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명기 8:1~11)

새벽지기1 2018. 7. 31. 06:46

 

“겸손은 기억을, 기억은 하나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순종하게 하고, 축복 받게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신명기 8장에서는 “기억하라”는 명령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신명기 8장 전체 구조가 “기억하라”는 말씀과 “잊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잊지 말라”는 것은 “기억하라”는 것을 부정형으로 강조하는 것임으로 그것도 “기억하라”는 명령입니다. 신명기 전체에서 “기억하라”는 명령이 20번, “잊지 말라”는 명령이 14번이나 나옵니다. 34번 이상 기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명기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후대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게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역사하심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단순히 정보만 기억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억력은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보를 담아두는 기억력은 시간이 갈수록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하라”는 명령은 예수님의 출생 장소부터 거니시던 루트와 성경에 나온 모든 지명을 기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시내산이 어디 있고, 광야는 어디 있는지를 모두 기억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정보의 기억은 한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출생지가 베들레헴인지 나사렛인지 헷갈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 내용을 기억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혈통으로 이뤄진 혈연공동체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하는 기억공동체입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혈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밟게 되는 미래를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의 뿌리는 과거에 있지만 온전한 기억은 미래를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식물의 뿌리는 땅으로 내려지지만 가지는 위로 향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기억은 감옥이 되지만 건전한 기억은 미래를 여는 창문이 됩니다. 하나님이 기억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역사적 정보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뛰어넘어 과거에 중요하게 일어났던 일들을 현재에도 동일하게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과거의 중요한 일이 현재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미래에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과거에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현재에도 일하시는 하나님, 미래에도 역사하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미래를 기억하는것이 더 중요합니다. ‘ 사전지역’ 이라는 말이있습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소망이라고 합니다. 소망이란 확실히 일어날 일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이 없다면 어떻게 소망할 수 있겠습니까. 기억이 소망을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할 때 우리는 미래를 소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 12장 1절에서 청년들에게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뭘까요. 진정한 미래를 열어가지 못하는 까닭이 창조자에 대한 기억이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있으면 미래는 열립니다.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됩니다. 꿈을 가져라 혹은 미래를 품으라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기억 속에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다면 소망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다음 세대들에게 미래에 대한 꿈을 꾸라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올바르지 않은 기억을 가진 사람이 꿈을 꾸면 그것은 헛된 미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환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기억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래를 꿈꾸라는 권면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우리는 기억보다 큰 존재

 

성 어거스틴은 <고백론>에서 기억에 대한 많은 고백을 했습니다. 고백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기억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는 기억이자기 자신과 동일하게 된다면서 때로는 괴로워하고 무서워하며 놀라워했습니다. 자기의 기억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아야 고백할 수 있고 회개를 할 수 있는데 자기 기억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지 못해서 고백하지 못한 수많은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라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에 붙잡혀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기억이라는 무서운 현실을 초월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나의 참 생명이 되신 하나님, 그러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나는 기억이라고 일컫는 이 힘을 초월하고자 합니다. 나는 이 기억을 초월하여 사랑스러운 빛이 되신 당신에게 다다르고자 합니다. 나는 기억이라고 일컫는이 힘을 초월하여 당신과 접할 수 있는 곳에서 당신을 접하고 당신을 붙들 수 있는 곳에서 당신을 붙들려고 합니다.” 

 

성 어거스틴이 기억을 초월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기억을 초월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우리는 기억을 형성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내 머리 속에 기억 되어 있는 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면 기억이 새로워지고, 기억을 형성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보다 큰 존재입니다. 살아온 기억만으로 인생이 결정된다면 과거의 노예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기억의 노예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억보다 큰 존재입니다. 우리는 기억을 초월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과거의 아팠던 상처, 감옥처럼 붙잡고 있는 기억을 초월해서 새로운 미래를 열수 있습니다. 그 기억이 미래를 여는 창문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 기억한다면 과거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여러분은 좋은 것만 기억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나쁜 것만 취사선택해서 기억합니다. 선한 일을 기억하기보다 부정적인 것을 선택해서 기억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면 새로운 기억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베푸셨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통이라고 여겼던 일들도 뒤집어 보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잊고, 기억할 것을 기억하면 우리의 기억창고가 새롭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신명기 8장에서 하나님이 기억하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너희를 어떻게 이끄셨는지, 어떻게 너희를낮추시고 너희를 시험해 너희 마음에 무엇이있는지, 너희가 그분의 명령을 지키고 있는지 아닌지 알려고 하셨음을 기억하라.”(2절) 광야는 크고 두려운 처벌의 장소입니다. 40년 동안 그들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징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광야를 학교로 만들었습니다. 학교란 졸업할 때가 있습니다. 계속 머물러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평생 가르치는 분도 있지만 그런 의미의 학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광야의 학교는 시험하고 훈련하고 연단시키는 장소입니다. 광야에서 두 가지를 드러냅니다. 

 

하나는 백성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광야는 우리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겉마음이 아니라 속마음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고 있는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것을의지하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의 길을 걷게 하고, 징벌을 주시면서 기뻐하시는 분이아닙니다. 광야의 여정 속에 우리와 동행하시며 함께 고통 받고, 거니시며, 공급하시고,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품는 것처럼 동행하십니다.

 

“그분이 너희를 낮추시고 배고프게 하셔서 너희나 너희 조상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만나로 먹이신 것은

너희로 겸손하게 해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3절). 

 

또 광야는 겸손을 배우는 자리입니다. 겸손은 배고프면서 배웁니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배웁니다.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겸손을 배웁니다. 광야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어디서 먹을 것을 구해서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땅입니다. 하나님은 그 땅에서 그들을 먹이심으로 겸손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두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욕심을 부려서 거두면 썩어버렸습니다. 안식일 전에 거둔 것은 하루가 지나도 썩지 않았습니다. 만나를 통해 하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삶이 주어진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사탄이 “돌로 빵을 만들어 먹으라”고 했습니다. 이 시험은 예수님에게 배고픔을 극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명하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치셨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 백성들을 교육하셨고, 사람이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어령 선생님께서 쓰신 책 <빵으로만 살 수 없다>는 말씀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한 아주 재미있는 책입니다. 그 책에 양식을 거두기에도 넉넉하지 않은 땅에 꽃을 심는 사람이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허기진 배를 달래면서도 시를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사람들이 심술궂게 묻습니다. 

 

“꽃이 밥 먹여 주냐? 시가 밥 먹여 주냐?”

그렇게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럼 밥 먹고 나서 뭐할래?” 

 

그 사람들에게 더 시급한 것은 육체의 배고픔보다 영혼의 배고픔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책에 “눈물과 함께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모른다”는 괴테의 말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괴테의 소설에 나오는 빵은 사실 인생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된 것입니다. “눈물과 함께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괴로움으로 밤마다 침대 머리에 앉아 흐느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당신들은 모를 것이요. 하늘의 힘.” 

 

괴테가 말하는 눈물과 함께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모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늘의 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눈물로 빵을 먹은 광야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힘을 체험하게 됩니다. 겸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힘을 체험합니다. 고난 속에서 눈물 흘리며 빵을 먹을 때 하나님의 힘을 체험하게 됩니다. 문제는 눈물 흘리며 빵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힘을 체험했어도 배가 부르면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배고플 때는 겸손했지만 배부를 때는 교만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린 수많은 사례들이 있습니다. 

 

멸망의 사이클과 축복의 사이클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배불리 먹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열 두 광주리나 담을 수 있는 음식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버리는 것이 없게 담으라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쓰레기를 줄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배가 고플 때 그들은 가능성이 있었지만 배가 부르고 나니까 열두 광주리나 되는 엄청난 가능성을 버렸습니다. 오병이어로 수천 명이 먹었다면 열 두 광주리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하는 인생이 중요합니다. 어느 통계를 보니까 북미대륙에서 버려지는 음식 쓰레기만 모아도 아프리카 모든 대륙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오병이어 사건 이후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왜 따라다녔냐면 예수님만 있으면 굶어죽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요 6:26). 

 

그들이 찾은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배부름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의 배부름을 추구한 것입니다. 신앙은 배부름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배부름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배부름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배부르면 하나님을 잊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먹고 배부를 때 그분이 너희에게 주신 그 땅을 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라. 너희는 삼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주는 그분의 명령과 그분의 법도와 그분의 규례를 지키지 못해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잊는 일이 없도록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먹고 배부를 때, 너희가 좋은 집을 짓고 정착할 때 너희 소들과 양들이 많아지고 너희 은과 금이 많아지며 너희가 가진 모든 것이 불어날 때 너희 마음이 교만해져 이집트에서, 그 종살이 하던 땅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잊게 될 것이다”(10~14절). 오늘 이 시대, 이 나라, 이 민족의 위기는 잊은 것입니다. 

 

불과 수십 년 전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였는지를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힘과 능력과 은혜로 배부르게 된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가난은 이겼지만 부요함은 이기지 못했습니다. 배부름이 교만을 가져오고, 교만이 망각을 가져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망각은 착각을 가져옵니다. “너희가 스스로 ‘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이런 부를 얻게 됐다’ 고 말할지 모른다.”(17절)

 

여러분, 이 착각이 비극을 가져옵니다. 어떤 비극입니까?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이는 너희에게 재산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그분의 언약을 오늘날과 같이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만약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잊고 다른 신들을 따라 숭배하고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다짐하는데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18~19절). 

 

여러분, 배부름은 교만을 가져오고, 교만은 망각을 가져오고, 망각은 착각을 가져오고, 착각은 우상숭배를 가져오고,우상숭배는 멸망을 가져옵니다. 이 멸망의 사이클에 들어가지 않으려면 어디서 끊어야 합니까. 배부를 때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축복의 사이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때로 우리에게 광야의 배고픔을 주시지만, 그 배고픔이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겸손은 기억을 가져오고, 기억은 하나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고, 축복을 받게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배부를지라도 겸손한 것입니다.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땅에서 너희는 부족함 없이 빵을 먹을 것이며 너희가 그 안에서 아무것도 모자라는 것이 없을 것이다”(9절). 모자람 없이, 부족함 없이, 우리에게 부어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축복의 사이클을 유지하려면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배고플 때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배부를 때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 삶의 비결입니다. 미래를 열어가는 비결입니다. 세상에 속한 기억, 우리를 아프게 하는 기억은 내려놓고 하나님을 기억할 때 새로운 삶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우리의 기억을 새롭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우리를 배부르게 하셨는데

우리는 교만했습니다. 망각했고, 착각했습니다.

다시 겸손을 회복하는 저희가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며 겸손하게

찬양하며 순종하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