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에 행할 때든지 누웠을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려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4-9)
이 말씀은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배를 시작할 때마다 읽던 구절입니다. 또 이스라엘 사람들은 4, 5세 때부터 이 말씀을 암송해서 하루에 두 번씩 아침과 저녁으로 암송하고 기도를 하는 그런 구절입니다. 우리 한국말 번역에는「이스라엘아 들으라!」이렇게 번역했지만 본래 히브리어에는「들으라 이스라엘아!」라고 하여「들으라」는 말이 먼저 있습니다.
「들으라」는 말이 히브리어로는「쉐마」라 하는데「쉐마」라는 말은 이 성경 구절을 가르치는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쉐마」라는 이 성경 구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한 구절입니다. 그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들으신 바와 같이 이 말씀은 비록 간단하지마는 이 말씀 가운데는 옛날 이스라엘의 종교의 핵심이 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며 하나님은「곧 여호와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중심 되는 진리가 이 한마디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여기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으로서 최고의 노력, 최고의 목적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이 한 분밖에 없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요리 문답의 첫째에 있는『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니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모든 계명 중에 첫 계명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다음에는『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 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이 말씀을 네 마음 가운데 새길뿐더러 네 자녀에게, 아들과 딸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든지 누웠을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이 말씀을 가지고 네 마음에 새길뿐더러 네 아들딸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학년말이므로 우리 가정에 졸업하는 학생도 많고 입학하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이런 시기를 당해서 하나님을 공경하고 주를 믿는 우리로서 이 아이들에 대한 종교적 책임이 어떠한 것을 잠깐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시간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잠언 22장 6절에『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의무는 많이 있습니다. 우선 양육의 의무, 어린애가 가정에 나면 그 애기를 잘 길러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젖과 옷과 음식과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점점 자라나게 되면 학교에 보내야 되겠습니다. 여기에는 학비도 필요하고 또한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자연히 부모의 책임이 매우 중하게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모든 의무를 행하려니와 이런 모든 의무보다도 제일 큰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이 아이들을 기르는 책임이올시다.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내 주시는 여러 가지 선물 가운데 제일 귀한 선물입니다. 우리 부모는 말하자면 이 아이를 대신 맡아 기르는 청지기와 같습니다. 근본적으로 생명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집의 아들과 딸들도 실상은 부모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는 이 아이들을 부모라는 이름 아래서 대신 기르는 청지기의 책임이 우리 부모에게 있습니다.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들을 우리에게 맡기시고 우리 부모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너희들이 이 아이들을 맡아서 충성되게, 내 뜻대로, 본래 주인의 뜻대로, 주님의 말씀대로 기르라고 하는 부탁을 우리 부모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아무리 다른 책임을 잘 한다고 할지라도 이 아이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이 종교적 책임을 바로 하지 못하면 다른 책임을 잘했다 할지라도 그 책임은 보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아이들을 잘 기른다고 할지라도 그릇된 길로 나가면 다른 것은 다 허사(虛事)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여러 가지 환경 가운데서 다른 책임은 잘 못할지라도, 온전히 우리 아이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이 종교적인 책임, 이 아이들을 훈련시키는 이 책임을 잘 감당하기만 하면 다른 책임에 좀 부족한 것이 있을지라도 이 책임을 잘 감당함으로써 보충될 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대한 책임과 교육 문제를 생각할 때에 자연히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오는 것은 언제부터 이 책임이 시작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아이의 교육이 시작되는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를 때에 이 말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列邦)의 선지자로 세웠노라.』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택하실 때에 태에서 나오기 전에 이미 구별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삼손의 어머니, 마노아의 아내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네가 장차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부탁을 한 다음 계속해서 이런 말씀을 삼손의 어머니에게 했습니다.『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이렇게 삼손이 잉태했을 때부터 그 어머니에게 독주나 포도주를 절대로 마시지 말라고 경계하였습니다.
우리 동양의 태교(胎敎)를 보면 이보다 더 상세히 말한 문헌(文獻)도 있습니다.『부정한 것을 먹지 말고 부정한 것을 보지도 말고 부정한 곳에 앉지도 말고 부정한 방에 들어가지도 말라』고 기록한 문헌이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바로 양육하는 책임은 어린아이가 모태에 있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 모태에 있을 때는 어머니의 감정 생활, 어머니의 체험이 직접 모체에 있는 아이에게 영향을 줍니다. 가령 어머니가 추우면 뱃속에 있는 애기도 추워합니다. 어머니가 더우면 뱃속에 있는 애기도 더워합니다. 그와 같이 어머니가 성내면 어린애도 성낸다고 합니다. 또는 어머니의 마음이 슬프면 어린 애기의 마음도 슬퍼한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감정이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 모태의 어린애에게 큰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린 애기를 바로 낳아서 잘 기르려고 하면 특별히 어머니는 조심해서 마음을 화평하게 가지고 언제든지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힘쓰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와 같이 하려면 우리가 독실히 믿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서 우리가 성신의 충만한 생활을 하면 성신의 열매가 자연히 그 마음 가운데 맺힐 것입니다.
성신의 열매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대로『사랑과 희락과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어머니의 마음속에 충만히 있기만 하면 자연히 그 영향을 아이에게도 미칩니다.
애기가 출생한 후에는 경건한 어머니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사무엘 상 1장 28절을 보면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애기를 낳은 후에 그 애기가 젖을 뗄 수 있을 때 젓을 떼고는 엘리에게 데리고 가서 하는 말이『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립니다.』하고 사무엘을 온전히 여호와께 드린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자를 낳은 후 팔 일만에 반드시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태 가운데서 난 남자마다 거룩히 세상 딴 사람들과 구별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란 표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의미로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우리 신교 시대에 와서 할례라는 의식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어린 아기에게 세례를 베풀어서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옛날부터 택한 백성에게 내리는 특별한 하나님의 축복을 어린아이들에게 계승시키기 위해서 베푸는 예식이 지금도 있습니다.
애기를 드리는데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삼손의 어머니 한나와 같이 온전히 그 일생을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르고 하나님의 역사를 하게 바치는 뜻이 있습니다. 할례를 행하는 보편적 뜻으로 말하면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 애기를 기르겠다는 서약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일생을 살아도 그 일생에 대해서 어떤 분명한 뜻이 없이 사는 것처럼 어떤 부모들은 귀한 애기가 가정에 온 다음에도 이 애기에 대해서 어떤 큰 목적이 없이 이 애기들을 기릅니다,. 내가 내 개인을 위해서 일생을 통한 목적을 두는 것이 필요한 것과 같이 우리가 부모 노릇을 바로 하려면 귀한 애기를 위해서 위대한 목적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애기가 커서 무엇이 되게 해 달라는 목적을 세우고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 바치고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부모로서 애기를 위해서 어떤 책임을 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약하고 온전히 그 뜻대로 기를 의무 의무가 우리 부모에게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애기가 난 후에 물론 어머니의 감화를 제일 많이 받습니다. 그 까닭은 어머니의 살에서 떨어져 났고 처음에는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교회 역사를 상고해 보면 아버지의 신앙에도 많은 영향이 있겠지마는 어머니의 영향에 큰 감화를 받은 그런 역사를 많이 봅니다.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경견한 어머니들이 있었습니다. 한나와 같이 하나님께 서약을 하고 맹세하는 어머니들,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기르는 어머니들이 많은 것을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라는 여자는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기르지마는 벌써 아이들이 네 살이나 다섯 살 나게 되면 그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는 물론이거니와 성경 말씀을 많이 그르쳐 주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후 2, 3세기에 유명한 학자요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인 오리겐이라는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렸을 적부터 총명도 하였지만 4, 5세부터 시편의 대부분을 외고 10세쯤 되어서는 성경 가운데 좋은 장들을 거의 다 외었다고 합니다. 모두 어머니가 배워 준 것이올시다. 전 번에 우리 교회 성경 암송 대회에서 특히 감사한 것은 작은 어린아이가 26절을 암송했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들을 어렸을 적부터 성경 말씀으로 인도하는 것은 매우 필요합니다.
또 보통으로 아들이 13세 이상 20세 전후해서 온전히 하나님께 몸을 바치고 회개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들은 매우 어릴 때 회개하고 몸을 바친 기록이 역사상에 있습니다. 가령 주석가 가운데 매튜 헨리 같은 분은 매우 유명한 사람인데 그는 11세 때에 온전히 회개했다고 합니다. 또 찬송가를 많이 기록한 영국의 왓트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9세 때 온전히 회개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목사로서 프린스톤 신학교 학장으로 있다가 세상을 떠난 요나단 에드워드라는 사람은 7세 때에 온전히 회개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은 얼마쯤 자란 후에 하려고 기다릴 것이 아니고 어릴 적부터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러 준다면 은혜 받는 대로 어릴 때도 온전히 회개하고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우리가 얼마든지 보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의 마음은 말하자면 흰 종이와 같습니다. 다른 글자 쓰기 전에 흰 종이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줄 수 있도록 우리가 힘써야 되겠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은 봄과 같습니다. 봄에 아직 아무 것도 심지 아니한 밭과 같습니다. 아무 것도 심지 아니했을 때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씨로써 심을 수 있습니다. 이 특권은 먼저 누구에게 부여되었나 하면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의 성품은 연한 나무 가지와 같습니다. 이른봄에 돋아나는 연한 나무 가지와 같습니다. 연한 나무 가지를 바로 잡아서 바로 돌려놓을 수가 있는데 이 특권은 역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이 어린이를 하나님의 뜻대로 가르쳐서 종교적 책임을 다하려고 한다면 가정 교육이 필요하고 또 교회에서 종교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 안에 유년 부나 유년 예배는 절대로 소흘이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서 어떻든지 종교 교육을 바로 그르치도록 힘써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부족합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종교적 책임을 감당하려면 가정에서, 교회에서 가르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학교에서도 가르쳐야 되겠습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나 기독교 가정이 필요할뿐더러 기독교 교육 기관이 필요합니다. 어릴 적부터 기독교 소학교가 필요하고 기독교 중학교 고등학교 기독교 대학교가 필요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서 가르치는 종교 교육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매일 성경을 가르치고 우리가 매일 젊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려 할 것이면 우리 교회에서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가 필요합니다. 본래 종교개혁을 한 후에 이 새로운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많은 국민학교를 세우고 중학교, 대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모든 교육을 교회에서 직접 했습니다. 그러나 신교에서는 기독교 교육에 대한 정신이 해이(解弛)해졌습니다. 반면에 천주교에서는 신교에서 하는 것을 배워서 자기네가 꼭 학교를 세워서 자기네 청년들을 자기네 학교에서 가르쳐 내어 보내는 방침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자녀에 대한 종교교육을 철저히 하려고 하면 세 가지 방면으로 힘써야겠습니다. 부모로서 내 가정에서 힘쓰고, 교회 안에서 힘쓰고, 모든 교육기관을 설립하는데도 물심 양면으로 잘 협력해서 과연 교회의 모든 교육기관을 좋은 교육기관으로 만들고 우리 아들과 딸들에게 교육을 줄 수 있을 때가 와야 우리의 책임을 다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1957년 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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