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여호와를 경외하고 섬기라 (신명기 10:12~22)

새벽지기1 2018. 8. 1. 12:35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십시오.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섬기십시오.” 

 

어떤 노래든지 반복되는 주제음이 있습니다. 신명기 말씀에 나타난 주제음은 ‘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입니다. 이 말씀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신명기가 기록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말씀을 통해서 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는지를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진정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삶을 통제하시고, 인도하시고, 다스리실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를 가지고 계신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진정한 하나님이신 그분께 우리는 모든 것을 다하여 복종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둘째,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하여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까닭은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필요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에 빠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쫓아다니시면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당신을 신랑이라고 표현하시고, 우리를 신부라고 표현하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할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먼저 마음을 다하여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 분이라고 속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주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사랑하느냐 

 

“이스라엘아, 지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로 걸어가며 그분을 사랑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온 마음과 온 영혼으로 섬기며 내가 오늘 너희가 잘 되라고 주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 아니냐?”(12~13절). 

 

우리가 어떤 것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가치 없는 것을 사랑하면 우리의 삶이 가치 없게 됩니다. 반대로 소중한 것을 사랑하면 우리의 삶이 소중한 것이 됩니다. 사랑을 다른 말로 정의하면 ‘ 자신의 모든 정서를 다하여 최우선으로 몰입하는 애착심’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정서가 어떤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 무엇에 몰입되어 있는지, 무엇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가 우리의 사랑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정서가 담겨있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값진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고백할지라도 우리 마음의 정서가 담겨있지 않으면 받으시지 않습니다. 사탄도 우리 마음의 정서를 사로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있지 않습니다”(요일 2:15). 

 

이 말씀은 우리 마음속에 어떤 사랑이 존재하는지를 질문합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를 마음을 다하여, 모든 정서를 다하여 사랑하는지를 묻습니다. 여러분, 영적세계에는 중립지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 이 세상’ 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 말씀을 적용하는 세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첫째, 도피적 금욕주의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세계 그 자체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담을 쌓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추구합니다. 수도원같이 세상과 담을 쌓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회와 벽을 쌓는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 세상에 존재하는 죄악이 있습니다. 중세에 수많은 수도원들이 생겨났지만 그 수도원의 타락과 부패가 말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 수도원이 세워진다고 해서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흐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종교적 금욕주의입니다. 세상을 어떤 종교적 울타리 밖의 세계로 해석한 것입니다. 종교적 규율을 잘 지키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그 규율을 지키는 일에 실패하면 세상을 사랑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올바른 관점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셋째, 세상속의 금욕주의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우리가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로 보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욕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정립해가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해서는 안되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덜 사랑해야 할 존재를 더 사랑하지 않고 더 사랑해야할 존재를 덜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더욱 사랑하고, 더욱 경외하고 

 

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가장 사랑해야 할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정서들이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덜 사랑해야 할 것을 덜 사랑하게 됩니다. 더 사랑해야 할 것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의 우선순위가 올바른 우선순위로 정립 됩니다. 주님을 24시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을 추구할 때 놀랍게도 종교적으로 집착된 삶이 아니라 너무나 자유롭고 행복한 삶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왜냐하면 삶의 모든 욕구의 우선순위가 제자리를 찾아가기 때문입니다.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 하고싶은 대로 하십시오.”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이것은 당신 마음대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런 마음의 상태를 가진 사람이라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정말 멋진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정말 멋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면 하나님과 친밀해집니다.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해야 함도 가르쳐주십니다.

 

사람은 친밀해질수록 조심성이 없어집니다. 가족간에 다투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서로 사랑해서 친밀한데 그 친밀함 속에 경외함이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도 서로 경외하고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사랑과 함께 경외심을 가져야 사랑이 풍성해지고 유지됩니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를 경외합니다. 친밀한 관계일수록 서로 경외함을 가지고 더욱 성숙한 사랑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그러므로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더 이상 목이 곧은 사람들이 되지 말라(신10:16).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친밀함을 누리는 동시에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겨야 합니다.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함과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란 하나님이 행하시는 대로 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대로 관심을 가지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악한 일을 두려워하면 악한 일에 타협하며 살게 됩니다. 선한 이를 두려워하면 선한 일에 힘쓰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을 닮게 되어있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이시며 위대한 하나님이시며 강력하고 두려운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사람을 겉모양으로 보지 않으시고 뇌물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분은 고아와 과부의 사정을 변호하시고 이방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며 사랑하시는 분이다”(17~18절). 

 

‘ 신의 신, 주의 주’ 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최상급의 표현입니다. 유일한 신이시며 가장 높으신 주님입니다. 위대한 하나님, 강력하고 두려운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고 행하시는 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의 사정을 변호하시고, 이방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그들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 높고, 강하고, 위대하신 분이 관심을 가지신 대상은 가장 연약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입니다.우리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한 사람 한사람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경외가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경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신 일에 우리가 동일한 관심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싫어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입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을 우리도 함께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경외입니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라면 두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 우리의 존재를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이웃을 사랑하라고 할 때는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자신보다 더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고, 내 모든 것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떤 분들은 내 몸과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 내 몸과 같이’ 를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그래서 자기만 사랑합니다.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지 않느냐는 논리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지나칠 정도로 자기사랑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먼저 사랑해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논리로 자기에 대한 사랑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자기를 사랑하는 방식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어떤 방식으로 사랑합니까. 스스로의 잘못된 행동을 분명히 싫어합니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까지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내가 그런 행동을 했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지은 잘못과 죄를 안타까워합니다. 그렇다고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은근히 자기 자신을 싫어합니다. 자기 자신의 잘못된 모습과 부족한 부분을 싫어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사랑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동자체를 싫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자체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호감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 이방인들을 사랑하라

  

“그러니 너희는 이방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이는 너희 자신도 이집트에서 이방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19절). 너희 자신이 이방 사람이었을 때로 돌아가서 이방인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들은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관계는 ‘ Give and take’ 입니다.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줌으로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나에게 돌아올 것이 없는 대상들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실시하고 있는 많은 사역들도 돌아올 것이 없는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큰 관심을 기울이고 계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고난주간에 우리는 자발적으로 한 끼든 두 끼든 금식해서 그 식사비를 헌금으로 드릴 것입니다. 그 헌금은 난민들을 돕는데 사용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라면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처럼 우리도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 수많은 고아들, 노숙인들, 탈북민들,이주노동자, 난민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이주민들과 함께 살아가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더 많아질것입니다. 그들을 어떻게 맞이하고, 그들에게 어떻게 주님의 사랑을 전해주느냐가 우리나라의 미래를 결정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이주자들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했기 때문에 큰 혼란이 일어났고 미래를 향해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앞으로 다가올 위기가 있다면 이주민들과의 갈등입니다. 그들을 사랑해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용하려고 맞이해서는 안 됩니다. 저출산 시대에 필요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많은 이주자들이 올 것입니다. 그들의 노동력만 이용하고 그들의진정한 삶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우리나라에 큰 위기가 닥쳐올 수 있습니다. 앞으로 수백만의 이주민들이 더 올 것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기회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세상을 변화시키는 귀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4월 26일 서서평 선교사님의 일대기를 조명한 영화가 개봉하고, 두란노서원에서는 아주 오래전 서서평 선교사님이 세운 주일학교에서 자란 백춘성 장로님이 서서평 선교사님의 일대기를 쓴 책을 다시 내기로 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 너무 감동적입니다. 서서평 선교사님은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열 네 명의 과부를 스스로 입양해서 키우고,과부들을 먹여 살리면서 영양실조에 걸리기까지 조선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조선 간호협회도 세웠습니다. 대한간호협회의 전신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사랑한 그분이야말로 신명기의 말씀을 진정으로 실천한 분이십니다. 이런 분을 우리가 기억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게으른 일입니까. 기억함으로써 우리의 삶에 작은 변화가 일어나게 될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서서평 선교사님을 늘 품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과 이웃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그것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아주 좋은 전도의 기회입니다. 한국 기독교가 회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 고아와 과부를 사랑하라, 이방인들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마음을 다해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이 관심 가지시고 있는 이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 섬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