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목회단상

우리의 대화가 소통에 이르지 못하는 까닭

새벽지기1 2018. 6. 8. 21:25


우리는 보통 대화를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한다.

옳다. 대화는 최고의 의사소통 방식이다.

인간은 글, 몸짓, 표정, 그림, 음율, 눈빛 등으로도 의사소통을 하지만

가장 일상적이고 보편적이며 효과적인 의사소통 방식은 단연 대화다.

그런데 우리의 대화가 곧 의사소통일까?

우리는 과연 대화로서 의사소통을 하고 있을까?

서로 마주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으로써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소통하고 있을까?

솔직히 그럴 때도 있지만 그러지 않을 때도 적지 않다.

대화의 성찬 속에서 의사소통의 빈곤을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며,

소통을 위해 마련된 모임에서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확인하게 될 때도 적지 않다.

솔직히 우리 모두는 소통에 목말라 있다.

소통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원하는 소통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왜 우리의 대화는 소통에 이르지 못하는 걸까?

 

첫째, 대화의 기술, 대화의 문화가 미숙해서다.

사실 소통의 성패는 말을 잘 하는데 달려있지 않고 상대의 말을 잘 듣는데 달려있다.

들음이 말에 앞서고 들음이 말보다 중시될 때 비로소 소통의 물꼬가 열린다.

그런데 우리의 대화 문화에는 들음의 미덕이 부족하다.

말하기의 미덕도 턱없이 부족하지만 들음의 미덕은 더더욱 부족하다.

우리가 대화하는 장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상대의 말에 정성껏 귀 기울이는 일이 거의 없다.

대부분은 자기입장과 생각을 강변하고, 자기감정과 억울함을 쏟아내기에 급급하다.

지레짐작으로 넘겨짚은 채 속단을 늘어놓기도 하고,

말꼬리를 트집 잡아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속 터놓고 이야기하자며 대화를 시도했다가 중간에 싸움으로 번지는 일도 다반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화를 두려워하 자들, 대화를 기피하는 자들이 은근히 많다.

심지어 대화란 ‘대놓고 화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아냥댈 만큼 

우리의 대화 기술, 우리의 대화 문화는 미숙하기 그지없다.

 

둘째, 사람이라는 존재가 심히 오묘하고 복잡해서다.

한 사람은 단지 한 사람이 아니다. 한 사람은 곧 하나의 세계다.

각 사람 안에는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세계도 있지만

누구와도 공유하기 어려운 자기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세계도 있다.

아무리 사랑하는 남녀라 해도, 50년을 함께 동고동락한 부부라 해도,

심지어 일란성 쌍둥이라 해도,

서로가 공유하기 어려운 자기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세계가 있다.

우리는 이렇게 고유하고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를 가리켜 ‘자아’라 한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언행은 단지 한 사람의 언행이 아니다.

한 사람의 말 한 마디, 몸짓 하나는 곧 그 사람의 세계 기표다.

‘사랑’이라는 말만 해도 그렇다.

백 사람이 ‘사랑’을 말해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의미와 뉘앙스가 조금씩 다르다.

같은 말이라도 말하는 사람의 세계(자아)에 따라 말의 의미와 뉘앙스가 다르고,

같은 말이라도 듣는 사람의 세계(자아)에 따라 이해와 해석이 다르다.

옳다. 한 사람의 언행은 그 사람의 세계 기표다.

때문에 한 사람의 언행을 제대로 읽어내기란 무척 어렵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세계(자아)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의 언행을 제대로 읽어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사람은 사실 자기의 세계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산다.

사람은 놀랍게도 자기의 세계(자아)에 무지하다.

하물며 타인의 세계는 어떻겠는가?

대화란 고작 타자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바늘구멍에 불과한데,

그 작은 바늘구멍으로 타인의 고유하고 오묘하고 복잡한 세계를 무슨 수로 읽어내겠는가?

소통에 이르기보다는 오해와 왜곡과 독단과 지레짐작으로

굴러 떨어지기 십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여, 우리 모두는 소통에 목말라 하고 있다.

소통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원하는 소통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고,

수많은 대화를 시도하면서도 소통에 이르지 못하는 좌절을 반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