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 12:2-3)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라』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오늘 아침 이 시간 인내의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4절에 사랑을 분석해서 설명할 때에 제일 먼저「사랑은 오래 참고」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랑의 화신(化身)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이 인내가 특색인 것입니다. 우선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그 당시부터 온갖 육신의 수고와 빈궁을 참으셨던 것입니다. 그는 본래 이 세상에 나실 때에 마구간에 나셨습니다. 그의 누우신 첫 자리가 구유였습니다. 같이 유한 그의 동무가 소와 말 같은 짐승이올시다.
결례의 날이 차서 마리아가 예수를 성전에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바칠 때에『그 제물로 비둘기 한 쌍을 바쳤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가정이 얼마나 가난하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웬만하면 어린양 한 마리를 사서 성전에 드리는 것이지만 가장 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만이 이것을 살 돈이 없어서 비둘기 한 쌍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는 빈궁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난 지 몇 달 못되어서 어머니 품에 안기어서 멀리 애굽으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빈궁한 가정이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더욱 먼 애굽까지 딴 나라에까지 피난하시기에 얼마나 수고를 했겠는가 하는 것은 해방 후에 38선을 넘고 6·25사변 때에 남한 방면으로 피난간 사람은 누구나 그 상황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줄 생각합니다. 혜롯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나사렛에 돌아와서 가난한 가정에 살림을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는 어린 아이 때부터 학교에 가지 못하고 아버지를 도와서 목수 일을 한 것입니다.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짐작으로 알기는 요셉은 일찍이 죽은 줄로 추측이 됩니다. 말하자면 예수 님께서 가 가정의 맏아들로서 동생들과 어머니를 모시고 전 생활을 책임지고 친히 목수 일을 하여 생활을 유지하여 나간 것 같습니다.
마구간에서 낳아서 십자가에서 그 생명이 마지막으로 떠날 때까지 예수 님의 일생은 그 자신이 묘사하신 바와 같았습니다『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했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날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갖은 육신의 빈곤과 여러 가지 질고(疾苦)를 다 지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은 이것을 참고 견디셨습니다. 육신의 노고가 물론 어렵지만은 심리적 고통은 그보다 더한 줄 압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그에게 가장 가까운 이들이 그를 오해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생각하여 보셨습니까? 아마 이 세상에 왔다간 사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오해를 받은 이는 별로 없는 줄 생각합니다. 마가복음 3장 1절을 보면 예수께서 처음에 각처에 다니며 전도할 때 그 친척들이 예수를 붙들어 왔습니다. 왜? 예수를 미친 줄로 그들이 오해했습니다. 자기가 본래 자라난 나사렛에 가서 회당에서 전도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처음에는 듣다가 나중에는『이 사람이 어떤 선지자냐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이 사람의 동생이 아무개 아무개가 아니냐? 』하며 예수를 반대했습니다. 가까운 친척들과 가까이 사는 동네 사람들이 예수를 오해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것도 참으셨습니다. 한 걸은 더 나가서 예수는 아무 죄도 없지만 공연히 악한 사람들이 예수를 미워하고 중상 모략하고 여러 가지로 역선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 기적적으로 고쳐 주시는 것을 보고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사람의 귀신의 왕이 되어 바알세불의 권세를 가지고 이와 같은 이적을 행한다고 성신을 훼방했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행복을 축복하셔서 혼인집에도 청하면 가시고 그 밖에 어떤 집에도 연회에 청하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연회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중상하였습니다. 안식일에 병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한 두 사람을 고쳐 주니까 곧 선전하기를 이 사람은 안식을 범한 사람이라고 역선전하였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 되시는 사람의 법칙을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니까, 이 사람들은 곧『아! 이 사람이 모세의 율법을 범하고 율법을 거역한다』고 이와 같이 중상하고 역선전을 한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죄인들과 하께 교제를 하시니 이 사람들은 곧『이 예수야말로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하고 중상한 것입니다. 갖은 간교한 질문을 해서 예수를 책잡으려고 했습니다. 가장 겸손한 듯이 나와서 예수님께 머리를 숙이면서『이 선생님은 지혜 많고 위대하신 선생님이올시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그릇된 것입니까?』옳다고 하면 유대인에게 격노를 사겠고 그릇된 것이라 하면 로마 사람들에게 탄압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를 모함하려고 이런 질문을 예수 앞에 나와서 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이와 같은 중상과 모략과 역선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 모든 것도 참고 견디셨습니다. 아무리 원수의 중상이 있을지라도 가까운 친구의 이해와 동정이 있으면 좀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는 참으로 예수의 사정을 이해해 주고 동정할 사람이 그 당시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일생을 고독한 가운데 홀로 상심하면서 이 모든 경험을 이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각오하시고 비장한 결심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앞으로 다가올 사명에 충성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이런 때 가장 수제자 중의 두 사람, 요한과 야고보는 자기의 어머니까지 데리고 와서 부탁하기를『선생님 선생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나라에 임하실 때에 우리 가운데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주소서』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말로 말하면 엽관(獵官)운동(運動)이올시다. 이런 말을 들으신 때에 예수 님의 마음이 얼마나 고독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이것도 참으셨습니다. 이런 소문이 제자들 사이에 들리자 다른 제자들은 거기에 대해서 시기가 나서 누가 높으냐 하는 언쟁이 일어나고 분규가 일어났습니다.
마지막 성만찬 유월절 잔치를 잡수실 저녁이야말로 예수 님의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저녁을 잡수시는 저녁이올시다. 그 저녁이야말로 얼마나 의의가 깊은 저녁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아시거니와 유대 사람의 풍속은 저녁을 먹기 전에 어떤 손님이 오면 마땅히 하인이나 주인이 나와서 먼저 그 손과 발을 씻기는 법입니다. 그런 경우가 아니고 주님과 제자들이 이렇게 함께 모여서 먹을 때는 제자들이 서로 서로 발을 씻어 주고 저녁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저녁에는 아무도 먼저 남의 발을 씻으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방금 누가 크냐? 하는 이 문제로 서로가 시기하고 있는 판에 종이 하는 일을 누가 먼저 물을 떠서 발을 씻기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허리를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을 발을 씻기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심경(心境)을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고독하시겠어요. 그러나 이것도 참으셨습니다. 저녁을 잡수시면서 여러 가지로 위로의 말을 주시고 권면의 말을 주시고 최후의 교훈과 격려를 주고 마지막 대제사장의 기도를 간절히 드린 후에 찬송을 부르고 그 자리를 떠나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오래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걸어오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셔서도 낮에는 종일토록 사람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밤을 세워 기도하셨던 예수님, 이날 저녁에는 어떻게 피곤하신 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육신의 피곤만 아니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세상 만민의 죄의 짐을 홀로 지시고 극도로 마음도 괴로웠습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내 마음이 심히 민망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했습니다. 이 간절한 부탁을 하고 예수께서는 돌을 던질 만큼 더 나가서 꿇어 엎디어서 피땀을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돌아와서 제자들의 광경을 보니 그들은 쿨쿨 잠만 자고 있습니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느냐? 깨어 기도하여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그 말을 남기고 다시 나가서 바위 위에 엎디어서 간절히 기도하여『아버지여! 아버지의 뜻이어 든 이 잔이 나에게서 떠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피땀을 흐리며 기도하고 돌아왔습니다.
이 제자들은 또 잡니다. 다시 나가서 세 번째 기도하고 돌아오니 제자들은 그냥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63장에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가운데『내가 포도즙 틀을 홀로 밟았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겟세마네라는 곳은 포도즙 틀이라는 말입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겟세마네의 쓴잔을 홀로 마시고 겟세마네의 고통을 홀로 당했습니다. 그 때 누구 한사람, 아무리 가까운 제자도 같이 깨어 있어서 예수께 동정을 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 고통도 참았습니다 그뿐입니까? 조금 있다가 겟세마네 동산에 여러 사람들이 어슬렁어슬렁 찾아옵시다. 보니까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이었던 유다가 칼과 몽둥이를 가진 무리를 데리고 앞장서서 예수를 잡으려 옵니다.
사랑의 상징이 되는 입맞춤으로써 예수를 팝니다.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말도 있고『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말도 있지마는 세상에 이런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삼 년 동안 주님의 교훈을 받고 동고동락하고 한 솥의 밥을 먹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입맞춤으로써 자기를 배반합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이것도 참으셨습니다.
정작 예수 님께서 잡히니까 제자들은 다 달아났습니다. 반석이란 이름을 듣던 베드로도 세 번씩 예수를 모른다고 하였고 마지막에는 저주까지 하였습니다. 한편 생각하면『이것이 삼 년간이나 불면불휴(不眠不休)의 나의 역사의 결과이었던가?』낙심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상심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도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 호산나를 부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던 대중은 이 때 어디 있는지 볼 수 없습니다.
빌라도 법정에 나타났던 여러 대중들은『바나바를 석방하시오. 바나바를 내어 주시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아우성 칩니다. 대중까지 예수를 싫어 버렸습니다. 예수를 끝까지 함께 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독한 이 고통을 홀로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는 십자가 그것도 참고 견디셨습니다.
잡히신 후에 예수께서 당하신 모욕과 고통은 그야말로『이필난기요 이구난설(以筆難記 以口難設)』이란 말이 있지마는 무엇으로 다 형용해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거짓 증거를 하는 무리들이 간악한 입술 소위 칠십인 공회로 모였다고 하면서 소위 법을 알고 법대로 하기 위해 모였다고 하는 사람들도 법대로 판단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군사들을 예수의 인자한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치며 손바닥으로 때리고 어떤 사람은 희롱해서 하는 말이『선지자 노릇 하라』『너를 때린 사람이 누구냐?』고 갖은 희롱을 다했습니다. 무책임한 로마 관원인 빌라도는 예수에게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대중의 신임을 사기 위해서 유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불의 한 재판을 내려서 무지한 군인들에게 예수를 내어 주었습니다. 군사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고 홍포(紅袍)를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서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 팔에 들리우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유대인의 왕이여, 평안 할지어다』하면서 희롱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골고다로 끌고 갔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십자가는 너무 무거워서 피곤한 예수께서 감히 십자가를 지고 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조금 가다가 넘어집니다. 넘어지면 이 무지한 군인들은 채찍으로 때립니다. 다시 일어나서 겨우 가다가는 또 넘어집니다. 그러면 또 때립니다. 그러면 또 가다가 넘어집니다. 이렇게 세 번씩 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선 구례네 사람 시몬이 튼튼해 보이니까 강제로 잡아서 골고다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아무 죄 없는 우리 주님의 부드러운 두 손에 못을 박도 두 발에 못을 박아 두 강도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살은 찢어지고 피를 흘려 내립니다. 사망의 고통이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을뿐더러 설상가상으로 이 악한 무리들은 갖은 희롱을 다했습니다.
『이 사람이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겠다고 하더니 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이 사람이 남은 구원했지마는 자기는 구원 못하는 것 아닌가』지나가는 사람들도 자기의 머리를 흔들며 희롱하기를 마지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도 참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어떤 군인이 와서 창으로 예수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물과 피를 흘렸습니다. 이것도 다 참으시고『아버지여! 이 죄를 이 무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사람들이 자기의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까지 견디셨습니다. 과연 문자 그대로 우리 주님은 인내의 주님이올시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 첫째 특색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랑의 화신(化身)인 고로 인내가 그 생활의 특색이었습니다. 이 예수께서는 그를 따라가는 무리에게 어떤 부탁을 하시는지 아십니까?『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하셨습니다.
갈라디아 5장 에 성신의 열매를 열거할 적에『성신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그 다음에는 인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장로가 말하기를『너희는 마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그 다음에는 인내를 더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인내를 말했습니다.
야고보 장로는『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했습니다. 인내가 있어야 우리의 신앙 생활이 온전해서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육신의 노고에 어찌할 수 없어서 허덕이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 빈궁한 생활에 말할 수 없는 짐을 지고 계신 분도 있을 줄 압니다. 오해에 상심된 분도 계시고 모략과 중상과 모욕에 상심된 분도 계시고 고독한 가운데 상심된 분도 계시고 여러 가지 어려운 세상 짐을 지고 허덕이는 분도 계신 줄 압니다.
오늘 이 시간「인내의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십자가를 참으심으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의 참으심을 생각하고 피곤하여 낙심하지 맙시다. (1957년 4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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