, 그 까닭은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애굽에서 4대만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는 이동을 하게 될 것인데 그 이동의 목적 중 하나가 가나안에 있는 원주민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사랑하시고, 복주시며, 그들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심판의 징조를 말씀하셨지만 그로부터 400여 년을 참고 또 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이르기까지 가득 찼습니다. 더 이상 사랑과 자비로 공의를 넘어뜨릴 수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노아 시대의 하나님은 인류를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동성애와 강간 등 성적인 타락이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셨습니다. 역사 속에 있었던 수많은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로운 심판이듯이 가나안 원주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뤄지는 과정도 공의롭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동이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내어 쫓고, 멸망시키고, 그들의 이름까지 제거해 버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공의로운 심판을 이루시는 내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멸망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가나안 거민들이 멸망당할 때 하나님은 고통스러워하시고 슬퍼하셨습니다.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들이 악을 택하고 악에 속하기를 고집했을 때 심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몸 안에도 병이 일부분 있습니다. 용납될 수있는 정도의 병이 있고, 용납될 수 있는 나쁜 세포들이 있는데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칼을 대어야 합니다. 칼을 대서 그 세포를 도려내지 않으면 온 몸이 죽게 되기에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무서운 악에 대하여 하나님이 영적인 수술을 하는 것입니다. 멸망에 대한 명령은 하나님이 선하시지 않고 악하기 때문에 주어진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하시고,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주어진 명령입니다. 

 

은과 금을 탐내지 말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거민들의 멸망을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다가 멸망하지 않도록 우상숭배와 가증스러운 악들을 따르지 않도록 그것들을 혐오하고 철저하게 미워하라는 명령도 주셨습니다.

  

“너희는 그들의 신들 형상을 불에 태우며그것 위에 입힌 은과 금을 탐내지 말며 가져가지도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덫이 될 것이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집에 가증스러운 것을 들이지말라. 이는 너희가 그것과 함께 멸망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을 철저히 혐오하고 미워하라”(25~26절). 

 

하나님이 가나안 거민들이 섬겼던 우상, 그들이 탐내었던 것들,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것들을 철저히 미워하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할지라도 가나안 거민들과 같이 행한다면 그들 또한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거민들이 속했던 악을 이스라엘 민족들도 동일하게 행한다면 그들 또한 하나님이 멸하십니다. 그래서 철저히 미워하고 혐오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과 그들의 가정과 혼약을 맺지 말고, 어떤 조약도 맺지 말고, 그들이 세웠던 우상을 불태워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살아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25절을 보면 그들의 우상을 불에 태우며 그것 위에 입힌 은과 금을 탐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에 의해서 마음이 흔들릴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사실 이스라엘백성들이 탐할 수 있는 위험은 가나안 거민들이 섬겼던 우상이 아닙니다. 우상에 입혀진 은과 금입니다. 그래서 우상에 입힌 은과 금을 탐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거민들이 섬겼던 우상을 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우상에 입혀진 은과 금을탐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거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섬겼던 것은 존재하지도 않은 우상이 아니라 그 우상에 입혀놓은 은과 금입니다. 

 

여러분, 헛된 우상일수록 화려하게 만듭니다. 헛된 우상일수록 은과 금으로 입힙니다. 존재하지도 않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우상이 가져다준다고 약속한 은과 금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에 대한 탐심으로 먹었습니까. 아닙니다. 열매 이면에 탐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은 자유에 대한 탐심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진짜 자유인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상의 헛된 우상일수록 은과 금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습니다. 이단과 사이비 특별히 헛된 종교를 보면 모두 은과 금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합니다. 조심해야 될 것이 십자가를 은과 금으로 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액세서리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다이아몬드를 다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소박합니다. 나무십자가면 됩니다. 십자가가 상징으로 보여지는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화려하게 만드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우상에게 은과 금을 입히면 사람들은 그 우상 자체를 믿는 것이아니라 ‘ 저 신을 믿으면 나에게 은과 금을 주겠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은과 금으로 주목하게 만드는 신앙이 아닙니다. 못 박힌 십자가,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주신 십자가입니다. 

 

사람들이 은과 금을 탐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너머에 무엇인가가 더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입니다. 은과 금이 있으면 하나님이 없어도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은과 금에 대한 탐심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의 탐심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이 아니라 은과 금을 의지하는 인생이 탐심의 본질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탐심을 허용하게 되면 덫과 올무가 되어 너희들이 멸망당하기 때문에 절대로 허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철저히 분리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믿음은 선한 싸움 

 

하나님은 백성들이 덫에 걸려 멸망당하지 않도록 싸우십니다. 성경 전체 주제 중 하나가 전쟁입니다. 하나님은 싸우는 용사입니다. 출애굽을 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그 후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한 전쟁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리적으로 전쟁을 했지만 우리에게는 역사의 교훈을 통해서 영적 전쟁의 원리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전쟁 이야기는 구약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땅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 10:34). 예수님의 말씀에도 전쟁 용어들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습니다. 믿음은 선한 싸움입니다. 우리는 전쟁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존 번연이 쓴 <거룩한 전쟁>이라는 풍유집이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썼습니다. 

 

샤다이라는 왕이 맨소울이라는 도시를 만들고 그 도시가 온 세상을 다스릴 수 있도록 권세를 줍니다. 그런데 샤다이 왕의 신하였다가 반역을 한 디아불루스라는 반역자가 맨소울을 점령하려고 침투합니다. 자신이 맨소울의 거민인 것처럼 위장해서 그들을 설득하고 맨소울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그렇게 반역을 하게 됩니다. 샤다이 왕이 맨소울을 탈환하기 위해서 전쟁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디아불루스가 어떻게 도시 사람들을 유혹했습니까. 마치 그들의 편인 것처럼, 그들을 위하는 것처럼 유혹 했습니다. 사단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사단은 언제나 우리 편인 것처럼 접근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도 어떻게 접근을 했습니까. 아담과 하와의 편인 것처럼 접근 했습니다. “그것을 따먹는 날에는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편인 것처럼 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대적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단이 왜 인간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 들이려고 하는지 아십니까. 사단에게는 세상을 다스릴 권세가 주어져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협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세상을 악하게 만들 수 없으니까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권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이 왜 그렇게 악하고 혼란스러운지 아십니까. 사단에게 협력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사단이 일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사단은 아무 일도 못합니다. 그런데 사단의 협력자가 되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이들을 통해서 사단이 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멸망하지 않도록 싸우고 계십니다. 악과의 싸움, 사단과의 싸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그까짓 사단을 다 쓸어버리시지 하나님은 왜 그냥 두십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이 그냥 보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쓸어버리는 순간 그 사람도 쓸려 가기 때문입니다. 함께 멸망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사단이 한 순간에 무저갱으로 들어가 버리면 얼마나 속 시원하고 편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면 거기에 물들어 있는 모든 영혼들도 한꺼번에 멸망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사단에 종노릇하고 사단의 협력자가 되어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알곡과 가라지 비유가 그것입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는데 왜 추수 때까지 그대로 내버려둡니까. 가라지를 뽑을 때 알곡들이 상할까봐 추수 때까지 두는 것입니다. 

 

존 번연의 <거룩한 전쟁>에서 맨소울이라는 도시를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에 자유의지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디아불루스여, 맨소울의 가련한 주민들은 너의 통치와 정권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다. 만일 네게 굴복하면 어떻게 되는지도 잘 안다. 전에 네가 우리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둔 것은 우리가 무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덫을 보지 못해 사냥꾼에게 잡힌 새와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섰고, 악의 세력에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섰다. 많은 것을 잃었고 당혹스러운 상황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포기하지도, 무기를 내려놓지도, 너와 같이 끔찍한 폭군에게 항복하지도 않을 것이다. 항복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 뿐만 아니라 왕이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너와 맞서 싸우겠다.” 

 

하나님이 우리가 디아불루스에 빼앗기고 덫에 빠져 버린 맨소울처럼 되지 않도록 싸우고 계십니다. 우리도 자유의지의 말처럼 맞서 싸워야 합니다. 절대 항복하지 않고 계속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증스러운 것을 혐오하고 미워하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내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 악(evil)’ 이라는 단어를 가만히 보면 ‘ 산다(live)’ 라는 단어를 거꾸로 해놓은 것입니다. 악이란 삶을 거스르는 것이고, 악을 거슬러야 진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증스러운 것을 혐오하고 미워하라”는 것은 선한 하나님이 내리신 선한 명령입니다. 사람을 혐오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미워하라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고

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흩어 버리는 사람이다”(마12:30).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우리는 악에 속해 살든지 아니면 악을 미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찢을 때와 꿰맬 때가 있습니다”(3:7).이 말씀을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은 찢으신 것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찢으시는 것입니다. 야곱도 가정을 떠나 찢겨졌지만 그로 인해 벧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택하신 것은 열방으로부터 찢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찢으신 것은 그로 인해 모든 열방이 복을 받는 꿰맬 때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거룩이란 ‘ 분리되었다’ 는 뜻입니다. 찢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철저히 찢어져야 세상의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악을 철저히 미워하는 찢어짐이 있어야 세상을 구원하는 축복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철저히 찢으신 것은 온 세상의 복의 통로로 꿰매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것은 철저히 찢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꿰매는 사역에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악을 미워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악을 미워하시는 까닭은 죄가 하나님을 슬프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멸망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를 회복 불능상태로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싸구려 책에 잉크가 떨어지고 물에 빠지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국보급 고문서에 잉크가 떨어져 못쓰게 되고, 물에 빠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을 귀하게 보면 볼수록 죄를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죄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을 무가치하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악에 대해서 미워하시고 악에 속한 이들을 멸망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를 무척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에 빠지지 않고, 영적인 승리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로 결단을 해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악에 대항하여 싸우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권세를 사용한다면 우리에게 영적 승리가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