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철목사

새벽묵상 (창세기 22장6절-12절)

새벽지기1 2017. 5. 7. 06:51


<묵상>


1. 아브라함은 산 아래에서 기다리게 한 종으로부터 건네받은 나무를 이삭의 어깨에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들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6절). 이삭에게 지운 나무는, 사랑하는 그 아들을 번제로 태울 나무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칼과 불 역시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데 필요한 도구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전적인 순종의 증표였고, 그 증표를 아버지와 아들이 한 마음이 되어 함께 옮기고 있습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식이 일평생 하나님의 자식으로 살아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믿음의 부모로서 오늘 자식의 어깨에 무엇을 지워주고 있습니까? 그 자식을 위해 지금 당신의 손에 들린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자식에게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멍에를 지워주는 것보다 더 큰 자식사랑은 없습니다. 순종은 그 어떤 제사보다 더 아름다운 예물입니다.

2.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물로 쓰일 양은 어디 있는지 물었고(7절),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고 답했습니다(8절). 그때까지도 아들은 자신이 번제물이 될 것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지정된 장소에 도착한 아버지는 단을 쌓은 다음, 나무를 벌여놓고 결박한 아들을 잡기 위해 나무 위에 눕혔습니다(9절). 그렇다면 우리는 8절과 9절 사이에 중요한 사실이 생략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들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제물임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 아들이 나무를 지고 산에 오를 정도였다면 최소한 10대 소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100세에 그 아들을 낳은 아버지의 나이는 110세가 넘습니다. 산에 도착하여 아버지가 자신을 제물로 잡으려는 것을 비로소 안 10대의 아들이 깜짝 놀라 줄행랑을 쳤더라면, 110세가 넘는 아버지는 절대로 아들을 붙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들이 아무른 저항도 없이 아버지의 결박을 순순히 받고 단 위에 제물로 누웠다는 것은, 산에 오른 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설득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십시오. 아버지가 아들의 눈을 쳐다보며 말합니다. ‘아들아, 하나님께서 너를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다. 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너를 제물로 잡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을 내가 아니라 네게 주시리라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칼을 내리쳐서 설령 네가 죽는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위해 반드시 너를 살리실 것이다. 이 아빠의 말을 믿을 수 있겠지?’(히11:17-19). 생각하면 할수록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아들은 하나님을 믿기 전에, 먼저 자기 아버지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아버지의 결박을 받고 단 위에 누웠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그토록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아버지가 신실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식 보기에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 있었던 이런 믿음의 대화가 당신 자식과도 가능합니까? 그것은 당신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여 단 위에 눕혔을 때 하나님께서 이제 족하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삭을 잡기 위해 손에 칼을 쥐었을 때도, 칼을 들어 올렸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이삭을 잡으려 칼을 내리치는 순간(10절), 그제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참됨을 확인해주셨습니다. 50%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90%, 아니 99%만 믿어도 참된 믿음일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100%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창조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그분을 100% 신뢰하시고 그분의 말씀 위에 서십시오. 당신의 삶이 새로운 창세기로 엮어질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제목>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100% 신뢰하므로 우리의 가족관계, 인간관계, 가정과 일터가 우리로 인해 새로운 창세기로 일구어지게 해주십시오. 아멘