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성서적 애국심 (느헤미야1:1-11)

새벽지기1 2017. 4. 25. 08:29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14:34)

지난 금요일 대한 민국의 정신적 탄일(精神的 誕日)이 되는 3·1절 제38회 기념일을 우리가 맞았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자유에 불타는 그 마음,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생명도 즐겁게 바친 애국 애족의 그 정신이 공통한 목적을 위하여 경향(京鄕), 문야(文野), 종교의 구별 없이 대동단결 했던 날입니다. 그 정신과 비폭력적 무저항주의의 혁명 운동과 정의의 신념 등의 3·1정신이 우리 민족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귀한 영적 유산으로 남겨졌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고귀한 운동에 당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핵심(核心)이 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줄 생각합니다.
오늘「성서적 애국심」이라는 문제아래서 애국심에 대한 성서의 교훈을 배우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 견지에서 읽을 때에 제일 먼저 깨닫게 되는 것은 신구약 성경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철두철미하게 애국 애족의 책이라는 사실이올시다. 구약은 모세의 오경으로 시작됩니다. 오경의 중심 인물은 모세입니다. 모세가 화려한 바로의 궁전을 떠나서 피압박 가운데 있는 자기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일생을 바치고 광야 40년을 거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였다는 사실은 역사적 일대장관(一大壯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위대한 애국자였습니다. 여호수아도 역시 그렇습니다. 자기의 민족을 거느리고 요단강을 담대히 건너가서 가나안 복지를 점령하고, 국가의 기초를 닦은 이가 애국자 여호수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전 민족사를 통해서 모든 위대한 선지자들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등 모든 선지자는 그 하나 하나가 애국자가 아닌 분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민족적 국가적 운명과 같이 했습니다. 자기의 국가와 민족이 번영할 때 기쁨과 웃음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고, 자기 민족과 국가에 치욕이 올 때에 한없는 탄식과 눈물을 뿌린 자들입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눈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육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哭)하리로다.』이는 예레미야가 자기 조국이 멸망당한 후에 부른 애가(哀歌)입니다.
구약 가운데 에스더는 누구보다도 애국 여성이었습니다. 여러분 다 아는 대로 하만의 모략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전멸 당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비밀을 자기 삼촌 모르드게가 에스더에게 말하면서『이것은 네가 왕에게 들어가 직소(直訴)해서 이 칙령(勅令)을 구두기 전에는 우리 민족은 전멸 당하게 될 터이니까 네가 들어가 직소 하라』고 강권(强勸)하였습니다. 그러나 파사에서는 이상한 법령이 있었습니다. 왕이 부름이 없이 왕정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사형에 처하는 법이 있었습니다.『다만 왕이 금홀(金笏)을 들어서 특서(特恕)하라』고 하는 지시가 있기 전에는 누구나 죽는 그런 법이 있었습니다. 에스더 역시 오랫동안 부름을 받지 못하던 중입니다. 왕의 기분이 어떤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다가 에스더가 하는 말이『나를 위해서 당신들이 금식하며 기도해 주세요. 내가 들어가서 말하겠습니다. 왕께서 나를 살려 주시면 좋고 죽이면 죽으리라』했습니다. 이런 결심을 가지고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에스더에 대하여 있습니다.
에스더, 느헤미야, 모두 민족을 예루살렘으로 반환케 한 애국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보아도 역시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애국자이십니다. 감란산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병아리를 모으듯이 내가 너를 모으려 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이런 예수 님의 탄식의 말씀을 하신 것은 애국의 눈물이요, 애국의 탄식인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런 말씀을 로마서에 썼습니다.『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나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이는 사도 바울의 애국의 심정, 애국의 지정(至情)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 말씀을 하기 전에 로마서 8장 마지막 절에『생명이나, 사망이나, 세상의 무엇이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끓을 자가 없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전에 일본사람들이 성경을 싫어하고 특히 구약을 읽지 말라고 강제로 우리 교인들을 향해서 지도 한 것은 바로 여기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애국자가 되는 까닭입니다.


제가 지난여름 아프리카의 카메룬에 가서 거기 형편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독립 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예수를 믿는 신자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운동으로 말미암아, 어떤 선교사는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애국적 정신을 일으킵니다. 신앙심과 애국심은 같은 밭에서 자라나는 풀이고 같은 밭에서 자라나는 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성서적 애국심은 혹 우리 사회에서 가끔 듣는 민족지상주의나 국가지상주의는 절대로 아닙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애국심은 민족을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국가가 귀하지마는 국가를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세계 역사상에 이와 같은 민족지상주의나 국가지상주의가 일어날 때는 기독교와 충돌되었고 교회는 그 사상과 운동 때문에 반드시 핍박을 받고야 마는 것입니다. 현대에도 이 사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는 대로 독일에서 대전 전에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나치 운동은 민족지상주의였습니다.『우리 독일 사람은 세계의 으뜸이다. 독일 사람으로 지상의 목적으로 삼자』민족을 우상화하는 것입니다. 대전 전에 일본 사람들이 천황 신성 불가침론(不可侵論)을 주장했습니다. 천황을 지상(至上)으로 삼고 천황을 숭배의 대상인 우상으로 삼았습니다. 대전 전 이태리는 무솔리니를 중심으로 한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파시즘, 소위 국가지상주의를 세웠습니다.
오늘날의 공산당들은 계급을 우상화합니다. 계급지상주의를 부르짖으면서『농민과 노동자 외에 다른 것은 우리 안목에 없다. 이 사람들의 권리를 지상(至上)으로 삼자』고 합니다. 계급지상주의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성서적 견지에서 보아서 용납 못할 사상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민족과 국가가 아무리 귀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했습니다.『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했습니다. 그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그의 의,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민족과 국가의 운영을 주장하십니다. 민족과 국가는 하나님의 섭리와 심판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래에서 신앙심과 겸해서 민족과 나라를 사랑할 때에만 그 애국심은 잘못된 대로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그릇된 애국심을, 우리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경계하여야 합니다. 애국심이 잘못되어서 변태적으로 발전되게 되면 거기서 독재주의가 생기는 것이고, 거기서 배타주의가 생기고 심지어는 온갖 불법과 테러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성서적 견지에서 우리 한국 실정에서 이 성서적 애국심을 어떻게 발로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실제 문제를 잠깐 생각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 한국 실정에 있어서 참으로 기독교적 애국심을 가졌다고 할 것이면 국가와 사회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실제 문제를 잠깐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성경을 보면 과거의 모든 애국자들이 그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이 성경의 교훈으로써 들은 말씀은 느헤미야의 기도올시다. 예루살렘이 황폐되었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공경 가운데 있는 소식을 듣고 애국자 느헤미야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되 그저 복을 달라고 기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죄를 자복하면서 자기 민족과 국가가 과연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복을 받을 만한 의로운 민족, 의로운 국가가 되기 위해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입니다.
옛날 우리 동양에도『역천(逆天)자는 망하고, 순천(順天)자는 흥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민족이 되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깨끗한 민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민족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우리의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느헤미야가 그런 사람이고 에스더가 그런 사람입니다.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모든 선지자가 다 그런 사람이었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다니엘이 예루살렘 선전을 향한 문을 열어 놓고, 하루에 세 번씩 민족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한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사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가게 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기도를 그치지 않고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을 다해서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사무엘이 자기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인 줄 생각했습니다.『내가 어떻게 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 죄를 범하랴?』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큰 죄로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더욱이 38선이 그냥 있고 북한이 공산 도배의 압제 아래 그냥 신음하고 있습니다. 오늘 남한 전체가, 기근과 환난과 죄악으로 가득 합니다. 이 같은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얼마나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간절히 눈물로 호소하며 기도합니까? 여러분이 과연 마음에 애국심을 가졌다면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기도 생활을 스스로 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좀더 우리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이 민족이 과연 의로운 민족이 되기 위해서 좀더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개인으로 기도하고, 단체로도 기도하고, 아침에도, 저녁에도, 시간 있는 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그는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면 기도에 가치지 않고 국민으로서의 책임의식, 책임감으로 이 애국심은 반드시 발로 될 것입니다. 책임을 느끼고 반드시 자기 책임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자기의 책임을 느끼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든지 하려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 느헤미야의 기도를 들어보셨습니까? 느헤미야가 기도한 때, 죄를 자복 할 때에 이런 말로 했습니다.『나와 내 아비의 집이 범죄 하였습니다.』이와 같이 했습니다. 나와 내 아비 집이 범죄 하였습니다. 사살은 예루살렘의 모든 형편을 직접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느헤미야에게 무슨 책임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것이 다 내 죄의 책임, 내 값이요 이것이 내 아버지의 죄 값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회는 유기체요 국가도 유기체입니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서, 연대적 책임(連帶的 責任)이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민주국가에서는 그 국민이 궁극적 책임을 지며 마지막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국민이 선거해서 대통령도 선거하고, 국민이 선거해서 국회의원도 선출하며 국회가 조직되고 모든 국가의 운영도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국회를 비난하기 전에 내 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 정부를 지난하기 전에 내 책임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국회가 잘못하면 우리가 투표를 잘못했습니다. 대통령이 잘못하면 우리가 투표를 잘못했습니다. 내 책임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내 책임을 깨닫고, 이것이 다 내 실수요, 내 죄인 줄을 알고, 나와 내 아비의 죄를 우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자복(自服)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내 생활부터 고쳐야 되겠습니다. 국민도 이러해야 할진대 하물며 선량의 명예를 가졌다고 하는 국회의원은 더 책임감이 강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삼천만을 대신해서 우리 국가의 일을 대신 맡아하는 정부의 요원들이나 공무원들은 좀더 책임의식이 강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남한의 실정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절량(絶糧)농가가 얼마나 많습니까? 도처에 여러 가지 사건, 여러 가지 사고, 화재 등 남한 전체가 불안과 공포 가운데 쌓여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 국민 각자가 여기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 국민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정당이나 정부의 지도자나 사회의 지도자면 더울 책임감을 통절(痛切)히 느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전 정력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우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납세를 피하거나 지체하지 말 것입니다. 세력 있다고 자기의 납세를 적게 바치면 안 되겠습니다. 애국자이면 납세의 의무를 충성되게 합니다. 병역의 의무도 충성되게 하여야 합니다. 내가 젊은 사람이면 국가에서 나를 부르면 나가서 그 의무를 충성되게 다하여야 되겠습니다.


어떤 장로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목사님 사모님이 와서 하는 말이『장로님 아무 육군 병원 원장 잘 아신다지요?』『네 잘 압니다.』『내 아들이 지금 전쟁에 나가 부상을 당해서 그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데 좀 나으면 제대하도록 편지 좀 잘 써주세요.』『네 써 드리지요.』그 후에 그 목사님이 장로님께 찾아와서 하는 말이『전에 우리 아내가 찾아와서 무슨 부탁합디까? 네 제대 좀 빨리 하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그리고 장로님은 생각하기를 아! 내가 편지가 늦어서 안됐다. 아마 재촉하려 온 줄 알고, 미안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하는 말씀은『우리 아내가 그저 여자가 되어서 미쳐 생각 못하고 그런 부탁을 장로님한데 한 모양입니다. 제가 부끄럽습니다. 우리 아들 삼 형제가 군대에 나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한 민국의 사활(死活)에 관한 전쟁이요 우리 기독교인의 견지로 보면 공산당과 싸우는 것은 최후의 일각(一刻)까지 싸워야 할 일인데 아들이 좀 부상했다고 해서, 제대 운동을 하려 다니면 되겠습니까? 아예 그 편지 취소해 주세요. 내 아들을 도로 전쟁에 내어 보낼 마음이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책임감이 있으면 의무를 해야 되겠습니다.


셋째로 우리가 과연 애국심이 있으면 법을 지켜야 되겠습니다. 민주국가는 법치국가입니다. 법이 서야 국가가 번영되고 국가가 운영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여호수아에게 간절히 명령하는 말이『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케 해서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했습니다. 율법을 잘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민주국가는 법을 지켜야 그 국가가 설 수 있습니다. 물론 민주국가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남용하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유는 언제든지 질서와 법 아래서 자유입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 있어야 자유를 얻습니다. 새는 공중에 있어야 자유로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기차는 궤도로 가야 자유가 있습니다. 질서와 법을 떠나서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법을 지키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향유(享有)하여야 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법을 지키는데 있어서는 법을 만든 국회위원들과 정부 요인 공무원들부터 먼저 법을 지켜서 법대로 하여야 되겠습니다.
권세를 남용하면 안 됩니다. 법을 지키지 않는데서 권세의 남용이 있고, 권세의 남용이 있는 곳에 국가의 기관이 문란해지고 국가 기관이 물란 할 때 민심이 해이해집니다. 법을 지켜야 합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법 아래서는 만민이 평등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헌법을 너무 자주 고치지 않는가! 하는 감이 있습니다. 이리하여 법의 존엄성에 손해가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헌법은 하나님의 공의와 언제든지 민주주의 국가의 원칙에 의해서 한번 제정할 것이지 어떤 소수나 어떤 정당에 의해서 경우를 따라서 조변석개(朝變夕改)로 고치는 헌법이 아닙니다. 법을 존엄하게 지켜야 우리의 자유가 보장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의 수치가 됩니다.』여기 의는 모든 의로운 생활을 가르쳤습니다. 법으로만 나라가 되지 않습니다. 거기에 도덕과 양심이 있어야 되고, 도덕과 양심 생활에 의지해서, 죄를 짖는 사람이 적어야 되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특별히 이 방면에 우리 깨끗한 생활로서 자유의 파수꾼이 되고, 이 진리의 파수꾼이 되어 우리가 먼저 꼭 법을 지킴으로서 도덕 생활에서 법을 초월해 나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의 직책을 다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입니다. 처음에 청교도들이 유명한「오월의 꽃」이라는 배를 타고 미 대륙에 도착한 플리마드만(灣) 맞은 편 높은 산 위에 기념상을 세운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을 어떤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 기념상에는 네 귀에 사람 네 명이 서 있습니다. 하나는 법을 대표하고 하나는 자유를 대표하고 하나는 도덕을 대표하고 하나는 교육을 대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높은 단위에 여자의 상(像)이 있는데 한 손은 위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에는 성경을 편 그런 상이 있습니다. 이 여상은 신앙을 의미합니다.
민주주의 국가는 하나님께 대한 높은 신앙 아래 자유가 있고, 도덕이 있고, 법이 있으며, 교육을 지켜서 민지가 깨게 될 때에만 과연 축복 받는 나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957년 3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