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십계명 (신명기 5:6~21)

새벽지기1 2018. 7. 24. 07:58


“십계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령입니다.

축복의 계명, 생명을 누리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사회에 법이 필요한 이유는 양심이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법을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도 양심의 기능이 회복되지 않으면 또 다른 죄가 만들어지고, 그 죄를 막는 또 다른 법이 만들어집니다. 법전만 두꺼워질 뿐입니다. 법의 진정한 목적은 처벌이 아니라 양심의 기능을 회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질서를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시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법조문을 주시며 명령만 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양심이 회복될 수 있도록 충분한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의 은혜입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그 종으로 있었던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다”(6절).

  

율법을 설명하기 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그들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의 은혜입니다. 

 

세 가지 해석원리 

 

율법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주시기 전에 은혜를 먼저 주셨습니다. 진리를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얻은 자이니 진리 위에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먼저 베풀어주시고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합당한 진리를 주신 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모든 율법의 요약입니다. 성경 전체 이야기가 십계명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 많은 법들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의식법이고, 제사법, 시민법 등 수많은 법이 있습니다. 핵심적인 것은 도덕법입니다.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도덕법은 문화가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도 영속적입니다. 제사나 의식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의미가 성취되었지만 도덕법은 여전히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십계명을 이해한 자는 성경전체를 이해한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십계명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중요한 세가지 해석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 십계명의 대부분은 하지 말라는 부정명령어입니다. “하라”와 “하지 말라”는 말은 정반대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가르친 계명은 보이지 않는 우상을 만들지 않으면 될 뿐만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라는 긍정문으로도 해석해야 합니다. 금지명령은 반대의 명령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긍정명령도 그와 반대되는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해석의 원리를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둘째, 십계명은 외형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마음의 동기까지 금하는 명령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런 원리로 산상수훈에서 십계명을 해석해주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살인이라는 외형적인 행위만 금하신 것이 아니라 살인을 유발하는 마음속 동기까지도 제한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해석원리입니다. 율법을 주신 분은영이신 하나님이시기에 육체의 법을 주신 것뿐만 아니라 영혼의 법도 주셨습니다. 

 

셋째,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우선입니다. 예를 들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을 있게 하지 말라”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공경하기 위해서 부모님이 섬기는 우상을 함께 섬긴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인간관계에서의 명령이 상치되고 대립될 때는 하나님의 계명이 더 큰 권위를 가진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또한 십계명은 놀라울 정도로 간결하고 단순합니다. 해석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쉽고 분명한 언어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너희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있게 하지말라”(7절). 

 

첫 번째 계명입니다. 진정한 신은 오직 한분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각이나 역사에서 만들어진 신은 진정한 신이 아닙니다. 진정한 신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뿐입니다. 인간과 세상을 만드시고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분입니다. 그 밖의 신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있게 하지 말라”는 명령은 마음을 다하여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너희는 저 위 하늘이나 저 아래 땅이나 땅밑 물속에 있는 어떤 형상으로도 우상을 만들지 말라.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지도 말고 경배하지도 말라. 나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니 나를 미워하는 사람의 죄를 갚되 아버지의 죄를 삼사 대 자손에까지 갚고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을 지키는 사람들은 천 대까지 사랑을 베풀 것이다”(8~10절). 

 

두 번째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첫 번째 계명이 확대된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교회에서는 둘째 계명과 첫 번째 계명을 연결하기도 합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말씀이 바로 첫 번째와 두 번째 계명입니다. 우상숭배의 위험은 어디서 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오,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귀로 듣고 순종해야 되는 분인데 우리는 눈으로 형상화해서 보기를 원합니다. 그 욕구에서 우상숭배가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형상화된 모습을 신이라고 규정짓는 것부터 우상숭배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하나님이 아니라 귀로 듣고 순종해야 하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영이시오,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기에 연약한 인간의 눈으로 재현할 수 없습니다. 그 신비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을 귀로 듣고, 말씀을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쓰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함부로쓰는 사람을 죄가 없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11절). 

 

세 번째 계명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 야훼 여호와’ 라는 이름을 ‘아도나이’ 라는 발음으로 바꿔 불렀습니다. 성경을 필사할 때도 ‘ 야훼 여호와’ 라는 이름이 나올 때면 옷을 갈아입고 목욕을 했습니다. 버려진 종이도 함부로 밟지 않는 까닭이 혹시 그 안에 여호와의 이름이 적혀 있을까봐서 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이 행동들이이 계명을 지키는 것일까요. 그런 문자적인 행동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 계명은 어떤 의미입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쓰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면 저절로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부르면 내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성품, 그분의 존재, 그 이름에 합당한 기도제목일 때만 이뤄집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복된 ‘안식’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6일 동안 너희는 노동하고 너희의 모든 일을 하되 7일째 되는 날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니 그날에는 어떤 일도 하지 말라. 너희나 너희 아들딸이나 너희 남종이나 여종이나 너희 소나나귀나 다른 어떤 가축이나 너희 성문 안에있는 이방 사람이나 너희 남종이나 여종이나 너희와 마찬가지로 쉬게 하라. 너희가 이집트땅에서 종이었던 것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쭉 뻗친 팔로 너희를 거기서 이끌어 내셨음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너희에게 명령한 것이다”(12~15절).

  

네 번째 계명입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을 보호하시는 법칙으로 주신 것이 바로 안식의 계명입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다고 했습니다. 일곱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다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시던 모든 일을 마치고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쉬셨기 때문입니다(창2:2~3).

  

쉬셨다, 복주셨다, 거룩하게 하셨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최초로 거룩하게 하신것은 시간입니다. 복되다고 말씀하신 것도 시간입니다. 6일 동안 창조하시면서 “모든 것이좋았더라”고 하셨는데 복되다는 말씀은 쓰지 않으셨습니다. 복되게 하신 것은 일곱째 날입니다. 일곱째 날을 통해 천지창조가 완성 되었습니다. 6일 동안의 창조는 제7일의 안식을 통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는 가장 마지막에 나오지만 하나님의 의도에 있어서는 가장 첫 번째입니다. 

 

하나님이 최초로 거룩하게 하시고, 복되게하신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입니다. 우리는 공간 중심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시간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안식이 무엇입니까. 공간 중심의 세상에서 시간을 기억하고 구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시간 속의 거룩함입니다. 시간이 우리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고치는 것입니다. 안식을 지킴으로써 세상은 나 없이도 잘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세상의 주관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의 주관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일중독은 신성모독죄입니다. 온 세상의 일을 자기가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인데 욕심입니다. 왜 그런 문제에 빠집니까. 시간속의 거룩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은 단지 공간만의 구별이 아니라 시간의 구별입니다.

 

모든 일상을 멈추고, 내려놓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의존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시간속의 거룩함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안식이 우리의 삶을 지켜줍니다.

 

부모공경 하고, 살인, 간음, 도둑질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면 너희가 오래 살 것이고 너희 하나님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준 그 땅에서 잘될 것이다”(16절).다섯 번째 계명입니다. 신체 중에서 우리의 존재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부위가 있습니다. 바로 배꼽입니다. 배꼽은 우리 모두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부모를 통해 왔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배꼽을 보며 우리를 존재하게 하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것이 공경의 시작입니다. 부모공경이 점점 사라지는 시대입니다. ‘ 한 어머니가 다섯 자녀를 기를 수는 있어도 다섯 자녀가 한 어머니를 책임 못진다’ 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반영하는 모습입니다. 옛날에 키가 작고, 손이 떨리고, 눈이 침침해진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식탁에서 음식을 잘 못 드셔서 음식을 잘 흘렸습니다. 함께 사는 며느리가 이것을 참지 못했습니다. 남편에게 같이 식사할 수 없다고 어머니를 부엌 한곳으로 데려가 여물통에서 식사하게 했습니다. 어느 날 이 며느리가 너무 사랑하는 네 살 난 아들이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무엇을 이렇게 만들고 있느냐?”라고 물으니 “나중에 어머니 먹여드릴 여물통을 만들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자녀는 그대로보고 따라합니다. 부모가 조부모를 어떻게 모시고, 대하는것을 보면서 자녀는 미래의 부모를 어떻게 대할지를 배웁니다. 

 

“살인하지 말라”(17절). 여섯째 계명입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살인이란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는 무서운 죄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살인이라는 행위에만 국한하지 않고 살인을 만들어내는 미움과 분노까지 금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긍정으로 바꾸면 어떤 내용입니까. 생명을 사랑하고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귀하게 여긴다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귀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노력해야 합니다. 그 생명들이 죽게 내버려둔다면 여섯째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18절). 일곱 번째 계명입니다. 이 시대는7계명을 가장 무시하는 세대인 것 같습니다. 법원에서조차 간통죄가 법으로 처벌되지 않도록 폐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법은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적인 문제입니다. 배우자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범죄입니다. 예수님은 이 계명을 확대하셨습니다. 마음속에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행위로 나타나지 않았을지라도 마음의 간음 또한 일곱째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이 계명 또한 적극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것들을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소중하고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욕망보다 더 큰 것을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19절). 여덟 번째 계명입니다. 과거 농경사회보다 현대사회에 더 필요한 계명입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훔칠 것도 별로 없고, 훔치는 방법도 단순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는 훔치는 방법이 매우 다양하고 교묘해졌습니다. 이 시대에도 정말 배고파서 도둑질하는 사람이 있지만 배부른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도둑질 합니다.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 하는 도둑질보다 배부른 자들이 더 배부르기 위해서 하는 도둑질이 더 중하고 위험합니다. 이 말씀을 긍정문으로 바꾸면 ‘ 자신이 바라는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바라는 이가 되라’ 입니다. 도둑질이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불의하게 내 것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그 반대는 자신이 원하는것을 다른 사람도 갖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바질이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줘야 하는 것을 주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도둑질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이 없는 것은 그들로부터 도둑질하는 것과 같다는것입니다. 

 

탐하지 말고 나누고, 생명을 누리고 

 

“이웃에게 거짓 증언하지 말라”(20절). 아홉 번째 명령입니다. 일상에서 가장 많이 어기는 계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대화하면서 진실을 왜곡함으로써 거짓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듣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는 것도 이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들은 사실을 왜곡해서 전하는 것도 어기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잘못된 소문에 의해서 어지러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하면서 ‘ 소문실명제’ 를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소식이 들리면 누가 말한 것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소문실명제를 선포했더니 소문이 싹 사라졌습니다. 누가 말했는지를 물어서 그것이 명확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옥한흠 목사님도 제게 “절대로 네가 직접 확인하고 체험한 것이 아니면 일단 믿지 말라”고 조언하셨습니다. 사회의 거짓된 소문, 거짓된 증언이 사라지고 진실만 믿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이웃의 집이나 땅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이웃에게 속한 다른 어떤 것도탐내지 말라”(21절). 

 

열 번째 계명입니다. 탐심에 대한 것입니다. 첫째 계명과 열 번째 계명의 공통점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명령입니다. 탐심은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계명들은 눈에 보입니다. 탐심을 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비밀스런 죄입니다. 너무 비밀스러워서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탐심을 ‘ Mother Sin’이라고 합니다. ‘ 죄를 낳는 죄’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요, 제1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열 가지 계명을 기억하고 이 말씀 앞에 양심을 비추어야 합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양심이 깨어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이 계명은 우리의 삶을 피곤하게 하고, 제한하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이 계명은 우리 삶을 지켜주고 복되게 살도록 인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시는 분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령입니다. 십계명은 축복의 계명입니다. 생명을 누리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십계명을 기억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