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오늘은 오순절 성신 강림을 기념하는 주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이 주일은 세계적으로 우리 기독교 세계에서 어린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어린이를 중심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꽃 주일이라는 이름이 있는 주일이올시다.
우리 자연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꽃인 줄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마 어린이일 것입니다. 그리해서 오늘은 어린이 주일, 꽃 주일이라고 합니다.
꽃은 작든지 크든지 다 아름답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린이들은 잘생겼던지 못생겼던지 동양의 어린이나 서양의 어린이나 또 저 아프리카의 어린이나 우리는 다 아름답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어린이 주일을 당해서 예수 님께서 어떻게 어린이를 대했으며 또 어린이들을 중심해서 우리에게 - 어떤 교훈을 주셨는지 생각해서 우리가 은혜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마가 10장 13-16절에 있는 말씀은 어머니들이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께서 한번 만져 주시기를 원하여서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오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 그 이유는 별로 적혀 있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큰 일에 바쁘신 데 어른들만 가르치기도 바쁘신 데 어떻게 어린이들까지 이렇게 분주하게 하는가? 생각해서 꾸짖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듣고 분히 여기셔서『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면서『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이와 같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며 아이들을 자기에게 다 오게 하고 어린이들을 자기가 친히 안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해 주시면서 다 복을 빌어 주시고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너희들이 하나님 나라 받들기를 이 어린이들과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느니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생활 가운데 한 간단한 일화이고 간단한 교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어린이에 대한 이런 태도, 또한 이와 같은 교훈이 세계 역사를 통해 준 영향은 심히 큰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어린이들에게 이런 태도를 취하셨고 또 어린이를 중심으로 하는 귀한 교훈을 주셨으므로 어린이들이 이 세상에 있어서 사회적 지위와 법률적 권리 이런 모든 방면에 큰 영향을 준 것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여러 나라, 여러 사회, 여러 문명 가운데서 어린이들에 대한 태도를 찾아보면 매우 유감스러운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가장 오랜 문명을 찾아볼 때 옛날 오 천년 전 애굽의 문명을 기억하게 됩니다. 애굽이 5천 년 전에 각방면에 문명이 발전했던 것을 우리가 찬탄(讚嘆)해 마지않는 점이 많습니다. 그렇지마는 그 사회에서 어린이를 어떻게 대했는가는 출애굽기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애굽 애들은 잘 대했겠지만 그들의 종노릇하는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은 여자를 낳으면 그냥 살려두었지만 남자를 낳으면 곧 나일강에 던지라는 법령을 내린 일도 있습니다.
애굽을 문명한 사회라고 하였지만 어린이의 지위가 이런 지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서양 문화 가운데 문명한 사회를 생각하면 헬라 문화를 기억하게 됩니다. 지금부터 4천년 전에 어떻게 철학과 예술이 발전되었고 과학이 발전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다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그 나라 사회에 들어가 본지라도 여기 헬라의 여러 나라 중에 스팔타라고 하는 작은 나라는 아예 아이들을 낳으면 국가에서 검사관을 보내서 커서 좋은 운동가나 군인이 될 수 있으면 그 애는 그냥 기르라 하고 그렇지 않고 뼈가 약하고 악질로 생겨서 그 애가 커서 국가의 부담이 될 것 같으면 그 애는 기르지 않고 버리라고 했습니다. 만일 영국의 유명한 아이작 뉴톤 같은 사람이 스팔타 같은 나라에 났다고 하면 나자마자 내다버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팔삭둥이올시다. 멘 처음 낳은 다음에는 뼈가 채 굳기도 못하고 약한 것을『이것이 다음에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하면서 미심 길로 길렀습니다. 길렀더니 제일 머리가 좋은 위대한 과학자가 되었습니다.
옛날 헬라 문화를 본지라도 헬라 사회에 있어서 어린이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대우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동양 5천년 문화를 가끔 이야기 하지만 기독교 문화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동양에 있어서 어린이의 생명이란 것도 이보다 더 귀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 동양에 있어서 어린이의 생명은 부모에게 절대의 권리가 있어서 사실 부모는 자녀의 생사에 대한 권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옛날은 부모가 자기 아이를 죽이면 그것이 법률상 죄가 되지 않고 더욱이 노예의 아들이나 노예의 어린이들은 짐승의 새끼와 같이 어릴 때부터 팔고 사고했습니다. 이렇게 말하자면 어린이의 생명이 천한 대우를 받은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를 볼 것이면 기독교 문화가 들어왔고 현대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법률적으로 어린이의 생명이 보호를 받는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가 사는 사회를 보면 서울 안에서 거의 매일 어린이를 내다버리는 영아 유기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어떻게 어린이가 났던지 그것은 말할 것 없고 우리 사회의 일반 사상이 어린이의 생명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갔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이 세상에 예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오셔서 아이들을 귀히 여기시고 아이를 존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면서 오히려 어린이에게 배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어린이도 그 생명에 존귀성을 갖게 되었고 점차 기독교 문화가 보급됨으로써 어린이의 생명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게 되고 법률적으로도 인정받게 된 것을 생각할 때에 이 간단한 일화와 교훈을 우리가 소흘히 볼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어떤 나라던 지 아무리 피 덩어리지만 사람의 생명인 이상에 법률상 보호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어린이를 죽였을지라도 살인죄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문명한 나라에는 소위 아동 학대 방지 법령이 있습니다. 어린이가 자기 아이라고 까닭 없이 학대하면 법률적으로 제재를 하게 됩니다. 공장 같은 곳에서 아이들에게 중한 노동을 시키지 못하게 합니다. 내 어린이든지 남의 어린이든지 어린이를 학대하면 법률적으로 이것을 제재하는 아동 학대 방지법안이 대체로 문명한 나라는 성립이 된 것입니다. 이 원천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화와 교훈에서 왔다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한번 더 깊이 연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은 배경을 마음속에 생각하시면서 이 일화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만 저 달라고 예수님께 많이 데려 왔습니다. 제자들은 분주한데 어린이들을 데려 온다고 꾸짖어 돌려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 광경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분히 여기셨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분히 여기셨다는 말씀이 자주 나타나지 아니합니다. 보통 우리로서는 분을 낼 만한 자리에 예수 님은 분을 내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동네를 지나갈 때에 날이 어두워서 하루 저녁 자자고 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사람들에게 편견을 가지고 잘 자리가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 때에 요한과 야고보는 분을 냈습니다.『이런 법이 있습니까? 하늘로부터 불을 내립시다』분 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예수님은 분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렇지 말라고 요한 과 야고보를 책망하고 다른 동리로 갔습니다.
악한 무리들이 예수를 붙잡고 침 벴으면서 손으로 때리고 갖은 능욕을 다 당하시면 서도 예수께서 분내지 않았습니다. 한마디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그러하니 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보통사람이 분낼 만한 때 예수님은 분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는 예수께서 분 냈습니다. 어떤 안식일 날에 예수께서 어떤 회당에 예배 보러 가서 보니까 어떤 손 마른 사람이 와 있지 않겠습니까? 그 손 마른 사람은 안식일이라도 내 손 마른 것을 고쳐 주면 좋겠다고 기대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예수님도 그 아픈 사람의 병을 고칠 마음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자리에 임석(臨席) 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냉혹한 율법주의에 사로잡혀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나 안 고치나 안식일을 범하는가 아니하는가 그 병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생각은 하나도 없고 냉혹한 율법주의에 사로 잡혀서 남의 허물만 잡아내려는 그런 기분 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광경을 보고 노해서 무리를 둘러 보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분 내신 것은 아이들이 자기에게 오려고 하는 것을 아무리 자기 사랑하는 제자들이라도 이것을 막을 때에 여기서 의분을 내시고 분히 여기시고 오히려 제자들을 책망했습니다. 왜 예수께서 이렇게 사랑하는 제자들이라도 책망했습니까? 제자들이 의식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라도 어린이를 경시하는 태도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가볍게 봅니다. 어른들이 대단히 분주한데 아이들이 왜 와서 덤비느냐 그런 태도를 흔히 가지기 쉽습니다.
예수께서는 아이들을 경시하는 그런 태도를 볼 때에 분히 여겼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도 어린이를 경시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교회에서도 아이들을 경시해서 유년주일학교나 이런 방면을 경하게 여기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 사회와 국가에서도 어린이들을 경시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까지 제자들과 같아서 어린이를 경시하기 매우 쉽습니다. 특별히 계집애들은 더합니다. 그래서 어떤 할머니들에게『할머니 어린이들 몇이나 있습니까?』하고 물으면『아이들 그저 다섯 이지만 쓸 것은 둘 밖에 없어요』쓸 것은 무엇이고 못 쓸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예수 믿는 할머니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태도를 보세요.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면 어떻게 사시겠는가 분명히 깨달으세요.
제자들이 아이들 오는 것을 막는다고 분히 여기셔서 책망했습니다. 그런 때에 예수께서 어떻게 여기시겠습니까? 분히 여기실 것입니다. 어린이들 경시하는 태도를 버려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적은 일 같지마는 제자들처럼 아직까지 어린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요 예수님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아무리 어린이들이라도 예수께 와야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어른들을 잘 인도해서 예수께 와서 회개하고 새 사람되는 것 매우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야 복을 받는 것처럼 어린이들도 예수님 앞에 나와야 복을 받습니다. 어른들을 한 분 인도해서 예수님 앞에 나오면 물론 그 남은 여생을 아름다운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종은 일을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내려가서 어렸을 적이 어린이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서 어린 때부터 바른 마음과 습관과 인격을 양성해서 일생동안 하나님을 공경하고 깨끗한 생활을 하면서 일생을 교회와 국가를 위해서 일하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어린이도 예수님께 나와야 되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른들이 예배당에 오는 것도 귀하지마는 어린이들도 꼭 어떻든지 잘 인도해서 주일학교로 나와서 예수님의 축복을 받게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은 이 사정을 몰랐습니다. 또한 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심정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어린이를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시고 예수님은 아이 적부터 축복하시기를 원하셨는가 하는 간절한 심정을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이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느니라』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어린이라고 우리가 절대 경시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것이고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를 경시하지 맙시다.
오늘 꽃 주일을 당해서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생각해서 오늘날 신문지상에 먹을 것이 없어서, 점심밥이 없어서 학교에 못 오는 어린이가 많다는 기사를 읽을 때, 혹은 서울이나 부산에서 깡통을 들고 얻어먹으러 다니는 것을 볼 때 우리가 이 광경을 보고 어떻게 느낍니까? 우리가 꽃 주일을 당해서 여기 대한 깊은 느낌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분히 여기셔서 제자들을 책망한 후에는 어린이를 자기 품에 안고 그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해서 어린이의 장래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어린이를 이와 같이 사랑했습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좀더 배워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집안 아이는 사랑합니다. 그러나 모든 아이가 예수께는 꼭 같이 귀합니다.
예수께서 어떤 아이든지 귀하고 사랑합니다. 일찍부터 동양의 성현도 말하기를 유오유하여 이급인지유(幼吾幼 以及人之幼)하라고 하였습니다. 내 집안에 어린이들에게 하는 심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어린이들에게 미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아이가 귀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아이들도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이들을 어떻게 대하여 어린이를 위해서 어떤 시설이 있는가 법률이 있는가 그것은 그 사회 문화의 한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1·4후퇴 때에 중공군이 갑자기 나오면서 유엔군이 황급히 후퇴할 때에 매우 분주하였습니다. 그러나 미 제5공군에서 고아를 비행기 여러 대를 내서 먼저 제주도로 피난시켰습니다. 이 배후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그 공군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종군 목사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와 같은 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서 이 일이 있은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도 신문에서 읽었겠지만 전쟁의 부산물(副産物)로 여러 혼혈아가 생겼습니다. 이 혼혈아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원치 않고 일방적으로 학교에서도 원치 아니하는 이 생명을 불쌍히 여겨서 미국에서 홀트 라고 하는 농사짓는 사람이 자기의 전 재산을 바쳐서 비행기를 대절해 나와 이 혼혈아를 데려다 지금 미국에서 기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정신은 오직 성경을 보지 않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꽃 주일을 당해서 어떤 생명이던지 귀하다고 하는 것을 좀더 깊이 인식하여야 되겠습니다. 우리 한국에 고아원이 있어서 고아들을 보호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이 외국 사람의 원조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귀하다고 하는 것을 철저히 이해한다면 아무리 한국에 고아가 많다고 하지만 우리의 힘으로 기를 수 있을 줄 압니다. 그 다음 어린이를 중심으로 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하늘 나라에 있는 이가 어린이들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어린이들처럼 하늘 나라를 받들지 아니하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의 성품 가운에 하늘 나라에 들어갈 성품을 발견했습니다.
첫째는 그 천진 난만한 무사기한 성품인 줄 압니다. 참되고 담박한 성품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시고 참 이스라엘 사람이 여기 있구나 네 속에는 간사한 것이 없구나 했습니다. 그 간사한 것이 없는 마음이 어린이의 마음인 것입니다.
어린이에게는 거짓과 권모술수와 야심도 없습니다.
전에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 어떤 집에 심방을 갔더니 그 집 부인이 잘 믿지마는 그 남편은 믿지 안았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이 하는 말이『지금 주인이 잠깐 뒷집에 갔는데 찾아다 같이 예배 봅시다』하고 아이를 심부름 보냈습니다. 좀 있다 돌아온 아이가 하는 말이『엄마 아버지 없다고 그러래』하였습니다. 어린이는 거짓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거짓말했지마는 아이는 없다고 그러라고 하는 말 그대로 전했습니다. 참된 성격 천진한 성품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성품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너무 거짓말이 많고 거짓 사상이 너무 많아서 진가를 분간 할 수가 없는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린이들에게 돌아가서 참된 것을 배워야 되겠습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를 믿고 의지하되 전적으로 믿고 의지합니다. 그런데 이런 어린이에게 거짓말하면 천벌을 받습니다. 부모의 말을 그대로 믿습니다. 부모와 같이만 있으면 아무리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평안한 마음으로 있습니다. 그 절대적인 신뢰성 그것이 하늘 나라에 있는 자의 성품일 것입니다.
어른들이 아이에게 졸아가서 배울 것은 절대적인 신뢰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성경 말씀대로『너희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고 근심, 염려, 없이 절대로 안심하고』사는 이것을 우리는 배워야 되겠습니다. 또 예수께서 마가 9장에 말씀하시기를『너희들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자기를 낮추지 아니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어린이들에게 교만이 없습니다. 빈부 귀천의 차이도 없고 무식 유식의 차이도 없습니다. 겸손합니다. 겸손도 우리가 어린이에게 돌아가서 배워야 할 줄 압니다.
우리는 꽃 주일에 예수께서 아이들을 얼마나 귀하게 여긴 것도 좀더 깨닫고 전전으로 의지하는 그 믿음, 겸손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그 성품을 우리가 배울 수 있으면 헛된 것이 아닐 줄 압니다. 예수 님께서는 어린이를 절대로 실족케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어린이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자기의 목에 연자 맷돌을 걸고 물에 빠져 죽는 것이 낫겠다』고 했습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죄에 빠지게 하지 맙시다. 이 아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꽃동산에서 아름다운 꽃과 같이 자라도록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협력해야 되겠습니다. (1957년 6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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